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의 남 북 교회

 

해방 직후의 교회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국, 영국, 중국의 수뇌(首腦)들이 카이로 회담(1943년 11월 22-26일)에서 전쟁의 지도 및 전후 처리를 토의하면서 한국을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키기로 공약하였다. 1945년 7월 26일에 미국, 영국, 소련의 거두(巨頭)들이 선언문을 통해서 카이로의 선억을 재확인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선언들에서 보장된 ‘적당한 시기에’의 한국 독립은 1945년 8월 15일에 일제가 연합군에 항복한 후 미국과 소련의 군정(軍政)으로 나타났다. 두 국가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합의하고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군정 속에서 한민족은 국내의 정치적 갈등 및 외세의 개입과 함께 우익과 좌익의 신탁 통치에 대한 찬반(贊反) 대립이 일어났다. 결국 남북 두 개의 정권이 수립되어 국토의 양분과 민족의 분열이라는 운명의 길에 들어섰고, 이는 북한의 공산 정권의 남침에 의한 ‘6․25 동란’이라는 민족 수난으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정치 및 사상의 남북 분당은 한국 교회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가 분열된 후 남한 교회는 자유 민주 사회에서 이제 더 이상 어떠한 외부 탄압을 받지 않고 급성장의 길에 들어섰으나 북한 교회는 무신론적 공산 정권과 투쟁하던 수난의 교회에서,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목자 없는 교회 그리고 ‘침묵의 교회’로 전환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41.1.1 남한 교회


  해방과 더불어 남한 교회에는 교계 체제의 변화가 있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된 메리놀회 소속 미국인 선교사들이 재입국하였고 연금 상태에 있었던 아일랜드계 성 골롬반회 성직자들이 풀려 나온 후 그들의 선교지로 되돌아와 활동하였다. 광주지목구의 책임자였던 일본인 와끼다 신부가 사임하고 성 골롬반회의 맥폴린(Owen McPolin) 신부가 복직하였다. 대구대목구에서도 하야사끼 일본인 신부도 직책을 내놓고 1946년 1월에 본국으로 귀국한 후에 주 재용(朱在用 : 바오로) 신부가 대목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후 1948년 12월 9일에 최 덕홍(崔德弘 : 요한) 신부가 대목구장으로 임명받아 다음해 1월 30일에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또한 노 기남 주교도 겸임하였던 춘천지목구장직을 담당 수도회였던 성 골롬반회에 이양하여 퀸란(Thomas F. Quinlan) 신부가 책임을 맡았다. 그외에 교황청이 1947년 8월 메리놀회의 번(Patrick J. Byrne) 신부를 한국 주재 임시 교황 사절로 임명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주일 교황 사절 관할에서 독립하였다. 1949년 4월에 교황청은 대한민국을 승인하면서 번 신부를 주교품에 올리고 정식 주한 교황 사절로 승격시켰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 교회는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에 나섰다. 첫째로, 교회는 한국 사회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정신을 뿌리내리기 위해서 출판 언론 사업을 전개하였다. 1946년 8월에 교회는 「경향잡지」를 속간하였고 서울대목구는 위조 지폐 사건으로 폐간된 ‘정판사’(精版社)를 인수하여 ‘대건 인쇄소’를 설립하였다. 2개월 후인 10월 6일에 일간지 「경향신문」을 간행하였다. 1949년 4월 1일에는 「천주교회보」도 대구대목구의 가톨릭 청년회 연합회에 의해 복간되었다. 둘째로, 교회는 교육 사업에도 계속 주력하여 학교를 신설하는(순심 여자 초급 중학교, 성의 여자 초급 중학교, 성지 여자 중학교 등) 동시에 초등 교육 기관을 중등 및 고등 교육 기관으로 승격시켰고(안법 중학교) 실업 학교를 인문 중고등 학교로 개편하였다(동성 중고등학교, 계성 여자 중고등학교). 1947년 4월 30일에 성직자 양성 기관인 ‘경성 천주 공교 신학교’(京城天主公敎神學校)가 정식 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성신 대학’(聖神大學)으로 교명응ㄹ 바꾸었고 소신학교는 성신 대학 부속 중학교로 개편하였다. 대신학교의 대학 승격은 신학생들의 교육 수준과 성직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셋째, 수도회에 있어서도 여러 면에서 발전적 변화가 있었다. 1946년 4월 21일에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가 창립되었고 1949년 2월 3일에는 ‘성가 수녀회’가 교황청의 공식 인가를 받았다. 1947년에 교황청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총본부의 청원을 받아들여 일본 관구에서 독립된 관구의 설정을 인준하여 1948년 11월 16일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한국관구가 설정되었다. 넷째로, 교회는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1939년에 기해 대박해 100주년을 맞아 발족하려고 계획하였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설립되지 못하고 성 안드레아 김 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발족하였다. 이는 순교 정신의 앙양, 한국 순교자에 대한 신심의 강화, 순교 성지의 확보, 순교 자료의 수집과 간행을 목적으로 창설되었다.


