權 데레사의 세속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녀의 교명만이 기록에 나타난다. 그녀는 1784년 경기도 양근(지금의 양평) 고을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꼬․사베리오는 조선에 천주교를 처음으로 전파할 때에 가장 열렬한 신자 중의 한 사람으로 1791년 신해교난 때에 순교하였다. 모친도 이미 2년 전에 선종하였기 때문에 막내딸이었던 데레사는 오빠들과 함께 어린시절을 보내야만 하였다. 집안 식구들 모두가 천주교 신앙이 깊은 신자들이었으므로 데레사도 일찍부터 천주교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데레사의 온화함과 상냥함, 그리고 깊은 애덕은 형제들 사이에 우애를 깊게 하고 신앙을 두텁게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장성함에 따라 그녀의 마음과 정신의 덕은 드물게 보이는 용모와 함께 모든 사람들의 눈을 끌게 되었다. 그러나 데레사 자신은 이러한 세속의 눈을 경멸하고, 그때부터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분에게 동정을 바칠 생각을 하였으며, 주문모 신부의 손으로 성사를 받는 행운을 얻었을 때에는 그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1801년 신유교난이 일어나자 데레사의 집안은 다시 한 번 박해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녀의 오빠 권상문(權相問)(권철신의 양자이지만 그의 생부는 권일신)은 순교하였고 권상학(權相學)은 규자도로 유배되었다. 이제 데레사는 아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으나 아무런 불평도 표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카 하나를 데리고 서울로 피하여 생활하면서도 여전히 동정에 대한 열정은 잊지 아니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녀의 친척들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절대로 동정을 지킬 수 없다 하면서 결혼할 것을 권하였다. 이러한 권유의 강력함으로 인하여 데레사는 하는 수 없이 그들에게 동조하여 결혼할 것을 승낙하였다.
21세에 이른 데레사는 조숙(遭淑) 베드로라는 교우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아직 베드로는 냉담자로 남아 있었다. 당시 조선 풍속으로는 남편에게 처음부터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데레사는 동정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수정(守貞)할 것을 권고하는 글을 하나 준비하였다. 신방에 둘이만 남게 되자 데레사는 남편에게 그 글을 주었으며, 이를 받은 남편 베드로는 별안간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원을 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그들 부부는 영원한 남매로 지내는 동정부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굳게 맹세하였다. 약속을 어김없이 지키면서 그들 부부는 화목한 가운데 살아 갔으며, 오래지 않아 데레사의 덕과 마음이 통하여 베드로는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었다.
평온한 상태가 되자 데레사는 남편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서 함께 여러 착한 일을 하기에 전심하였다. 그들은 몹시 가난하여 궁핍하게 지내면서도 알뜰히 절약한 돈으로 자기네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애긍(哀矜)을 베풀었다. 남편 베드로는 이전의 죄를 생각하고는 보다 열심히 본분을 다하였다. 냉담자들을 권고하며, 외교인을 가르쳐 입교시키고 죽을 위험에 처한 어린이들에게 대세(代洗)를 주는 등 천주교인의 신앙 그대로를 실천하였다. 특히 그의 주요한 목적은 조선에 성직자를 모셔오는 일에 있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 베드로는 모든 힘을 기울였으며, 정하상(丁夏祥) 바오로가 북경에 다녀오기로 되었을 때에는 모든 준비를 도맡아 하였다.
한편 데레사도 교회의 본분을 지키며 선행을 하는 데는 남편 못지 않게 열심이었다. 무엇보다도 자기의 영신적 향상을 열망하여 여러 가지 극기를 행하였다. 한 주일에 두 번 대세를 지키며, 밥그릇에 재나 먼지를 몰래 섞기도 하였다 한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괴로움을 참아내고, 열심히 기도한 나머지 가끔 침식조차 잊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하루에 몇 시간 밖에 잠을 자지 아니하고 모든 시간을 기도하는 일과 천주교 서적을 읽는 일과 이웃사람을 위로하는 일로 보냈다. 누구든지 무엇을 물어보면 언제나 기꺼이 대답하여 주었으며, 그녀의 말을 들으면 누구나 감화되어 만족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데레사가 남편과 수정생활을 하며 15년을 사는 동안 그들의 결심을 유혹하는 일도 많이 있었다. 특히 남편 베드로는 이 유혹에 빠져 결심을 무너뜨리려고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데레사는 착한 말로 권유하여 남편을 돌아서도록 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모든 덕행을 닦아 준비가 되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고난의 시련을 겪도록 하였다.
