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십계명(탈출20,1-17)

2.2. 십계명(탈출20,1-17)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위하여 열 가지 계명을 모세를 통하여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하느님 백성은 계명을 지키는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19,2)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룩함은 자유와 평등과 사랑 안에서 계명을 지키는 삶을 통해서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 사람을 죽이지 마라.

. 간음하지 마라.

. 도둑질을 하지 마라.

.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십계명의 첫 세 계명은 인간이 하느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1계명은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이며, 2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이며, 3계명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이 세 계명은 모두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을 규정합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흠숭하기에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되고, 우상을 만들어 숭배해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 백성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 더욱 빛나실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하며, 특별히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합니다. 모세는 하느님 백성에게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려 줍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6,5)

 

하느님 자녀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며,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기 위해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어 놓아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며 주님 안에서 기뻐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십계명의 나머지 일곱 계명은 하느님 백성이 이웃과 어울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하느님 백성에게는 어떤 권한이 있는지를 규정해 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효도, 생명 존중, 부부의 신의, 재산권 보호, 진실한 증언, 가정의 보호, 탐욕으로부터의 자유 등입니다. 그 핵심은 이웃사랑의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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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십계명(탈출20,1-17)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2.2.1.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하느님 한 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약한 인간은 자연적인 현상을 신의 섭리로 생각했고,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동물들에게도 신성을 부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에 신성을 부여하며, 그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탈출20,2-3)

    우상숭배는 이집트에서 긴 시간 동안 종살이를 하던 백성들이 반드시 버려야 할 항목이었고, 가나안에 정착해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이집트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말똥구리도 신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신성을 부여했고, 파라오조차 자신이 살아있는 신이라고 선포하며 백성들을 통치하였습니다. 이러한 우상숭배는 로마시대로 이어져 황제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며 통치수단으로 삼았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거짓 메시아가 끊임없이 등장하여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다른 신이 없다는 것는 것은 오로지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흠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신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신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신이 없기에 그것들을 형상화한 신상은 숭배를 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고, 그 신상 자체는 신입니다. 그런 신상을 우리는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매의 머리를 한 신, 황소나 악어의 모습을 한 신, 뱀이나 하마의 모습을 한 다양한 신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우상과 허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탈출20,4-5)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이후에는 주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 성상들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성상을 주님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성상을 하느님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일 성상을 만들어 놓고 그 성상이 하느님이시고, 예수님이시다.”라고 말한다면 그 자체가 바로 신상이요 우상입니다. 그 성상이 신비한 힘을 발휘한다고 믿거나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으면 그 자체가 우상이 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성상들이 신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화나 성상은 한 편의 잘 정리된 교리서입니다. 글을 모르는 이들에게 성화는 성경을 이해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게 하며, 하느님 나라를 생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성모님의 슬픔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그 슬픈 조각상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감사하고, 성모님의 슬픔에 동참하며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다짐하게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은 그 성상들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지, 결코 성상만을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로마군은 수많은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는 잔인한 형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그 십자가가 의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제사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상이 달려 있어야 만이 십자가가 참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가톨릭교회는 5세기부터 1계명에 탈출기 202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을 포함시켰습니다. 왜냐하면 동물을 신으로 섬기거나 온갖 조잡한 것들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의 위험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대의 우상은 재물이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6,24)

     

    재물은 신의 형상을 띠고 있지 않지만 그 어떤 우상보다도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재물은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고, 하느님을 잊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 재물은 힘이 있어서 사람을 죽이게까지 하고, 사람을 파멸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멸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참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물을 섬길 때 인간은 주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재물을 섬길 때 인간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재화로 바라보며, 재화를 축적하기 위해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행동합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재물로 보며 악마보다 더 잔인한 악당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언제나 사람이 먼저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 될 때, 재물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재물보다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는 세상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우상숭배는 악마에게 절하는 행위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시며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식으로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악마는 한 편의 영화를 보여주듯 그렇게 세상을 보여 주며 예수님을 유혹을 하였습니다.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마태4,9)

     

    참으로 달콤한 유혹입니다. 재물의 유혹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첫 마음을 잊게 만듭니다. 마음이 흔들리게 되면 인간은 첫 마음을 잊어버리고 재물을 움켜잡으며 재물과 하나가 되려 합니다. 그 재물을 움켜잡으려 끊임없이 악마에게 절하며 양심을 팔아넘기게 됩니다. 결국 재물은 자신을 붙잡으려고 하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어떻게 물리쳐야 하는지를 단호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4,10)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절하여 재물을 얻을 계획이 있으셨다면 굳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오로지 하느님만을 경배해야 합니다. 하느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생명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는 이에게 아낌없이 복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가 계명 안에서 살아가면 자녀들도 그 계명 안에서 살아가고, 그 자녀들이 계명 안에서 살아가면 그 자녀의 자녀들도 계명 안에서 살아갈 것이기에 그 복은 지속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19)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을 섬기며 계명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삶은 구원에 이르는 삶이고, 그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이는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이기에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나눔 19: 한 분이신 하느님을 어떻게 흠숭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느님을 흠숭해야 합니까?

