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하느님의 종 모세
(읽어야 할 말씀: 민수11,24-17,28;21,4-9;신명 31,14-34,12)
1. 말씀읽기: 신명 32,48-52 모세가 느보 산으로 올라가라는 명령을 받다
48 바로 그날에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49 “너는 예리코 맞은쪽,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맥의 느보 산으로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소유하라고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아라. 50 그리고 너의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선조들 곁으로 간 것처럼, 너도 네가 올라간 산에서 죽어 선조들 곁으로 가야 한다.
51 그것은 너희가 친 광야에 있는 므리밧 카데스 샘에서, 이스라엘 자손들 한가운데에서 나를 배신하였고, 이스라엘 자손들 한가운데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52 너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는 땅을 멀리 바라보기만 할 뿐 들어가지는 못한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하느님의 종 모세
모세는 군림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섬기는 영도자(領導者)였습니다. 그러나 그 섬김의 삶은 모세에게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백성들은 기쁨과 희망이 있을 때는 잘 따르는 듯 했지만,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즉시 불평과 불만을 모세에게 터트리고, 원망과 분노를 쏟아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섬김의 삶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섬김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삶에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그 삶을 잘 보여 주었습니다.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보속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이 백성을 돌보며, 그들과 운명을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도 “느보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죽어야 하는 모세를 떠올려본다면 “사랑과 섬김의 삶”은 눈물의 길이요 온전한 의탁의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모세를 부르셨고, 모세는 그렇게 응답을 하였습니다. 이제는 모세를 본받아서 내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2.1. 모세에게 도전하는 미르얌과 아론(민수11,24-12,16)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은 불평과 불만, 판단과 심판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라 인내와 친절, 사랑과 용서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공동체를 이끄는 이들은 더욱더 자신의 사랑과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고, 그 사랑과 열정은 공동체를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가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의 종을 신뢰하며 온전히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시기하지 말고, 하느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대하며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다가는 미르얌처럼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① 원로 일흔 명이 주님의 영을 받다(민수11,24-30)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사랑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중심으로 일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원로들에게 주님의 영을 내려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구름 속에서 내려오시어 모세와 말씀하시고, 모세와 같은 마음이 될 수 있도록 모세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 내시어 그 일흔 명의 원로들에게 내려 주셨습니다. 그 영이 그들에게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예언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백성의 원로들이 모세의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원로들은 모세를 견제하라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세의 일을 협력하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때 진영에 남아 있던 두 사람에게도 영이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진영에서 예언을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한 소년이 달려와 모세에게 알려주자 옆에 있던 모세의 시종 여호수아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민수11,28)
사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의 본성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영을 받았으니 이제 모세를 우습게 볼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일흔 명이나 됩니다. 그 많은 인원이 모세에게 덤비면 모세는 큰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눈에는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섬김의 리더쉽을 살아가는 모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일흔 명의 원로들이 하느님의 영을 체험하였다면 그들은 분명 자신처럼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백성을 위해서 봉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세의 처지를 이해해 주고, 모세와 함께 백성들을 돌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11,29)
물론 모세의 생각은 맞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여호수아의 말이 맞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위해서 이스라엘의 원로들에게 하느님의 영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들이 예언을 했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을 이끌고 있는 모세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야기하며 하느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고 예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와 의탁이 없으면 아무리 큰 영적인 체험이 있다 할지라도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자신들도 예언을 한 번 해 봤기에 “나도 해 봤는데…,” 하면서 모세에게 반기를 들 것이고, 불평하며 선동하는 이들의 편에 서서 모세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의외로 가까운 가족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② 미르얌과 아론이 모세를 시기하다(민수12,1-9)