1817년 3월말 경 정하상(丁夏祥) 바오로가 북경에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던 중, 포졸에게 검거된 베드로의 몸에서 천주교 축일표가 발견되어 압수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시 베드로가 가르치고 있던 예비신자의 몸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사람이 베드로를 밀고했다고도 한다. 이 축일표는 곧 포청에 제시되었고 이어 포장은 포졸들을 보내어 그를 잡도록 하였다. 이 때 데레사는 남편을 위험한 처지에 혼자 버려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남편과 함께 포청으로 끌려갔다.
관원들은 이들 부부를 고문하여 배교를 강요하면서, 특히 여자인 데레사는 상냥한 말로 달래어 배교하도록 권유하였다. 이것은 용맹한 그녀의 마음을 모르고 하는 것이었으니, 데레사는 ꡒ천주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고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데, 어떻게 그 분을 배반하라고 그러십니까. 이 세상에서도 누구든지 부모를 배반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은 더구나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ꡓ라고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이에 다시 형벌이 가해졌으나 그녀는 이를 기쁘게 참았다. 그녀가 얼굴빛 조차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 관장은 그녀의 항복을 쉽사리 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초를 당할 때도 언제나 데레사가 머저 대답하여 남편에게 말할 겨를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하였다.
데레사와 베드로는 옥중에서 충실한 교우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高 발바라․막달레나였다. 고 발바라는 황해도 재령 지방 서민의 딸이었다. 아직 외교인으로 있을 때에 귀양가는 남편을 따라갔다가 유배지 무산에서 조동섬(趙東暹) 유스띠노를 만나, 그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적소에서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남편을 선산으로 이장한 다음 상경하여 조 숙 베드로의 집으로 갔다. 이전에 그녀는 무산에서 친척 조동섬(趙東暹)을 찾아온 베드로를 만난 적이 있었다. 베드로의 집에 하인 모양으로 있으면서 그녀는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진심으로 계명을 지켰다. 베드로와 데레사가 체포되자 그녀는 자진하여 옥에까지 다라가 갖은 문초와 형벌을 당하였다.
이 세 증거자의 문초는 시일만 점점 끌어갔다. 이들은 2년 이상이나 옥에 갇혀 있었는데 그동안 교회의 본분을 충실히 지키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데레사가 그녀의 굳건한 마음과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을 드러낸 것이 특히 이 무렵이었다. 그녀는 항상 명랑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고통을 이겨냈으며, 얼굴에 안온하고 화평한 빛을 잃지 않아 다른 사람들에게 천사처럼 보였다. 그녀는 때때로 ꡒ죄많은 내게 이미 천주께서 동정을 지키는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셨는데, 이제 또 순교의 은혜를 내리고자 하시니 어떻게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ꡓ라고 말하였다. 하루는 남편 베드로가 유혹을 받아 더 이상 형벌을 당해내지 못하겠다고 대답하자 데레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말로 남편의 용기를 북돋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ꡒ이렇게도 좋은 기회를 놓치고 목숨을 보전하신들 이 세상에서 어떤 훌륭한 일응ㄹ 바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천주를 위하여 함께 치명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ꡓ라고 반문하여 순교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런 뒤부터 베드로의 마음은 다시 흔들리지 않고 굳은 신앙심을 갖게 되었다.
