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소명을 받은 모세

하나. 소명을 받은 모세

(읽어야 할 말씀: 탈출1,1-4,17)

1. 시작기도: 탈출3,7-12 모세가 소명을 받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8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9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 10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11 그러자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12 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면, 너희는 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2.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

하느님께서는 오묘하신 방법으로 요셉을 이끄시어 야곱 집안을 기근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 정착하여 살아간 기간이 430여 년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왕조가 바뀌면서 요셉의 치적을 모르는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게다가 19왕조의 람세스 2세가 즉위하면서 히브리인들의 삶은 더욱 비참해졌습니다. 람세스 2세가 아버지 세티 1세보다 한층 더 열정적으로 건설 사업을 추진하면서 히브리인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인들은 노예로 전락한 자신들의 삶과 강제 노동의 비참함속에서 하느님을 기억했고, 하느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마지막 희망인 하느님의 도우심만을 바라게 되었고, 고역에 짓눌려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소리는 하느님께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2.1. 히브리인들에 대한 파라오의 정책

통치자가 바뀌면 정책도 바뀌게 됩니다. “이집트를 구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파라오가 이집트에 군림하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불행이 닥쳤습니다. 요셉의 치적을 알지 못하는 파라오가 보기에는 점점 늘어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는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아마 요셉의 치적을 알고 있었어도 그랬을 것입니다.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보다 더 많고 강해졌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고,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그들은 우리 원수들 편에 붙어 우리에게 맞서 싸우다 이 땅에서 떠나가 버릴 것이다.”(탈출1,9-10)

 

이집트의 제15-16왕조의 왕들은 힉소스족이었습니다. 힉소스족의 왕조는 제17왕조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힉소스족에게 승리하여 신왕국 시대를 연 이집트의 제 17왕조의 아흐모세 1세는 델타 지역에서 힉소스를 몰아냈습니다. 그는 나라의 행정 체제를 재조직했고, 대형 신전 건축 사업들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에 남아 있는 셈족은 언제나 정치적 불안요소였습니다. 특히 히브리인들이 거주하는 고센 땅은 이민족이 이집트 땅을 침략해 올 때 반드시 거치게 되는 지역이었습니다. 만일 히브리인들이 침략자들과 연합하여 이집트를 공격하게 되면 큰 재앙이기에, 고센 땅에 히브리인이 머물고 있다는 것은 신왕국의 파라오에게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강제 노역

파라오는 공사 감독들을 두어 히브리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켰습니다. 파라오는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나일강 삼각주 동북부에 곡식을 저장해 둘 성읍(피톰과 라메세스)을 짓게 하였습니다.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고된 일과 온갖 들일 등이 히브리인들의 몫이었습니다. 파라오는 이 모든 일을 혹독하게 시켜 히브리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남아 살해 정책

파라오는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히브리인들이 번성하자 히브리인들의 남아 살해 정책을 실행하였습니다. 파라오는 이집트인 산파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였습니다.

 

너희는 히브리 여자들이 해산하는 것을 도와줄 때, 밑을 보고 아들이거든 죽여 버리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탈출1,16)

 

파라오는 히브리인의 사내아이는 죽이라고 명령하였지만 산파들은 파라오에게 순명하지 않았습니다. 산파는 아이를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지 아이를 죽이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양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파라오의 명령을 거부해야 합니다. 또한 산파들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파라오의 명령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산파들은 이집트 임금이 그들에게 분부한 대로 하지 않고 사내아이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여자의 이름은 시프라였고, 다른 여자의 이름은 푸아였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들은 산파들의 대표였을 것입니다. 산파들은 하느님을 파라오보다 더 경외하고 두려워하여 하느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일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시프라와 푸아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임금이라 하지만 인간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만이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래서 저희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다 살려 주었습니다.”

 

산파들은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삶,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은 당연히 행동으로 옮기는 삶, 그 삶은 나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산파들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자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탈출1,22)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억압 받으면 억압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을 이렇게 박해하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서서히 펼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는 큰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고 거듭 약속해 주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생명은 하느님의 것

이유가 있으니 죽이려 하겠지만 생명을 어찌 그리 죽일 수 있겠는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가 어찌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는가?

파라오는 히브리인 사내아이들을 죽이라 명령하지만

산파인 시프라와 푸아는 파라오의 말에 따를 수가 없었다네.

그녀들의 임무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지 죽이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인간의 생명을 죽이는 일은

그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네.

 

두렵다 하더라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고,

강요한다 할지라도 거부해야 할 것들이 있으니,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그녀들의 삶은

두려움 속에서도 인간이 당연히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라네.

얼마나 괴로웠을까? 파라오의 명령을 받았을 때.

얼마나 두려웠을까? 파라오의 질책을 들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바라보며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니,

그녀들의 행동은 의롭다 칭송할 수밖에 없으리.

 

원치 않는다 하여 생명을 없애려 한다면

그 기준을 세우는 이는 하느님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도 처음에는 태아였고 어린 아기였다네.

아무 힘없는 존재였고, 보잘 것 없는 존재였기에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한 이를 만났다면 이 따사로운 햇살을 느끼지 못했으리.

원치 않는다 하여 생명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을 살인자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라네.

잘 생겨야만이, 똑똑해야만이, 아무런 질병이 없어야만이,

더 나아가 원해야만이 태어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리오.

내 몸이니 내 마음대로 한다 하지만 내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자리할 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또 한명의 인간임을 왜 인정하지 못하는가?

