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속의 교회

 

일제 강점기 속의 교회․1


39.1.1 교회의 발전


  1911년 4월 8일에 조선대목구(일반적으로 교구라고 일컬어지지만 당시에는 정식 교계 제도가 설정되지 않아 공식 명칭은 ‘교황 대리 감목구’임. 우리 나라에서 정식 교구가 설정된 시기는 1962년 3월 10일 이후임)는 경성(京城)대목구로 개칭되면서 대구대목구가 분리되어 경성대목구는 충청도 이북 지방을 담당하였고, 대구대목의 관할은 경상도와 전라도였다.


  후에 경성대목구는 성 베네딕도회가 담당한 원산대목구(1920년 8월, 함경도와 간도 지방 관할), 미국계 메리놀회가 책임 맡은 평양지목구(1927년 3월, 평안도 관할 : 1939년 4월 대목구로 승격), 아일랜드계 성 꼴롬바노회에 위탁된 춘천지목구(1939년 4월, 강원도 관할)로 세분되었고  간도 지방을 관할하는 연길지목구(1928년 7월)가 원산지목구에 분리된 동시에 원산대목구는 1940년 1월에 함흥대목구와 덕원면속구로 양분되었다. 대구대목구에서도 방인 신부가 책임 맡은 전주지목구(1931년 4월, 전라도 관할)가 분리되었고 여기서 다시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라도 남부 지방을 관할하는 광주지목구(1937년 4월, 아일랜드께 성 꼴롬바노회 담당)가 신설되었다.


  한편, 교회는 1925년 7월 25일에 79명의 순교자들을 복자로 모시는 영광을 안았다. 기해 대박해(1839년)와 병오 박해(1846년) 중에 치명한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이 ‘파리 외방 전교회’를 거쳐 1846년 10월에 로마 교황청에 전달됨으로써 시복(諡福) 수속이 시작되었으나, 조선 교회의 사정으로 교황청의 조사는 1882년에 착수되었다. 1925년 5월 9일에 82명의 신앙 증거자들 중에서 79명의 순교 사실을 인정받아 교황 비오 11세(1922-1939년)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다.


  또한 1931년에는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9월 13일부터 9월 26일까지 주일(駐日) 교황 사절의 사회로 전국 주교회의가 개최되어 조선 교회의 통일된 운영 방침을 위한 법령을 제정하였다. 「조선 교회 공동 지도서」라는 제목으로 간행된 지침서의 내용은 신앙의 증대, 교회의 규율 및 전례(성사), 성직자와 교회 재산에 관한 74조항의 법령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1932년 3월 12일에 교황청 포교성성의 인준을 받아 9월 26일에 5개 대목구 및 지목구(경성, 대구, 원산, 평양, 연길)의 주교들의 공동 명의로 반포되었다.


  조선 교회의 발전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낸 역사적 사건은 방인 주교의 탄생이다. 조선 총독부는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종교 단체의 책임자를 일본인으로 대체하려고 획책하였다. 경성대목구에서는 총독부의 조선 관리를 통해서 일제(日帝)의 교회 지배 계획을 미리 파악하고 방인 신부들은 라리보 주교에게 대목구장 직책을 조선인에게 계승시키도록 권유하였다. 주교는 당시에 종현본당의 보좌였던 노기남(盧基南 : 바오로, 1902-1984) 신부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1941년 12월 12일에 밀사로 주교 비서 오기선(吳基先 요셉, 1907- ) 신부를 주일 교황 사절에게 파견하였다. 오 신부는 총독부가 공포한 ‘종교 단체법’을 연구한다는 거짓 명목으로 여행허가서를 받아 내어 동경에 가서 처음에는 일본인 주교를 고집하던 교황 사절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마침내 1942년 1월 3일에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노 신부를 경성대목구장에 임명하는 동시에 평양대목구와 춘천지목구의 책임도 겸임케 하였다. 같은해 12월 20일 노 신부는 종현 성당에서 최초의 방인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조선 천주교는 1945년에 이르러 9개 대목구와 지목구, 1백63개의 본당에 17만9천1백14명의 신자를 갖는 교세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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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속의 교회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일제 강점기 속의 교회․1

    39.1.1 교회의 발전

      1911년 4월 8일에 조선대목구(일반적으로 교구라고 일컬어지지만 당시에는 정식 교계 제도가 설정되지 않아 공식 명칭은 ‘교황 대리 감목구’임. 우리 나라에서 정식 교구가 설정된 시기는 1962년 3월 10일 이후임)는 경성(京城)대목구로 개칭되면서 대구대목구가 분리되어 경성대목구는 충청도 이북 지방을 담당하였고, 대구대목의 관할은 경상도와 전라도였다.