     

    절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 앞에 나를 낮춘다는 것이고, 상대방을 높이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우상에게 절하며 우상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받아들여 부모에게도 절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제사를 지내며 돌아가신 부모님께 절을 하는 이유는 부모를 공경하기 위해서이지 숭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부모가 신이 되었기에 경배를 드리는 예식이 아니라 조상을 기억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 예식입니다. 제사는 자녀들에게는 공경과 효도를 가르치고, 형제자매들 안에서는 일치를 가져옵니다. 이 제사를 통하여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에 감사하고 부모의 가르침에 따라 더욱 화목하게 살아가고자 다짐합니다. 또한 한국인의 예절은 몸의 예절이고, 한국인의 기도는 몸의 기도입니다. 상대방의 말에 동의를 하게 되면 고개를 끄덕이고, 어른 앞에 가면 손을 모으며, 인사를 할 때는 고개를 숙입니다. 또한 절을 하면서 몸으로 어른께 인사를 드리고, 부모로부터 받은 그 몸을 귀하게 여깁니다. 돌아가신 분께 절을 올리는 것은 그분께 대한 최대한의 존경과 애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돌아가신 부모에게 절을 하지 않는 행위는 한국문화권 안에서는 분명하게 불효입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계명이 아니라 조직의 이념이나 주장이 중심이 된다면 그것 또한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온 생애를 이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에 감사하며,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과 구원을 기억하면서 살아갈 때, 나는 하느님만을 섬기며 재물을 섬기는 삶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2. guest 님의 말:

    2.2.2.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친한 친구끼리는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를 때도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부를 때도 아이 때는 이름을 부르지만, 자녀가 성장하여 가정을 갖게 되면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내 자녀도 누군가의 배우자이며, 누군가의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존중을 담아서 부르는 것과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더 나아가 아버지의 이름은 결코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처럼,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의 이름을 결코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탈출20,7)

     

    하느님의 이름은 존경과 흠숭의 대상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도 안 되고, 부당하게 불러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언제나 흠숭 받으셔야 하고, 거룩히 빛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부당하게 부르는 이들은 하느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이고, 자신이 하느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이 태양신의 아들이요, 살아있는 신이라고 자처하는 파라오를 만났습니다. 온갖 잡신을 섬기는 파라오는 자신의 통치방식이 신의 뜻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나일강이 범람하게 되면 신전의 사제들은 나일로미터를 통해서 범람의 양을 계산해 내고, 그것에 기초해서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또한 범람의 양을 미리 계산하여 파라오는 마치 자신이 범람을 주도하는 것처럼 말하며 축제를 주도했고, 세금을 감면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파라오는 그렇게 신처럼 행동했습니다. 또한 파라오가 제사를 드리며 신탁을 청할 때는 제단 뒤에서 제관이 파라오의 말에 신처럼 응답하며 파라오의 의지를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이들은 신이 아니지만 신처럼 말하고 행동했으며, 더 나아가 신의 이름으로 하느님 백성을 탄압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은 결코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군림해서도 안 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우상화시켜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헛되이 부르는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받아들이기 싫은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요, 자신이 듣고 싶은 말씀만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자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이 예레미야 예언자를 붙잡아 말하였습니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집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예레26,8-9)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박해하였습니다. 이들에게는 경건함과 열정이 있는 듯하지만, 단지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뿐입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뜻을 존중해 주시고, 자신들의 뜻을 따라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동등한 자리에 앉아 있었고, 어느 순간 하느님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언자를 박해하였듯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을 박해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말하며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참된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거짓 예언자는 백성들이 좋아하는 말을 전하였습니다. 참된 예언자 중에 박해받지 않은 예언자는 별로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통치자들과 백성들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예언자의 말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가 있으면, 그 예언자는 죽어야 한다.”(신명18,20)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게 큰 경종을 울립니다. 하느님 백성은 사제들이 제단 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사제 개인의 말로 들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또한 사제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제단과 강론대에서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이 있다는 것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독서자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선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방법이고,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는 방법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이들은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은 거룩한 성전에 들어와서도 마치 하느님과 동격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있기에 하느님께 자비를 청할 일도 없고, 아무런 아쉬움도 없기에 하느님께 기도할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매일 미사에 참례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타성화 되어 신앙생활을 하는지 취미생활을 하는지 구분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 같지만 삶은 변하지 않고, 입으로만 하느님을 찾으며 형제자매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이런 사람을 매일 미사에 참례하는 냉담자라고 부릅니다.

     

    하느님 백성은 언제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려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나눔 20: 나는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핑계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고, 개인의 잘못을 합리화하며, 개인의 생각을 하느님의 뜻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거짓 맹세,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들,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저주와 모욕을 퍼붓는 말들은 믿음이 없기에 쏟아져 나오는 것들입니다. 이런 모습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하느님께는 모욕이 됩니다.

     

    구교우촌에서 아이들이 놀다가 자주 하는 말이 천주께 맹세였습니다.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느님께 맹세를 하면서 말했던 것입니다. 보통 그렇게 말하면 친구들은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옳지 않은 일에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덮으려고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성당 다녀도 소용이 없군. 성당 다니는 사람은 다 그래?”라는 말도 듣게 됩니다.

     

    또한 기도를 해주면서 이제 당신은 사업이 성공할 것이고, 병이 나을 것이고, 대학에 붙을 것이며…,”라고 말하는 것도 하느님처럼 말하는 것이며, 하느님 윗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런 모습에 많은 이들이 열광하기도 합니다. 어느 순간 그렇게 말하는 이가 우상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말하는 이들은 재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처럼 말하며 사람들을 현혹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3. guest 님의 말:

    2.2.3.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하느님께서는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은 쉬셨고, 그날을 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들은 안식일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노예였기에 언제나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예살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내시고 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 백성이 쉴 수 있는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탈출20,8)

     

    하느님께서는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탈출2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던 백성들은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노동을 해야 했고, 고통 속에서 시달려야 했습니다. 노예나 종들은 주인에게 복종하고 주인을 위해 언제나 일을 해야 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일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존귀합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 쉬면서 자신의 권리를 찾아야 하고,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느껴야 합니다. 종살이하던 이들이 자유인이 되어 처음으로 안식일을 지키며 휴식 시간을 가졌을 때, 그들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하느님께서 안 계셨다면 휴식도 없었을 것이고, 자신들의 권리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안식일은 그들에게 은총의 선물이었습니다.

