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지도자, 정 하상
19.1.1 가정 환경
정 하상(바오로, 1795-1839)은 1795년에 경기도 광주 지방의 마재에서 정 약종(아우구스띠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주 문모(야고보) 신부에게 바오로라는 영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집안은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대표적 순교 가정으로, 바오로의 부친인 정 약종 이외에 어머니 유 소사(체칠리아), 이복형 정 철상(까롤로), 누이 동생 정 정혜(엘리사벳)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치명하였다.
정 철상(1781-1801)은 정 약종의 전처의 아들로 부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신심생활을 익혔다. 그는 저명한 양반 집안 출신답지 않게 명예를 업신여기고 천주 공경과 영혼 구원을 유인한 생활 목표로 삼았다. 1801년, 신유대박해로 아버지 정 약종이 의금부 감옥에 갇혔을 때에 까롤로는 감옥 근처에 머물면서 부친을 돌보며 옥중생활을 위로하였다. 관리들은 이러한 정 철상을 의금부에 불러다가 아버지의 생명을 구하는 길은 주 문모 신부의 피신처를 알려주는 것이라며, 그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 정 약종에게 가혹한 고문을 하며 위협하였으나 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말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2월 26일(음력) 정 약종이 순교하자 정 철상은 체포되어 형조(刑曹)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그는 온갖 고문에도 마음의 동요를 느끼지 않고 순교의 원의만을 드러냈다. 4월 2일(음력)에 다섯 명의 신자들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참수형으로 20여 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유 소사(1760-1839)는 정 약종의 재취로 들어와 남편에게 배운 교리와 신심을 항구하게 지켰다. 그는 남편과 아들 정 철상이 순교한 후에 정 하상과 딸과 함께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그러나 가장(家長)이 구사범으로 처형되었으니 한양의 집과 가산은 몰수되었다. 한 친척의 주선으로 세 자녀와 며느리, 손자(정 철상의 아내와 아들)를 데리고 마재로 돌아온 유 소사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힘겨운 고통을 받았다. 정씨 가문에서는 천주교 때문에 받은 피해로 물질적 도움을 베풀기를 꺼렸고, 오히려 멸시와 조소, 비난과 협박을 가하면서 천주교 신봉을 방해하였다.
유 소사는 이러한 빈궁과 학대로 맏딸, 며느리, 손자를 잃었지만 더욱 신앙생활에 충실하였고, 자녀들의 종교 교육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기해대박해가 일어났을 때에 한 친척이 은신처를 제공할 터이니 피신하라고 권유하였지만 유 소사는 사양하면서 “나는 항상 순교하기를 원하였으니 내 아들 바오로와 함께 순교하고 싶네”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그는 6월 9일에 체포되어 노령에도 불구하고 곤장 2백30대를 맞는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신앙을 지켰다. 당시 국법에는 나이 많은 죄인은 참수형이 금지되었기에 유 소사는 감옥에 몇 달 동안 갇혀 있다가, 옥고로 기진하여 10월 18일(음력)에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선종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79세였다.
정 정혜(1796-1839)는 생활의 어려움으로 어려서부터 길쌈과 바느질을 하면서 오빠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가정의 생계를 이어갔다. 몸가짐이 단정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훌륭한 표양을 보여 많은 외교인들을 입교시킨 정 정혜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하여 동정 서원을 하였다. 서원 후 2년 동안 마귀의 유혹을 받았을 때도 기도와 극기로써 자기의 서원을 끝까지 지켰다. 아울러 그는 외롭고 가난한 이들과 친교를 맺고 그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였으며, 부녀자와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를 받도록 준비시키는 일을 통해서 오빠의 교회 활동을 도왔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관리의 “배교하면 석방시키겠다”는 회유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일곱 차례의 혹독한 고문 속에서 3백20대의 곤장을 맞았으나, 신앙심이 더욱 굳어진 정 정혜는 10월 2일(음력)에 형조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다시 여섯 차례에 걸쳐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그는 옥중에서도 함께 구속된 교우들을 격려하면서 기도로 지냈다. 또한 가난하고 불우한 이들을 위한 자선 사업에 헌신하였던 그는 사형장으로 떠나면서 옥중의 신자들에게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하세요”라고 당부하였다. 정 정혜는 11월 24일(음력)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4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19.1.2 교회 활동
국법에 의하면 국사범의 아들은 처형되어야 했지만, 그의 부친과 이복형이 순교하였을 때에 정 하상은 6세의 어린 나이였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성장하면서 문중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는, 집안에서 천주교 서적을 찾아볼 수도 없었고 집 밖의 교우들과는 접촉할 수도 없었기에 어머니로부터 구전으로 기초적 종교 교육을 받았을 뿐이다. 또 불우한 가정 환경 때문에 한문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였으며, 결혼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정 하상은 오직 동료 신도들의 구령을 도모하며 성직자를 모셔올 계획을 세우는 데에만 몰두하였다.
