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순교자 성(聖) 요셉 장주기(張周基, 1803-1866)

 

성(聖) 요셉 장 주기(張周基, 1803-1866)


  당시에 ‘장 낙소’라고도 불리던 장 주기는 경기도 수원 지방의 ‘느그저’ 마을(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탕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826년에 세례를 받고 자기 가족을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1836년에 입국한 모방 신부는 서양인으로 활동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어 조선인 보조자가 필요하다고 느끼던 중에 뛰어난 학식과 깊은 신앙심을  겸비한 장 요셉을 전교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이후로 장 회장은 순교할 때까지 그의 임무를 성실히 완수하였다. 기해대박해 이후 그는 목자 없는 교회 시대에 교우들을 돌보았다. 1845년에 장 주기는 친척들의 학대에 못 이겨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가산과 전답을 처분하고 충청도 제천 지방의 배론으로 이사하였다. 1855년에 매스뜨르 신부가 신학교를 세웠을 때에 장 요셉은 신학생 3명을 자기 집에서 교육하였다. 1년 후에 뿌르티에 신부가 성 요셉 신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한 이후로 신학교 경리를 담당하면서 교장 신부의 오른팔 구실을 하였다. 후에 그는 나이가 들어 회장직은 자기 조카에게 맡기고 신학교의 당가 업무는 이 경주(李景周, 빈첸시오)라는 교우에게 이관하였다.


  1866년 3월에 포졸들이 배론 신학교에 와서 뿌르티에 교장 신부와 쁘띠니꼴라 신부를 체포하였을 때 장 주기 회장도 함께 결박되었으나 교장 신부의 요청으로 그는 풀려났다. 그러나 그는 신부들이 한양으로 압송될 때에 5리 길까지 따라갔으나 뿌르티에 신부의 명령으로 배론으로 돌아갔다. 한편 두 선교사들이 한양 도착한 이후 포도청에서 신학교 집주인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시달되었다. 당시에 남 종삼은 신문받는 중에 신학교 집주인이 이 경주라고 말하였다. 3월 16일에 제천에서 포졸들이 배론에 도착하였을 때에 이 경주는 피신하였고 장 요셉이 집주인이라고 나서 제천 관가에 압송되었다. 그는 제천 현감의 배교 강요를 거부하면서 자기가 선교사들과 함께 지낸 장본인임을 거듭 밝혔다.


  다시 한양으로 압송된 장 회장은 3월 23일에 포도청에서 두 차례에 걸쳐 신문과 함께 고문을 받고 이튿날 군문효수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같은 날에 그는 보령 사형장으로 떠나는 다블뤼 주교 등 선교사들과 황 석두 일행에 동행하기를 간청하여 승락을 받았다. 장 요셉은 4명의 증거자들과 함께 성가를 부르며 기도 속에 형장에 도착하여 맨 마지막에 칼을 받아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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