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개국과 신교 자유

 

조선의 개국과 신교 자유


  1873년 11월 10년 동안 집권하던 흥선 대원군이 하야(下野)하고 왕비 민씨 일가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조선왕국의 대외 정책은 쇄국에서 개국으로 전환하였다.


  한편 19세기 중반기에 들어서면서 토구가와(德川)의 에도 바쿠후(江戶  府)를 타도하고 왕정 복고(王政復古)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이룬 일본은 서양 국가들과 국교를 맺으면서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력 신장에 나섰다. 당시에 명치 유신 정부 안에는 제2의 임진 왜란을 꿈꾸던 정한론자(征韓論者)들이 등장하여 그 첫 실현 단계로 조선의 문호 개방을 꾀하였다. 따라서 1868년 이후로 8년 동안 조선 왕국과의 외교 수립 교섭 시도에 거듭 실패하던 일본은 1875년에 침략의 근거로 ‘운양호(雲楊號) 사건’을 고의적으로 도발한 후에 무력 시위로 조선의 개항을 강요하였고, 무력한 민씨 정권은 주체성이 결여된 타의의 문호 개방을 하였다. 1876년(병자년) 2얼 강화도에서 ‘조일 수호 조규(朝日修好條規)’ – 시기와 장소에 따라 ‘병자 수호 조약’또는 ‘강화도 조약’이라고도 함 – 가 조인되었다.


  이때에 조선의 종주국으로 자처한 청국은 속국에 참투하기 시작한 일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조선 정부에 구미 제국과의 수교를 권유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미국(1882년), 영국(1883년), 독일(1883년), 러시아(1884년), 이딸리아(1884년), 프랑스(1886년), 오스트리아(1892년), 등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이상의 조약들 중에서 신교(信敎)의 자유와 전교의 보장 등 종교 문제가 취급된 것은 ‘조선-프랑스 수호 통상 조약’이었다. 조선 정부는 서양 국가들과 수교하면서 처음부터 종교 문제는 회피하였다. 물론 ‘조선-독일 수호 통상 조약’이 조선에 체류하는 독일인의 자유로운 종교 행사를 보장하고 있지만 이는 조선인의 신교에 대한 명시적 언급이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50년 전부터 자국의 국민들이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순교하였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조선 왕국과의 수교에 있어서 신교의 자유와 선교사의 안전을 보장하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 때문에 ‘조선-프랑스 수호 통상 조약’은 늦게야 체결되었다.


  1884년에 프랑스는 조선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시도하였고, 1886년에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 꼬고르당(Francois George Cogordan)이 전권대사로 조선에 들어와 조약 협상에 들어갔다. 이때에 프랑스는 조약문에 자국 선교사들의 성당과 교회 운영, 건물 건립용 대지의 매입권 및 소유권에 대한 합법화, 조선인의 천주교 신교 자유에 대한 승인, 프랑스 선교사들의 전교 활동에 대한 안전 보장 등의 종교 조항을 삽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조선 정부는 종교 자유에 대해서는 암시적 표현도 거부하였다. 따라서 두 국가는 난항을 거듭한 후에 전교의 자유를 명문화하는 대신, 암시하는 데에 그치자는 타협으로, 가르쳐 깨우친다는 뜻을 가진 ‘교회’(敎誨)라는 단어를 삽입하였다.


  이로써 선교사들은 지금의 여권 구실을 하는 호조(護照)를 지니고 전국에 다니면서 선교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고 치외 법권의 자격을 소유하여 박해로 순교하는 사건은 예방되었다. 이는 조선 왕국에서 천주교 신교의 자유를 공인하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이로써 다른 국가와 종교(개신교)의 사업도 보장되었다.




