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숙(베드로 )

 

조 숙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ꡒ명수ꡓ로 ꡒ淑ꡓ은 그의 관명이다.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최초의 박해인 신해교난이 일어나기 몇해 전인 1787년, 경기도 양근(현 양평) 고을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올바른 성품을 갖고 있었다. 부모님들은 천주교 신자였으며, 1830년 오랜 귀양살이 끝에 선종한 조동섬(趙洞暹) 유스띠노도 그의 친척이었다. 특히 그의 아내 權 데레사는 남편을 일깨워 주고 함께 동정을 지켜 순교하였던 열심인 교우로 유명한 바, 이제 베드로에 대한 기록을 살펴봄으로써 그들 부부의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엿볼 수가 있겠다.


  1801년 신유교난이 일어났을 때에 아직 나이가 어렸던 조 숙 베드로는 양친과 함께 강원도에 살고 있는 외가로 피난가서 여러해 동안 그 곳에서 생활하였다. 장성하여 감에 따라 베드로는 훌륭한 재능을 나타냈으며, 성품이 착하고 친절하여 나이h다 훨씬 점잖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종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다른 교우들과의 상종도 없었으므로 신입교우들이 갖게 되는 박해에 대한 무서움으로 인하여 일상의 수계(守誡)도 게을리 하였다. 이러한 그에게 신앙에 대한 믿음과 정신을 일깨워 준 사람은 그의 아내 權 데레사였다.


  데레사는 초기의 조선천주교회에서 그 전파에 열심이었던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의 딸이었다. 일찍부터 성교의 진리를 열심히 믿은 그녀는 어떠한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어려서 모친을 잃은 그녀는 신해교난 때 부친을, 그리고 신유교난 때 오빠마저 잃는 등 파탄이 된 집안에서 오직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만 열심이었다. 한편, 그녀는 일찍부터 수정(守貞)할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친척들은 그 환경 속에서 동정을 지킨다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이야기하면서 자주 혼인할 것을 권하였다. 데레사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그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세에 이르러 베드로가 데레사와 결혼을 하였을 때, 아직도 그는 냉다한 교우였다. 데레사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는 남편을 위하여 하나의 글을 준비했는데, 거기에는 동정의 아름다움과 남편에게 수정(守貞)을 권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신방에 둘이만 남게 되자 데레사는 그 글을 남편에게 주었다. 이 때 베드로는 가자기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소망을 들어 주었고, 이에 그들은 남매와 같이 지내기로 약속하였다. 이제 그들은 하느님의 도움을 입어 동정부부가 되었던 것이다. 베드로 부부는 대단히 화목한 생활을 하였으며, 오래지 않아 아내의 덕으로 베드로는 신앙심이 깊어지기 시작하였다.


  평온한 상태가 이루어지자 베드로는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여러 가지 착한 일을 하기에 전심하였다. 그들 부부는 몹시 궁핍하게 지냈으나, 이를 기쁘게 생각하면서 자신들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애긍(哀矜)을 베풀었다. 베드로는 기도와 묵상에 전심하며, 이전에 지은 죄를 생각하고 가끔 눈물을 펑펑 쏟기도 하였다. 어떤 교우든지 냉담하게 변하면 몹시 마음 아파하면서 권고하기를 힘썼고, 반드시 그 교우를 깊은 진리의 길로 인도하였다. 그는 많은 외교인을 가르쳐 입교시키고, 죽을 위험에 처한 외교인 어린이들에게도 대세(大洗)를 주어 영생의 길로 인도하였다. 비록 신자가 아닐지라도 그의 말을 듣는 데 열심이었으며, 그이 가르침을 받으려고 끊임없는 발길들이 이어졌다. 한편 그의 중요한 목적은 조선에 성직자를 모셔 올 수 있게 하는 일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베드로는 온 힘을 기울였으며, 정하상(丁夏祥) 바오로가 북경에 다녀오기로 되었을 때에는 모든 준비를 도맡아 하였다. 이 때도 그는 많은 고통과 곤란을 받았지만 언제나 신앙의 힘으로 이를 견디어 냈다.


