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순교자 성(聖) 시메온 – 프랑스와 베르뇌

 

병인 대박해의 순교자 1


29.1.1 성(聖) 시메온 – 프랑스와 베르뇌(St. Simeon-Francois Berneux 1814-1866)


  프랑스 르망 교구 관할지역인 샤또 뒤 로아르라는 도시에서 1814년 5월 14일에 태어난 베르뇌는 집안이 가난하여 학교에 다니지 못하다가 10세 때에 본당의 보좌신부가 어린 소년의 성소를 발견하고 동네 중학교에 입학시켰다. 학업 성적이 뛰어난 그는 르망 중학교로 전학하여 중학교 과정을 끝내고 프레시네의 소신학교에 들어갔다. 1831년에 르망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휴학하여 3년 동안 가정 교사로 지내다가 복학하였다. 한때 그는 수도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도 갖고 있었으나 1837년 5월 20일에 사제 서품을 받고 르망 대신학교에서 철학 교수로 2년 보내고 1839년 7월 27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아들과의 이별이라는 고통을 받던 모친에게 베르뇌는 사제의 목적은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이고 이는 양보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이며, 외교 백성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가는 소명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면서 위로, 설득하였다.


  1840년 2월 12일에 통킹의 선교사로 임명된 베르뇌 신부는 매스뜨르 신부와 함께 프랑스를 떠나 7개월 만에 마카오 지부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2개월 동안 머물면서 조선인 신학생 김 대건과 최 양업에게 신학을 가르쳤다. 1841년 1월에 마카오를 떠나 부임지에 도착하였으나 교회 박해로 3개월 만에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고 23개월 동안 옥중 생활을 하였다. 1843년 3월에 프랑스의 함대 사령관의 개입으로 베르뇌 신부 일행은 석방되었다. 같은 해 8월에 베르뇌 신부는 마카오에 도착하여 새로운 부임지로 만주 요동이 선정되어 홍콩, 상해를 거쳐 1844년 3월에 목적지에 도착하여 11년 동안 포교하였다. 이 동안에 그는 귀국 계획 중인 최 양업 신부에게 많은 조언과 사목 실습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1854년에 조선 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베르뇌 신부를 그의 보좌주교로서 후임 교구장으로 선임하였다. 이때에 베르뇌 신부는 이를 사양하였으나 1854년 12월 24일에 교황 비오 9세(1846-1878)가 같은 해 8월 5일에 공석 중인 조선 교구장으로 결정한 임명장을 받고 3일 후에 주교로 축성되었다.


  1855년 9월에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상해로 가서 뿌띠니꼴라 신부와 뿌르티에 신부를 만났다. 1856년 1월 17일에 그의 일행은 조선의 연락 교우인 홍 봉주(토마스)의 안내로 상해를 떠나 2개월의 항해 끝에 3월 15일에 황해도 장연에 이르렀고 12일 후에는 한양에 도착하였다. 당시에 장 경일(張敬一)이라고 불리던 주교는 신장결석증으로 고생하면서 교계 체제의 재정비와 확립, 신학교 설립, 교회 출판 사업, 자선 활동 등을 통해서 교세를 확장하였다.


  그는 당시에 조선 왕가의 분위기와 국제 정세를 고려하여 선교 자유의 기대를 갖기도 하였으나 병인대박해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1866년 2월 23일에 베르뇌 주교는 그의 복사 홍 봉주 등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1주일 동안 혹독한 고문과 함께 포장, 형조 관리, 대원군 등의 신문을 받고 3월 1일에 의금부로 이송되었다. 심문 중에 베르뇌 주교는 그의 하인 이 선이가 제보한 사실 외에는 교회 사정에 대해서 모르는 일로 대답하였다. 그는 재판관의 본군 송환 조처에 그것이 강제 축출이 아니라면 이 땅에서 순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3월 6일에 베르뇌 주교는 2월 말에 체포된 3명의 신부들과 함께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사형선고를 받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218.159.194.97 jhkim: 내용이 괜찮네요 조사해가야 하는데 좀 어려운말이 조금있어셔 그게좀 [09/22-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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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 순교자 성(聖) 시메온 – 프랑스와 베르뇌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병인 대박해의 순교자 1