34.1.2 선교사들의 입국


  병인 대박해의 와중에서 살아 남아 조선을 탈출하여 청국에 도착한 성직자는 리델(Ridel), 페롱(Feron), 깔레(Calais) 였다. 리델 신부는 1866년의 ‘병인 양요’ 이후에 상해에서 최 지혁(요안)으로부터 조선어를 배웠고, 1868년 페롱 신부의 프랑스 귀국 후에는 조선 교회의 임시 관리자로서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런데 당시에 병인 대박해로 선교사들이 순교하여 ‘파리 외방 전교회’의 본부는 블랑(Jean-Narie-Gustave Blanc, 白圭三)신부, 마르띠노(Alexandere-Jeremie-Martineau, 南)신부, 삐에르-유제느 리샤르(Pierre-Eugene Richard, 蔡)신부 등을 조선 선교사로 파견하였고, 이들은 깔레 신부와 함께 조선 잠입을 앞두고 만주교구 관할 지역인 차쿠에 머물고 있었다.


  따라서 1868년 말에 리델 신부는 이곳에 와서 네 명의 신부와 함께 조선 교구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여 조선 입국 방법과 조선 교구 관리에 대해 토의하기도 하였다. 1869년 7월에 리델 신부는 1868년 4월 27일자로 제6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870년 6월 5일 로마에서 주교품을 받았다.


  그리고 대원군의 하야로 조선 왕국은 천주교 박해가 가라앉게 되어 1876년 5월 10일에 블랑 신부는 새로 조선 교회의 선교사로 파견된 드게뜨(Victor-Marie Deguette, 崔鎭수)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1874년 가을에 귀국한 최 지혁의 안내로 한양에 들어왔다. 1877년 9월 리델 주교가 두세(Eugene-Gamille Doucet, 丁加우) 신부 및 로베르(Achille-Paul Robert, 金保  )신부와 함께 입국하였다. 이제 10여 년만에 조선 교회는 교구장과 네 사제들이 비밀히 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조선 교회 소식을 전하는 리델 주교의 편지를 갖고 만주로 떠났던 신자들이 국경에서 체포되어 성직자들의 잠입 사실이 발각되었다.


  1878년 1월에 리델 주교는 체포 구속되었다가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의 외교적 교섭으로 석방된 후에 국외 추방령을 받고 북경으로 호송되었다. 1879년 5월 15일에 드게뜨 신부도 배교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같은 방법으로 석방, 추방되었다. 이러한 조처는 처음 있는 일로서 조선 왕국의 천주교에 대한 정책 변화였다.


  리델 주교가 추방된 후에 부주교인 블랑 신부가 두 명의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 교회를 관장하였다. 그러다 1880년 11월에 뮈뗄(Gustave-Marte Mutel, 閔德孝)과 리우비(Luciea-Nicolas Liouville, 柳達榮) 신부가 잠입에 성공하였고, 1883년에는 뽀아델(Victor-Louis Poisnel, 朴道行) 신부와 조스(Jean-Baptiste Joees, 趙) 신부가 조선에 들어왔으며 1년 후에 드게뜨 신부가 재입국하였다. 한편 1882년에 보좌주교로 임명된 블랑 신부는 1년 후에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주교로 성성되었다. 그리고 1882년에 만주에서 프랑스로 귀국하였던  리델 주교가 서거한 후에 블랑 주교가 제7대 조선교구장이 되었다. 1885년 초에는 뮈뗄 신부가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 교수로 전임하였다. 동시에 같은 해에 마라발(Gabriel-Edmone-Joseph Maraval, 徐  )신부와 보두네(Calixte-Xavier Baudounet, 尹  勿), 그리고 1876년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당시 일본에 있던 꼬스뜨(Eugene-Jean-Georges Coste, 高)신부가 입국하였다.