새끼를 잡아먹는 부모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을까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라오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이들이 종종 있으니

시프라와 푸아의 의로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명의 길이 어디인지를 비추어 주는 것이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리…,

 

생명은 인간이 함부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인간은 생명의 관리자이지 생명의 주인이 아닙니다. 살인을 명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스파르타에서는 더한 일도 벌어졌습니다. 군국주의를 지향하던 스파르타는 아이가 태어나면 부족의 장로에게 보내졌고, 허약한 아이로 판명되면 국가를 위해서 일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 자리에서 절벽 아래로 던져 버려졌습니다. 건강한 아이만 키워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스파르타도 멸망하였습니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됩니다. 시프라와 푸아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 큰 빛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생명의 주인이 아닙니다. 이 의로운 여인들을 바라보면서 생명의 고귀함과 소중함을 다시 깨달아야 합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생명의 관리자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나눔 1: 가끔은 어쩔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나 자신의 불합리한 행동을 변명합니다. 시프라와 푸아의 모습과 파라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산파들과 파라오와의 관계에서 예수님과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무딘 마음을 질책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병자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었고, 예수님을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혹에 빠지면 교만과 옹졸함이 양심을 감싸고 있기에 사랑과 겸손이 양심을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유혹

어쩔 수 없었습니다.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앞날이 불안했습니다. 원치 않았습니다.

자신이 없었습니다. 태어날 아기가 불쌍했습니다.

다들 하는데 왜 저라고 못하겠습니까? 그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숨기고 싶었습니다.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구속당하기 싫었습니다.

내 몸이니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

그러나 그 후로,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살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괴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또 다른 보속을 하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도 그날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죄에 눌려 살게 됩니다.

 

내가 흔들릴 때, 악마는 흔들리는 나에게 손을 내밀고

나를 위로합니다.

이번만 하고 싶은 대로 해봐.”

그 위로의 손을 잡으면

잠시 편안해지지만

벗어날 수 없는 죄의 늪에 빠진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악마는 기뻐합니다.

 

유혹…,

넘어가면 언제나 후회하는 것입니다.

산파들이 유혹을 이겨낸 것처럼, 그렇게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는 유혹을 이겨낼 수 있으니

기도하며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유혹은

그저 지나가는 한 줌의 먼지와도 같아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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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소명을 받은 모세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2.2. 모세의 탄생과 하느님의 이끄심(탈출2,1-10)

    레위 집안의 어떤 남자가 레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의 아버지는 아므람이고, 어머니는 요케벳입니다.

     

    모세의 탄생

    이집트가 히브리인의 남아 살해 정책을 펼치자 히브리인 부모들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파라오의 명령을 거부하며 아기를 석 달 동안 숨겨 키웠습니다. 그러나 더 숨겨 둘 수가 없게 되자, 왕골 상자를 가져다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 안에 아기를 뉘어 강가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습니다. 아이의 누이 미르얌은 아이를 파라오의 딸에게로 흘러가게 했습니다. 미르얌은 멀찍이 서서 동생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파라오의 딸이 목욕하러 강으로 내려왔다가 갈대 사이에 있는 상자를 보고, 여종 하나를 보내어 그것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왕골 상자를 열어 보니 아기가 울고 있었습니다. 공주는 그 아기를 불쌍히 여기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아기는 히브리인들의 아이 가운데 하나로구나.”(탈출2,6)

     

    이때 아이의 누이가 나서서 제가 가서, 공주님 대신 아기에게 젖을 먹일 히브리인 유모를 하나 불러다 드릴까요?”(탈출2,7)하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이 아기는 제 동생인데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당신께로 흘러오게 했답니다. 지금 제 동생이 젖을 먹어야 하니 어머니를 모셔 와도 될까요?” 파라오의 딸은 그렇게 하라고 하였고, 아이의 누이는 어머니를 불러왔습니다. 파라오의 딸은 아이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아기를 데려다 나 대신 젖을 먹여 주게. 내가 직접 그대에게 삯을 주겠네.”(탈출2,9)

     

    하느님께서는 부모의 간절함을 굽어보셨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세의 어머니는 아들을 살릴 수 있었고, 자신의 품에서 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가 그렇게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모세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사랑을 받고,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으며, 올바른 품성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아이가 자라자 어머니는 아이를 파라오의 딸에게 데려갔습니다. 공주는 그 아이를 아들로 삼고,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하면서 그 이름을 모세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끄심

    모세가 파라오의 딸의 양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파라오의 딸은 모세가 히브리인들의 사내아이라는 것을 알았고, 히브리 사내아이를 살리는 일은 아버지인 파라오의 뜻을 거역하는 것임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녀가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고 있었기에, 강물에 떠내려 오는 아기를 발견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고,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히브리 사내아이를 양자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제 공주의 양자가 된 모세는 이집트 왕실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하느님 구원의 도구가 되기 위하여 다양한 역량을 키우게 될 것입니다.

     

    공주의 선택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른 척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파라오의 딸은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떠내려 오는 아이가 히브리 사내아이라는 것을.

    아버지의 정책 때문에 죽을 운명에 처해졌다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파라오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어린 생명은 물 위를 떠다니다가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어머니의 품속에서 사랑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녀는 물위에 떠 있는 애처로운 어린 생명을 바라보았습니다.

    측은한 마음이 들은 그녀는

    히브리 아이를 물에서 건저 냈고,

    아이의 누이가 원하는 대로 아이의 어머니를 유모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자비를 베풀며 아이를 양자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녀의 자비는

    아버지의 만행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보속일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이끄심에 마음을 열었기에 생겨난 것입니다.

    다른 이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며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이기에

    이런 마음을 가진 이들은 하느님의 손길에 마음을 연 이들입니다.

    모세는 그렇게 그녀의 양자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나병환자였던 그녀가

    그 왕골상자에 손을 댄 순간 나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녀는 복을 끌어당긴 것입니다.

    어린 생명을 살리려는 그 가족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비를 베풀었기에

    분명 그녀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을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자 어머니는 아이를 공주에게 데려갔습니다.

    공주는 그 아이를 아들로 삼고,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 하면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하였습니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른 척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파라오의 딸이 그리 했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내 옆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나눔 2: 모세의 누이 미르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동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이가 누이며 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정 안에서 형제자매들이 시기와 질투와 경쟁을 버리고 사랑과 존중과 배려를 할 수 있는 관계는 어떻게 해야 이루어질까요?

