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박해

 

기해박해


18.1.1 역사적 환경


  19세기 전반기의 조선 왕국은, 순조(純祖)이후 역대 국왕이 모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외척(外戚)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본격화되고, 척족(戚族) 사이의 정권 투쟁이 격심한 정치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대왕대비 정순왕후의 경주(慶州) 김씨 일가의 세력을 견제하고 왕통 보호의 임무를 선왕(先王) 정조(正祖)로부터 유탁(遺託)받은 안동(安東) 김씨의 김 조순(金祖淳)은 순조가 등극하자 왕대비 김씨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보필하였다. 1802년에 김 조순은 자기 딸을 순조의 비(純祖妃)로 책립(冊立)하여 국구(國舅)의 위세를 떨치면서 그의 정치적 세력 기반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2년 후 경주 김씨의 외척 세력을 누르고 대비 김씨를 수렴청정에서 물러나게 하고 1805년에 대왕대비의 죽음으로 안동 김씨의 새로운 세도정치가 등장하였다. 김 조순은 정권 강화를 위해 자기 친족을 정부 요직에 등용시켰으나, 조선 왕국은 안동 김씨 일족의 독무대가 되었다.


  후에 성년(成年)이 된 순조가 친정(親政)을 베풀었지만 정책 결정에 있어서 안동 김씨의 척족 세도가들에게 소외당하고 있었다. 여기서 국왕은 김씨 가문의 세도를 통제하려는 의도로 1819년에 풍양 조씨(豊穰 趙氏) 조 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하고 그 일족을 요직에 기용하였다. 이로써 풍양 조씨의 척족은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하는 새로운 외척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더욱이 1827년 2월에 순조는 김씨 세도 권력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기 위해서 건강이 나쁘다는 이유를 내세워 19세의 효명세자(孝明世子)에게 대리 청정(代理聽政)을 시켜 조씨 세력의 기반을 확고하게 마련하고자 하였다. 세자는 그의 장인 조 만영의 보필을 받아가며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렸으나 3년 만에 병사하여 순조가 다시 친정에 나섰다. 따라서 견제세력으로 등장한 풍양 조씨 세력도 정치 무대에서 일단 주춤하였다. 1834년 11월 13일(음력)에 순조가 승하하고 여덟 살의 왕세손(王世孫) 즉 헌종(憲宗)이 등극하자 대왕대비인 순조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그의 오빠인 김 유근(金遺根)이 보필하고 있었다. 그러나 1835년에 헌종의 외조부(外祖父)인 풍은 부원군(豊恩 府院君) 조 만영 등 풍양 조씨 문중에서도 주요 관직을 장악하면서 무시될 수 없는 세력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1837년 3월(음력)에 김 대비는 안동 김씨의 세력 확장과 권력 유지를 위해 열한 살 된 헌종의 왕비로 그의 일족인 김 조근(金祖根)의 딸을 맞아들였다. 두 외척은 연립 세도의 형태를 통해서 공존하면서 치열한 정권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1837년 1월(음력)에 세 의정(議政) 중에서 안동 김씨파는 사직하고 조씨파인 이 지연(李止淵)만이 우의정(右議政)으로 남아 있었고, 집권 실력자인 김 유곤도 중병에 걸려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풍양 조씨의 세력은 중대하여 1839년 쯤에는 실질적 집권 외척이 되었고, 이듬해 12월에는 김 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조씨 가문의 단독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한편 이러한 세도정치는 조선 왕국의 사회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정부의 관료직은 척족 세도에 관련된 족벌이나 매관매직(賣官賣職)의 부정부패로 충당되었고, 이에 따라 국가 재정의 수취 체제가 문란해졌다. 당시에 국가 수입은 삼정(三政), 즉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모두 농민을 대상으로 한 재정이었다. 그러나 관리들의 부당한 과세로 농민은 착취당하고 동요를 일으켰다. 게다가 수십 년 동안 계속되는 한해(寒害)와 수해(水害)로 인한 흉년, 전염병의 만연, 화재 등으로 민심의 이탈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농민들은 지방 관리들의 수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는 유민(流民)이나 화전민(火田民)이 되었다. 또한 사회적 모순 속에서 몰락한 양반들을 중심으로 한 민중 봉기(민란)가 곳곳에서 일어나 정부 당국을 괴롭혔다.




18.1.2 박해의 배경


  1805년 이후로 외척 세도 권력을 장악한 안동 김씨 일가는 신유대박해를 일으킨 경주 김씨 척족의 노론 벽파(老論 辟派)에 대립된 시파(時派)에 속하였다. 그러므로 안동 김씨의 세도가들은 대체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개인적 적개심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천주교의 금교령이 철폐되지는 않았지만 처음에 순원왕후는 천주교인들의 처벌을 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권자인 김 유근은 천주교에 대해 깊은 관심과 호의적 태도를 표시하였다. 당시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병석에 누워 있는 동안에 자기와 절친한 사이였던 유 진길(아우구스띠노)과 자주 종교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였고 대세를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울러 순조도 어진 임금으로서 천주교 탄압에 대해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물론 그 시대에 두 차례의 박해 즉 을해박해(1814)와 정해박해(1827)가 발생하였지만 이는 모두 국왕의 새로운 칙령을 통해서 일어난 교난(敎難)이 아니라, 지방 관료의 개인적 증오나 주민들의 적의와 신자들의 불목에 의한 밀고의 결과로 나타난 지엽적 탄압이었다. 아울러 이러한 중앙 정부의 온건 정책은 당시에 돌발한 여러가지 사건에도 연유하였다. 즉 호명세자의 승하(1832)와 재궁(梓宮)의 반소(半燒), 김 조순의 사망(1832) 창덕군 대조전의 화재 등의 불상사는 무죄한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 때문에 생긴 사건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귀양가 있거나, 구속된 천주교인들의 사면을 조처하였다. 이러한 관용 정책은 선교사들이 잠입, 활동을 가능케 하여 1838년에 이르러 교세가 증가하여 신자들의 수효가 9천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1838년 초에 풍양 조씨 일파인 우의정 이 지연이 정권을 독점하자 정부의 교회 정책은 관용에서 탄압으로 전환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천주교에 대해 적대 감정을 품고 있었고 이미 형조판서로서 교우들을 잡아들인 박해자였다.


