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철은 1795년(정조 18년)에 순교한 최인길(崔仁吉․마지아)의 동생으로서, 그의 집안은 본래 중인 계급에 속하는 역관이었다. 형인 마지아는 일찍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활동하였으며, 특히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전교 활동을 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인물이었다.
그런데 최인철에 관해 자세히 기록한 문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교명이나 출신지, 어릴적 행적 등에 관하여는 거의 알 수가 없다. 다만 그의 문초 기록을 검토함으로써 입교한 후 그가 활동한 양상이나 신앙 생활의 정도, 순교에 이르기까지의 내력 등을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열심한 교우였던 형으로부터 천주교 신앙을 배운 인철은 신자의 본분을 지켜 항상 모범된 생활을 하였으며, 조선의 전통적인 풍속에 따른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폐지하였다. 이러한 두 형제의 행동은 외교인들의 눈에 윤리를 파괴하는 것으로 비쳤고, 이에 1791년의 신해교난(辛亥敎難)이 일어나 교우들이 박해를 받응 무렵에 인철도 체포되어 투옥당하였다. 아마도 이때 인철은 일시적으로 마음이 약해져서 배교를 하고 석방된 듯하다. 그러나 그는 곧 이러한 행동을 뉘우치고 보다 깊은 신앙심으로 교우들과 함께 교회의 일을 돌보게 되었다.
1794년경 최인철은 주문모 신부의 입국을 위하여 형과 함께 지홍(池洪․사바), 윤유일(尹有一․바오로) 등과 협력하면서 활동하였으며, 이들이 순교한 후에는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시면서 교리를 배우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김종교(金宗敎․프란치스꼬), 최필공(崔必恭․토마스), 최필제(崔必悌․베드로), 황사영(黃嗣永․알렉산델) 등과 서로 연락하면서 교회의 일을 돌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신유 교난(辛酉敎難)이 일어나 주문모 신부가 체포되어 순교하자, 그는 박해를 피하여 관정동(冠井洞)에 있는 외숙모의 집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박해의 손길은 그를 찾아내었으며, 이에 그는 여러 교우들과 함께 옥에 갇히게 되었다.
포청과 형조를 거치면서 인철은 여러 가지 문초와 형벌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신앙심을 지켜 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형조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여러 교우들과 함께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니, 때는 1801년 7월 3일(음력 5월 23일, 혹은 5월 22일)이었다.

최인철은 1795년(정조 18년)에 순교한 최인길(崔仁吉․마지아)의 동생으로서, 그의 집안은 본래 중인 계급에 속하는 역관이었다. 형인 마지아는 일찍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활동하였으며, 특히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전교 활동을 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인물이었다.
그런데 최인철에 관해 자세히 기록한 문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교명이나 출신지, 어릴적 행적 등에 관하여는 거의 알 수가 없다. 다만 그의 문초 기록을 검토함으로써 입교한 후 그가 활동한 양상이나 신앙 생활의 정도, 순교에 이르기까지의 내력 등을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열심한 교우였던 형으로부터 천주교 신앙을 배운 인철은 신자의 본분을 지켜 항상 모범된 생활을 하였으며, 조선의 전통적인 풍속에 따른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폐지하였다. 이러한 두 형제의 행동은 외교인들의 눈에 윤리를 파괴하는 것으로 비쳤고, 이에 1791년의 신해교난(辛亥敎難)이 일어나 교우들이 박해를 받응 무렵에 인철도 체포되어 투옥당하였다. 아마도 이때 인철은 일시적으로 마음이 약해져서 배교를 하고 석방된 듯하다. 그러나 그는 곧 이러한 행동을 뉘우치고 보다 깊은 신앙심으로 교우들과 함께 교회의 일을 돌보게 되었다.
1794년경 최인철은 주문모 신부의 입국을 위하여 형과 함께 지홍(池洪․사바), 윤유일(尹有一․바오로) 등과 협력하면서 활동하였으며, 이들이 순교한 후에는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시면서 교리를 배우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김종교(金宗敎․프란치스꼬), 최필공(崔必恭․토마스), 최필제(崔必悌․베드로), 황사영(黃嗣永․알렉산델) 등과 서로 연락하면서 교회의 일을 돌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신유 교난(辛酉敎難)이 일어나 주문모 신부가 체포되어 순교하자, 그는 박해를 피하여 관정동(冠井洞)에 있는 외숙모의 집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박해의 손길은 그를 찾아내었으며, 이에 그는 여러 교우들과 함께 옥에 갇히게 되었다.
포청과 형조를 거치면서 인철은 여러 가지 문초와 형벌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신앙심을 지켜 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형조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여러 교우들과 함께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니, 때는 1801년 7월 3일(음력 5월 23일, 혹은 5월 22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