어떤 예언자도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어떤 예언자도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거부하는 사람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고향 사람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것. 별것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사실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입견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지 말고, 첫인상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지 말고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그를 대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안식일 집회는 기도와 성서 낭독으로 이루어졌다. 율법서(모세오경)는 언제나 낭독되었으나 예언서의 구절을 선택하는 일은 낭독자의 소관이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누구나 낭독할 권리가 있었고, 해설을 덧붙이거나 다른 훈계의 말을 할 권리도 있었다. 이 권리를 행사하기 원한다는 표시로 예수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이것이 성서 낭독을 포함한 그 의식이 시작되는 방식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의례 규정을 완벽하게 지키셨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다. 따라서 성서는 경건하고 공손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예수님께서 받아 드신 성서 구절은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그 대목을 펴신 것은 우연히 아니라 성령의 감도에 의해서였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도유되셨고 성령의 능력으로 행동하셨던 것이다. 이사야는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언자였다. 마리아는 수태고지 때에 이사야의 예언을 감지했고, 시므온은 이사야로부터 빛과 영감을 받았다. 세례자가 자신의 사명을 깨달은 것도 이사야를 통해서였다. 쿰란 공동체의 생활은 이사야서에 기초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이사야의 말을 빌어 묘사하신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이 말씀은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인용한 것이다(주 야훼의 영을 내려 주시며 야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고 나를 보내시며 이르셨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야훼께서 우리를 반겨 주실 해, 우리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실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여라.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여라).


다만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가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이사야58,6)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대체됨으로써 전체 내용이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첫째 문장과 둘째 문장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성령을 받고 하느님으로부터 그 사명을 위임받았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그 밖의 문장들은 구원의 증여자가 이루어야 할 일들을 다루고 있다. 첫째 문장과 마지막 문장, 그리고 가운데 두 문장은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첫째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복음 선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가운데 두 구절은 구세주의 활동을 언급한다. 구세주는 말씀과 행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성취한다. 그는 구원자이며 승리를 알리는 사자이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구원의 때가 시작되었다는 것과 구세주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예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임으로써였다. 이것은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구원의 메시지는 믿음을 요구하며 이 믿음은 들음으로써 온다. 믿음은 도전에 대한 응답이다.


성서 낭독 후에는 가르침이 뒤따랐다. 그 가르침이 강렬한 만큼 인상적인 단어들로 된 한 문장으로 요약되고 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때를 선포하시고 그 때가 도래하였음을 알리셨다. 이것은 바로 이 순간에 있어서 새롭고도 기묘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거룩한 관습과 약속을 담은 성서 말씀이 이제 실현된 것이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의 총애를 많이 받으셨었다(2,52). 청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모두들 예수님을 칭찬하였다.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디도서2,11). “하느님께서는 그분과 함께 계셨습니다.”(사도10,38). 이러한 것은 예수님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직접 체험한 첫인상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인성이 걸림돌이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님의 말씀은 도전이었고 문제 거리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는 환영하였지만 그 메시지를 가져온 구세주는 배척하였다. 예수님은 그들과 다름없었고,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걸림돌은 예수님의 죽음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께 그러했듯이 사도들에게도 화를 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에 대해, 그리고 하느님의 메시지를 설교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있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고향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설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바울로와 바르나바도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당신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그 영원한 생명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으니 우리는 당신들을 떠나서 이방인들에게로 갑니다(사도13,46).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구세주이시라는 표징을 원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예수님의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그들이 규정하는 바대로 입증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요구하신다. 당신이 정하신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동의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없었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예언자는 자신의 임의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파견하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기적이 이웃 주민들에게가 아니라 낯선 이들과 이방인들에게 베풀어지도록 하셨다. 나자렛 사람들이 구세주의 구향 사람들이었고 같은 혈통을 지닌 친척들이었다는 것이 구원의 정당한 사유가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온 이스라엘은 그들 가운데에서 메시아가 나셨다는 이유로 구원에 대한 권리 주장을 내세울 수는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셨고 또 그 다스림을 확립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기쁨이 되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푸신다. 구원은 은총이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예언자임을 자처하는 사람은 반드시 표징과 놀라운 일들로 자신이 예언자임을 증명해야 한다(신명 13,2-3).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경한 자로 단죄하고 돌로 쳐 죽이려 하였다. 불경한 자를 처벌하는 첫 조치는 핵심 증인이 그 죄인을 벼랑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모인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심판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즉시 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이 사건은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 대한 예수님의 사명이 좌절되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예수님은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 불경한 자로 낙인찍히고 배척당하여 죽음에 직면하게 되셨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지만 예수님께 손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의 죽음의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하느님께 달려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 처해지셨을 때조차 그것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의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었다.




3.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의 모습을 잘못 알고 있었던 적은 없었습니까? 그리고 나의 모습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럴 경우 어떻게 하십니까?






2.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상처받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떠나게 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됩니다. 마치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혹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박해한 적이나, 박해를 당한 적은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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