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운동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가톨릭 액숀 즉 가톨릭 운동(Actio Catholica : Catholic Action)이라는 용어가 가톨릭 세계 안에 등장하였다. 이는 19세기에 교회의 사목 활동에 있어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공동 협조를 위해 결성된 평신도 조직인 ‘독일 가톨릭 연합회’, ‘이딸리아 가톨릭 청년회’, ‘프랑스 가톨릭 청년회’에서 발전한 20세기의 평신도 사도직 활동을 의미하였다.
현대 교황들은 가톨릭 운동을 ‘교회의 교계적 사도직에의 평신도의 참여’라고 정의를 내렸다. 또한 평신도 활동은 성직자가 부족한 현대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신앙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파하고 반(反) 그리스도교적 사회에서 합법적 투쟁을 통해서 가정, 학교, 직장에 다시 그리스도를 들여놓는 것이다. 그래서 평신도 활동은 그리스도교적 사상과 생활을 회복, 강화시키는 동시에 민중 특히 근로자와 농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데에 필수적 교회 사업임을 규정했다. 이러한 가톨릭 운동은 1920년대에 이르러 이 땅에서 청년 활동으로 전개되었다. 교회 당국은 전국의 청년회를 통합하여 ‘경성구 천주교회 청년 연합회’(1922년)와 대구의 ‘남방 천주교 청년회’를 발족시켜 위에서 언급한 민중 교육 이외에 구호, 의료, 언론 및 출판 등의 사업을 당면 과제로 채택, 추진시켰다. 또 언론을 통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투쟁 활동에 나섰다.
청년회원들은 자연 재해가 발생하였을 때(1924년, 1925년, 1930년 1935년, 1940년)에 연합회의 이름으로 주최하고 각 신문사의 후원을 얻어 재민 구호를 위한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 기념으로 청년회는 의료 시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병원 설립을 제창하여 5년 후에 ‘성모 병원’을 세웠다. 이 병원은 설립 2년만에 당시 경성 시내에서 유능한 병원으로 발전하였고 헌신적으로 시민에게 봉사하는 의료기관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청년회는 신자들의 신앙심을 앙양하고 사회에 그리스도교 정신을 침투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언론 사업을 전개하였다. 1927년에 ‘남방 천주교 청년회’는 「천주교 회보」를 창간하였고 2년 후에 ‘경성구 천주교회 청년 연합회’는 「별」을 발간하였다. 이러한 청년회 기관지는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목적 이외에 교황 소식 보도, 교회 발전에 대한 의견 교환과 보조일치를 내세우며 청년회원들에 의해 편집되었다. 그러나 이 월간지들은 1933년에 조선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청년 지식을 위한 교회 공인 잡지로 발간된 「가톨릭 청년」이 등장하자 종합적 가톨릭 운동(출판 사업)을 위해 자진 폐간하였다. 「가톨릭 청년」은 평양지목구에서 1934년에 발간된 「가톨릭 연구」(1937년에 「가톨릭 조선」으로 개제)와 함께 가톨릭 문화의 개발과 보급에도 선구적인 구실을 다하였다.
1930년대에 조선 천주교는 민족 운동을 내세우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위험을 깨닫고 여기에서 야기되는 사회 문제에 우려를 표시하면서 무신론과 유물론에 대항하여 투쟁할 것을 신자들에게 호소하였다. 당시의 「가톨릭 청년」은 초대 교회의 재산 공유 생활과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의 차이점을 제시하였고, 자본주의의 결점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치유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리고는 공산주의의 선전에 속지 말 것과 청년 지식층 사이에 유포되는 공산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도입된 신사조(新思潮)에 불과한 것으로, 유행과 같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대립으로 천주교는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았다. 간도 지방 연길교구에서는 공산당들에 의해서 성당과 부속 건물들이 소실되었고 성직자가 공산주의자의 습격을 받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