34.1.3 교회 활동


  1886년 ‘조선-프랑스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기까지 20여 년 동안에 조선 교회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처음에는 국외에서 가능한 활동, 즉 신교(信敎) 자유를 위한 노력과 출판 사업에 주력하였고 점차로 신교 자유의 분위기가 일자, 교회 성장에 가장 필요한 성직자 양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첫째, 조선 교회는 신교 자유를 위한 시도로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구현하고자 하였다. 첫째 방법은 무모한 시도로써, 이는 무력 시위였으며 실패로 끝났을 뿐 아니라 조선 정부의 천주교 금압 정책을 더욱 강화시키는 역효과를 초래하였다. ‘병인 대박해’로 인하여 일어난 ‘병인 양요’(1866년)는 자국 국민의 학살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보복 조처였지만 여기에는 신교 자유의 구현이라는 의도도 밑에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역시 병인 대박해로 인하여 청국으로 탈출한 페롱 신부는 1868년 5월 신교 자유의 획득을 위한 방법으로 충청도 덕산에 있는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여 유해를 강탈하려던 ‘옵페르트(Oppert) 덕산 굴총 사건’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대원의 하야와 일본과 중국의 개방 정책에 따라 조선 교회 선교사들은 프랑스 정부 당국에 조선과의 수교를 강요하였다. 이는 신교 자유를 위한 긍정적 수단으로서 ‘조선-프랑스 수호 통상 조약’ 체결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둘째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사들은 ‘병인 대박해’이후 10여년 동안 조선 입국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선교 활동 대신에 출판 사업이라는 문화 활동에 주력하여 「조선 교회사」(Histoire de PEglise de Coree), 「한불 사전」(Dictionaire Coreen-Francais, 조불 사전), 「한국어 문법」(Grammaire Coreen, 조선어 문법)을 간행하였다. 1874년 파리에서 출판된 「조선 교회사」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신부인 달레(Claude-Carles Dallet, 1829-1878)가 저술한 두권의 책으로서, 이는 다뷜리 주교의 수기(手記)와 함께 그가 수집하여 불어로 번역된 국한문(國漢文) 자료와 선교사들의 편지와 보고서에 근거하였다. 그리고 이 책은 서설(序說)에서 조선의 자연 환경, 왕가, 정부 조직, 교육, 언어, 사회 계급, 여성, 가족 제도, 종교, 기술, 조선인의 성격 등을 언급하고 있어 교회의 역사뿐 아니라 조선의 문화와 풍습을 서양 세계에 소개하여 준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조선어 문법과 사전의 편찬은 리델 주교가 착수하여 꼬스뜨 신부가 완성하였다. 병인 양요 이후에 리델 주교는 만주 차구에 머물면서 같이 온 최 지혁의 도움을 받아 한글 자모체를 주조(鑄造)하면서, 편찬 작업 중에 꼬스뜨 신부에게 맡기고 조선에 입국하였다. 꼬스뜨 신부는 활자를 일본에 갖고 가서 추방된 리델 주교의 지도 하에 한 인쇄소에서 1880년 12월 20일에 46배판의 6백 94쪽의 사전을 발간 하였고, 1881년 초에 문법책을 내 놓았다. 이는 한글의 보급과 발전에 대한 조선 천주교의 문화적 공헌을 의미한다.


  세째로, 1870년에 로마에서 주교품을 받고 만주에 돌아온 리델 주교는 국내의 조선 신자들에게, 병인 대박해 이전에 신학 교육을 받았던 신학생들과 소년들을 만주에 보내도록 지시하여 1873녀부터 만주에 온 소년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주교는 1877년 조선에 입국하여 로베르 신부에게 신학생 교육을 위임하였다. 로베르 신부는 1878년에 그의 숙소에서 3명의 신학생을 가르쳤다.


  1878년 리델 주교가 추방된 후에 1879년에 블랑 신부가 전라도 장수 큰골이라는 마을에 피신하면서 신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리고 1882년에 보좌주교로 임명된 블랑은 곧 말레이지아의 페낭(Penang)으로 신학생을 유학 보내기 시작하여 188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21명의 학생이 그곳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이 학생들은 열대 지방의 기후와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1885년에 국내에 신학교가 설립되자 점차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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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개국과 신교 자유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조선의 개국과 신교 자유

      1873년 11월 10년 동안 집권하던 흥선 대원군이 하야(下野)하고 왕비 민씨 일가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조선왕국의 대외 정책은 쇄국에서 개국으로 전환하였다.