     

    이집트 왕자 모세

    모세는 히브리인이지만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집트 왕실에서 공주의 양자요, 왕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공주의 양자라는 것은 고된 노역에 시달리는 히브리 남자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집트 왕실의 최고 권력자 중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희박하지만 이집트의 파라오가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니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문명의 중심지였고, 조직이 잘 정비된 대제국이었으며, 정치, 경제, 군사, , 문화, 건축분야 등에서 큰 능력을 드러내고 있던 나라였습니다. 이집트의 왕자가 된 모세는 이 모든 지혜와 지식들을 당연히 배웠을 것입니다. 그 지식과 지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수 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또한 노예를 해방시키려는 지도자는 당연히 완전한 자유를 체험해야 했습니다. 노예 신분의 부모에게서 태어나 평생 노예로 사는 히브리인들은 자유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노예의 운명에서 벗어나 이집트 왕궁에서 그 시대 최고의 문화적 혜택을 누리면서 자유인으로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모세를 이끌고 계셨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모세의 자존감을 최대한 높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출애굽의 리더는 통치자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서로 평등한 관계이며, 백성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리더입니다. 섬김의 리더쉽은 자존감이 높아야만 제대로 발휘가 됩니다. 자존감은 어릴 적 환경과 부모의 사랑으로 높아지기에 하느님께서는 친부모의 진실한 사랑과 이집트 왕실에서의 풍요로운 혜택을 받도록 모세를 이끄셨습니다.

     

  2. guest 님의 말:

    2.3. 모세가 미디안 땅으로 달아나다(탈출2,11-22)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였지만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성년이 된 모세는 늘 자신의 동족에 대한 연민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동포들이 강제 노동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가슴 아파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 품 안에서 자라면서 주님께 대한 신앙과 동포애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모세는 자기 동포들이 있는 데로 나갔다가, 이집트 사람 하나가 자기 동포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이리저리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그 이집트인을 때려죽이고서 모래 속에 묻어 감추었습니다. 아마 모세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이 히브리인은 이집트인 공사 감독에 의해서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집트인을 죽여서 묻은 이튿날 다시 나가서 보니, 히브리 사람 둘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잘못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시오?”(탈출2,13)하고 말하며 중재를 했습니다. 같은 동족으로서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야 하고, 더욱 많은 배려를 해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싸우는 동족의 모습을 바라본 모세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잘못한 사람에게 한마디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모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당신은 이집트인을 죽였듯이 나도 죽일 작정이오?”(탈출2,14)

     

    모세는 이집트인을 죽일 때,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모세로부터 도움을 받은 이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세의 일을 동족들에게 이야기했고, 그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겨났던 것 같습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역시! 모세가 히브리인이니 당연히 동족을 생각해 주겠지. 그래도 히브리인 중에 이집트의 왕자가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야!”라고 말하면서 모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히브리 사람은 나는 이렇게 노예로 살아가는데 누구는 왕자라니…,” 하면서 모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모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집트 고위 관료들이나 제관들은 그런 히브리인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모세를 감시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일이 정말 탄로나고야 말았구나.”(탈출2,14)라고 말한 것입니다. 모세는 동족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오히려 배신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사랑은 배반으로…,”

    ! 주님,

    제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은 동족에 대한 사랑이었고,

    동족에 대한 사랑은 목숨을 건 행동으로 이어졌건만

    제가 사랑한 동족은 저를 이해해 주지 않고,

    오히려 저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제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 동족에 대한 사랑이었기에

    제 마음은 늘 동족에 대한 연민이 가득했건만

    이제 그 사랑의 마음자리에 차지하려는 것들은

    원망과 분노와 안타까움 입니다.

    사랑이 배반으로 돌아오니 죽음의 칼날은 저를 향하여 한발자국씩 다가오고,

    원망과 분노, 후회의 넝쿨들이 저를 휘감기 시작하니

    숨조차 쉬기 어려워졌습니다.

    이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지만

    저를 겨눈 칼날은 지칠 줄 모를 것이고

    저를 휘감은 그 넝쿨들은 저를 놓아줄 것 같지 않습니다.

    ! 주님!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 주님!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모세를 싫어하는 이들은 좋은 기회를 잡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분명한 명분을 가지고 모세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파라오도 모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이집트인을 죽인 것이 탄로가 났다는 것을 알고 미디안 땅으로 달아났습니다. 동족에 대한 사랑은 모세의 모든 안락함과 왕실에서의 위치와 그 밖의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이집트 왕자 모세는 이제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의 대화

    종살이에 지치고 무뎌져서 그렇게 길들여진 사람들!

    어리석은 노예들의 미천한 생각은 우리의 희망을 사라지게 하였네.

    모세가 달아나자 이렇게들 말하네.

    드디어 사라졌다! 드디어 사라졌어!

    같은 히브리인 주제에 누구는 왕실에서 왕자로 살아가고

    누구는 이렇게 강제 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니

    차라리 그가 사라진 것이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하니

    오히려 잘된 일이라네.”

     

    ! 어리석은 사람들아! 어리석은 노예들아!

    무거운 등짐과 온 몸에 감긴 보이지 않는 사슬은

    그대들을 어리석고 옹졸하게 만들고, 한줄기 희망마저도 버리게 만들었구나.

    그리 좋은가? 희망이 사라진 것이,

    그리 좋은가? 등짐 진 그대들의 모습이!

    우리 동족이 이집트의 왕자로 있었기에

    어려울 때마다 살며시 우리를 도왔는데,

    이제 누가 그처럼 우리를 도와준다는 말인가?

    !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모세가 파라오가 되었다면 자연스레 우리도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을 텐데.

    ! 희망이 사라지니 등짐 진 어깨는 더욱더 무거워지기만 하는구나.

    ! 어리석은 사람들아! ! 어리석은 노예들아!