     

    네가 삼가 안식일을 짓밟지 않고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네 조상 야곱의 상속 재산으로 먹게 해 주리라.”(이사야 58,13-14)

     

    하느님 백성은 하루를 쉬면서 자신들이 쉴 수 있음에 감사드리고,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자신들의 종살이를 기억하면서 자신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종들과 집짐승들과 이방인들도 쉬게 해 주어야 합니다. 주인이 쉬어야 종들도 쉴 수 있고, 종들이 쉬어야 집짐승들도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다른 피조물들은 착취와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조화의 대상입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작품이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제 이 안식일은 예수님을 위해서 주일로 옮겨지게 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안식일 다음날 부활하셨기에 안식일 다음날을 주님의 날로 고백하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6,5)

     

    안식일은 하느님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참되게 섬기기 위해 안식일(토요일)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간의 첫째 날(주일)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주일을 지내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하고, 주일을 일요일이 아니라 주님의 날(주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일은 한 주간의 밀린 일들을 하는 날이 결코 아닙니다. 주일에 하느님 백성은 한 주간 동안 베풀어 주신 은총에 감사하며 경건하게 미사에 참례하고, 공동체와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한 주간의 나의 모습과 가족의 모습을 돌아보고, 가족과 함께 하며, 가족에게 사랑과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합니다. 내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꺼운 마음으로 도움을 주고, 다시 새롭게 한 주간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청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낼 때, 내 옆에 있는 이들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낼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낼 때, 하느님 백성의 영적인 삶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가정은 사랑과 활기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나눔 21: 하느님 백성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기 위하여 어떤 노력들을 해야 할까요?

     

     

  4. guest 님의 말:

    2.2.4.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자기의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며 공경하겠습니까?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어떻게 가장 가까운 이웃인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계명으로 주시면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탈출20,12)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할 때, 많은 원망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아버지가 노예이니 나도 노예요, 내가 노예이니 내 자식들도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고된 일을 마치고 집에 모였을 때는 사랑스러운 대화나 웃음, 서로에 대한 걱정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왜 저를 낳으셔서 이렇게 당신과 똑같은 노예로 만드셨습니까? 차라리 저를 낳지 마시지…, 저는 이 노예 생활이 지긋지긋 합니다. 그리고 저를 낳아주신 부모님이 원망스럽습니다. 저에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이렇게 부모를 원망하며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모에게 효도하여라.”는 계명은 노예살이로 무뎌졌던 그들의 양심에 큰 경종을 울렸을 것입니다. 또한 자녀로부터 공경받을 권리를 부여받은 모든 부모들은 노예 신분을 물려줬던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녀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부모를 원망하며 살아왔던 자녀들도 부모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으며, 앞으로는 자신들도 자녀들로부터 공경을 받을 것을 알았기에 희망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는 이유는 나에게 무엇을 해 주셔서가 아니라 부모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늙고 병들었다 하더라도,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서 내가 부양해야 한다 할지라도 부모님은 언제나 사랑과 공경의 대상입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하느님의 명령이니, 하느님 백성은 당연히 부모에게 효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하느님을 흠숭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자녀들에게는 하느님을 떠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자신을 학대하고 폭력을 가하는 부모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공경하라.”라고 말한다면 그 자녀는 세상 그 어떤 곳에서도 위로를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강요와 폭력도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서 떠나게 합니다. 특히 어릴 적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나 일관성 없는 양육방식, 자존감을 떨어트리는 다양한 폭력이나 방임(放任)은 자녀의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고, 자녀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짓눌려 있는 나무가 곧게 성장할 수 없고,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는 댐이 물을 가득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자녀들의 내면은 그렇게 상처로 가득하고, 시간이 지나면 그 상처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조건과 맞닿으면 감당할 수 없는 존재로 바뀌어 버립니다. 자녀 문제는 사실 부모 문제입니다. 사랑으로 키우라고 맡겨주신 하느님의 자녀를 부모가 망쳐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자녀들에게 기쁨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스스로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할 때, 지금 발생하고 있는 모든 청소년 문제, 정신건강 문제, 각종 사회문제를 99%는 예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며 부모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부모의 신앙을 물려받으며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눔 22: 부모님 공경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부모는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자녀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는 부모가 될까요?

