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운(토마)

 

  한덕운은 충청도 홍주 고을에서 태어났다.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으므로 그의 어렸을 때 행적이나 집안 내력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지만, 문초기록을 살펴 볼 때, 그가 매우 열성적인 신자였음을 알 수가 있다. 1790년(正祖 14)에 전라도 지방의 유명한 교우였던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에게서 천주교에 대하여 들은 그는 즉시 교리의 본분을 열심히 실천하였다. 그러던 중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덕운은 그를 찾아가 영세를 받았으며, 1800년(正祖 24)에 이르러서는 경기도 광주의 의일리(義一里)라는 곳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이듬해에는 신유교난의 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순교함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그는 홍낙민(洪樂敏) 루까, 최필제(崔必悌) 베드로 등 교우들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지내는 한편, 나약한 마음을 나타내는 교우들을 공공연하게 꾸짖기도 하였다. 특히 홍낙민 루까의 아들 홍자영(洪자榮) 쁘로따시오가 배교하는 것을 보고는 심하게 책망하여 마음을 돌리게 하였는 바, 쁘로따시오는 훗날 1839년(憲宗 5)에 순교의 영광을 얻기에 이른다.


  결국 덕운은 이러한 그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포졸들의 눈에 띄어 체포당하였다. 어디에서 그가 체포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체포된 이후 그는 여러 교우들과 함께 포청과 형조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의 신문과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꿋꿋한 신앙심을 지켜서 어떠한 배교의 말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형조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광주로 이송되어 여러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 참수를 당하였으니, 이 때가 1802년 1월 30일(陰, 1801년 12월 27일)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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