     

    모세는 시나이반도의 동쪽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곳에는 친족 관계에 있는 같은 셈족인 미디안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미디안족은 이 아카바만을 중심으로 살았고, 현재 아카바만은 이집트의 시나이반도와 요르단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나눔 3: 동족에게 배신당한 모세의 마음을 헤아려 봅시다. 혹시 모세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은 없습니까? 또한 모세를 배신한 그 사람들처럼 열정을 가지고 봉사하는 이들이 봉사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적은 없습니까? 방해했다면 왜 그런 마음이 들었고, 왜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졌을까요?

     

    모세는 동족에게서 배반을 당하고 도방자의 길에 들어섭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사십 년 동안 모세는 끊임없이 동족들에게 시달림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동족들에게 배반을 당하시고, 함께 하던 제자에게 배반을 당하시는 것처럼, 모세도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의 일은 누가 알아줘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보답해줘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감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시기와 모욕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결코 멈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기까지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시며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모세도 끊임없는 불평과 불만 속에서도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쁨도 있지만 내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이들 때문에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그들로부터 받은 상처들 때문에 신앙생활을 접고 싶은 마음까지 생길 때도 있습니다. 봉사자들을 끝까지 존경해 주고, 지지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하여 그 상처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주저앉게 된다면 나는 주님을 위한 봉사를 할 수 없게 됩니다. 모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동족과 함께 한 것을 기억하면서, 공동체로부터 상처를 받는다 할지라도 주님을 바라보며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기쁘게 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위한 봉사를 계속 할 수 있게 됩니다. 모세와 함께라면 나 또한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하느님께 기도하고 의탁하며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탈출기는 일상에서 겪게 되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강력한 위로의 말씀을 오늘도 나에게 쏟아부어주고 있습니다.

     

     

  3. guest 님의 말:

    2.4.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보고 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픔을 간직하고 아카바로 도망쳐 온 모세를 지켜주셨고, 은총으로 치유하시며 성장시키고 성숙시켰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도록 은총을 주셨습니다. 만일 도망자로서의 자신의 모습과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신의 처지만을 바라보았다면 절망 속에서 포기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르우엘을 통해서 모세가 미디안 땅에 정착하도록 이끌어 주셨고, 치포라를 통해 위로받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이제 모세는 미디안 땅에서 자신이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섭리대로 출애굽의 영도자로서의 준비를 차근차근 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르우엘과의 만남

    모세는 파라오를 피하여 시나이반도의 아카바만까지 도망을 쳤습니다. 그렇게 도망치다가 어떤 우물가에서 운명의 인연을 만나게 됩니다. 미디안의 사제에게는 딸이 일곱 있었는데 그녀들이 우물에 와서 자신들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려 하였습니다. 그때 목자들이 와서 그녀들을 쫓아냈습니다. 이런 불의한 상황을 바라본 모세는 목자들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힘없는 처녀들을 도와주었고, 그녀들의 양떼에게 물을 먹여 주었습니다. 딸들이 집에 평소보다 일찍 돌아오자 아버지는 그 이유를 물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르우엘은 딸들에게 모세를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그가 어디 있느냐? 어째서 그 사람을 내버려 두었느냐? 그를 불러다 음식을 대접하여라.”(탈출2,20)

     

    인연은 지금 이 순간 헤어졌다 하여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와의 인연도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신 것이기에 당연히 다시 만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르우엘의 딸들은 모세에게 감사했지만 모세에게 감사를 표현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녀들의 마음을 알고 계신 하느님께서는 르우엘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모세를 불러다 음식을 대접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르우엘은 잘 생기고 건장한 모세를 보자 그를 붙들었습니다. 르우엘은 아들이 없었으니 모세가 자신들과 함께 머물러 주기만 한다면 모세로부터 많은 도움과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실 모세도 특별히 갈 곳이 없었고, 선택의 폭이 넓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이것 또한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모세는 르우엘의 청을 받아들여 함께 살기로 하였습니다. 르우엘은 자기 딸 치포라를 모세에게 아내로 주었습니다.

     

    모세가 르우엘을 만나고, 치포라를 아내로 얻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모세를 안전한 곳에 보호하시면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세의 장인 르우엘은 미디안의 사제였습니다. 이제 모세는 어머니로부터 배운 신앙을 미디안의 사제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심화시키는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모세를 이끌고 계십니다. 모세는 지금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 삶은 그 누구보다도 힘들고 지쳐 있지만, 지금 이 순간도 하느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이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을 우연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하느님의 이끄심과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 주도적으로 살아갈 때, 힘들고 지치더라도 힘을 내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치포라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모세

    모세는 르우엘의 딸 치포라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도망자인 모세를 치포라가 받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모세는 장남이 태어났을 때, “내가 낯선 땅에서 이방인이 되었구나.” 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방인)이라고 지었습니다. 게르솜(이방인)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모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지금 모세는 미디안 땅에서 아내를 얻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아직 자기 자신은 이 부족에 속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에는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결코 동족들을 구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엘리에제르(하느님은 구원이시다)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모세는 장인의 양을 치고 있지만 동족들의 불행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동족들의 배신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둘째 아들이 태어나면서 모세는 이제 동족을 노예살이에서 구하려는 생각은 접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모세는 못하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족들의 구원을 생각하는 것을 통해 모세가 동족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치유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그렇게 치유해 주셨던 것입니다.

     

    모세의 변화

    미디안족과 긴 시간을 사는 동안 모세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모세가 미디안 땅에 살면서 이집트의 종교와 관습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났고, 장인인 미디안의 사제를 통해서 하느님을 알게 되고, 신앙이 심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홀로 고독하게 머물며 이집트에서 배운 모든 학문들을 심화시키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 백성의 규정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동족으로부터 받은 배반의 상처에서 벗어났습니다. 모세는 상처의 치유를 통해서 동족들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동족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모세가 양들을 치며 돌아다니는 아카바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모세는 양을 치면서 이 지역을 거의 완벽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영도자로서 완벽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웅을 만드시어 당신 구원 역사를 펼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불완전한 인간의 모든 것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완전한 구원 역사를 펼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시련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인간의 모든 선택을 존중해 주시고, 그 시련 속에서도 함께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하시며,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성장시키고 성숙시키셨습니다.