  한편 부인 데레사도 선행을 하고 신앙심을 깊이하는 데 있어 남편에 못지 않았다. 자신의 영신적 향상을 열망하여 극기로 이를 얻기에 힘썼고, 온갖 고난을 감수하였으며, 너무나 기도에 열심인 나머지 침식조차 잊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이웃사람을 가르치거나 위로하며 어느 누구의 요청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여 그의 말을 들으면 모든 이가 감동하였다.


  이와 같은 베드로 부부의 열성을 시기하여 못된 유혹도 있었다. 특히 베드로는 자신의 언약을 파기하려고 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데레사는 착한 마음으로 권유하여 남편이 처음 가졌던 마음으로 돌라서게 할 줄을 알았으며, 이럴 때마다 두 내외는 이 일을 천주께 진심으로 감사하여 마지 않았다. 그들이 이처럼 오랫동안 모든 덕행을 닦아서 준비가 되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커다란 고난의 시련을 겪도록 하였다.


  1817년 3월말 쯤 정하상 바오로가 북경에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던 중, 포졸들의 수색으로 베드로의 몸에서 천주교 축일표가 발견되어 압수당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가 당시 가르치고 있던 어느 예비신자의 몸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사람이 베드로를 밀고했다고도 한다. 마침내 이 축일표가 포청에 제시되었고 포장은 곧 포졸들을 보내어 베드로를 체포하도록 하였다. 데레사는 남편과 떨어지기도 싫고, 그를 위험하고 외로운 처지에 혼자 버려 두고자 아니하여 그를 따라 함께 옥에 갇히었다.


  베드로는 문초를 당하면서 배교를 강요당하고, 천주교 서적이 있는 곳과 교우들을 대라고 위협을 받았다. 베드로는 형벌을 꿋꿋이 참으면서 어떠한 말이건 한마디고 하지 않았다. 관원은 처음에 그의 아내 데레사를 상냥한 말로 달래어 배교하고 목숨을 구하라고 꾀려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용맹한 부인의 마음을 너무도 모르고 하는 것이었으니, 데레사는 주님의 진리를 꿋꿋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ꡒ천주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고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데, 어떻게 그 분을 배반하라고 그러십니까. 이 세상에서도 누구든지 부모를 배반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신 주님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ꡓ 이렇게 내외가 문초를 당할 때에는 언제나 데레사가 먼저 대답하여 베드로에게는 말할 겨를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더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하느님께서는 베드로 부부가 감옥살이와 고통을 받는 중에 충실한 교우 한 사람을 동행하도록 하였는 바, 이가 高 발바라․막달레나였다. 발바라는 황해도 재령에 살던 서민의 딸로, 아직 외교인으로 있을 때 귀양가는 남편을 따라갔다가 유배지 무산에서 조동섬(趙東暹) 유스띠노를 만나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당시 조 숙 베드로가 그의 친척인 유스띠노를 찾아갔다가 그녀를 만난 일이 있었다. 적소에서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사랑을 드러낸 것이 특히 이 무렵이었다. 베드로의 아내 권 데레사는 항상 명랑하고 행복하여 괴로움으로 기쁨을 삼고, 얼굴에 안온하고 화평한 빛을 잃지 아니하였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위로의 천사같이 보였다. 베드로가 유혹을 받아 형벌을 당해내지 못하겠다고 고백하자 그녀는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남편의 용기를 돋아 주었다. 이런 뒤부터 베드로의 마음이 다시는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는 옥 중에서 신앙의 정이 가득한 편지를 여러장 써 보내기도 하였고, 이 편지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교훈을 받게 하였다 한다. 다만 이들 편지는 한 장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제 베드로는 여러 차례의 형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굳건한 마음만 변하지 않았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할 마음만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옥에 갇힌지 27개월이 지난 1819년 5월 21일 서울에서 아내와 발바라와 함께 참수를 당하니, 이 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이 베드로 동정부부의 순교는 1801년 유중철(柳中哲) 요한과 이순이(李順伊) 루갈다 동정부부가 순교한지 18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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