  또한 그는 1838년 7월(음력)에 조선 왕국의 북경 파견 사절단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여 정식 사신 이외에는 신분이 확실한 하인들만이 북경에 들어가고 정부에서 명시한 물품만이 반입할 수 있다고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이러한 제재 조치는 이제까지 교우들이 사절단 일행에 끼여 북경에 들어가 교회의 서적과 성물을 도입하고 외국 선교사를 영입하던 길을 막아보려는 간접적 반(反) 교회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풍양 조씨 일가는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외척으로서. 안동 김씨 가문을 누르고 권력을 쟁취하는 수단과 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천주교의 탄압을 주창하였다. 이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관대하게 대하던 안동 김씨파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여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는 방편으로 천주교 박해를 택하였다.


  아울러 사회적으로 볼 때에 농민의 반란은 민심을 불안케 하였고 풍양 조씨 척족 세도가들의 정권에도 위협을 주었다. 여기서 집권자들은 민심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반(反) 정부 행동은 엄벌에 처한다는 본보기로 국가의 금교령을 위배하는 천주교인들을 처벌하게 되었다.


18.1.3 박해의 과정


  풍양 조씨 일파의 책동으로 천주교 박해는 1839년 1월 16일에 조 프란치스꼬와 권 바오로의 가족이 체포됨으로 시작되어 4월 7일에는 남 명혁(다미아노)과 이 광헌(아우구스띠노)이 붙잡히면서 본격화되었다. 4월 15일에는 궁녀 출신의 전 경협(아가타)과 박 희순(루치아) 등이 체포되어 좌우 포도청과 형조의 감옥에는 배교를 거부한 신자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따라서 정부는 이제 체포를 중단하거나 석방, 또는 처형을 택하여야만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정을 형조판서로부터 보고를 받은 이 지연은 천주교를 박멸하기로 결심하였다.


  1839년 4월 18일에 우의정 이 지연은 입궐하는 기회에 김 왕대비에게 천주교를 격멸할 것을 청원하였다. 그는 천주교인들이 무군무부(無君無父)를 주창하는 무리로서 오랑캐나 짐승과 같은 무리라고 비방하면서 가혹한 고문이나 죽음보다는 죽기를 원하여 배교를 거부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아울러 우의정은 신유대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의 무리는 더욱 증가하고 있으며 이들이 도적이나 반란자들이 될 위험도 있다는 중상 모략을 하면서 세 가지의 구체적 근절 방책을 제시하였다.


  첫째로 좌우 포도청은 천주교인들을 철저하게 색출, 체포하고, 둘째로 형조판서는 재판을 미루지 말고 항상 개정하여 엄하게 심문하고 배교를 거부하는 교인은 사형에 처하고, 세째로 서울과 지방에 공문을 보내어 ‘오가 작통법’을 실시해야 한다.


  우의정의 이러한 주청(奏請)에 대해서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풍양 조씨 세도가들의 압력에 못 이겨 사하토치령(邪學討治令)을 반포하였다. 김 대비는 신유년의 박해가 지나쳤다는 말이 있으나 오히려 엄격하지 못하여 천주교인이 다시 증가하고 있음을 한탄하면서, 인류(人倫)을 부정하는 천주교 박멸을 철저하게 수행하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그는 천주교의 서적과 성물이 발견되면 그 출처를 캐내어 반입자가 신자가 아니더라도 重刑)에 처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로써 기해년의 대박해가 시작되었다.


  이제 한양과 지방에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다. 교회 지도자인 정 하상(바오로)과 유 진길(아우구스띠노)과 조 신철(까롤로), 동정 궁녀 박 희순(루치아)과 전 경협(아가타), 최 양업 신부의 부모 최 영환(프란치스꼬)과 이 성례(마리아), 김 대건 신부의 부친인 김 제준(이냐시오), 동정 자매 김 효임(골롬바)과 김 효주(아녜스) 등 2백여 명이 옥사 또는 사형으로 순교하였다. 특히 배교자 김 순성(요한)의 밀고와 간계로 앵베르 주교의 수원 은신처가 탄로되어 8월에 주교가 자수하였고 샤스땅 신부와 모방 신부도 주교의 권유로 9월에 자수하여 한강 새남터에서 9월 21일에 군문 효수형(軍門梟首形)으로 순교하였다.


  한편 1839년 11월 23일에 조 인영(趙寅永)이 작성한 ‘척사윤음’(斥邪掄音)이 김 왕대비의 명의로 반포되었다. 이는 주자학 입장에서 본 천주교의 오류 즉 인륜의 부정, 조상 제사의 거부, 신주의 파괴, 성사의 미신적 행위, 천당 지옥의 현혹설 등으로 천주교의 모순성을 알리어 박해로 동요된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기해년의 박해는 1839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1840년에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풍양 조씨의 세도 정치가 시작됨으로 1~2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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