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는 사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살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옆에 계셔도 모르고, 더 나아가 거부하게 됩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부활 이후 제자들의 공동체는 사랑을 바탕으로 사랑 안에서 성장해 가는 공동체였습니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고, 함께 하면서, 기도에 힘쓰던 초대 교회의 공동체. 이 공동체의 유지와 성장에는 바로 예수님의 계명들이 있었습니다. “드러내 보일 것이다”, ‘드러내 보이다“란 말씀은 제자들의 노력에 앞선 예수님의 자기 계시를 가리킵니다.
계명들을 지키면서 자기를 더욱더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더욱 구체적으로 강하게 드러내 보이는 삶.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그것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 나는 늘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내 옆에 계십니다. 그분은 결코 약속을 어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시몬 이스가리옷의 아들 유다가 아니라 야고보의 아들, 또는 타대오라고 불리는 사도 유다입니다. 교회 전통에서는 예수님의 사촌 형제인 유다(마르6,3; 마태13,55 참조)와 동일시했습니다. 유다는 왜 예수님께서 세상과는 거리를 두려 하시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예수님께서 드러내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못 알아 뵙는 것입니다. 내 옆에 계신 주님을 못 알아 뵙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세상)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난(蘭)”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귀한 난이라도 그저 풀 한포기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난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보이고, 마음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하신 분들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에는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가서”즉,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라는 표현과 “함께 살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지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며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 “거처하신다(머무신다)”라는 표현으로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모든 것을 예수님 안에서 실천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계신 곳, 하느님의 사랑(생명의 공동체)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가리옷 사람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세상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다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22절)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세상(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거부하는 사람들, 불신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계명이나 가르침)을 경청하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당신을 드러내셔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아무리 가르쳐도 흘려버리고 맙니다. 차라리 소나 개를 불러 놓고 가르치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의 특별한 일치는 선택받은 극소수의 영혼이 누릴 배타적인 특권으로서 이야기 되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모든 신자가 마땅히 이르게 될 조점으로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내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간다면 나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늘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치의 길은 누구나 다 걸을 수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자격이나 특별한 지식, 혹은 관상생활이나 수도생활이 전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계명을 실행하고 그분을 사랑한다면 얻게 될 축복입니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함께 하시는 동안에 하느님 아버지를 보여주셨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으며, 그 뜻을 행하셨고, 가르치셨습니다. 즉 하느님 아버지를 계시하셨습니다. 이제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내일이면 죽음을 맞이하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가르치셨던 것들을 제자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소화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협조자는 곧 성령이십니다. 이 성령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서 보내주신다고 함으로써 성령이 오심은 예수님의 오심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성령께서도 나의 구원을 위해서 오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상기시켜 줄 협조자라는 말씀 안에서, 우리는 성령께서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계시(가르침)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시를 계속 이행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사명은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가르치신 진리를 되새기게 하고 그것을 밝게 비추어 주고, 그 속에 감추어져 잇는 풍부한 보화를 찾아내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 안에서 교회는 맡겨진 사명을 다 하기 위하여 성령의 보호에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협조자, 곧 성령의 임무와 역할은 예수님의 계시 내용을 더욱 심화시키고 현실화시키며 증언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기시킨다.”, “되새기게 하다”는 과거를 해석하고 현재화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협조자이신 성령의 임무는 예수님의 계시 내용을 증언하면서 더욱 심화하고 실현하는 일입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2. 기억한다는 것은 그 체험이 현재화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것을 기억해야 예수님의 사랑을 지금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체험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