모세에게는 치포라라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치포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성경이 더 이상 이야기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장인 이트로가 모세의 아내 치포라와 두 아들을 데리고 시나이산으로 왔다고 언급한 이후에 치포라는 사라졌습니다. 치포라가 수송아지 사건 때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고, 자연적으로 사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연유인지는 잘 모르나 모세는 에티오피아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고, 미르얌과 아론은 모세가 아내로 맞아들인 그 에티오피아 여인 때문에 모세를 비방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민수12,2)
모세가 왜 에티오피아 여인과 혼인을 했는지는 성경은 명확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세의 누이와 형이 모세를 비난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일흔 명의 원로들에게 영을 내려 주실 때, 미르얌과 아론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미르얌과 아론은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셨다.”하면서 영도자 모세의 자리를 흔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염려한 것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미르얌과 아론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무리 모세라 할지라도 유다인들의 혼인풍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유다인들끼리 혼인하였고, 친족과 동족 안에서 배우자를 찾았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이사악도 그랬고, 야곱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 살붙이를 가까이하여 그의 치부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레위18,6)라고 말씀하시며 근친혼을 금지시키셨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탈출기 34장에서 가나안 땅의 주민들과 계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딸들을 며느리로 맞아들이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가나안 땅의 배우자를 통해 가나안 땅의 신들을 섬기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인과 혼인을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모세와 혼인한 그녀는 이집트에 포로로 잡혀 와서 강제 노역을 하다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실 때,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출애굽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끄셨으니 에티오피아 여인도 하느님 백성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느님 백성은 순수 이스라엘 민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함께 하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이 에티오피아 여인을 통해서 우상숭배에 빠질 위험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미르얌과 아론은 왜 이 혼인을 반대하며 모세를 비방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13,57)고 하셨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순간, 한 번 받은 하느님의 영에 도취해 있는 누이 미르얌과 형 아론은 모세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미르얌과 아론에게는 모세가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아니라 자신의 동생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르얌과 아론의 생각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라면 이스라엘 백성과 혼인을 해야 하고, 더 나아가 자신들의 허락을 당연히 받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에티오피아 여인은 이방인 여인이고, 이름도 밝혀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하찮은 여인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에티오피아 여인과 모세의 혼인은 모세에게도 어울리지 않으며, 자신들의 품위와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미르얌과 아론은 모세의 선택을 못마땅하게 받아들이며 모세를 깎아 내리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는 교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이 교만한 것이지 모세가 교만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을 한 번 받아 예언을 했던 그들은 어느새 모세와 동등한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있고, 하느님께 맞서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를 향한 비난은 모세를 이끄시는 하느님을 비난한 것입니다. 에티오피아 여인과의 혼인은 하느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누이와 형의 비난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 비난을 그냥 듣기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습니다.
미르얌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자 주님께서는 즉시 개입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모세와 아론과 미르얌에게 “너희 셋은 만남의 천막으로 나오너라.”(민수12,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주님께로 나아오자, 주님께서는 구름 기둥 속에 내려오시어 천막 어귀에 서시고, 아론과 미르얌을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르얌과 아론에게 모세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종 모세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의 예언자
하느님의 온 집안을
충실히 맡고 있는 사람
모세에게 맡겨진 사람들
하느님과 입과 입을 마주하여
말하는 사람
환시나 수수께끼로, 꿈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한 번 들어본 사람들
주님의 모습까지 볼 수 있는 사람
모세와 일흔 명의 원로는 격이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예언자가 있다 하더라도 모세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대하지 않을 경우에는 꾸중과 벌이 따라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미르얌과 아론을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두려움도 없이 나의 종 모세를 비방하느냐?”(민수12,8)
미르얌과 아론은 모세가 자신들의 동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하느님을 대하듯이 대해야 했습니다. 분명 아론은 모세의 입이 되면서부터 모세를 하느님을 대하듯 그렇게 대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영을 한 번 받고서 이렇게 교만하게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두 번 받았으면 아마 하느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③ 미르얌이 벌을 받다(민수12,10-16)
주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시며 떠나가시자 구름이 천막 위에서 물러갔습니다. 그러자 미르얌이 악성 피부병에 걸려 눈처럼 하얗게 되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의 손에 보여 주셨던 그 피부병이 미르얌을 덮어버린 것입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론이 모세에게 애원하였습니다.