    나눔 4: 이집트 왕자에서 미디안 땅의 목동으로 신분이 변한 모세, 그 낯선 땅에서 양을 치며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모세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들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느님 백성은 자존감이 높아야 합니다. 자존감이 높아야 시련 속에서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하며 계속해서 자신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이들은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느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포기하기 보다는 계속해서 그 자리에 머물며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모세에게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누구에게나 상처가 아물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고독 속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그 고독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 상처가 치유가 됩니다. 모세처럼 나 또한 많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모세는 고독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상처를 치유했습니다. 완전한 치유는 하느님께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 나 또한 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셨고, 치유해 주셨듯이, 나에게도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 나를 온전히 보여드리며 의탁할 때, 하느님께서는 나의 모든 아픔을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아카바의 양치기

    뜨거운 태양 아래 뻘겋게 불타고 있는 바위와 모래로 뒤덮인 끝없는 광야,

    끊임없는 양들의 울음소리와 딸랑거리는 방울소리.

    신기루이기를 바라고 또 바랬지만

    텁수룩한 내 모습과 손에 들려있는 지팡이는

    내가 누구인지를 늘 확인시켜 주고 있다네.

    내가 해야 할 일은 풀을 찾아 양들을 이끌고,

    물을 찾아 양들에게 먹이며,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내 양들을 지켜 내는 것.

    그것 뿐.

    양들이 가면 나도 가고, 내가 가면 양들이 따라오고…,

     

    넘쳐나던 나일강의 풍요로움은 잊은지 오래되었고,

    신전축제를 지내며 즐거워하던 기억도 사라져 버렸다네.

    해가 지면 내려앉는 저 어둠은

    얄밉게도 가슴깊이 내려앉은 생각들을 떠오르게 하고,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들은 옛 생각의 조각들을 비추어 나를 괴롭히네.

    하늘 향해 쏘아 올려 그 넝쿨들을 태워 버리고 싶어도

    하늘의 별들은 더욱 선명하게 그 조각들을 비추고 있네.

     

    후회한들 무엇하리오.

    기억한들 무엇하리오.

    낯선 땅에 이방인이 되어 게르솜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나이거늘.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저 양치기일 뿐이거늘.

    생각을 접고 잠을 청하려 달빛과 별빛을 피해 천막 안으로 들어오면

    차가운 모래 바람은 밤새도록 천막을 두드리며 내 마음을 흔들어 놓고

    아침이 되면 천막 앞에 모래를 한가득 쌓아놓고 말없이 사라지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가련한 양치기는

    쌓인 모래 훌훌 털어 버리고 다시 하루를 시작하려 하는데,

    양들은 다가와 말을 건네며 어서 네 일을 하라재촉을 하네.

    아카바의 양치기인 나에게…,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부르셔서 당신의 일을 맡기실 때, 그가 단순히 생각만 바뀌어서 그 일을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가 온 마음이 바뀌어서 하느님의 도구로써 그 일을 하기를 바라십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온전히 바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고통도 허락하시고, 기쁨도 허락하십니다. 또한 인간은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모세는 모르고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시간에 은총을 담아서 함께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때가 되면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해 모세를 부르실 것입니다.

     

     

  4. guest 님의 말:

    2.5.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생각하시다(탈출2,23-25)

    이스라엘 자손들은 계속해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마지막 희망인 하느님의 도우심만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었고, 고역에 짓눌려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소리는 하느님께 올라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신음 소리는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소리이며, 이제 하느님만이 이 노예살이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수 있음을 고백하는 탄식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탄원하며 기도하였으니 하느님께서는 직접 개입하셔서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당신 백성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그 계약을 이루어 주시고, 당신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 가실 것입니다.

     

    나눔 5: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타성에 젖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닙니다. 나 또한 오래되어 굳어진 버릇이 있습니다. 좋은 것을 몰라보고 엉뚱한 것에 집착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의 신앙생활은 어떠할까요?

     

    고된 노예살이를 통해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서, 나는 힘들고 지칠 때 누구를 찾고 있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주님께 매달리며 어려움을 극복하고 주님의 일을 계속해서 해 나가야 하는데, 오히려 주님을 원망하며 주님께로부터 멀어지기도 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히브리인들의 구원을 통해 하느님께 의탁하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탈출기는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힘을 주시고, 희망을 갖게 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인 나는 언제나 힘을 내야 합니다. 희망의 끈을 언제나 꼭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5. guest 님의 말:

    2.6. 하느님께서 불타는 떨기 속에 나타나시다(탈출3,1-6)