      후에 경성대목구는 성 베네딕도회가 담당한 원산대목구(1920년 8월, 함경도와 간도 지방 관할), 미국계 메리놀회가 책임 맡은 평양지목구(1927년 3월, 평안도 관할 : 1939년 4월 대목구로 승격), 아일랜드계 성 꼴롬바노회에 위탁된 춘천지목구(1939년 4월, 강원도 관할)로 세분되었고  간도 지방을 관할하는 연길지목구(1928년 7월)가 원산지목구에 분리된 동시에 원산대목구는 1940년 1월에 함흥대목구와 덕원면속구로 양분되었다. 대구대목구에서도 방인 신부가 책임 맡은 전주지목구(1931년 4월, 전라도 관할)가 분리되었고 여기서 다시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라도 남부 지방을 관할하는 광주지목구(1937년 4월, 아일랜드께 성 꼴롬바노회 담당)가 신설되었다.

      한편, 교회는 1925년 7월 25일에 79명의 순교자들을 복자로 모시는 영광을 안았다. 기해 대박해(1839년)와 병오 박해(1846년) 중에 치명한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이 ‘파리 외방 전교회’를 거쳐 1846년 10월에 로마 교황청에 전달됨으로써 시복(諡福) 수속이 시작되었으나, 조선 교회의 사정으로 교황청의 조사는 1882년에 착수되었다. 1925년 5월 9일에 82명의 신앙 증거자들 중에서 79명의 순교 사실을 인정받아 교황 비오 11세(1922-1939년)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다.

      또한 1931년에는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9월 13일부터 9월 26일까지 주일(駐日) 교황 사절의 사회로 전국 주교회의가 개최되어 조선 교회의 통일된 운영 방침을 위한 법령을 제정하였다. 「조선 교회 공동 지도서」라는 제목으로 간행된 지침서의 내용은 신앙의 증대, 교회의 규율 및 전례(성사), 성직자와 교회 재산에 관한 74조항의 법령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1932년 3월 12일에 교황청 포교성성의 인준을 받아 9월 26일에 5개 대목구 및 지목구(경성, 대구, 원산, 평양, 연길)의 주교들의 공동 명의로 반포되었다.

      조선 교회의 발전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낸 역사적 사건은 방인 주교의 탄생이다. 조선 총독부는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종교 단체의 책임자를 일본인으로 대체하려고 획책하였다. 경성대목구에서는 총독부의 조선 관리를 통해서 일제(日帝)의 교회 지배 계획을 미리 파악하고 방인 신부들은 라리보 주교에게 대목구장 직책을 조선인에게 계승시키도록 권유하였다. 주교는 당시에 종현본당의 보좌였던 노기남(盧基南 : 바오로, 1902-1984) 신부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1941년 12월 12일에 밀사로 주교 비서 오기선(吳基先 요셉, 1907- ) 신부를 주일 교황 사절에게 파견하였다. 오 신부는 총독부가 공포한 ‘종교 단체법’을 연구한다는 거짓 명목으로 여행허가서를 받아 내어 동경에 가서 처음에는 일본인 주교를 고집하던 교황 사절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마침내 1942년 1월 3일에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노 신부를 경성대목구장에 임명하는 동시에 평양대목구와 춘천지목구의 책임도 겸임케 하였다. 같은해 12월 20일 노 신부는 종현 성당에서 최초의 방인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조선 천주교는 1945년에 이르러 9개 대목구와 지목구, 1백63개의 본당에 17만9천1백14명의 신자를 갖는 교세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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