     

    부모의 가르침이 자녀의 마음에 와 닿으면 자녀들은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부모님의 신앙을 물려받으며, 부모님을 공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이해하고, 자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자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고, 배움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 노력과 배움을 멈추게 되면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고, 더 나아가 그들보다 더 어색한 관계가 됩니다. 가족은 서로에게 하느님의 귀한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5. guest 님의 말:

    2.2.5. 사람을 죽이지 마라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 나의 생명도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고, 나는 내 생명의 관리자입니다. 인간은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존권은 하느님께로부터 보장받은 것입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탈출20,13)

     

    하느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십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이 계명을 듣고 큰 안도와 기쁨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함부로 나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종살이 할 때는 때리면 맞아야 했습니다. 내 가족이 지배자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해도 하소연 할 곳이 없었습니다. 요셉도 포티파르의 아내로부터 억울하게 모함을 당했지만 하소연할 곳이 없었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을 선포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힘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낯선 무리에 들어가도 내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제로 붙잡혀가서 노역을 하며 종살이를 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시키셨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이렇게 자신의 생존권을 보장받았으니 다른 이들의 생존권도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보장받는 생존권

    강제 노역을 시키는 것은 생존권을 빼앗는 행위입니다.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보는 이들은 가혹하게 노동을 착취하고, 그 노동자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갑니다. 노동자들에게 안전한 노동 환경이 제공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익을 추구하는 고용주는 노동자의 안전은 무시하고, 그저 생산과 목적 달성의 도구로만 생각합니다. 노동을 하는 이들에게 휴식을 취할 공간과 시간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행위입니다. 재물을 섬기는 이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렇게 약한 이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또한 삶의 자리를 빼앗는 것도 생존권을 빼앗는 것입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퇴거를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큰 폭력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생존권은 사회정의의 구현과 실질적 평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인간의 권리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발달과 통제할 수 없는 시장경제는 소득의 양극화를 더욱 분명하게 만들고, 가난한 이들의 생존권을 더 위협하고 있습니다. 쪽방이나 반지하방, 냉난방을 할 수 없는 옥탑방, 비정규직, 무자비한 고금리, 인신매매, 다양한 폭력…,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생존권을 위협합니다. 그래서 국가는 사회적 약자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제도적 장치를 해야 합니다. 최저임금 보장, 사회복지, 무상의료, 교통비 지원, 임대주택 등도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법적 조치입니다. 당연히 보호받고 있는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아무런 보호 장치가 없는 이들에게는 생존권이 얼마나 절실한지 모릅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의 생존권을 보장해 주는 것도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계명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분별한 벌목이나 살생, 환경을 생각하지 않는 행위들도 다양한 생명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움과 분노

    하느님께서는 이집트를 탈출한 백성들에게 이웃에 대한 직접적인 살인이나 상해 등에 대해서만 금지하셨지,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나 미움 등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백성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뿐 아니라 분노나 모욕, 매도 또한 살인행위라고 가르치시며 금지시키셨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

     

    미움은 상대방을 칼이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 죽이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미워한다는 것은 피를 본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신기하게도 그를 미워하는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 계속해서 그를 미워하도록 부정적인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 부정적인 이야기는 내가 그를 미워하는 것을 합리화시켜 주고, 그를 미워하면서 정의를 실천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이렇게 미움의 그릇은 만들기만 하면 무조건 채워집니다. 그 그릇은 들고 있는 한, 절대로 마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은 미움의 그릇을 얼른 버려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 백성은 당연한 것을 넘어서 사소한 것에도 마음을 써야 합니다. 한 마디의 부주의한 말로 상처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몸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치유가 되지만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치유가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상처를 준 나는 그것을 잊고서 내가 언제?”라고 말하며 웃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은 결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박힌 못이 빠져도 못자국은 남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도 그러게 흔적이 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존중해야 하고, 생존권을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생각과 말과 행위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인간은 서로에게 생명을 불어 넣으며 창조질서에 협력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였던 그 질투와 시기와 미움의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고, 손에 움켜쥐고 있는 그 분노의 돌을 내려놓을 때, 우리의 생명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그 삶이 바로 하느님 백성의 삶이고, 하느님 자녀들의 삶입니다.

     

    나눔 23: 나는 어떻게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있습니까? 내 옆에 있는 이들이 생기 넘치는 삶을 살도록 나는 어떻게 도와주고 있습니까?

     

    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내 옆에 있는 이들도 모두 하느님의 귀한 자녀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삶은 가정 안에서 충실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가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폭력이 사라질 때 가족은 진정 평화가 무엇인지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가정에서의 크고 작은 폭력은 학교나 직장으로 이어지고, 학교나 직장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은 피해자를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트려 버립니다. 공황장애, 우울증, 대인기피, 피해망상, 자해,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는 그 시작점은 가정에서 쏟아지는 부주의한 말 한마디, 사랑 없는 말 한마디라는 것을 하느님 백성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6. guest 님의 말:

    2.2.6. 간음하지 마라

    간음은 부부가 아닌 이들이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노예살이 하던 히브리인들에게는 인권이 없었기에 젊은 히브리 여성들은 지배자들에게 성적 약탈을 흔하게 당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배자들에게 항의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계명이 선포될 때, 특히 여성들은 얼마나 큰 기쁨을 누렸을까요? 이제 좀 더 안전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렸을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탈출20,14)

     

    하느님 백성에게 가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가정은 작은 교회입니다. 불륜을 통하여 가정이 파괴된다면 결국 교회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파괴는 공동체의 파괴를 가져오고, 공동체의 파괴는 하느님 백성의 파멸을 가져오기에 간음은 공동체 안에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유를 찾은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힘과 재력을 이용하여 여성들을 향락의 도구로 이용해서도 안 됩니다. 불행하게도 권력을 가진 이들이나 재력을 가진 이들이 지금도 자신의 힘과 재물을 이용하여 성을 착취하는 경우가 종종 등장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느님 백성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는 결혼한 여인이 다른 남자와 성적으로 관계를 맺으면 간음하는 것이지만, 결혼한 남자가 같은 일을 하면 간음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관계입니다. 어떤 일이 상대방에게 죄가 된다면 나에게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5,28)

