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끄 오노레 샤스땅 신부

 

쟈끄 오노레 샤스땅 신부


  1803년 10월 7일에 프랑스 남동부 지역에 위치한 디뉴 근처의 ‘마르꾸’라는 작은 농가에서 앙드레 세바스띠앵 샤스땅과 마리안느 루공의 아들로 태어난 쟈끄는 어려서부터 신양생활에 충실하였다. 어린 샤스땅은 마르꾸의 본당 신부로 있다가 중국 선교사로 떠난 오드마르 주교의 영향을 받아 선교사의 꿈을 가졌다.


  샤스땅 소년은 2년 동안 디뉴에서 중학교 교육을 받다가 1820년 앙브룅 중학교로 전학하여 고급 과정과 수사학을 이수하였다. 여기서 그는 성직자가 되려는 마음을 확고하게 다지고 기도 생활에 성실하였으며, 성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전기를 읽고서 이교 백성들의 영적 갈망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점차로 그는 동료들에게 외국 선교에 헌신하겠다는 뜻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1822년에 샤스땅은 디뉴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1년 후에 디뉴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부제가 되었을 때에 교구장 미을리 주교에게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입학 허가를 간청하였다.


  주교는 처음에 감상적 신심의 충동에서 오는 청원이 아닌가 생각하여 거절하였으나 젊은 부제의 꾸준한 간청에 허락을 하였다. 샤스땅은 1826년 12월 23일에 사제서품을 받고 다음해 1월 6일에는 고향에 가서 자신의 계획을 부모에게 알렸다. 처음에는 모정에서 오는 이별의 고통으로 어머니가 극구 반대하였으나, 그것이 하느님의 원의라고 믿어 아들을 교회에 봉헌하고 가정의 행복을 희생하기로 하였다.


  1827년 1월 13일에 샤스땅은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갔다. 3개월 동안의 수련 기간을 마친 샤스땅 신부는 4월 22일에 네 명의 선교사와 함께 보르도 항구를 떠났으나, 배가 파선되어 코친차이나(베트남)에서 9개월 동안 체류하다가, 포르투갈 배로 1828년 7월 19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파리 외방 전교회의 새로운 선교지인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11월 4일에 파리의 신학교 교장 신부에게 조선 선교사로 파견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의 청원은 수락되지 않았고 샤스땅 신부는 말레이지아의 삐낭에 있는 선교사 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사목활동에 관심을 두어 장상에게 중국인의 선교 사업에 종사할 수 있는 허락을 받고 뿌또띠꾸스 본당에서 열성적인 사목자로서 활동하였다.


  샤스땅 신부는 브뤼기애르 주교가 조선의 선교사로 파견된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 포교를 자원하였다. 주교는 입국의 가능성이 확실해질 때에 부르겠다고 약속하였다. 마침내 1833년 5월에 포교성성 극동지부장 움삐에레스 신부의 편지를 받고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움삐에레스 신부는 조선의 입국과 선교의 전망이 밝다는 소문을 듣고 마카오에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 설립을 계획하였다. 이때 샤스땅 신부는 신학교 교장직을 제의받았으나 간절히 사양하였다. 그는 1833년 8월 31일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편지를 가족에게 보냈다. 편지에서 샤스땅 신부는 “성직자는 불쌍한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가정에 대한 애정을 희생하는 용기를 갖고 있어야 하며, 대신 하느님께서 그 가정에 풍성한 은총을 베푸실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1833년 9월에 샤스땅 신부는 마카오를 떠나 복건성에 도착하여 모방 신부를 만났다. 2개월을 모방 신부와 지낸 다음 샤스땅 신부는 남경으로 갔다. 거기서 안내자를 데리고 직예(直隸) 해협을 건너 만주에 상륙하였다. 그는 한 달 동안을 만주 벌판에서 헤매다가 국경 지방에 도착하였으나 조선인 안내 교우를 만나지 못해 북경으로 돌아왔다. 이때, 샤스땅 신부는 마카오로 돌아가든지 산동성(山東省)에서 사목에 종사하라는 북경의 삐레스 주교의 권유로 2년 동안 중국 신자들의 구령에 힘썼다. 아울러 그는 모방 신부에게 조선의 안내 교우를 보내달라고 알렸다. 1836년 말, 마침내 그는 중국으로 돌아온 유 방제 신부를 통해서 모방 신부의 편지를 받고 1836년 12월 25일 국경 지방에 도착하여 3일 후에 조선 교우들을 만났다.


  1837년 1월 1일에 샤스땅 신부 일행은 조선 국경을 무사히 넘었다. 상복 차림에 방갓을 쓰고, 2주간을 걸어 1월 15일에 한양에 도착, 어느 회장 집에 머물렀다. 그는 우선 기초적인 조선어를 배우고 성찰 규식을 외는 데에 힘써, 2개월 후에는 조선말로 신자들의 죄 고백을 들을 수 있었다. 1837년 부활 대축일을 모방 신부와 함께 지낸 샤스땅 신부는 지방 교우촌을 순회하면서 성무를 이행하였다. 그는 모방 신부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신자들과 함께 풀뿌리와 야채를 넣고 끓인 국을 음식으로 대신하고 오막살이집에서 잠을 자는 고통을 받았지만, 30년 동안 고해성사를 보지 못한 이들에게 양심의 평화를 주었을 때에는 온갖 피로와 고통이 사라지는 기쁨을 느꼈다.


  샤스땅 신부는 사목 방문 중에 가난한 신자들을 만나면 갖고 있는 돈을 나누어주었고 감옥에 갇힌 교우들을 돕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모방 신부와 함께 처음으로 교세 조사를 실시하여 6천 명의 신자들을 확인하였다. 또한 두 신부는 1837년 1년 동안 1,237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2,078명 신자들의 죄고백을 들었으며, 1,950명이 성체를 배령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글은 카테고리: 교회사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