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에 의한 교난 – 박해

 

동학에 의한 교난


  1860년에 천도(天道)를 창시한 최 제우(崔濟愚)는 천주교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어 ‘천주’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계시론, 구세주 사상, 일신론, 천국 사상 등 천주교 교리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1861년에 그는 추종자들이 당시에 서학(西學)이라고 불리던 천주교와 혼동하였을 때에 서학이라는 용어에 대립하여 동학(東學)으로 교명을 개칭하였다. 이러한 개명의 이면에는 천주교에 대한 경쟁 의식도 내포되어 있었다. 동학은 창립 이후 3-4년 동안 삼남(三南) 지방에서 교세가 확장되었으나, 1864년에 교조(敎祖)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처형되었고 동학은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동학은 하나의 종교로서 창건되었지만, 점차로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동시에 지방 탐관 오리의 학정에 항쟁하면서 정치 및 사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혁명적 사회 단체가 되었다.


  최 제우는 천주교를 도(道)에 있어서 서도(西道), 학문으로는 천주학, 종교면에 있어서는 성교(聖敎)라고 지칭하면서도 서학이라는 명칭 안에서 서구의 종교와 정치, 과학, 기술을 동일시하여 혼동하였다. 더욱이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북경 점령 이후로 조선에서 국가 패망의 위기 의식이 고조되었을 때에 최 제우는 천주교에 대한 대립 감정에서 적개심으로 태도를 바꾸고 서양 세력의 조선 진출을 저지하고 국내의 서학 박멸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신식 무기를 갖고 침략하는 서양인에 대항하여 보국안민을 내세우면서 침략의 도구인 무기를 서학의 산물로 보아, 프랑스 선교사들을 제국주의 침략자로 간주하였고 결과적으로 천주교 신자들도 침략의 공범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동학 교조의 천주교에 대한 적의는 동학란(동학 혁명 또는 갑오 농민 전쟁)에서 외적으로 표현되었다.


  동학은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으로 교세를 발전시켰고 1893년에 교조의 신원(伸寃) 운동을 전개하면서 ‘척왜 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깃발을 내세웠고 1894년 1월(음력)에 전라도 고부에서 전 봉준(全琫準)이 동학란을 일으켰다. 이 동란중 선교사들과 천주교인들은 호남 지방에서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당시의 교회 문헌에 의하면 조선 정부의 요구로 동학 반군 토벌을 위해 출동한 청국군이 동학군과 결탁하였고 천주교를 전멸하려는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 따라서 뮈뗄 주교의 상경 지시를 받고 전라도 지방에서 한양 피난길에 나선 죠조(Jean-Moyses Joseau : 趙得憂) 신부가 1894년 7월에 공주 지방 근처에서 동학군의 사주(使嗾)로 청국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또한 동학군들은 점령 지역에서 성당을 파괴하고 천주교인을 추적, 체포, 위협하여 금품을 강탈하였으며 교우들은 가산을 버리고 산으로 피신하여 기아의 고통속에서 지냈다. 당시 충청도와 전라도에 있던 교우촌 5백여 곳이 폐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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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에 의한 교난 – 박해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동학에 의한 교난

      1860년에 천도(天道)를 창시한 최 제우(崔濟愚)는 천주교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어 ‘천주’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계시론, 구세주 사상, 일신론, 천국 사상 등 천주교 교리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1861년에 그는 추종자들이 당시에 서학(西學)이라고 불리던 천주교와 혼동하였을 때에 서학이라는 용어에 대립하여 동학(東學)으로 교명을 개칭하였다. 이러한 개명의 이면에는 천주교에 대한 경쟁 의식도 내포되어 있었다. 동학은 창립 이후 3-4년 동안 삼남(三南) 지방에서 교세가 확장되었으나, 1864년에 교조(敎祖)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처형되었고 동학은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동학은 하나의 종교로서 창건되었지만, 점차로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동시에 지방 탐관 오리의 학정에 항쟁하면서 정치 및 사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혁명적 사회 단체가 되었다.

      최 제우는 천주교를 도(道)에 있어서 서도(西道), 학문으로는 천주학, 종교면에 있어서는 성교(聖敎)라고 지칭하면서도 서학이라는 명칭 안에서 서구의 종교와 정치, 과학, 기술을 동일시하여 혼동하였다. 더욱이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북경 점령 이후로 조선에서 국가 패망의 위기 의식이 고조되었을 때에 최 제우는 천주교에 대한 대립 감정에서 적개심으로 태도를 바꾸고 서양 세력의 조선 진출을 저지하고 국내의 서학 박멸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신식 무기를 갖고 침략하는 서양인에 대항하여 보국안민을 내세우면서 침략의 도구인 무기를 서학의 산물로 보아, 프랑스 선교사들을 제국주의 침략자로 간주하였고 결과적으로 천주교 신자들도 침략의 공범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동학 교조의 천주교에 대한 적의는 동학란(동학 혁명 또는 갑오 농민 전쟁)에서 외적으로 표현되었다.

      동학은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으로 교세를 발전시켰고 1893년에 교조의 신원(伸寃) 운동을 전개하면서 ‘척왜 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깃발을 내세웠고 1894년 1월(음력)에 전라도 고부에서 전 봉준(全琫準)이 동학란을 일으켰다. 이 동란중 선교사들과 천주교인들은 호남 지방에서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당시의 교회 문헌에 의하면 조선 정부의 요구로 동학 반군 토벌을 위해 출동한 청국군이 동학군과 결탁하였고 천주교를 전멸하려는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 따라서 뮈뗄 주교의 상경 지시를 받고 전라도 지방에서 한양 피난길에 나선 죠조(Jean-Moyses Joseau : 趙得憂) 신부가 1894년 7월에 공주 지방 근처에서 동학군의 사주(使嗾)로 청국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또한 동학군들은 점령 지역에서 성당을 파괴하고 천주교인을 추적, 체포, 위협하여 금품을 강탈하였으며 교우들은 가산을 버리고 산으로 피신하여 기아의 고통속에서 지냈다. 당시 충청도와 전라도에 있던 교우촌 5백여 곳이 폐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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