     

    죄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단호한 결정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마음의 뿌리를 단호하게 뽑아버리고, 죄 지을 기회를 피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5,29-30)

     

    육체적으로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음으로 음욕을 품었다면 간음한 것이니, 몸과 마음을 조심하지 않고, 바르게 생각하지 않으면 간음하게 되는 것입니다. 콥트 정교회에는 시몬이라는 성인이 있는데. 그분은 한 쪽 눈을 보지 못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직업은 구두 수선공이었는데, 어느 날 구두를 수선하러 온 귀부인의 허벅지를 보고 음욕을 품은 시몬은 즉시 통회하며 수선 도구인 꼬챙이로 자신의 한 쪽 눈을 찔렀습니다.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에게는 예수님 말씀의 실천이 더 중요했던 것이고, 하느님 나라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내를 버리는 것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마태오19,9)

     

    예수님 시대에는 쿰란 종파만이 일부일처제를 주장하면서 이혼과 재혼을 인정하지 않았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일부다처제를 묵인했을 뿐만 아니라 이혼과 재혼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남자들에게 큰 권한을 부여하였습니다. 구약에서는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으면 이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수치스러운 일일까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바리사이계 율법학자들은 심지어 음식을 태우는 것, 남편 눈에 거슬리는 모습도 수치스러운 일로 보았습니다. 남편이 이혼장을 만들어 아내에게 건네주면 그 순간부터 아내는 소박맞고 쫓겨난 여자가 되었습니다. 이혼장에 소박 사유를 쓸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하느님 백성은 배우자를 사랑하며, 배우자의 부족함을 채워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배우자의 부족함을 단죄한다면 그 잣대로 하느님께로부터 단죄 받을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 신의(信義)가 있어야 하고, 신의를 지켜야 합니다.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서로를 믿어주고, 어떤 역경을 만나도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특별히 부부는 서로 신의를 지켜야 합니다. 가난해도 부족해도 사랑해주며, 아껴주고 믿어주어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 사랑하기 위해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함께 기도하며 하느님께도 신의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부부의 저녁기도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남편은 어떤 이유로 아내와 이혼할 수 있을까?”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둘이 한마음이 되어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부부는 어떻게 아내를 사랑해야 할까? 어떻게 남편을 사랑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 안에서 고민할 때 부부의 신의는 더 깊어지고 넓어지게 될 것입니다.

     

    나눔 24: 부부의 신의는 무엇입니까? 그 신의는 어떻게 꽃을 피워야 합니까?

     

    악마는 나를 유혹할 때 하느님을 미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내 행동을 합리화 시킬 수 있는 그럴듯한 명분을 떠올리게 합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을 더 이상 바라보지 않게 유혹을 합니다. 하느님을 벗어난 행위 중에 죄가 안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부의 신의는 하느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하느님 안에서 함께할 때 더욱 굳건해질 것입니다.

     

  7. guest 님의 말:

    2.2.7. 도둑질하지 마라

    도둑질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재산이나 재물,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생명과 권리와 자유를 빼앗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이라고 말하는 것도 도둑질이고, 자신은 수고의 땀을 흘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익을 얻으려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다른 이들의 재산권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타인의 권리가 인정되어야 만이 나의 권리도 보호를 받게 됩니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탈출20,15)

     

    하느님 백성은 내 것을 통해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들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면 관심 갖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땀 흘리지 않고 얻은 것들은 어느 순간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도 같이 사라져 버림을 하느님 백성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빼앗은 것들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빼앗길 날이 온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셔도 그렇게 심판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은 도둑질을 멀리해야 합니다.

     

    도둑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하느님께서는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도둑질은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둑질은 없는 사람만이 아니라 있는 사람들이 더 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일등을 하는 학생이 더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문제지를 훔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주가를 조작하고, 자신의 탐욕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힘 있는 자들과 훔친 것을 나눕니다. 더 나아가 힘 있는 이들이 정책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는 혜택이 덜 돌아가도록 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금품이나 향응의 대가로 방관하기도 합니다. 이 또한 도둑질인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바른 양심을 가지고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을 각자의 자리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남의 것을 훔쳐서는 당연히 안 되며, 다른 사람의 재산권도 반드시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도둑질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많은 기회의 문을 정책적으로 열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생명을 도둑질해 가는 이들

    도둑질 중에 가장 나쁜 도둑질은 사람의 생명을 도둑질해 가는 것입니다. 힘 있는 이들이 군사를 이끌고 다른 부족이나 나라를 침략하여 사람들을 약탈해 가서 노예로 팔아버린 일이 과거에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우리나라도 임진왜란 때 너무도 많은 사람이 잡혀가 노예로 팔려나갔습니다. 아시아나 유럽의 노예시장의 노예 값이 조선 사람들 때문에 폭락을 했다고 합니다. 도둑질 중에서 가장 나쁜 도둑질은 바로 사람 도둑질인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도둑질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이를 붙잡아서 고된 노동을 시키며 착취하는 일, 인신매매를 통하여 사람을 사고파는 일, 불공정 계약을 맺어 지속적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 이 모든 일들은 하느님께서 금하신 것들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그 자유를 빼앗고, 생명을 위협하는 도둑질은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나눔 25: 일상에서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도둑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시험을 치는데 다른 것은 다 풀었지만 모르는 문제 하나 때문에 끝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옆 사람의 답안지를 보았는데 정답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순간 고민에 빠졌습니다. “정답을 쓸 것인가? 아니면 빈 칸으로 남겨둘 것인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내 자녀가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말해 줄까요?