      한편 19세기 중반기에 들어서면서 토구가와(德川)의 에도 바쿠후(江戶  府)를 타도하고 왕정 복고(王政復古)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이룬 일본은 서양 국가들과 국교를 맺으면서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력 신장에 나섰다. 당시에 명치 유신 정부 안에는 제2의 임진 왜란을 꿈꾸던 정한론자(征韓論者)들이 등장하여 그 첫 실현 단계로 조선의 문호 개방을 꾀하였다. 따라서 1868년 이후로 8년 동안 조선 왕국과의 외교 수립 교섭 시도에 거듭 실패하던 일본은 1875년에 침략의 근거로 ‘운양호(雲楊號) 사건’을 고의적으로 도발한 후에 무력 시위로 조선의 개항을 강요하였고, 무력한 민씨 정권은 주체성이 결여된 타의의 문호 개방을 하였다. 1876년(병자년) 2얼 강화도에서 ‘조일 수호 조규(朝日修好條規)’ – 시기와 장소에 따라 ‘병자 수호 조약’또는 ‘강화도 조약’이라고도 함 – 가 조인되었다.

      이때에 조선의 종주국으로 자처한 청국은 속국에 참투하기 시작한 일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조선 정부에 구미 제국과의 수교를 권유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미국(1882년), 영국(1883년), 독일(1883년), 러시아(1884년), 이딸리아(1884년), 프랑스(1886년), 오스트리아(1892년), 등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이상의 조약들 중에서 신교(信敎)의 자유와 전교의 보장 등 종교 문제가 취급된 것은 ‘조선-프랑스 수호 통상 조약’이었다. 조선 정부는 서양 국가들과 수교하면서 처음부터 종교 문제는 회피하였다. 물론 ‘조선-독일 수호 통상 조약’이 조선에 체류하는 독일인의 자유로운 종교 행사를 보장하고 있지만 이는 조선인의 신교에 대한 명시적 언급이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50년 전부터 자국의 국민들이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순교하였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조선 왕국과의 수교에 있어서 신교의 자유와 선교사의 안전을 보장하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 때문에 ‘조선-프랑스 수호 통상 조약’은 늦게야 체결되었다.

      1884년에 프랑스는 조선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시도하였고, 1886년에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 꼬고르당(Francois George Cogordan)이 전권대사로 조선에 들어와 조약 협상에 들어갔다. 이때에 프랑스는 조약문에 자국 선교사들의 성당과 교회 운영, 건물 건립용 대지의 매입권 및 소유권에 대한 합법화, 조선인의 천주교 신교 자유에 대한 승인, 프랑스 선교사들의 전교 활동에 대한 안전 보장 등의 종교 조항을 삽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조선 정부는 종교 자유에 대해서는 암시적 표현도 거부하였다. 따라서 두 국가는 난항을 거듭한 후에 전교의 자유를 명문화하는 대신, 암시하는 데에 그치자는 타협으로, 가르쳐 깨우친다는 뜻을 가진 ‘교회’(敎誨)라는 단어를 삽입하였다.

      이로써 선교사들은 지금의 여권 구실을 하는 호조(護照)를 지니고 전국에 다니면서 선교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고 치외 법권의 자격을 소유하여 박해로 순교하는 사건은 예방되었다. 이는 조선 왕국에서 천주교 신교의 자유를 공인하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이로써 다른 국가와 종교(개신교)의 사업도 보장되었다.