    모세는 이트로의 양을 치는 목자로서 살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가축 떼를 이끌고 광야에서 풀밭을 찾아다니다가 하느님의 산으로 갔습니다. 이 산은 예로부터 거룩한 곳으로 여겨 왔기 때문에 하느님의 산이라고 불렸고, 이 산에서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하느님께서는 불타는 떨기나무로 모세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모세가 주님 앞으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보니 떨기가 불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불꽃이 이글거리는데도 타지 않는 떨기라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설명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저 떨기가 왜 타 버리지 않을까?”(탈출3,3)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모세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모세를 당신 앞으로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불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형태중의 하나입니다.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맺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불 속에 내려오셨습니다.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들과 카르멜 산에서 대결할 때에도 주님은 불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불꽃이 솟아오르지만 떨기가 타지 않는 것은 그 불이 살아 있는 사랑의 불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불은 가까이에 있는 것을 태워 버리기에 가까이 접근할 수 없습니다. 또한 금과 은은 불을 통해서 순수함을 얻듯이 불은 불순한 것을 태워 순수하게도 하지만 불순한 모든 것을 태워 버리기에 심판과 처벌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서 모세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신발을 벗으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불타는 떨기나무의 이상한 현상을 통해서 모세의 호기심을 자극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세가 그 이상한 현상을 보러 오는 것을 보시고, 불타는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탈출3,4)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두 번 거듭하여 부르시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명을 부여하시기 위함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이 백세 때에 겨우 얻은 아들 이사악을 바치라는 명령으로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에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세22,11)하고 두 번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오롯하게 순명하였고, 아브라함의 오롯한 순명을 기쁘게 받아들이신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임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을 부르실 때에도 사무엘아, 사무엘아”(1사무3,10)하고 두 번 부르셨습니다. 마지막 판관인 사무엘은 사울과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중요한 임무를 맡기려 하실 때, 그 이름을 두 번 연거푸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두 번 부르시며 중요한 일을 베드로와 바오로에게 맡기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거듭하여 부르시자 즉시 응답을 하였습니다. 모세가 ,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3,5).

     

    신을 벗는다는 것은 예의를 갖춘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른들 앞에 가면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고, 모자를 벗는 것이 예의인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신을 벗는 다는 것은 겸손과 신뢰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인 앞에 신을 벗고 맨발로 서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는 행위요, 자신을 낮추는 행위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한 것은 있는 그대로 하느님 앞에 나서라.”라는 것이요, 하느님 앞에서 예의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이라면 당연히 더 큰 예의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반드시 예의를 지켜야 갖추어야 합니다.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손과 발을 겸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손과 발이 겸손해 질 때 마음도 겸손해지고, 더욱 경건하게 주님을 향하게 됩니다. 예전에 성당 바닥이 마루일 때는 성당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마루로 된 성당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편한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신발을 벗으면서 내가 지금 성당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성당에서 살다가 일반적인 성당에 가면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성당에 신발을 신고 들어왔을까?” 잠시 후, “아하! 이곳은 마루가 아니지.”하며 안도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성당을 가든 하느님의 집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으로 나아갈 때는 모세가 신발을 벗은 것처럼 그렇게 아무런 꾸밈도 없이 있는 그대로 하느님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 무엇에 의지하지 말고, 그 무엇을 내세우지도 말고, 겸손하게 하느님 앞에 나서야 합니다. 마음뿐만 아니라 몸가짐도 누가 보더라도 겸손한 모습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3,6)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시며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모세를 부르신 분은 바로 조상들의 하느님이십니다. 모세는 하느님 뵙기가 너무나 두려워 얼굴을 가렸습니다. 부족한 인간이 하느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당당해 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6. guest 님의 말:

    2.7. 모세가 소명을 받다(탈출3,7-12)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모세에게 당신의 계획을 말씀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9-10)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는 깜짝 놀랐습니다. 보잘 것 없는 양치기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이집트의 왕자였지만 지금은 그저 도망자요, 양치기에 불과한 사람이 어떻게 파라오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모세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더 잘 알고 계셨고, 지금까지 모세를 이끌고 계셨습니다. 출애굽은 모세가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구원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냈다면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모세를 믿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면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눔 6: 하느님께서는 구원자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당신 백성을 종살이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종살이에서 자유로, 죽음에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시는 분이 바로 구원자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당신 구원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셨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는 이렇게 아룁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탈출 3.11)

     

    모세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자신은 그럴 만한 능력이 없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하느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동족에게 버림받고, 파라오에게 쫓긴 모세는 긴 시간 동안 낯선 땅에서 양을 치며 이방인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미디안 땅에서의 삶은 모세를 많이 변화시켰습니다. 모세는 결코 옛날을 회상하며 과거에 머물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는 사람이며,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목자는 양떼를 안전한 길로 이끌어야 하기에 늘 깊이 생각하고 즉흥적이거나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목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모세의 모습도 그렇게 변화되었기에 모세는 겸손하게 자신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뒤로 물러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잊고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집트 왕실에서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 살아가며 광야를 이해하고 광야에서의 삶을 살아왔던 사람, 하느님께 선택받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모세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사명을 부여하시는 분이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일을 맡기시기 위해 한 처음부터 모세를 이끌고 계셨습니다. 모세는 지금 이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은 모세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확실하게 힘을 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3,12)

     

    아무리 두려운 곳이라 할지라도 아이는 아버지와 함께라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불가능해 보여도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와 함께 해 주시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모세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2.8.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계시하시다(탈출3,13-15)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말씀하시자 모세는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탈출3,13)라고 하느님께 아뢰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이름을 알려주기를 거부하십니다. 그러나 모세가 백성의 인정을 받기가 쉽지 않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십니다.

     

    나는 있는 나다.”(탈출3,14)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라는 당신의 이름,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이름을 계시하시고 나서 모세에게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탈출 3,14)라고 말씀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당신을 드러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탈출3,15)

     

    모세는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되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견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제부터 도망자나 양치기의 삶을 접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시작은 이집트로 돌아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당신 이름을 계시하신 하느님께서는 모세가 이집트로 돌아가서 이스라엘 원로들을 모아놓고 해야 할 말씀들을 알려 주십니다.(탈출3,16-22)

     

    첫째,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느님께서 이제 이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 가시려 하신다는 것.

    둘째, 광야로 나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파라오에게 말하고, 여러 가지 이적을 일으켜서 파라오가 내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

    셋째, 떠날 때는 이집트인들로부터 재물을 받아서 떠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것.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모세가 해야 할 사명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수록 모세는 걱정이 앞섰을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기쁜 소식을 전했을 때, 과연 이스라엘 백성이 받아들이겠는가?”하는 문제입니다. 또한 모세는 도망자 신세였기에 파라오 앞에 나설 자신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할지라도 파라오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나눔 7: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실 계획을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모세를 부르셨을까요? 내가 만일 모세였다면 하느님께 어떻게 말씀드렸을까요?