     

     

  8. guest 님의 말:

    2.2.8.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거짓 증언이란 사실 여부를 공적인 자리에서 따질 때, 다양한 이유에서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거짓 증언을 통해서 가해자가 피해자로 바뀌고,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뀌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가끔은 진실이 왜곡되고, 정의가 거짓에 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의를 부르짖다가 감옥에까지 가게 되는 경우도 생겨나게 됩니다. 심지어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정의를 실현하려는 이들은 사라지게 되고, 진실을 이야기했다가 자신에게 돌아올 피해를 생각하며 입을 닫아버리게 됩니다. 더 나아가 불의를 지적했다가 불의는 법으로 보호를 받고, 그 지적의 방법을 문제 삼아 불의를 지적한 사람이 처벌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 당연한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존중을 받아야 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정의가 자리 잡아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이 계명은 잘 지켜지지가 않습니다. 거짓말한 사람뿐만 아니라 거짓 증거를 만들어 심판한 사람도 심판받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6)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는 동안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며 살아왔고,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과 가족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를 얻는 이스라엘 백성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공동체이고, 진실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나와 내 가족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본다 할지라도 이웃과 공동체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새롭게 태어난 하느님 백성은 이웃을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거짓 증언을 강요해서도 안 되고,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침묵하거나 거짓을 말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불이익이 돌아온다 할지라도 진실에 입을 닫아서도 안 됩니다. 입을 닫음으로써 진실이 막히고, 무죄한 이가 위험에 처하게 되며, 더 나아가 무죄한 이가 죽임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나의 죄를 덮고, 나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자발적인 거짓 증언으로 그 죄는 더욱 커지게 됩니다. 자신이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하는 경우는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것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유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입니다. 상대방이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하는 이유는 상대방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함이고, 그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했지만 인정하지 않고, 아무리 증거가 많이 나온다 할지라도 내가 한 것이 아니다. 그런 기억이 없다. 모르겠다.”고 발뺌을 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당신이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대 보시오.”라고 말하며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진실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상대방을 깎아 내리며, 개인이나 조직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하고, 심지어 거짓 증거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계명을 신앙인들은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지켜야 합니다.

     

    둘째, 거짓 증언을 강요받는 경우입니다.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는 계명은 단순히 법정에서 진실만을 말하라는 것을 떠나서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사실을 왜곡시키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진실의 입을 막아서는 안 되며, 고문이나 협박을 통하여 거짓 자백을 만들어도 안 됩니다. 인간의 나약한 육체는 고문이나 협박에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거짓 증언을 강요하며 고문이나 협박을 가할 경우 자신이 하지 않을 것을 했다고 자백하고, 다른 사람까지도 허위로 끌어들입니다. 우리의 역사 안에서 얼마나 많은 거짓 자백을 받아내어 증거로 삼고, 그것을 정쟁의 도구로 삼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또한 강요는 아니지만 친분이나 기타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은 것 때문에 거짓 증언을 하거나 침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오.”라고 한마디만 해 주면 무죄한 이가 억울하게 손해 보는 일이 없을 텐데, 친분 때문에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고 침묵하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짓 증언을 하여 죄 없는 이를 억울하게 만듭니다.

     

    셋째, 상대방을 모함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공개적으로 망신을 줄 때, 보통의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큰 쾌감을 얻게 됩니다. 성실한 사람,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고통당하는 것을 행복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셉은 포티파르의 아내로부터 모함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요셉이 감옥에 갇힐 때 포티파르의 아내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감옥에 갇혀 있는 요셉을 이끌어 주시어 이집트의 재상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요셉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에, 이 계명을 들으면서 자신들의 억울했던 처지를 떠올리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넷째, 미운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지도자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법은 권력자의 편에 섰고, 증거는 조작되었으며, 그를 죽이기 위해 모든 권력을 다 끌어들였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모함을 받으셨습니다. 유다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사형을 요구하며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마태27,25)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없애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나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서슴지 않고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다섯째, 병이기 때문입니다. 미디어를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각종 기사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잡기 위해 극단적인 표현을 쓰고, 그 글에 온갖 사람들이 댓글을 쓰며 현인과 판관을 자처합니다. 미디어의 글들을 살펴보면 긍정적인 글보다는 부정적인 글이 훨씬 많습니다. 병에 걸렸기에 망상에 빠지고, 병에 걸렸기에 관종이 되어 사람들을 자극하고, 그 관심을 먹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사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병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울증이나 대인기피증으로도 연결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될 때, 그 부끄러움이 자신을 단죄하기 때문입니다.

