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알렉산델

 

황사영


黃嗣永 1775~1801(영조 51~순조 1)


조선 후기 가톨릭교도. 자는 덕소(德紹). 세례명 알렉산드르. 강화도 출생. 1790년(정조 14) 16세 때 사마시1)에 합격하여 진사2)가 되었다. 스승이자 처숙이 되는 정약종(丁若鍾)에게 교리를 배우고 가톨릭에 입교하였으며, 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만나 사목활동을 도왔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에는 제천(堤川) 배론〔舟論〕에 은거하면서 신유박해로 인한 조선교회의 참상과 재건책에 관한 장문의 밀서를 써서, 황심(黃沁)․옥천희(玉千禧)로 하여금 베이징〔北京〕의 A.구베아 주교에게 발송하려 하였다. 이를 황사영백서라 하는데, 사전에 발각, 황심 등과 함께 체포되어 그해 11월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로 모두 순교하였다.




신유박해는 황사영의 체포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정약용의 고발로 이미 2월 11일에 체포령이 내렸으나, 7개월이 sdja도록 그의 행방을 찾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황심이 북경 왕래자의 하나라는 규관검의 고발로 말미암아, 9월 25일(음)에 잡히자, 황심의 자백으로 황사영도 9월 29일(음) 은신처인 충청도 제천 배론에서 잡히게 되었다. 함께 피신 중이던 김빈도 같이 잡혔다.


황사영은 2월 10일(음) 박해가 일어나자 이 곳으로 와 숨어살면서, 박해로 폐허가 된 조선 교회의 실정과 조선 교회의 재건과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양박(洋舶)을 청하는 내용의 백서를 작성한 곳도 이 곳에서였다. 황사영은 곧 서울로 압송되어 황심, 김한빈, 그리고 곧 이어 잡혀 들어온 옥천희와 현계흠등과 함께 문초를 받았다. 그중 김한빈과 황심은 10월 24일(음) 판결을 받고, 그 이튿날 참수되었다. 황사영만은 백서 작성과정에서 정약용, 정약전 등과의 공모 여부를 가리기 위해 정약용과 정약전 등이 다시 잡혀 왔으나, 황사영의 단독적인 것이라는 주장과 공모에 대한 증거가 없어 11월 5일(음) 황사영에게 대역부도죄가 선고되어, 그 날로 능지처참의 사형이 집행되었고, 옥천희와 현계흠도 함께 참수되었다.




황사영과 그와 관련된 자들을 심문하고 있는 동안 동지사3)가 출발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그런데 이번 박해에 저명인사들이 많이 관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청국인 주문모를 처형한 사건을 변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므로 조정에서는 조윤대를 동지사 겸 진주사4)로 임명하는 동시에 가지고 갈 토사주문5)의 내용과 진주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토사주문은 대제학 이만수가 작성하였고, 주문내용의 증명으로 백서의 사본도 갖고 가기로 하되, 그 중에서 불리한 내용은 이를 삭제하여, 그 내용을 대폭적을 축소시킨 소위 가백서를 가지고 갔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ata2020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