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대박해

 

병인박해


  신자들은 대원군의 면담 수락 소식을 듣고서도 즉시 지방에 있는 주교들을 모시고 오기에 필요한 재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며칠 후에 조 기진이 여비를 보태주는 동시에 교군을 보내어 1월 25일에 이 유일은 다블뤼 주교를 모셔왔고 5일 후에 베르뇌 주교가 김 면호의 안내로 상경하였다. 따라서 1월 31일에 남 종삼은 입궐하여 대원군에게 주교들의 상경을 품고(稟告)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급한 대원군은 자기 요청에 천주교측이 2주일이나 지연한 사실을 무성의와 불경으로 속단하여 냉담한 태도로 구정이 가까웠다는 이유로 면담을 미루었다.    이때에 조정에서는 동지사행으로부터 중국의 여러 지방에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기서 서양인에 대한 배척 사상을 갖고 있던 양반 세력과 천주교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던 풍양 조씨 일파의 대신들은 대원군의 주교 교성 수락을 공박하면서 선교사와 신자들의 처형을 극렬하게 주창하였다. 대원군은 처음에 천주교 박해가 외세 침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이러한 위기 의식은 민 대부인에게서도 나타났다. 그는 베르뇌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듣고 서양 군대가 침입하여 국왕을 시해할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대신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천주교 박해령을 승인하였다.


  1866년 2월 23일에 베르뇌 주교가 대원군과 면담을 위해 입궐 대기 중에 주교댁에 있던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면서 교회 박해가 시작되었다. 3월 4일에는 전국에 천주교 서적 압수령과 소각령이 선포되었고 3일 후에는 천주교인 색출을 위한 ‘오가작통법’의 시행에 대한 정부 지시가 있었다. 특히 대왕대비는 천주교 신자를 숨기는 백성은 엄벌에 처하고 반대로 고발하는 이에게는 보상하겠다는 상벌 제도를 실시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리고 정부는 배교자들이 묘사한 선교사의 인상 착의에 대한 기록을 전국 관청에 배부하였다. 6월 말에 중국으로 탈출한 리델 신부에게 박해 소식을 들은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는 7월 13일에 중국 황제에게 선교사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에 선전 포고한 사실을 통보하였다. 8월 15일에 중국 사신이 한양에 파견되어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프랑스군의 침공 준비 소식을 전하면서 협상을 권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중국 사신의 이러한 권고를 내정 간섭으로 일측하였다. 오히려 그는 9월에 이르러 천주교인의 6촌까지의 친척도 중앙 정부와의 문의 없이 즉결 처형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한편,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 함대의 로즈 제독은 9월 10일에 세 척의 군함을 이끌고 조선으로 출항하여 15일 후에 양화진까지 진입하면서 무력 시위를 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일곱 대의 군함을 이끌고 원정하여 10월 14일에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3일 후에 조선 정부는 불법 입국한 선교사 처형의 당연성과 함대의 즉각 퇴각을 주장하였다. 이때에 로즈 제독은 프랑스 선교사의 학살에 대한 보상과 조약 체결을 요구하였고 아무런 반응이 없자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전등사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매복하고 있던 조선군의 공격에 많은 부상자를 내고 11월에 퇴각하였다(병인양요). 따라서 배외 사상과 쇄국정책과 함께 교회 박해는 더욱 치열해지면서 아홉 명의 선교사와 수많은 신자들이 새남터, 서소문 밖, 양화진(이곳은 프랑스 함대가 첫 원정시에 침입한 곳이라는 이유로 새로운 처형장이 됨) 등지에서 순교하였고 조선 교회는 ‘제2의 목자 없는 시대’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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