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랑 죠셉 마리 앵베르 주교

 

로랑 죠셉 마리 앵베르 주교


  1796년 4월 15일에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액스 앙 쁘로방스 지방의 까브리애 본당에 속하는 ‘깔라’라는 시골에서 루이 앵베르와 스잔 플로뺑의 아들로 태어난 로랑은 집안이 가난하여 어릴 때에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앵베르 소년은 동네 부인에게 글의 읽고 쓰기를 배웠고, 후에 까브리애 본당의 아르망 주임신부의 눈에 뜨여 사제관에서 불어 문법을 공부하게 되었다.


  아르망 신부는 소년을 그리스도 은수 수사가 액스 앙 쁘로방스 교구의 도움을 받아 운영하는 성 요아킴 기숙학교에 보냈다. 소년은 주임 신부의 주선으로 학비와 기숙사비는 면제를 받았으나 옷과 일요품은 자비로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가정은 가난하였고 부친은 연로하여 일을 할 수 없었다. 앵베르는 수사들과 함께 묵주를 만들어 시장애 보내 매달 15프랑의 수입을 얻어 학용품과 필요한 물건을 사고 나머지는 아버지에게 보냈다.


  그는 일하는 시간을 빼놓고는 공부와 신심생활로 착실하게 보냈다. 마침내 인문학부를 마치고 대학(문학부) 입학 자격을 얻은 후에 액스 앙 쁘로방스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로랑은 신학교 생활을 하는 동안 선교사의 꿈을 꾸었다. 그는 신학 공부가 끝났지만 부제품을 받을 법적 나이가 안되어 어느 가정에서 어린이들의 공부를 지도하였다. 이후 앵베르는 트라피스트 봉쇄 수도원에서 피정을 하는 동안 원장과 영적 대화를 통해 그의 선교사의 성소를 확인하였다. 원장의 주선으로 그는 1818년 10월 8일에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에 들어가 다음해 3월 27일에 부제품을 받고 12월 18일에 사제가 되어 중국 사천 지방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20년 5월 1일에 앵베르 신부는 보르도 항구를 출범하여 다음해 3월 19일 삐낭에 도착하여 몇 달 동안 신학교에서 라틴어와 신학을 강의하고, 12월 2일 영국 배에 승선하여 1822년 2월 10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당시 사천으로 직접 들어가는 길이 막혀 앵베르 신부는 코친차이나(베트남)를 거쳐 1825년 3월에 사천성에 도착하여 12년 동안의 선교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1833년에 그는 브뤼기애르 주교와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 전교회의 지부장인 르그레죠아 신부에게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다. 1835년 1월 12일에는 모방 신부와 샤스땅 신부가 르그레죠아 신부에게 브뤼기애르 주교의 유고 지 계승자로 앵베르 신부를 추천하였고, 르그레죠아 신부는 이를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 교장 신부를 통해서 포교성성에 상신하여 승인받았다.


  1836년 5월에 앵베르 신부는 조선교구장의 보좌 주교로 선출되었고, 브뤼기애르 주교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1837년 4월에 제2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1837년 5월 14일(성신 강림 대축일)에 사천교구장인 폰타나 주교의 주례로 주교품을 받고 8월 17일에 사천을 떠나 몽고 서만자를 거쳐, 12월 16일 국경 지방에 도착했다.


  1837년 12월 18일에 앵베르 주교는 조선 교우들의 안내를 받아 국경을 넘어 12월 30일에 한양에 도착하여 정 하상(바오로) 집에서 모방 신부를 만나고 그와 함께 지냈다. 주교는 석 달 동안에 조선말을 배우고 예수 부활 대축일 준비로 3백여 명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성체를 배령하도록 하였다. 주교가 도착한 후로 1838년 11월까지 1,994명이 세례를 받았고, 교우수는 약 9천 명에 이르렀다.


  앵베르 주교는 매일 새벽 2시 반에 일어나 3시에 교우들과 함께 아침 기도를 드리고 3시 반에 성세와 견진을 거행하고 미사성제를 봉헌하였다. 곧이어 오전 중에 20~30명의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나서야 아침을 겸한 점심으로, 맛도 영양 가치도 없는 소량의 식사를 하였다. 따라서 배고픔은 그에게 닥치는 고통 하나였다. 식사 후에 잠시 쉬고 밤 9시에 흙바닥의 온돌 위에 깔린 돗자리에서 잠들기까지 신자들의 죄 고백을 들었다. 그리고 발각의 위험 때문에 한 집에서 이틀 이상 머물지 않고 해가 뜨기 전에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러한 일반적 사목 활동 이외에 앵베르 주교는 일본선교 계획과 신학생 교육에도 관심을 두었다. 이미 1836년 4월 26일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일본의 유구(琉球)를 조선교구장에게 위임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파리 외방 전교회서 브뤼기애르 주교가 조선에 들어가지 못할 경우에 외국인의 왕래가 어느 정도 가능한 유구로 가서 그곳에서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는 제의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앵베르 주교는 조선교구장인 동시에 유구 교회도 책임을 맡게 되어 중국 사천의 회장을 이곳에 파견하였다. 조선에 와서는 샤스땅 신부를 통해서 조선인 회장을 부산포에 있는 일본인들에게 보내어 그들을 입교시키고 잠복기의 일본 교회 사정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또한 앵베르 주교는 한양에 도착하자 즉시 사제직에 적합한 사람, 즉 42세의 정 하상, 32세의 신자 그리고 두 명의 청년들에게 매일 점심 식사 후 두 시간씩 한역 신학서를 갖고서 3년 동안 신학을 강의하여 신품을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기해대박해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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