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의 몽고 전래

 

1. 한국의 천주교 접촉


1.1 몽고를 통한 천주교 접촉 가능성


1.1.1 천주교의 몽고 전래


  몽고족은 1194년에 테무진(1162-1227)이라는 부족장이 등장하면서 세계 역사 속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기 시작하였다. 테무진은 주위의 부락들을 정복하고 몽고 민족의 통일 사업을 완수하여 1206년에 몽고 부족의 최고 의결 기관인 ‘쿠릴타이’에서 민족 통치자인 위대한 ‘칸’으로 선출되었고 ‘징기스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징기스칸과 그의 계승자들은 우수한 기병대와 출중한 전략을 통해서 세력 팽창에 나서 1250년경에 이르러서는 유럽과 아시아를 혼합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1271년, 몽고 제국의 5대 황제인 쿠빌라이(1259-1297)는 국호를 ‘원’으로 고치고 원 제국의 세조가 되었다.


  몽고(원) 제국이 영토를 확장하던 시대에 유럽은 탁발 수도회(특히 프란치스꼬회와 도미니꼬회)들이 활발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유럽의 여러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몽고군이 남부 러시아를 거쳐 폴란드, 헝가리, 다뉴브강 계곡까지 점령하고 서부 유럽의 침공을 준비하자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몽고군이 국내 사정(황제의 사망)으로 남부 러시아까지 철수하자 유럽 세계는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다.


  유럽의 그리스도교계 지도자들은 후에 그들이 십자군 운동을 통해서 투쟁하고 있는 사라센 제국의 회교도들이 몽고군의 적군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고는 오히려 몽고군과 군사동맹을 맺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몽고군은 제국의 영토 확장에 장애가 되며 국가 안보를 위협하고 있는 인근 회교도의 저항 세력을 정벌하기 위해서 유럽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군사적 도움을 갈망하고 있었다. 몽고족의 대제국 건설은 아시아와 유럽의 두 대륙을 동서로 직접 연결하는 교통로를 열어 놓았다. 그뿐 아니라 라마교가 몽고 황실의 종교였지만 몽고의 통치자들은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의 태도를 보였고 토지 소유권과 면세 특권을 부여하는 종교보호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천주교가 유럽에서 몽고로 전래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 1240년에 이르러 몽고군이 중국 여행의 안전을 보장하였다. 그러자 그리스도교계의 국가 지도자들과 역대 교황들은 정치적 목적(외교 교섭)과 종교적 동기(복음 전파)로 여러 차례에 걸쳐 수많은 수도자들과 상인들을 외교 사절 또는 선교 사절로 몽고 황제에게 파견하였다.


  아울러 몽고의 지도자들도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에 사신들을 보내어 선교사 또는 군원을 요청하였다. 1245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4세(1243-1254)는 리옹 공의회(1245)의 결정에 따라 이딸리아의 프얀 델까르피네 태생인 지오반니(지오반니 까르피니 : 1180-1252) 프란치스꼬 수도회 신부를 몽고 황제에게 파견하였다. 이 사절단의 목적은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가 몽고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고 몽고군의 침입과 이에 따른 잔인한 인간 살육 행위를 항의, 방지하는 동시에 점령 지역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보호하며 평화적 우호관계의 체결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려는 데에 있었다.


  이러한 동기에 의해서 1253년에 프랑스 국왕 루이 9세(1215-1291)가 플랑드르 지방(지금의 벨기에 북부 지역) 출신인 빌럼 반 뤼스브룩(1215-1291) 프란치스꼬회 수사 신부를 파견하였다.


  지오반니와 빌럼은 교황의 친서를 몽고 황제에게 전달하고 귀국하여 황제의 답신과 함께 그들의 여행 보고서를 교황에게 제출하였다. 두 사절의 여행담은 유럽 사람들에게 동양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동방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극동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특히 유명한 여행가인 마르코 폴로(1254-1324)의 부친인 니콜로 폴로와 삼촌인 마테오 폴로는 상업 관계로 1264년에 몽고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상도)에 도착하여 황제 쿠빌라이를 알현하였다. 두 탐험 상인은 황제의 특사로 다시 교황에게 파견되었는데, 쿠빌라이는 그의 친서에서 몽고 학자들과 종교문제를 토의할 100명의 그리스도교 지식인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1271-1276)는 그 답례로 1271년에 마르코 폴로 일행(그의 부친과 삼촌)을 파견하였다. 이때에 교황은 100명의 지식인 대신에 도미니꼬 수도회의 학자 신부 2명에게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어 동행케 하였으나 수도자들은 도중에 돌아오고 폴로 가족만 몽고 황궁에 도착하였다.


  1278년, 마르코 폴로가 상도에서 관직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이란 지역의 몽고 통치자가 네스토리오 교회의 고위 성직자인 라반 바르 사우마(1200-1294)를 몽고와 그리스도교 국가의 군사동맹을 교섭하는 특사로 파견하였다. 사우마는 로마에 와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성지를 순례하고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면서 가톨릭을 모(母) 교회로 받아들이면서 교황의 강복을 요청하였다. 이로써 페르시아 지역의 네스토리오 교회는 로마 교회에 합치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유럽 국가의 지도자들이 몽고와 동맹을 맺는 데에 무관심하여 교회일치와 복음 전파의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희망은 20여 년이 지난 후에 성취될 수 있었는데, 1289년에 니콜라오 4세(1288-1292)는 이딸리아의 몬테 꼬르비노 태생인 지오반니(1180-1252)가 인솔하는 선교 사절단을 보내 원 제국의 복음화에 성공하였다.


  지오반니는 1294년에 제국의 수도인 다이두(대도 : 북경)에 도착하여 황제 성종(1294-1307)에게 교황 친서를 전달하고 황실의 도움으로 1300년에는 성당을 짓고 6천여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새로운 신자 중에는 황족도 끼어 있었다. 마침내 1307년에는 원 제국의 천주교가 크게 발전하여 지오반니는 총대주교로 임명되었고 다이두 대교구가 설정되었다.


  이후로 많은 주교들과 수도자들이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수행하였다. 지오반니가 사망한 후에 몽고 황제는 대주교의 계승자로 추기경급의 고위 성직자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원 제국의 멸망과 함께 천주교는 중국 대륙에서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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