  남한의 천주교회는 교회의 사업이나 활동 외에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48년 1월 11일에 국가적 어려움 속에서 실시되는 총선거에 즈음하여 ‘가톨릭 시국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같은 해 2월에는 5명의 주교들이 연합 교서를 반포하였다. 이 교서에서 주교들은 국토의 분단, 정치적 마찰, 사회의 혼란, 경제적 빈곤, 사상의 대립 등으로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처하여 있는 위기가 극복되도록 신자들에게 기도와 보속의 실천을 권유하였다. 서울에서는 국가의 독립 촉구를 위한 장엄 미사가 거행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4월 9일에 한구 주교단은 신자들이 당하는 어려움을 국가와 교회를 위해 감수하도록 요청하면서 이를 한국 치명 선조들의 순교 정신에 호소하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또한 1950년 2월 21일에 남한 교회의 주교회의는 “사회 질서 재건에 대하여 교도와 동포에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내놓았다. 이 성명서는 한국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으로 발생되는 비참한 현실에 교회가 무관심 할 수 없음을 밝히면서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함께 그 해결책을 7개 항목에 걸쳐 제시하였다.




41.1.2 북한 교회


  남한에서와는 달리 북한에서는 교회의 수난이 민족의 해방과 함께 종식되기보다는 소련군의 진주로 교회 박해는 일제 시대에 이어 지속되었다. 공산 정권은 1946년 7월에 결성된 ‘북조선 노동당’의 강령이나 2년 후에 성립된 소위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헌법에 종교 자유 보장의 사항을 삽입하였으나 실제로는 교회에 대해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탄압하면서 종교 말살에 광분하였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1950년대까지 교회에 대해서 합법을 가장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교회 탄압을 자행하였다. 첫째는 교회 재산의 몰수였다. 1946년 3월에 토지 개혁령으로 교회의 토지와 건물이 강제로 압수당하였고 교회 학교가 모두 국유화되었다. 둘째는 종교인에 대한 차별 대우와 사찰(査察)이었다. 신자들은 직장이나 관청에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고 엄한 감시를 받았다. 셋째는 청소년에게 유물론에 의한 반(反)종교적 공산주의 교육을 시키는 일이었다. 청소년들은 소년단 또는 민청(民靑) 등 세포 조직에 가입되어 종교는 비과학적 미신 행위이며 성직자는 인민의 착취 계급이라는 사상 교육을 받았다. 더욱이 신자 어린이들이 성당의 주일 미사와 교리 학교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에 청소년의 집회와 행사를 개최하였다. 넷째는 공산 정권의 어용 단체인 ‘기독교 연맹’을 통한 성직자에 대한 회유(懷柔)와 포섭 그리고 교회 분열 책동이었다. 기독교 연맹 결성의 목적은 각 교회가 보고서를 작성하여 정치 보위부에 제출함으로써 교회의 실정을 파악하려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개신교와는 달리 천주교는 연맹의 가입이 정치 활동이며 공산주의의 유물론이 교리에 어긋나고 교황청의 공식적 교시가 없다는 이유로 방관적 중립 자세나 비협조적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음성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북한 천주교회는 일치 단결하여 공산 정권과 투쟁하며 신앙을 지키면서 교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평양대목구는 홍 용호(洪龍浩 : 프란치스꼬) 주교를 중심으로 일제에 의해 징발당한 평양 관후리 주교좌 성당과 토지를 공산 정권과 교섭 또는 투쟁하여 되찾고 ‘평양 교구 사업 기성화’를 발족하여 대성당 건립 기금의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8월 5일 기초 공사에 착수한 대성당 건축을 위해 신자들은 일치 단결하여 현금 및 물품의 기증과 공사장에서의 노동 봉사를 통해서 1년 만에 정초식을 갖는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주교좌 대성당은 준공을 보지 못한 채 홍 주교가 피납된 후 1949년 12월 10일에 공산 정권에 강제몰수 당하였다. 황해도는 서울대목구의 관할 지역이었지만 대목구의 행정력이 두절되어 사리원본당의 박 우철(朴遇哲 : 바오로) 신부가 대목구장의 권한을 대행하였다. 황해도 교회의 활동 중에 특기할 만한 사항은 월남(越南) 동포의 보호와 반공 투쟁이다. 황해도는 남한으로 향하는 중간 기착지로서 신자들은 북부 지방에서 남하하는 수도자, 신학생, 평신도뿐 아니라 외교인들에게 침식을 제공하고 38선 통과를 안내하는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실천하였다. 그리고 황해도는 반공 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한 지방으로서 신자들도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으로 반공 운동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반공 삐라를 제작하여 간선 도로에 살포하거나 주요 공공 건물에 부착하였고 반공 비밀 결사에 입단하여 투쟁하였다. 이러한 투쟁의 목표는 무력 항쟁 자체에 있기보다는 공산 정권의 붕괴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데에 있었다.       1949년에 이르러 공산 정권은 종교 말살 정책의 노골적 방법으로 성직자 숙청 작업에 착수하였다.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담당하고 있던 덕원면속구와 함흥대목구에 있어서 1949년 5월 7일 사우어(Bonifacius Sauer) 주교가 4명의 신부와 함께 체포, 구속되기 시작하여 1년내에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가 잡혀갔다. 한국인 신학생과 수사들은 축출되었으며 덕원 수도원과 신학교는 사리원 농과 대학이 이전하여 김 일성 농과 대학이 되었다. 사우어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들은 평양대목구와 홍 주교는 항의서를 작성하여 내무상에게 발송하였다. 그러나 5월 14일에 홍 주교는 서포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본원에서 주교관으로 오던 도중에 피납되었다. 이후로 신자들이 목자를 잃지 않기 위해 사제관을 지키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부들은 체포 또는 피납되어 6.25 동란을 전후하여 평양대목구에는 한명의 신ㅂ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북한 지역에 속하던 황해도와 강원도에서도 신부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이로써 북한 교회는 수난의 교회에서 침묵의 교회로 변모하였고 남한의 교회와 연락이 두절된 채,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남한 교회에 제한되어 서술될 수밖에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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