“아, 나의 주인님, 우리가 어리석게 행동하여 저지른 죄의 값을 우리에게 지우지 마십시오. 미르얌을, 살이 반은 뭉그러진 채 모태에서 죽어 나온 아이처럼 저렇게 놓아두지 말아 주십시오.”(민수12,11-12)
아론은 모세를 “나의 주인님”이라고 호칭하며 자신이 모세에게 맡겨졌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또한 모세를 비방한 것에 대한 죄는 어리석음에서 나온 행동이니 용서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모세는 즉시 하느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느님, 제발 미르얌을 고쳐 주십시오.”(민수12,13)
모세가 주님께 청하자 주님께서는 “미르얌이 하느님의 벌을 받았다면 이레 동안은 그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면서 미르얌을 이레 동안 진영 밖에 격리하였다가 돌아오게 하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미르얌에게 이레 동안 악성 피부병으로 진지 밖에서 보내게 하신 이유는 모세를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원로들도 이제 기회만 되면 “나도 하느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니 모세의 말 뿐만 아니라 나의 말도 들어야 한다.”라고 백성들에게 말하며 모세를 어렵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르얌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백성들에게 “모세를 비방하거나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바라보는 모세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르얌은 모세의 누이였기 때문입니다. 미르얌이 벌을 받자 모세의 시종 여호수아는 안도했을 것입니다. 이제 당분간 모세에게 대항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④ 왜 에티오피아 여인인가?
모세는 에티오피아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이 혼인은 하느님의 이끄심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만 하느님 백성이 아니라 함께 나온 모든 백성이 하느님 백성입니다. 이 백성들을 통해서 세상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이 선포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티오피아 여인이 모세의 아내가 되었을 때, 히브리인이 아닌 다른 모든 민족들은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공정함을 맛보았을 것이고, 모세를 진정한 지도자로 우러러봤을 것입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미르얌과 아론은 공동체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론은 모세의 대변인이었고, 미르얌은 여예언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잘못하면 모세 집안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로얄 페밀리”로 비추어 질 수 있게 됩니다. 다행히 치포라는 이 백성과 상관없는 미디안 족이었기에 영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만일 열두 지파 중 한 지파에서 아내를 얻게 된다면 그 지파가 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평등해야 합니다. 아마도 아무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는 에티오피아 여인은 모세에게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셋째, 에티오피아인들도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과 앞으로 교류가 있을 것임을 미리 보여 주는 복선일 수 있습니다. 에티오피아는 역사상으로 오래 전부터 유대인들과 교류하였고, 에티오피아로 이주해 온 유대인들과의 혼인을 통해 흑인 유대인들이 생겨나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또한 에티오피아에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다는 전승과 동방박사들이 에티오피아에서 경배를 드리러 왔다는 전승도 그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언급 자체가 에티오피아인들에게는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하느님의 겸손한 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혼인을 통하여 하느님 백성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인종과 문화, 지역을 떠나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세상 모든 이들입니다. 에티오피아 여인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은 “우리”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이들”을 향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나눔 40: 가장 가까이에 있는 봉사자를 나는 어떻게 사랑하고 존경해 주고 있습니까? 어떻게 그들을 도와주고 있습니까?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2.2. 가나안 정찰과 40년의 광야 생활(민수 13,1-14,45)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각 지파에서 모두 수장을 한 사람씩 뽑아 가나안 땅을 정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주님의 분부에 따라 파란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우두머리를 한 명씩을 선발하여 가나안으로 보냈습니다.모세는 가나안 땅을 정찰하라고 그들을 보내면서 그 땅이 어떠한지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그곳에 사는 백성이 어떠한지를 잘 살피고, 그 땅의 과일을 가져오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정찰대는 모세의 명령대로 가나안 땅을 사십 일 만에 정찰하고 포도송이와 석류와 무화과를 따서 돌아왔습니다.
① 정찰대의 보고(민수13,25-33)
정찰대는 모세와 아론과 온 공동체에게 그 땅의 과일을 보여 주면서 보고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대해서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곳 과일입니다.”하며 약속의 땅의 풍요로움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절망적인 이야기를 쏟아냈습니다. “그 땅에 사는 백성은 힘세고, 성읍들은 거창한 성채로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그곳에서 아낙의 후손들도 보았습니다.”(민수13,28) 정찰대는 기골이 장대한 아낙의 후손들을 시작으로 강한 민족들을 줄줄이 나열하며 “땅을 좋으나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 판단하도록 선동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유다 지파의 칼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진정시키면서 “어서 올라가 그 땅을 차지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해낼 수 있습니다.”(민수13,30) 라고 말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나서지 않고 칼렙이 나선 이유는 여호수아가 언제나 모세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고, 여호수아가 나서면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가 모세 편에 서서 진실을 감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칼렙은 가나안이 너무도 풍요로운 땅이기에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주시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파라오의 군대를 물리쳐 주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하여 그 땅의 모든 민족들을 당연히 물리쳐 주실 것임도 믿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칼렙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도 하느님께서 이기게 해 주셨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칼렙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해 주시기에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② 백성이 반란을 일으키다(민수14,1-9)
칼렙과 함께 올라갔던 이들은 가나안 땅의 민족들의 강함을 강조하면서 절망적인 이야기들을 쏟아냈습니다. 그 땅은 주민들을 삼켜 버리는 땅이요, 그곳의 강한 민족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메뚜기 같아 보인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온 공동체가 소리 높여 아우성쳤습니다. 거짓정보에서 두려움과 절망을 움켜잡은 백성들은 밤새도록 통곡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와 아론에게 투덜거렸습니다.