     

    2.9.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능력을 주시다(탈출4,1-17)

    모세는 자신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파라오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파라오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살아온 히브리 동족들, 더 나아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파라오와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도와준 것을 생각하지 않고 간섭하는 것을 거부하며 그것을 이집트인들에게 알린 동족들이 과연 모세의 말을 들어줄 것인지에 대해 모세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매달리며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제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주님께서 당신에게 나타나셨을 리가 없소.’ 하면 어찌합니까?”(탈출 4,1)

     

    하느님께서는 모세가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고 다시 뱀이 지팡이로 변하는 표징과 손이 나병에 걸려 하얗게 되었다가 다시 제 살로 되돌아오는 표징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나일강 물을 피로 물들일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지팡이 표징

    하느님께서는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탈출4,2) 라고 물으십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의 지팡이를 몰라서 물어보시는 것이 아니라 지팡이를 통해서 모세가 확신을 갖도록 지팡이를 변화시켜 주시고자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지팡이는 그저 길을 가는데 쓰이는 도구이자 양 떼를 이끌기 위한 도구입니다. 이제까지의 모세의 지팡이는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지팡이를 이제부터 하느님의 백성을 이끄는데 필요한 것으로 바꿔주시려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던지니 그 지팡이는 놀랍게도 뱀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쥐고 있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는 순간, 모세는 놀라서 뒤로 물러났습니다. 늘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가 갑자기 뱀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어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아라.”(탈출4,4) 하시자 모세는 손을 내밀어 꼬리를 붙잡았습니다. 그 순간 뱀은 도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뱀으로 변한 지팡이를 잡기를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뱀은 그 자체로 두렵기도 하지만 파라오의 왕관에도 뱀이 달려있었기에 그 뱀을 보고 파라오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과 파라오가 아니라 바로 한 분이신 하느님, 지금 모세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는 하느님이시어야 합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지팡이를 뱀으로, 뱀을 지팡이로 만드시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는 그들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인 주님이 너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그들이 믿게 하려는 것이다.”(탈출4,5)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 기적을 통해서 힘과 용기와 확신을 주셨습니다. 지팡이는 힘과 권력과 권위를 상징합니다. 지금은 힘있는 지팡이를 들고 있는 이는 파라오입니다. 파라오는 자신이 생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신으로 자처하며, 그 지팡이로 히브리인들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큰 힘을 지닌 지팡이를 들고 있는 이는 모세입니다.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았을 때 지팡이로 변했다는 것은 더 이상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없다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받은 모세는 이제 파라오 앞에서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도 당당해져야 합니다. 파라오는 모세에게 무릎을 꿇게 될 것이고, 모세는 양을 치던 그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며 종살이하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손이 나병에 걸렸다 깨끗해지는 표징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에 이어서 두 번째 표징을 보여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네 손을 품에 넣어 보아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그의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보니, 그 손은 나병에 걸려 하얀 눈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어 보아라.”하고 말씀하시자, 모세가 손을 다시 품에 넣었습니다. 그런 다음 품에서 손을 꺼내 보니, 제 살로 되돌아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를 믿지 않고 첫 번째 표징이 말하는 것을 듣지 않는다 하더라도, 두 번째 표징이 말하는 것은 믿을 것이다.”(탈출4,8)

     

    모세는 두렵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술은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상대방의 눈을 속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순식간에 멀쩡하던 자신의 손이 나병에 걸리게 된 것은 눈속임이 아니라 실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세를 거역하는 사람들이 장차 그렇게 순식간에 나병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 보니, 제 살로 되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모세에게 보여 주셨으니 모세가 먼저 믿고 받아들이며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모세가 확신을 가져야 파라오도 하느님의 전능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도 확신을 가지고 약속의 땅으로 향할 수 있게 됩니다. 모세는 더 이상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하느님 백성을 이끌어야 합니다.

     

    세 번째 표징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위의 두 증거를 보고도 믿지 않을 경우에는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이 두 표징도 믿지 않고 너의 말을 듣지 않거든, 나일강에서 물을 퍼다가 마른 땅에 부어라. 그러면 나일강에서 퍼 온 물이 마른 땅에서 피가 될 것이다.”(탈출4,9)

     

    나일강물은 이집트인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생명수입니다. 생명의 강물인 나일강물이 피로 변한다는 것은 이집트인들에는 더할 수 없는 큰 재앙이 될 것입니다. 그런 재앙 앞에서 파라오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론이 모세의 대변인이 되다(탈출4,10-17)

    모세는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고, 손이 나병에 걸렸다가 깨끗해지는 것과 나일강물이 피로 변하게 될 것임까지 하느님께로부터 약속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다시 한번 변명을 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하였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말씀하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탈출4,10)

     

    모세가 다시 한번 변명을 하자 주님께서는 누가 사람에게 입을 주었느냐? 누가 사람을 말 못하게 하고 귀먹게 하며, 보게도 하고 눈멀게도 하느냐? 나 주님이 아니냐? 그러니 이제 가거라. 네가 말할 때 내가 너를 도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겠다.”(탈출4,11-12)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또 거절하려고 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주님께서 보내실 만한 이를 보내십시오.”(탈출4,13)

     

    계속되는 모세의 변명을 들으면서 과연 모세가 그렇게도 말주변이 없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집트에서 왕자로서 다양한 교육을 받은 모세가 말주변이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저는 말을 못합니다.”

    가서 말하라말씀하시지만 말을 잊어버려서 말을 못합니다.

    가서 말해도 받아들여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저는 말을 못하겠습니다.

    자신을 신으로 생각하는 파라오가

    도망자요 양치기인 저의 말을 들어줄 리 없고,

    도와주어도 감사하지 않았던 동족들이

    긴 시간 후에 만난 저를 인정해 줄 리 없기 때문입니다.