     

    침소봉대 (針小棒大)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바늘을 큰 몽둥이라고 말하는 것으로써, 작은 것을 크게 부풀려서 거짓을 말하거나 과장을 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침소봉대는 칭찬의 형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느님 백성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의 잘못은 크게 보고, 형제자매들의 잘못은 작게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형제자매들을 모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사실이 아닌 이야기, 가짜 뉴스를 만들어 배포하는 것도 명백하게 거짓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기에 비방과 비난을 아무 거리낌 없이 쏟아내고, 그 말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으려 합니다. 처벌이 없거나 약하기에 거리낌 없이 살인행위를 이어갑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은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진실이 승리하고, 하느님의 정의가 다스리는 세상이 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은 할 것은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 할 것은 .’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5,37)

     

    신앙인은 아니오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진실을 말하는데 상대방이 안 믿어주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거짓을 말하면서 상대방을 믿게 하려고 하느님을 끌어들여서도 안 됩니다.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있는 그대로 말하고, 좀 더 정직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상대방이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형제자매들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나눔 26: 많은 거짓말들이 내 입에서도 쏟아지고 있습니다. 또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거짓을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 백성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은 그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랑과 자비와 용서이지만 악마가 원하는 것은 미움과 단죄와 분열입니다. 유혹에 빠진 이들은 알지도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아는 체 하고, 말을 만들어 상대방의 명예를 실추시키며,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상대방을 모함합니다. 이런 일들은 성당에서도 많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무리를 지어 서로의 허물을 덮어줍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반대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언제나 하느님 편에 서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존중해 주고, 내가 비록 손해를 본다 할지라도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9. guest 님의 말:

    2.2.9.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남편에게 아내는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어느 누구도 남의 아내를 탐내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해 이집트에 내려갈 때,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보, 나는 당신이 아름다운 여인임을 잘 알고 있소.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보면, ‘이 여자는 저자의 아내다.’ 하면서,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려 둘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내 누이라고 하시오. 그래서 당신 덕분에 내가 잘되고, 또 당신 덕택에 내 목숨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시오.”(창세12,11-13)

     

    아브라함이 두려워했다면 다른 남자들도 두려워했을 것이고,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사람들에게는 그 두려움이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약탈의 대상에는 언제나 여자가 포함되어 있었고, 신분제도 안에서 노예는 언제나 주인의 소유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종살이하면서 자기 아내를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계명을 들으면서 부부는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을까요? 드디어 가정이 보호받을 수 있는 하느님의 법이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탈출20,17)

     

    여성은 재물들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여성은 남성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여성은 남성과 똑같은 고귀한 존재이고, 똑같이 존중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내는 남편의 가장 중요한 소유였습니다. 물론 당시의 사회적 상황은 신랑이 신부 측에 신부값을 주었고, 또 신부는 지참금을 들고 시집을 왔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의 문화로서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위한 그들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부값이 집안과 집안, 남자와 여자를 묶어주는 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부부를 묶어주는 끈이 되어야 하고, 신뢰가 집안과 집안을 묶어주는 끈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소중한 존재이며, 그 어떤 재물로도 사고 팔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가톨릭교회는 5세기경부터 17절의 말씀을 두 가지의 계명으로 구분하였습니다. 9계명을 통해서 가톨릭교회가 여성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여성관은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 결코 아니며,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다니엘서의 정절의 여인 수산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수산나라는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요야킴의 아내로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남편 요아킴은 매우 부유한 사람으로서 큰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해에 어떤 두 원로가 백성 가운데에서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들은 악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하느님의 딸들을 함부로 했고, 요아킴의 아내인 수산나도 취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기회를 노리다가 수산나가 혼자 목욕하는 기회를 잡고 수산나를 협박하였습니다.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젊은 남자와 간음을 했다고 증언하겠다며 수산나를 함정에 빠뜨렸습니다. 그러나 수산나는 이 죽음의 덫에서 단호한 결심을 합니다.

     

    주님 앞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그렇게 하지 않고 당신들의 손아귀에 걸려드는 편이 더 낫소.”(다니13,23)

     

    이렇게 말한 수산나는 크게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당황한 두 원로도 수산나를 향하여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에게 수산나가 어떤 젊은이와 부정을 저질렀다고 거짓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두 원로는 자신들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자 수산나를 죽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가해자인 이 두 원로의 말을 듣고 백성들은 수산나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수산나는 하느님만을 신뢰하며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다니엘을 통하여 수산나를 구원해 주셨고, 악한 두 원로에게는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로 벌을 내리셨습니다. 만일 두 원로가 자신들의 인생의 종말이 이렇게 끝나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요? 남의 아내를 탐낸 그 두 원로는 죽으면서 분명 후회했을 것입니다.

     

    나눔 27: 모든 가정은 존중받아야 하고, 보호받아야 합니다. 가난해도, 부족해도, 흠이 있어도 사랑받아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내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10. guest 님의 말:

    2.2.10.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모든 것을 빼앗기며 살아왔습니다. 노예는 주인의 소유이고, 주인은 노예가 가진 것을 힘으로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자신들에게 보장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뺏으려는 자에게 목숨까지도 내어 주어야 했습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들었을 때, 그들은 분명 뛸 듯이 기뻐했을 것입니다. 재산과 재물에 대한 권한은 소유자에게 있기에 소유자의 것을 탐내는 것은 이제부터 하느님께 도전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다 하여 그것 때문에 목숨을 잃을 염려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물건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붙잡혀서 노예로 팔려가거나, 강제 노동을 당할 염려도 사라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이웃의 그 무엇도 탐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멋진 것을 보면 감탄하게 되고, 만져보고 싶고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의 대부분은 그렇게 내 마음에 들어서 붙들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내 것 보다도 더 마음에 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남이 가진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 똑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남의 것은 언제나 더 좋아 보이고, 내 것보다 상대방의 것은 늘 커 보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욕심이라고 하고, 그 욕심이 통제가 되지 않는 것을 탐욕이라고 말합니다. 탐욕(貪慾)에 사로잡히게 되면 탐하는 마음을 절제하지 못하게 됩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는 탐하는 그것만을 향하게 되고, 탐욕을 채우기 위해 기름을 등에 지고 불길 속으로도 뛰어 들게 됩니다.