“우리가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아니면 이 광야에서라도 죽어 버렸으면! 주님께서는 어쩌자고 우리를 이 땅으로 데려오셔서, 우리는 칼에 맞아 쓰러지고, 우리 아내와 어린것들은 노획물이 되게 하시는가?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민수14,2-3)
두려움을 움켜잡은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에 전혀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원망하며 다시 이집트의 노예살이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이렇게 제시하였습니다.
“우두머리를 하나 세워 이집트로 돌아가자.”(민수14,4)
이스라엘 백성이 반란을 일으키자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의 회중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이 백성의 영도자인 모세는 당당하게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며 그들을 진정시켜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두려웠을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터져 나온 노예근성은 예의를 잊게 만들고, 더 나아가 하느님도 잊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백성들에게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은 섬김의 리더쉽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지도자의 권위는 하느님께로부터 나오지만 군림하지 않는 권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백성이 존중하지 않고, 따라주지 않으면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이 현세에서는 전혀 없습니다. 또한 모세와 아론에게 하느님 백성은 섬김의 대상이지 싸움의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모세와 아론은 땅에 엎드리며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겼습니다.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기에 하느님께서 분명 개입하시어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반란을 여호수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일흔 명의 원로들에게 하느님의 영이 내릴 때, 모세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의 본성을 알고 있었기에 우려하였습니다. 여호수아의 우려대로 하느님의 영을 한 번 받은 경험이 있는 원로들은 모세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며, “자신들 중 한명이 우두머리가 되어”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을 제시한 것입니다.
드디어 여호수아가 나섰습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푼네의 아들 칼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칼렙이 옷을 찢은 이유는 슬픔과 분노와 애통함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이 눈앞에 있지만 이들은 가나안의 주민들을 두려워하여 그곳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다른 지도자를 뽑아 이집트의 종살이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하느님께 대한 배반이기에 하느님께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는 여호수아와 칼렙에게는 분노로 다가왔습니다.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하느님의 약속을 잊고 두려움을 붙잡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칼렙은 이 백성의 어리석은 선택에 슬픔을 느끼며 진실을 말해 주고자 자신들의 옷을 찢었습니다. 또한 한생을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 힘써 온 모세와 아론이 백성들 앞에 엎드려 있는 상황에 분노와 애통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칼렙은 자신들이 직접 보고 온 사실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가로지르며 정찰한 저 땅은 정말 무척이나 좋은 땅입니다. 우리가 주님 마음에 들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저 땅으로 데려가셔서 그곳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민수14,7-8)
여호수아와 칼렙은 “그러므로 모세를 위협하며 주님을 거역해서는 안 되고, 가나안 땅의 백성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이 백성과 함께 계시니 두려워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역의 무리는 여호수아와 칼렙의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돌을 던져 여호수아와 칼렙을 죽이자고 말을 해 댔습니다. 그들 눈에는 여호수아와 칼렙이 모세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미 이집트를 향하여 마음을 돌린 그들은 모세도 돌을 던져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③ 하느님의 분노와 모세의 중재(민수14,10-38)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돌을 던져 여호수아와 칼렙을 죽이려고 하자 하느님께서 즉시 개입하셨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만남의 천막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났습니다. 주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이들은 모세와 아론에게까지 돌을 던졌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노하시고 후회하시며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은 언제까지 나를 업신여길 것인가?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일으킨 그 모든 표징을 보고도, 이자들은 언제까지 나를 믿지 않을 것인가?”(민수14,11)
그런데 하느님의 실망과 분노는 이 백성을 향한 것이 아니라 모세에게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모세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이제 이들을 흑사병으로 치고 쫓아내 버린 다음, 너를 이들보다 더 크고 강한 민족으로 만들겠다.”(민수14,12)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미안하셔서 이렇게 먼저 말씀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백성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맡기셨으니 그 책임은 모세에게 있습니다. 모세는 한생을 하느님 백성을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드디어 반란까지 일으켰고, 이제는 돌을 들어서 모세를 치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분명 돌을 던졌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면서 분명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여러 번 들었을 것이고, 하느님께서 이 백성에게 분노하실 때, “맞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유혹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종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책임지고 있는 모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을 섬겨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영도자라는 자리”를 주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자유와 구원을 위해서 모세에게 사명을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주님은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충만하며 죄악과 악행을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용서를 청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여기에 올 때까지 이 백성을 용서하셨듯이, 이제 당신의 그 크신 자애에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민수14,19)
