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라
– 에파타 –
듣지 못하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 둘 중에 누가 더 갑갑할까요? 듣지 못하는 사람은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본 것을 말할 수 없으니 오죽 갑갑할까? 또 보지 못하는 사람은 듣기는 하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할까?
만일 당신에게 하느님께서 “너는 노년에 귀가 먹거나 눈이 안 보이는 병이 생긴다면 어떤 것을 택하겠느냐?” 어느분은 보지 못하는 것을 택하겠다고 합니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들을 수 있으니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저는 둘 다 싫습니다.^^)
그런데 보는 것에 대해서, 듣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은 그것에 대해서 감사드렸으면 좋겠습니다.
31 예수님께서 다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잠시도 쉬시지 못하고 당신의 일을 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기쁜 소식을 전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발걸음을 또 옮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티로에서 잠시 사람들을 피해 제자들과 함께 쉬려 하셨지만 결국 그곳에서도 쉬지 못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이방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자녀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다시 티로를 떠나 갈릴래아 호수가로 돌아오셨습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로.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사람들이 귀먹은 반벙어리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시면 귀가 들리고 입이 열릴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예수님께서는 앓는 기관(귀와 혀)을 만지고 침을 바르십니다. 이것은 히브리인이 병이나 액땜에 잘 쓰던 관습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사고방식에 자신을 맞춤으로써 당신께서 나쁜 병을 치유하고자 한다는 것을 확신케 해 주십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침은 눈을 치료하는 약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떼어 놓습니다. 그의 치유를 통해서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믿음 없이 오직 기적만을 바라고, 예수님을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로 받아들일까봐서 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군중에게서 따로 떼어 놓는 이유는, 그들 속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나도 말하기 위해서, 듣기 위해서는 떠나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듣지 못한다면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낚시도 마찬가지 입니다. 잡히지 않는 자리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포인트를 향해서 떠나야 합니다. 이제 내가 신앙의 포인트를 향해서 떠나야 할 때 입니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준비에 불과한 것입니다. 치유자체는 명령하시는 말씀에 이어 나타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하느님, 예수님께서도 말씀으로, 명령으로 병을 고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에파타” 하고 말씀하십니다. “열려라” 라는 뜻 입니다. 이것은 병든 기관을 향한 것이 아니라 환자 전체를 향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사람 전체가 병든 것으로, 그가 건강해지면 그로써 그 병든 기관이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결과는 즉시 나타납니다.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렸습니다(그런데 이 예식은 세례식에 사용되었습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초자연적인 입장에서 보면, 귀먹은 반벙어리와 같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셨을까요?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교류인 듯 합니다. 병으로 신음하는 이들, 이들 모두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이시기에 환자들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것은 가슴 아픔 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보시기 좋도록 창조하셨는데, 창조질서를 역행하다보니 이렇게 장애가 생겨 예수님 앞에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좋은 자동차를 망가뜨리고, 당신이 잘못 만들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우기면 얼마나 한숨이 나올까요?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나는 아닌지,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향해 한숨을 짓고 계시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생겨라.” 하시니 세상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려라.” 하시니 그 환자의 귀와 입이 열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부족한 저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억지로 끌어드리시지는 않습니다. 제가 가기 싫으면 억지로 끌고 가지는 않으십니다. 하지만 제 옆에서 늘 제가 당신께로 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열려라.”하여 입을 열어 주셨지만 제가 말을 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으면 결국 저는 벙어리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예수님께서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는 군중들이 오해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로, 그래서 그 능력으로 이 억압의 세상(로마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자유를 주는 힘 있는 메시아로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기적에만 관심을 기울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벙어리는 그 기쁨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기뻤으니, 또한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니 주변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 사실을 알게 되면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겠지만, 기적만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메시아 사명을 왜곡하여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적 사실들이 알려 지면 알려질수록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의 경계심과 음모는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기적을 처음 보았습니다. 모두들 놀랐습니다. 아마도 성경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그 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이사35,5-6)는 말씀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메시아 시대에 일어날 일들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펼쳐지니 놀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어떻습니까? 그저 나보다 조금 몸이 불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장애를 얻어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된다면 어떤 시선을 받고 싶습니까?
2. 말을 못하던 사람이, 듣지 못하던 사람이 듣게 되고 말을 하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까?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한다면 나도 벙어리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한다면 나는 소경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나를 통해서 보여 주기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