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의 천주교관
1889년에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에서 발생하였던 기근은 천주교와 개신교가 처음으로 접촉하게 된 계기를 이루었다. 당시의 한양에서는 외교관들이 두 지방의 이재민 구제를 위해 위원회를 구성하고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이 모임에서 개신교의 성금으로 양곡을 마련하여 이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역할을 현지의 천주교 신부들이 담당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는 남부 지방이 아직은 개신교보다는 천주교가 활동하던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제의를 받아들인 블랑 주교는 이재민 구호품을 전달하기 위해 현지에 두 명의 신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조선 정부에 호조를 신청하였으나 당국은 기근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교의 요청을 거절하여 두 교회의 구호 사업에 대한 공동 협력의 기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동학란 중에 선교사들의 집에 외국인을 배척하면서 귀국을 요구하는 벽보가 붙게 되었을 때에, 뮈뗄 주교는 개신교측과 정보를 제공하고 한문으로 쓰여진 벽보의 내용을 번역하는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천주교와 개신교의 관계는 상호 갈등과 불신, 대립 등으로 불행하였다. 이러한 자세는 ‘해서 교안’ 중에 발생한 두 교회의 충돌사건에서 표현되었다. 개신교의 문헌에 의하면, 1898년 황해도 재령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건축 중인 예배당에 몰려가 집단 폭행을 가하면서 예배당 공동 사용을 요구하였고, 1900년에는 재령의 신환포(新煥浦) 성당 신자들이 개신교인들에게 사통(私通)을 발급하여 성당 건축 기금을 강요하면서 불응하는 경우에는 결박하여 성당에 끌고 가서 구금, 구타하였다고 한다. 개신교 저술가들이 말하는 ‘천주교의 개신교 박해’ 또는 ‘교폐’(矯弊)는 일부 몰지각한 천주교의 자탁(藉託) 교인의 행패였고, 교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잘못을 시정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어쨌든 이러한 충돌 사건은 개신교가 천주교를 더욱 비판적으로 보게 된 결정적 요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 그리스도교 세계에 있어서 두 교회의 불편한 관계는 각 교회가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신앙의 공동체라는 생각을 떠나 당시 서구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팽대되었던 대립과, 조선에 진출한 프랑스와 미국의 국가적 경쟁 의식에 근거한 부산물이라는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천주교가 개신교를 열교(裂敎)로 취급하였듯이 개신교의 천주교관도 부정적 선입견에 근거하였다. 우선 천주교의 정책과 방법에 대해서 개신교 지도자들은 종교적 동기보다 정치적 성격을 부여하여 신부들을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로 간주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1801년에 발생한 ‘황 사영의 백서 사건’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나타난 제국주의 침략의 표본으로 단언하였다.
또한 개신교측은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를 교회가 국법을 위배한 결과로 보며, 순교 행위를 신앙 고백이 아니라 종교적 영웅주의의 발로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개신교의 의도적 비판은 선교 경쟁 의식에 기인한 것으로 추측된다. 마지막으로 개신교는 천주교가 기관지 「보감」을 통해서 개신교 교리를 비교, 논박하였듯이 1908년에 간행된 「예수 텬쥬 량교 변론」(예수天主兩敎辯論)을 통해서 천주교의 주요 교리, 즉 교황 제도와 교황의 무류권, 미사 성제와 성체 현존, 고해성사, 성화상 공경, 천주의 모친 마리아의 승천과, 신과 인간의 중재자직 역할, 신부의 독신 생활 등이 성서의 내용을 왜곡하거나 위배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천주교 교리에 대한 비성서적 결론은 서구의 교리 논쟁을 외국 선교사들이 조선 그리스도교계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간주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