아마 주님께서 모세로부터 듣고 싶으셨던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간청을 들으시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말대로 내가 용서해 주마.”(민수14,20)
죄는 용서 받지만 벌은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보고도 믿지 않은 이들은 파라오가 열 가지의 재앙을 겪은 다음에 하느님께 항복하였듯이, 이스라엘 백성도 그런 운명을 끌어당겼습니다. 하느님의 구원과 사랑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잊어버린 백성은 파라오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축복이 내려집니다.
“나의 종 칼렙은 다른 영을 지녀 나를 온전히 따랐으므로, 나는 그가 다녀온 땅으로 그를 데려가고, 그의 후손들이 그 땅을 차지하게 하겠다.”(민수14,24)
칼렙이 다른 영을 지녀 하느님을 온전히 따랐다는 것은 두려움과 불신을 가진 사람들과는 달리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 안에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의 시종 여호수아도 언제나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었고, 모세의 뒤를 이어서 이 백성을 이끌 책임을 맡겨 주실 것이기에 지금은 칼렙만 언급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원된 하느님 백성은 변화된 삶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하고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느님의 종에게 위협을 가한 백성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에서 나온 말로 벌을 내리십니다.
첫째, “너희는 내일 발길을 돌려 갈대 바다 쪽 광야로 떠나라.”(민수14,25) 이제 그들이 가야 할 길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 광야입니다. 그들이 하느님께서 이끄시고자 했던 약속의 땅을 “땅을 좋으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고 말했기에 그들 말대로 약속의 땅이 아니라 광야로 떠나야 합니다.
둘째, “너희 가운데 스무 살 이상이 되어, 있는 대로 모두 사열을 받은 자들, 곧 나에게 투덜댄 자들은 모두, 여푼네의 아들 칼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만 빼고, 내가 너희에게 주어 살게 하겠다고 손을 들어 맹세한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민수14,29-30) 이제 하느님께 불평했던 이들은 그들의 말대로 될 것입니다. “이 광야에서라도 죽어 버렸으면!”하며 하느님께 불평했던 이들은 자신들의 말대로 광야에서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셋째, “노획물이 되리라고 너희가 말한 너희의 어린것들만 내가 데려가서, 너희가 업신여긴 저 땅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게 하겠다.”(민수14,31)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의 자리에서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약속의 땅은 하느님처럼 말하는 이들의 땅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하느님께서는 광야에서의 기간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자식들은, 너희가 모두 주검으로 이 광야에 누울 때까지, 너희가 배신한 값을 지고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칠 것이다. 너희가 저 땅을 정찰한 사십 일, 그 날수대로,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너희는 사십 년 동안 그 죗값을 져야 한다.”(민수14,33-34)
이스라엘 백성은 축복을 불행으로 바꿔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그 땅을 정찰하러 갔던 사람들 가운데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푼네의 아들 칼렙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이들은 약속의 땅에서 하느님 백성을 이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따로 모세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 또한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너의 시중을 드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그곳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가 바로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해 줄 사람이니, 너는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어라.”(신명1,37-38)
하느님께서는 분명 모세에게 사랑스럽게 말씀하셨겠지만 듣고 있는 모세에게는 눈물 나는 말씀입니다. 한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아왔고, 한생을 하느님 백성을 위해서 살아온 모세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죽어갈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운명을 지닌 상황에서 공동체를 이끌어 가도록 하셨습니다. 만일 지도자가 백성의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라면 백성들은 결코 지도자를 따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지도자인 모세까지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들은 끝까지 모세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과 같은 생활을 하며, 같은 운명을 짊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함을 통해서 당신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또한 이것을 통해서 공동체의 지도자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도자는 풍요로운 생활을 하면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는 궁핍한 생활을 요구한다면 그는 지도자가 아닙니다. 지도자는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같은 조건에서 생활해야 하며, 같은 법 아래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고, 그것이 바로 섬김의 리더쉽을 살아가는 지도자의 삶이어야 합니다. 이제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광야에서 죽을 운명을 지닌 백성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섬김의 리더쉽은 “내가 이 일을 끝마쳐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나는 하느님의 작은 도구”라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운함이 밀려와 눈물이 눈앞을 가린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④ 백성이 만용을 부리다(민수14,39-45)