옥에 갇힌지 27개월이 지난 1819년 5월 21일, 마침내 데레사는 남편과 발바라와 함께 참수를 당하니, 이 때 그녀의 나이는 36세였다. 그 후 교우들은 데레사의 머리채를 대바구니에 넣어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의 집에 보관하였는데 그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여 방안을 가득채웠다고 한다. 이렇게 순교한 데레사 동정부부는 1801년 유중철(柳重哲) 요한과 이순이(李順伊) 누갈다 동정부부가 순교한 후 18년 만의 일이었으며, 그들과 함께 천주교 순교사에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權 데레사의 세속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녀의 교명만이 기록에 나타난다. 그녀는 1784년 경기도 양근(지금의 양평) 고을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꼬․사베리오는 조선에 천주교를 처음으로 전파할 때에 가장 열렬한 신자 중의 한 사람으로 1791년 신해교난 때에 순교하였다. 모친도 이미 2년 전에 선종하였기 때문에 막내딸이었던 데레사는 오빠들과 함께 어린시절을 보내야만 하였다. 집안 식구들 모두가 천주교 신앙이 깊은 신자들이었으므로 데레사도 일찍부터 천주교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데레사의 온화함과 상냥함, 그리고 깊은 애덕은 형제들 사이에 우애를 깊게 하고 신앙을 두텁게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장성함에 따라 그녀의 마음과 정신의 덕은 드물게 보이는 용모와 함께 모든 사람들의 눈을 끌게 되었다. 그러나 데레사 자신은 이러한 세속의 눈을 경멸하고, 그때부터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분에게 동정을 바칠 생각을 하였으며, 주문모 신부의 손으로 성사를 받는 행운을 얻었을 때에는 그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1801년 신유교난이 일어나자 데레사의 집안은 다시 한 번 박해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녀의 오빠 권상문(權相問)(권철신의 양자이지만 그의 생부는 권일신)은 순교하였고 권상학(權相學)은 규자도로 유배되었다. 이제 데레사는 아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으나 아무런 불평도 표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카 하나를 데리고 서울로 피하여 생활하면서도 여전히 동정에 대한 열정은 잊지 아니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녀의 친척들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절대로 동정을 지킬 수 없다 하면서 결혼할 것을 권하였다. 이러한 권유의 강력함으로 인하여 데레사는 하는 수 없이 그들에게 동조하여 결혼할 것을 승낙하였다.
21세에 이른 데레사는 조숙(遭淑) 베드로라는 교우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아직 베드로는 냉담자로 남아 있었다. 당시 조선 풍속으로는 남편에게 처음부터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데레사는 동정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수정(守貞)할 것을 권고하는 글을 하나 준비하였다. 신방에 둘이만 남게 되자 데레사는 남편에게 그 글을 주었으며, 이를 받은 남편 베드로는 별안간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원을 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그들 부부는 영원한 남매로 지내는 동정부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굳게 맹세하였다. 약속을 어김없이 지키면서 그들 부부는 화목한 가운데 살아 갔으며, 오래지 않아 데레사의 덕과 마음이 통하여 베드로는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었다.
평온한 상태가 되자 데레사는 남편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서 함께 여러 착한 일을 하기에 전심하였다. 그들은 몹시 가난하여 궁핍하게 지내면서도 알뜰히 절약한 돈으로 자기네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애긍(哀矜)을 베풀었다. 남편 베드로는 이전의 죄를 생각하고는 보다 열심히 본분을 다하였다. 냉담자들을 권고하며, 외교인을 가르쳐 입교시키고 죽을 위험에 처한 어린이들에게 대세(代洗)를 주는 등 천주교인의 신앙 그대로를 실천하였다. 특히 그의 주요한 목적은 조선에 성직자를 모셔오는 일에 있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 베드로는 모든 힘을 기울였으며, 정하상(丁夏祥) 바오로가 북경에 다녀오기로 되었을 때에는 모든 준비를 도맡아 하였다.
한편 데레사도 교회의 본분을 지키며 선행을 하는 데는 남편 못지 않게 열심이었다. 무엇보다도 자기의 영신적 향상을 열망하여 여러 가지 극기를 행하였다. 한 주일에 두 번 대세를 지키며, 밥그릇에 재나 먼지를 몰래 섞기도 하였다 한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괴로움을 참아내고, 열심히 기도한 나머지 가끔 침식조차 잊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하루에 몇 시간 밖에 잠을 자지 아니하고 모든 시간을 기도하는 일과 천주교 서적을 읽는 일과 이웃사람을 위로하는 일로 보냈다. 누구든지 무엇을 물어보면 언제나 기꺼이 대답하여 주었으며, 그녀의 말을 들으면 누구나 감화되어 만족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데레사가 남편과 수정생활을 하며 15년을 사는 동안 그들의 결심을 유혹하는 일도 많이 있었다. 특히 남편 베드로는 이 유혹에 빠져 결심을 무너뜨리려고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데레사는 착한 말로 권유하여 남편을 돌아서도록 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모든 덕행을 닦아 준비가 되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고난의 시련을 겪도록 하였다.