     

    탐욕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지만 그 결과를 보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탐욕은 모함과 거짓이 난무하게 만들고, 탐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람의 생명도 가볍게 여깁니다. 제 정신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것들을 탐욕에 눈이 멀면 그것을 행합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가진 이가 겨우 한 마리의 양을 가진 이의 양을 빼앗는 것처럼, 그렇게 탐욕은 탐욕을 부르고, 또 다른 탐욕으로 이어지며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하느님 백성은 탐욕을 멀리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며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것을 나누면서 형제자매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 나에게 하나를 더 주신 이유는 그것에 집착하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옆에 있는 형제와 나누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은 남의 재물을 탐내지 않고, 오히려 나눔의 삶을 살아갑니다. 나눔은 기쁨과 희망을 샘솟게 하고,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기게 만들어 줍니다. 하느님 백성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나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보물로 생각하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향하며 나눔의 삶을 살아가고, 세상의 재물을 보물로 생각하는 이들은 세상 속에서 세상과 함께 살아갑니다. 재물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활용의 대상이고, 인간은 재물의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입니다. 재물은 하늘에 쌓는 것이지 자신의 금고에 쌓아두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통해서 보물을 하늘에 쌓을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야 합니다. 재물에 집착하여 귀한 보물을 잃어버리는 삶은 하느님 백성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서예를 하신 분이 어느 날, 친구로부터 아주 귀한 벼루와 붓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선물을 해 준 친구도 서예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선물을 받은 그는 그 벼루와 붓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어느 누구도 만지지 못하게 했고,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외출을 해도 그 벼루와 붓 때문에 일찍 들어가게 되었고, 심지어는 외출도 자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배우자와 손자손녀들과도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기도를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 친구가 그래서 그것을 나에게 주었구나.” 그는 벼루와 붓을 선물받은 다음부터 그것 때문에 마음이 자유롭지 못했고, 가족들과도 거리가 멀어지게 된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그는 그 벼루와 붓을 그 친구에게 다시 돌려주고, 전에 쓰던 것을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유로움을 만끽했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탐욕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나가야 합니다. 재물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활용의 대상이요 나눔의 대상임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나눔 28: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렇게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습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삶은 어떤 행복을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주변에는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 손에 쥐어주신 것들을 잘 알고 계시고, 내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도 보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 것을 넘어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를 원하십니다.

     

     

  11. guest 님의 말:

    2.2.11. 계명을 지키는 삶

    온 백성은 우렛소리와 불길과 뿔 나팔 소리와 연기에 싸인 산을 보고 있었습니다. 백성은 그것을 보고 떨면서 멀찍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두려움에 떨면서 우리에게는 당신이 말해 주십시오.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랬다가는 우리가 죽습니다.”(탈출20,19)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시험하시려고, 그리고 너희가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을 지녀 죄짓지 않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탈출20,20)

     

    하느님께서 눈앞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에서 모든 피조물이 조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힘과 권력을 가지고 누구를 억누르는 삶이 아니라 다양성 안에서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하느님 보시기에 좋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의 권리를 존중해 주며, 이웃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라고 하느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셨고, 그렇게 살라고 우리를 당신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을 흠숭하며 하느님의 계명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첫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섬깁니다. 언제나 하느님이 먼저입니다. 재물을 섬기지 않고, 물질만능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둘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남을 단죄하거나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으니 나도 형제자매들로부터 심판받거나 단죄받지 않게 됩니다.

    셋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냅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이고, 주님 안에서 쉬는 날이며, 주님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날입니다. 그래서 주일에는 하던 일을 멈추고 가족과 함께 쉬며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게 주님의 사랑 안에서 힘을 얻어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게 됩니다.

    넷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자기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며 자녀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부모의 권리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고 있기에 부모에게 순종하며, 부모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합니다. 또한 부모의 의무가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자녀를 하느님의 자녀로 귀하게 양육하는 것임을 알고 있기에 마음을 다해 자녀들을 사랑하고, 자녀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 주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다섯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또한 인간은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자라는 것을 고백하며 자신의 몸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타인의 생존권도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여섯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배우자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고, 배우자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이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의를 이어갈 의무와 권리가 있음을 알고 있기에 함께 기도하며 하느님께 은총을 청합니다.

    일곱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내 것을 약탈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타인의 것을 보호해줄 의무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힘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의 것을 빼앗거나 훔쳐가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말하며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큰 도둑질입니다.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남의 것을 훔치는 사람이 아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남을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여덟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진실 안에서 살아가며 거짓 증언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로부터도 거짓 증언을 통해서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거짓 증언은 상대방의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것이기에 생명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진실 위에서 살아가며 아니오를 분명하게 말하기 위해 기도합니다.

    아홉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배우자를 사랑하고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부부들은 마음까지도 온전하게 하나가 되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기에 한생을 노력하며 살아야 하고, 자신의 배우자뿐만 아니라 타인의 배우자도 존중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알고 있기에 세상의 모든 가정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됩니다.

    열째,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자신의 소유에 만족하며,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기도하며 노력합니다. 자신은 그저 관리자임을 기억하며 슬기로운 청지기가 되어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것을 하느님을 위해 사용하려 노력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삶은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이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누구신지를 세상에 드러내고, 인간이 하느님께로부터 얼마나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인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 삶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영광 받으시고, 그 삶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은 살맛나는 세상을 체험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게 될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삶!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음을 서로 공감하며 지켜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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