모세는 하느님의 심판을 백성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슬퍼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희망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다음날 다시 엉뚱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자, 우리가 잘못하였으니,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곳으로 올라가자.” 하면서, 산악 지방의 고지대로 올라갔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잘못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아말렉족과 싸워 이겼던 것을 기억하면서 그들과 싸우려 하였습니다. 모세는 이들을 말렸습니다. 그 싸움은 하느님께서 계셨기에 이긴 것이지 자신들의 힘으로 이긴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용서를 청하며 참회할 때이지 만용을 부릴 때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회개의 삶입니다.
“너희는 어쩌자고 주님의 분부를 거스르느냐? 이 일은 성공하지 못한다. 주님께서 너희 가운데에 계시지 않으니, 너희가 적에게 패배하지 않으려거든 올라가지 마라.”(민수14,41-42)
하느님 백성은 주님의 뒤를 따라야지, 주님께 따라오라고 말씀드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계약 궤와 모세가 진영을 떠나지 않았는데도, 만용을 부려 산악 지방의 고지대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어차피 여기서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오히려 싸우는 것이 더 생존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모세가 말한 그대로였습니다. 그 산악 지방에 사는 아말렉족과 가나안족이 내려와, 만용을 부리던 이스라엘 백성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쫓아 버렸습니다.
백성들의 만용은 “섬김의 리더쉽”의 한계를 다시 한번 드러냅니다. 이들이 모세의 권위를 인정해 주었다면 모세의 말에 순명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면 하느님의 영을 한 번 받았던 일흔 명의 원로들이 결코 교만한 생각과 무례한 행동을 모세에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 백성을 말릴 수 있는 위엄은 가지고 있지만 법적인 권한은 행사할 수 없습니다.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여 법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공동체와 사회공동체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추구하는 이념도 서로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위하여 십계명을 주시고, 규정과 규칙들을 주셨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 나아가 하느님까지 부정하게 될 때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철저하게 익히게 하고, 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섬김의 리더쉽”도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유의지를 통제할 물리적인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나눔 41: 복을 걷어찬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들 안에서 나의 모습을 찾아봅시다. 내가 복을 걷어찬 것은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두려움과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붙잡지 못한 복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2.3. 코라와 다탄과 아비람의 반역(민수16,1-17,28)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오늘만 살아가게 되고,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 생각합니다. 또한 자신의 능력을 착각하는 이들은 겸손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멀어지게 되자 모세와 아론을 무능한 존재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는 “모세와 아론”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나도 모세와 아론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권력에 대한 욕망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파들이 다 들고 일어난다 할지라도 모세와 아론과 같은 레위 지파에서는 열성을 다하여 모세를 지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레위 지파의 코라가 르우벤 지파의 다탄과 아비람과 온과 함께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모세를 비방하다가 미르얌이 악성 피부병에 걸린 것을 그들은 잊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이백오십 명과 함께 모세에게 맞서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집회에서 뽑힌 공동체의 수장들로서 이름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몰려와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들은 너무하오. 온 공동체가 다 거룩하고,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계시는데, 어찌하여 당신들은 주님의 회중 위에 군림하려 하오?”(민수16,3)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딱 한 번, 주님의 영을 받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원로들이 모세를 도와야 하고, 원로들이 모세와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모세와 일치할 수 있도록 그렇게 영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원로들은 하느님의 계획을 잘못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더 나아가 “악행을 저지르고 벌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하느님 안에 있다고 착각을 하였습니다. “온 공동체가 다 거룩하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섬김의 리더쉽의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공동체가 “어찌하여 당신들은 주님의 회중 위에 군림하려 하오?”라고 말할 때는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처럼 겸손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세와 아론을 교만한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염려한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계속해서 섬김의 리더쉽을 살아가는 한,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즉, 교회 내에서도 이 일은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코라의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켜 모세에게 대항하자 모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양떼가 목자에게 교만하다고 이야기하면 목자는 변명할 것이 아니라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세는 그들과 얼굴을 맞대고 싸우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섬기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코라와 그의 온 무리에게 “내일 아침에 주님께서는 누가 당신의 사람이고, 누가 거룩하며, 누가 당신께 가까이 갈 수 있는지 알려 주실 것이다. 당신께서 선택하신 사람을 당신께 가까이 오게 하실 것이다.”(민수16,5)라고 말하며 이렇게 지시하였습니다.