     

    가서 말하라말씀하시지만 저는 입이 무뎌서 말을 할 줄 모릅니다.

    그저 장인의 양떼나 돌보고 있는 목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긴 시간 동안 양치기 노릇을 했더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긴 시간 동안 많은 말을 하지 않다보니 말을 할 필요성도 잊어버렸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했고,

    더위에 지쳐서 말할 힘도 없었습니다.

    해가 지면 불어오는 모래바람은 눈과 입을 닫게 했습니다.

    눈을 뜨면 모래가 눈으로 들어갔고,

    입을 열면 모래가 입으로 들어갔습니다.

    제 삶은 말하는 삶이 아니라 그저 양들과 함께 걷고,

    돌보고, 찾고, 쫓는 삶이었습니다.

    그렇게 제 혀는 무뎌지고, 제 입은 말을 잃었습니다.

    이런 저는 부족하오니, 부디 저보다 더 나은 사람, 말 잘 하는 사람을 보내십시오.

    저보다 나은 사람을 보내십시오……,

     

     

    모세는 끝까지 핑계를 대며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절하고 싶어 했습니다. 모세가 마지막으로 댄 핑계는 말을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미디안 땅에서 목자로서 살아가는 모세는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을 이집트 왕실에서 배운 모세와 미디안 땅에 살고 있는 이들과의 대화 수준도 맞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화의 수준이 맞지 않을 때는 들어주고 웃어주며 말을 자제하게 됩니다. 말을 해도 못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마지막까지 핑계를 대며 부르심을 거절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화를 내시며 이렇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말씀하십니다.

     

    레위인인 너의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나는 그가 말을 잘하는 줄 안다. 그가 지금 너를 만나러 오고 있다. 그는 너를 보면 마음으로 기뻐할 것이다. 너는 그에게 일러, 그가 해야 할 말을 그 입에 담아 주어라. 네가 말할 때나 그가 말할 때, 내가 너희를 도와주겠다. 너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가르쳐 주겠다.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는 너의 입이 되고, 너는 그의 하느님이 되어 줄 것이다.(탈출4,14-16)

     

    하느님께서는 모세가 이렇게 변명할 줄을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결정하셨으면 인간은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힘과 권위를 주시면서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지팡이를 손에 잡아라. 너는 그것으로 표징들을 일으킬 것이다.”(탈출4,17)

     

    이제 더 이상 변명을 할 수 없게 된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을 예언자라고 합니다. 예언자는 자신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담아주신 말씀을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론은 모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전하게 될 것이고, 아론에게 있어서 모세의 말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이고, 하느님께서 담아주신 말씀입니다. 아론이 하는 말은 결국 모세가 하고자 하는 말이니 아론은 모세의 입이 되는 것이고, 아론에게 모세는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아론은 모세를 통해서 하느님을 뵙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너의 입이 되고, 너는 그의 하느님이 되어 줄 것이다.”(탈출4,16)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당신 구원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의탁한 것처럼 나 또한 주님께 의탁하며 모든 것은 주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말하는 이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저 하느님의 도구라는 것을 명심하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21,13-15)

     

    하느님의 자녀들은 굳게 믿어야 합니다.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끔은 봉사의 기회가 부여될 때 거절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모세가 주님께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주님께서 보내실 만한 이를 보내십시오.”(탈출4,13) 라고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못합니다.”하고 겸손하게 거절합니다. 그러나 겸손은 지나치면 자기 비하가 되고, 봉사의 기회를 계속해서 거부하면 그것 또한 하느님께 불경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봉사를 권유하는 사람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니, 계속 거부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됩니다. 할 수 있는 능력이 되니까 부탁을 하는 것이니 ! 부족하지만 해 보겠습니다.”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채워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7. guest 님의 말:

    3. 정리해 봅시다.

    정리해 봅시다.”는 이 과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며, 말씀의 핵심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기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말씀으로 묵상기도를 하기 위한 중요한 재료를 만드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탈출기 11절부터 417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중에서 내 마음에 깊이 와 닿는 말씀은 어떤 것이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모세를 이끄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서 묵상해 보면서 나를 이끄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기억해 봅시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생애를 어떻게 이끌어 주고 계십니까?

     

    어떻게 하면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일을 성실하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나와 내 옆에 있는 이들이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거나 실망하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변함없이 할 수 있도록 힘을 낼 수 있을까요?

     

     

    4. 실천사항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깊이 있게 받아들였다면 그 말씀이 나를 움직이게 되고, 그 말씀을 실천하려는 열정이 생겨납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무엇을 행동으로 옮기고 싶은 열정이 솟아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실까요? 말씀을 삶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세 가지 정도를 정해 봅시다. 이것은 삶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정해보는 것이니 구체적인 것이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 이것을 하겠다.”고 정해 봅시다. 또한 다음번 모임 때, 이 실천사항을 어떻게 실천했는지를 서로 이야기한다면 기쁨은 더욱 커지게 될 것입니다.

     

    5. 말씀으로 기도하기

    말씀으로 기도하기는 이 과에서 나에게 깊이 있게 와 닿은 말씀을 가지고 이 장의 전체를 바라보며 주님께 감사하고, 그 말씀에 비추어 나의 모습을 돌아보며 자비와 은총을 청하고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이 기도를 성체 앞에서 바치는 것은 중요합니다. 말씀을 머리로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말씀에 마음이 움직였다면 주님의 성체 앞으로 나아가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감사드리며, 내가 정한 실천사항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할 것인지를 주님과 이야기하고, 주님의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가슴에 와 닿은 말씀이 가슴에 자리 잡고, 가슴에 자리 잡은 말씀이 나를 이끌 수 있도록 자주 주님의 성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머리로 받아들인 것을 가슴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고, 말이 아니라 삶으로 그 말씀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성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묵상기도 없는 성경공부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공부는 묵상기도로 이어지고, 묵상기도는 내 삶을 주님과 일치시키는 중요한 은총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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