    29.1.1 성(聖) 시메온 – 프랑스와 베르뇌(St. Simeon-Francois Berneux 1814-1866)

      프랑스 르망 교구 관할지역인 샤또 뒤 로아르라는 도시에서 1814년 5월 14일에 태어난 베르뇌는 집안이 가난하여 학교에 다니지 못하다가 10세 때에 본당의 보좌신부가 어린 소년의 성소를 발견하고 동네 중학교에 입학시켰다. 학업 성적이 뛰어난 그는 르망 중학교로 전학하여 중학교 과정을 끝내고 프레시네의 소신학교에 들어갔다. 1831년에 르망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휴학하여 3년 동안 가정 교사로 지내다가 복학하였다. 한때 그는 수도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도 갖고 있었으나 1837년 5월 20일에 사제 서품을 받고 르망 대신학교에서 철학 교수로 2년 보내고 1839년 7월 27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아들과의 이별이라는 고통을 받던 모친에게 베르뇌는 사제의 목적은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이고 이는 양보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이며, 외교 백성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가는 소명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면서 위로, 설득하였다.

      1840년 2월 12일에 통킹의 선교사로 임명된 베르뇌 신부는 매스뜨르 신부와 함께 프랑스를 떠나 7개월 만에 마카오 지부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2개월 동안 머물면서 조선인 신학생 김 대건과 최 양업에게 신학을 가르쳤다. 1841년 1월에 마카오를 떠나 부임지에 도착하였으나 교회 박해로 3개월 만에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고 23개월 동안 옥중 생활을 하였다. 1843년 3월에 프랑스의 함대 사령관의 개입으로 베르뇌 신부 일행은 석방되었다. 같은 해 8월에 베르뇌 신부는 마카오에 도착하여 새로운 부임지로 만주 요동이 선정되어 홍콩, 상해를 거쳐 1844년 3월에 목적지에 도착하여 11년 동안 포교하였다. 이 동안에 그는 귀국 계획 중인 최 양업 신부에게 많은 조언과 사목 실습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1854년에 조선 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베르뇌 신부를 그의 보좌주교로서 후임 교구장으로 선임하였다. 이때에 베르뇌 신부는 이를 사양하였으나 1854년 12월 24일에 교황 비오 9세(1846-1878)가 같은 해 8월 5일에 공석 중인 조선 교구장으로 결정한 임명장을 받고 3일 후에 주교로 축성되었다.

      1855년 9월에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상해로 가서 뿌띠니꼴라 신부와 뿌르티에 신부를 만났다. 1856년 1월 17일에 그의 일행은 조선의 연락 교우인 홍 봉주(토마스)의 안내로 상해를 떠나 2개월의 항해 끝에 3월 15일에 황해도 장연에 이르렀고 12일 후에는 한양에 도착하였다. 당시에 장 경일(張敬一)이라고 불리던 주교는 신장결석증으로 고생하면서 교계 체제의 재정비와 확립, 신학교 설립, 교회 출판 사업, 자선 활동 등을 통해서 교세를 확장하였다.

      그는 당시에 조선 왕가의 분위기와 국제 정세를 고려하여 선교 자유의 기대를 갖기도 하였으나 병인대박해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1866년 2월 23일에 베르뇌 주교는 그의 복사 홍 봉주 등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1주일 동안 혹독한 고문과 함께 포장, 형조 관리, 대원군 등의 신문을 받고 3월 1일에 의금부로 이송되었다. 심문 중에 베르뇌 주교는 그의 하인 이 선이가 제보한 사실 외에는 교회 사정에 대해서 모르는 일로 대답하였다. 그는 재판관의 본군 송환 조처에 그것이 강제 축출이 아니라면 이 땅에서 순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3월 6일에 베르뇌 주교는 2월 말에 체포된 3명의 신부들과 함께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사형선고를 받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218.159.194.97 jhkim: 내용이 괜찮네요 조사해가야 하는데 좀 어려운말이 조금있어셔 그게좀 [09/22-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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