“코라와 그의 무리는 모두 향로를 가지고 오너라. 내일 주님 앞에서 향로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피워라. 그때에 주님께서 선택하시는 사람이 바로 거룩한 사람이다. 레위의 자손들아, 너희야말로 너무하구나.”(민수16,6-7)
레위 지파의 코라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만 사제직무를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백성의 지위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각자의 역할이 다른 것입니다. 성막의 봉사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레위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하기에 레위인들을 병역에서 면제시켜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인들은 자신들이 그저 성막의 봉사자들이고, 사제들의 시종 정도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제직을 권력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이제 성막의 봉사자가 아니라 사제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반역의 무리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무리요, 평등을 모르는 무리이며, 권력을 추구하는 교만한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을 향하여 “레위의 자손들아, 너희야말로 너무하구나.”라고 한탄하였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서로 평등한 사람들로서 서로 존중하며 각자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모세에게 반역한 무리는 이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반역의 무리의 잘못을 명확하게 지적합니다.
“너와 너의 무리는 바로 주님을 거슬러 모여든 것이다. 아론이 누구인데 너희가 그에게 투덜댄다는 말이냐?”(민수16,11)
모세는 이렇게 레위 지파만 불러놓고 지파의 자세에 대해서 엄하게 훈계하였습니다. 모세는 다른 반역자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들도 향로를 들고 하느님 앞으로 나아오라고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 앞으로 나아오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집트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하며 이렇게 모세에게 대항하였습니다.
“우리는 올라가지 않겠소.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이 광야에서 죽이는 것만으로는 모자라서, 이제 우리 위에서 아주 군주 노릇까지 하려 드시오? 더군다나 당신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지 못하였소. 그리고 밭과 포도원을 우리 소유로 주지도 못하였소. 당신은 이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할 셈이오? 우리는 올라가지 않겠소.”(민수16,12-14)
반역의 무리들은 모세를 눈먼 지도자, 무능한 지도자, 자신들을 광야에서 죽이려 하는 지도자로 매도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군주 노릇까지 하려 하느냐?”하면서 모세를 비난하였습니다. 차라리 모세가 군주로 살았으면 이런 일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모세는 드디어 화가 나서 서운한 감정을 하느님께 드러냅니다.
“저들이 바치는 제물에는 눈도 돌리지 마십시오. 저는 저들에게서 나귀 한 마리 가져오지 않았고, 저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민수16,15)
모세는 많이 억울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봉사를 당연하게만 여겼지, 모세를 섬길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도 이들을 본받아 예수님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였습니다. 겸손한 모세는 남의 것을 탐하지도 않았고, 부정하게 뇌물을 받고 송사를 그르게 판단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심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니 억울함이 있다 할지라도 판단은 하느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이제 모세는 아론이 누구인지를 반역의 무리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모세가 지시한 대로 아론을 포함하여 반역의 무리들이 모두 자기 향로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피운 다음 만남의 천막 앞에 섰습니다. 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온 공동체에게 나타났습니다. 아마도 반역의 무리들은 “이제 우리도 아론처럼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이 공동체를 한 순간에 없애 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모세와 아론은 “하느님, 모든 육체에 영을 주시는 하느님, 죄는 한 사람이 지었는데, 온 공동체에게 격분하십니까?”(민수16,22) 라고 말씀드리며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자비를 청하자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악인들과 이스라엘 백성을 분리시키고, 반역자들에게 딸린 것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뜻의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말이 있습니다. 나쁜 사람과 가까이하면 나쁜 버릇에 물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반역의 무리와 함께 하면 당연히 그들 무리의 일원이 됩니다. 더 나아가 그들이 받게 되는 벌에 휘말리게 됩니다.