그는 20세가 되자 더욱 심해지는 문중의 박해로 그의 어머니와 누이 동생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어느 교우집으로 피신하였다. 생활의 어려움을 종교적 극기로 인내하며 자기의 신앙을 심화, 향상시켰다. 동시에 그는 박해로 흩어진 교우들을 모아 지도하고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에게 좀더 깊은 교리 지식과 한문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정 하상은 당시에 출중한 재능과 높은 덕망을 지닌, 함경도 무산 지방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신자 조 동섬(유스띠노)을 찾아가서 교리와 한문을 배우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한양으로 돌아온 정 하상은 젊은 나이에 교회의 새로운 지도자로서, 5년 전에 신 태보(베드로), 권 기인(요한), 이 여진(요한)이 교회 재건 운동의 하나로 시도하다 이루지 못한 성직자 영입 운동을 재개하면서 교회 활동에 나섰다. 그는 하인이라는 미천한 자리를 자원하여 조선 왕국의 북경 파견 사절단 일행에 끼여 여러 차례에 걸쳐 북경을 드나들면서 앞으로 성직자가 입국할 수 있는 경로를 조사하였다.
1816년, 한양의 교우들과 접촉한 정 하상은 성직자 영입 운동을 호소하여 북경 왕래에 필요한 여비를 마련하여 북경으로 떠났다. 그러나 첫 여행에서는 북경교회로부터 성직자 파견을 약속받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는 결코 실망하지 않고 거의 매년 북경을 방문하여 성직자를 간청하였다. 성직자 숙소를 마련하기 위해 한양에 자기 집을 장만하고 어머니와 누이 동생을 마재에서 데리고 왔다. 1823년에 정 하상은 북경 여행 중, 당시 사절단의 역관인 유 진길(아우구스띠노)을 알게 되고 조금 후에는 사절단의 마부로 있던 조 신철(까롤로)을 만나 이들을 영세, 입교시켰다.
이제 두 사람은 정 하상의 성직자 영입 운동에 있어서 절대적 협조자가 되어 좀더 쉽고 안전하게 북경을 왕래하면서 북경 교회와 로마 교황청에 보내는 편지를 쓰고 전달하여, 마침내 한 명의 중국인 신부와 세 명의 프랑스인 성직자를 모실 수 있었다. 정 하상은 성직자들을 자기 집에 모시고 사목 활동을 도왔다. 또한 그는 앵베르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교육을 받기도 하였으나, 기대해박해로 교육이 중단되어 사제서품을 받지는 못하였다.
19.1.3 순교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이 반포되자 정 하상은 자기 집에 모시고 있던 앵베르 주교를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고 6월 1일(음력)에 체포되었다. 이때에 그는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자 자신의 체포를 예감하고 써놓은 「상재상서」(上宰相書)를 관가에 제출하였다. 이 소책자는 3천4백 자로 된 한국 교회 역사상 유일한 호교론으로서 당시에 천주교 탄압을 주창한 우의정 이 지연에게 올리는 글이다.
세계 교회사에 있어서 초대 교회에 등장한 호교 교부(변증론자)들이 그리스 철학 사상을 갖고 그리스도 교리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정당성과 박해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듯이, 정 하상도 「상재상서」에서 유교의 사상과 윤리관을 통해서 천주교 교리(천주의 존재, 천지 창조, 십계명, 영혼론, 상선 벌악, 천주교와 불교의 비교 등)를 설명하였다. 아울러 그는 조선 유학자들이 오해 또는 비난하고 있는 천주교의 신앙(무군무부의 종교, 조상 제사의 거부, 신주 공경의 배척 등)을 해명, 옹호하였다. 또한 정 하상은 천주교는 조선 유교 사회의 전통을 거스르는 종교가 아니며 사회윤리를 올바르게 하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하고,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몰아 박해함은 부당하다고 지적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호소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러한 신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을 경우 어떠한 형벌이 닥치더라도 배교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명하였다.
6월 4일(음력)에 정 하상은 첫 심문에서 배교를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다음과 같이 반문하였다. “우리는 매일 우리의 일용품으로 외국(중국)에서 값비싼 물건들을 구입하면서, 참된 종교인 천주교는 다만 그것이 다른 나라에서 들어왔다는 것만으로 배척하는 것이 옳습니까? 모든 사람이 누구를 막론하고 이 종교를 신봉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는 여섯 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으면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1839년 8월 15일(음력)에 정 하상은 그의 동료 유 진길과 함께 모반무도(謀叛無道)의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형장으로 가는 도중에도 평화로운 미소를 띠던 정 하상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의 나이 44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