    34.1.2 선교사들의 입국

      병인 대박해의 와중에서 살아 남아 조선을 탈출하여 청국에 도착한 성직자는 리델(Ridel), 페롱(Feron), 깔레(Calais) 였다. 리델 신부는 1866년의 ‘병인 양요’ 이후에 상해에서 최 지혁(요안)으로부터 조선어를 배웠고, 1868년 페롱 신부의 프랑스 귀국 후에는 조선 교회의 임시 관리자로서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런데 당시에 병인 대박해로 선교사들이 순교하여 ‘파리 외방 전교회’의 본부는 블랑(Jean-Narie-Gustave Blanc, 白圭三)신부, 마르띠노(Alexandere-Jeremie-Martineau, 南)신부, 삐에르-유제느 리샤르(Pierre-Eugene Richard, 蔡)신부 등을 조선 선교사로 파견하였고, 이들은 깔레 신부와 함께 조선 잠입을 앞두고 만주교구 관할 지역인 차쿠에 머물고 있었다.

      따라서 1868년 말에 리델 신부는 이곳에 와서 네 명의 신부와 함께 조선 교구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여 조선 입국 방법과 조선 교구 관리에 대해 토의하기도 하였다. 1869년 7월에 리델 신부는 1868년 4월 27일자로 제6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870년 6월 5일 로마에서 주교품을 받았다.

      그리고 대원군의 하야로 조선 왕국은 천주교 박해가 가라앉게 되어 1876년 5월 10일에 블랑 신부는 새로 조선 교회의 선교사로 파견된 드게뜨(Victor-Marie Deguette, 崔鎭수)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1874년 가을에 귀국한 최 지혁의 안내로 한양에 들어왔다. 1877년 9월 리델 주교가 두세(Eugene-Gamille Doucet, 丁加우) 신부 및 로베르(Achille-Paul Robert, 金保  )신부와 함께 입국하였다. 이제 10여 년만에 조선 교회는 교구장과 네 사제들이 비밀히 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조선 교회 소식을 전하는 리델 주교의 편지를 갖고 만주로 떠났던 신자들이 국경에서 체포되어 성직자들의 잠입 사실이 발각되었다.

      1878년 1월에 리델 주교는 체포 구속되었다가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의 외교적 교섭으로 석방된 후에 국외 추방령을 받고 북경으로 호송되었다. 1879년 5월 15일에 드게뜨 신부도 배교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같은 방법으로 석방, 추방되었다. 이러한 조처는 처음 있는 일로서 조선 왕국의 천주교에 대한 정책 변화였다.

      리델 주교가 추방된 후에 부주교인 블랑 신부가 두 명의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 교회를 관장하였다. 그러다 1880년 11월에 뮈뗄(Gustave-Marte Mutel, 閔德孝)과 리우비(Luciea-Nicolas Liouville, 柳達榮) 신부가 잠입에 성공하였고, 1883년에는 뽀아델(Victor-Louis Poisnel, 朴道行) 신부와 조스(Jean-Baptiste Joees, 趙) 신부가 조선에 들어왔으며 1년 후에 드게뜨 신부가 재입국하였다. 한편 1882년에 보좌주교로 임명된 블랑 신부는 1년 후에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주교로 성성되었다. 그리고 1882년에 만주에서 프랑스로 귀국하였던  리델 주교가 서거한 후에 블랑 주교가 제7대 조선교구장이 되었다. 1885년 초에는 뮈뗄 신부가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 교수로 전임하였다. 동시에 같은 해에 마라발(Gabriel-Edmone-Joseph Maraval, 徐  )신부와 보두네(Calixte-Xavier Baudounet, 尹  勿), 그리고 1876년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당시 일본에 있던 꼬스뜨(Eugene-Jean-Georges Coste, 高)신부가 입국하였다.