1817년 3월말 경 정하상(丁夏祥) 바오로가 북경에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던 중, 포졸에게 검거된 베드로의 몸에서 천주교 축일표가 발견되어 압수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시 베드로가 가르치고 있던 예비신자의 몸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사람이 베드로를 밀고했다고도 한다. 이 축일표는 곧 포청에 제시되었고 이어 포장은 포졸들을 보내어 그를 잡도록 하였다. 이 때 데레사는 남편을 위험한 처지에 혼자 버려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남편과 함께 포청으로 끌려갔다.
관원들은 이들 부부를 고문하여 배교를 강요하면서, 특히 여자인 데레사는 상냥한 말로 달래어 배교하도록 권유하였다. 이것은 용맹한 그녀의 마음을 모르고 하는 것이었으니, 데레사는 ꡒ천주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고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데, 어떻게 그 분을 배반하라고 그러십니까. 이 세상에서도 누구든지 부모를 배반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은 더구나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ꡓ라고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이에 다시 형벌이 가해졌으나 그녀는 이를 기쁘게 참았다. 그녀가 얼굴빛 조차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 관장은 그녀의 항복을 쉽사리 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초를 당할 때도 언제나 데레사가 머저 대답하여 남편에게 말할 겨를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하였다.
데레사와 베드로는 옥중에서 충실한 교우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高 발바라․막달레나였다. 고 발바라는 황해도 재령 지방 서민의 딸이었다. 아직 외교인으로 있을 때에 귀양가는 남편을 따라갔다가 유배지 무산에서 조동섬(趙東暹) 유스띠노를 만나, 그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적소에서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남편을 선산으로 이장한 다음 상경하여 조 숙 베드로의 집으로 갔다. 이전에 그녀는 무산에서 친척 조동섬(趙東暹)을 찾아온 베드로를 만난 적이 있었다. 베드로의 집에 하인 모양으로 있으면서 그녀는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진심으로 계명을 지켰다. 베드로와 데레사가 체포되자 그녀는 자진하여 옥에까지 다라가 갖은 문초와 형벌을 당하였다.
이 세 증거자의 문초는 시일만 점점 끌어갔다. 이들은 2년 이상이나 옥에 갇혀 있었는데 그동안 교회의 본분을 충실히 지키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데레사가 그녀의 굳건한 마음과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을 드러낸 것이 특히 이 무렵이었다. 그녀는 항상 명랑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고통을 이겨냈으며, 얼굴에 안온하고 화평한 빛을 잃지 않아 다른 사람들에게 천사처럼 보였다. 그녀는 때때로 ꡒ죄많은 내게 이미 천주께서 동정을 지키는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셨는데, 이제 또 순교의 은혜를 내리고자 하시니 어떻게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ꡓ라고 말하였다. 하루는 남편 베드로가 유혹을 받아 더 이상 형벌을 당해내지 못하겠다고 대답하자 데레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말로 남편의 용기를 북돋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ꡒ이렇게도 좋은 기회를 놓치고 목숨을 보전하신들 이 세상에서 어떤 훌륭한 일응ㄹ 바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천주를 위하여 함께 치명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ꡓ라고 반문하여 순교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런 뒤부터 베드로의 마음은 다시 흔들리지 않고 굳은 신앙심을 갖게 되었다.
옥에 갇힌지 27개월이 지난 1819년 5월 21일, 마침내 데레사는 남편과 발바라와 함께 참수를 당하니, 이 때 그녀의 나이는 36세였다. 그 후 교우들은 데레사의 머리채를 대바구니에 넣어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의 집에 보관하였는데 그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여 방안을 가득채웠다고 한다. 이렇게 순교한 데레사 동정부부는 1801년 유중철(柳重哲) 요한과 이순이(李順伊) 누갈다 동정부부가 순교한 후 18년 만의 일이었으며, 그들과 함께 천주교 순교사에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