    34.1.3 교회 활동

      1886년 ‘조선-프랑스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기까지 20여 년 동안에 조선 교회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처음에는 국외에서 가능한 활동, 즉 신교(信敎) 자유를 위한 노력과 출판 사업에 주력하였고 점차로 신교 자유의 분위기가 일자, 교회 성장에 가장 필요한 성직자 양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첫째, 조선 교회는 신교 자유를 위한 시도로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구현하고자 하였다. 첫째 방법은 무모한 시도로써, 이는 무력 시위였으며 실패로 끝났을 뿐 아니라 조선 정부의 천주교 금압 정책을 더욱 강화시키는 역효과를 초래하였다. ‘병인 대박해’로 인하여 일어난 ‘병인 양요’(1866년)는 자국 국민의 학살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보복 조처였지만 여기에는 신교 자유의 구현이라는 의도도 밑에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역시 병인 대박해로 인하여 청국으로 탈출한 페롱 신부는 1868년 5월 신교 자유의 획득을 위한 방법으로 충청도 덕산에 있는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여 유해를 강탈하려던 ‘옵페르트(Oppert) 덕산 굴총 사건’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대원의 하야와 일본과 중국의 개방 정책에 따라 조선 교회 선교사들은 프랑스 정부 당국에 조선과의 수교를 강요하였다. 이는 신교 자유를 위한 긍정적 수단으로서 ‘조선-프랑스 수호 통상 조약’ 체결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둘째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사들은 ‘병인 대박해’이후 10여년 동안 조선 입국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선교 활동 대신에 출판 사업이라는 문화 활동에 주력하여 「조선 교회사」(Histoire de PEglise de Coree), 「한불 사전」(Dictionaire Coreen-Francais, 조불 사전), 「한국어 문법」(Grammaire Coreen, 조선어 문법)을 간행하였다. 1874년 파리에서 출판된 「조선 교회사」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신부인 달레(Claude-Carles Dallet, 1829-1878)가 저술한 두권의 책으로서, 이는 다뷜리 주교의 수기(手記)와 함께 그가 수집하여 불어로 번역된 국한문(國漢文) 자료와 선교사들의 편지와 보고서에 근거하였다. 그리고 이 책은 서설(序說)에서 조선의 자연 환경, 왕가, 정부 조직, 교육, 언어, 사회 계급, 여성, 가족 제도, 종교, 기술, 조선인의 성격 등을 언급하고 있어 교회의 역사뿐 아니라 조선의 문화와 풍습을 서양 세계에 소개하여 준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조선어 문법과 사전의 편찬은 리델 주교가 착수하여 꼬스뜨 신부가 완성하였다. 병인 양요 이후에 리델 주교는 만주 차구에 머물면서 같이 온 최 지혁의 도움을 받아 한글 자모체를 주조(鑄造)하면서, 편찬 작업 중에 꼬스뜨 신부에게 맡기고 조선에 입국하였다. 꼬스뜨 신부는 활자를 일본에 갖고 가서 추방된 리델 주교의 지도 하에 한 인쇄소에서 1880년 12월 20일에 46배판의 6백 94쪽의 사전을 발간 하였고, 1881년 초에 문법책을 내 놓았다. 이는 한글의 보급과 발전에 대한 조선 천주교의 문화적 공헌을 의미한다.

      세째로, 1870년에 로마에서 주교품을 받고 만주에 돌아온 리델 주교는 국내의 조선 신자들에게, 병인 대박해 이전에 신학 교육을 받았던 신학생들과 소년들을 만주에 보내도록 지시하여 1873녀부터 만주에 온 소년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주교는 1877년 조선에 입국하여 로베르 신부에게 신학생 교육을 위임하였다. 로베르 신부는 1878년에 그의 숙소에서 3명의 신학생을 가르쳤다.

      1878년 리델 주교가 추방된 후에 1879년에 블랑 신부가 전라도 장수 큰골이라는 마을에 피신하면서 신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리고 1882년에 보좌주교로 임명된 블랑은 곧 말레이지아의 페낭(Penang)으로 신학생을 유학 보내기 시작하여 188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21명의 학생이 그곳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이 학생들은 열대 지방의 기후와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1885년에 국내에 신학교가 설립되자 점차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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