“너희는 이 악인들의 천막을 떠나라. 그들에게 딸린 것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라. 그랬다가는 그들의 모든 죄 때문에 너희도 같이 휘말려 죽을 것이다.”(민수16,26)
공동체는 코라와 다탄과 아비람의 거처 주변에서 물러섰습니다. 공동체가 반역자들의 주변에서 물러나자 하느님께서는 반역자들의 발밑의 땅바닥이 갈라지게 하여 반역자들의 집안의 모든 것을 삼켜 버리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반역의 무리들은 공동체 가운데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어서 주님에게서 불이 나와, 향을 바치던 이백오십 명을 삼켜 버렸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죄, 하느님의 부르심을 자기들 마음대로 바꾸려 한 죄, 권력에 대한 탐욕의 죄, 그 죄의 벌로 그들은 공동체에서 사라져 땅속으로 끌려 들어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불탄 자리의 향로를 모아 두드려 펴서 제단을 씌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표징이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명령대로 아론 사제의 아들 엘아자르에게 말하여 그대로 실행하였습니다. 그렇게 사제직은 아론의 후손에게 명확하게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 당신께서 아론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드러내십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각 집안의 수장에게서 지팡이 하나씩 열두 개를 거둔 다음 그 지팡이에 수장의 이름을 쓰게 하였습니다. 레위 지파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게 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팡이들을 만남의 천막 안, 증언판 앞에 놓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선택하는 바로 그 사람의 지팡이에서 싹이 돋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희에게 투덜거리는 것을 멈추게 하겠다.”(민수17,20)
이튿날 모세가 증언판을 모신 천막에 들어가 보니, 레위 집안을 대표한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 있었습니다. 싹이 나오고 꽃이 피고 편도 열매가 이미 익어 있었습니다. 모세가 그 지팡이들을 모두 주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내오자, 그들은 저마다 자기 지팡이를 찾아 들었습니다. 각 지파의 수장들은 아론의 지팡이를 보고 깜짝 놀라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아론은 자신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론의 지팡이는 증언판 앞으로 도로 가져다 놓아, 반역자들에게 표징이 되도록 보존하여라. 그렇게 해서 너는 그들이 나에게 그만 투덜거려, 그런 일로 죽는 일이 없게 하여라.”(민수17,25)
모세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반기를 든 코라 일당의 죽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은 기적도 확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두 눈으로 하느님의 뜻을 확인하자 자신들도 반역의 무리들처럼 그렇게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우리는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망했습니다. 다 망했습니다.”하고 절망하였습니다. 아론이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 두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봉사직무는 권력이 아닙니다. 그 직무를 차지하기 위해 로비를 해서도 안 되고, 그 직무를 차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켜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오늘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봉사직무는 말 그대로 봉사직입니다. 모세처럼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백성을 섬기는 봉사직입니다. 또한 직무가 주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봉사할 수 있습니다. 더욱 자유롭게 봉사할 수 있고, 봉사하는 이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 직무를 내가 꼭 차지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는 코라 일당과 같은 운명을 끌어당길 것이고, 지파의 수장들처럼 그렇게 두려움에 떨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나눔 42: 내가 어울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신앙인의 눈으로 바라봅시다. 나와 어울리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과 어울리며 나의 영적인 모습은 어떻게 변화되고 있습니까?
2.4. 구리 뱀 사건(민수21,4-9)
이스라엘 백성은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산을 떠나 갈대 바다로 가는 길에 들어섰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점점 멀어지는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백성은 모세에게 불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21,5)
모세에 대한 불평은 하느님께 대한 불평임을 그들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백성의 멸망을 바라시지 않고 회개하여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후회하며 참회의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모세의 말에 순종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백성은 오히려 불평과 불만의 화살을 모세에게 쏘아 대며, 모든 책임을 모세에게 돌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광야에서의 고된 삶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 대한 불신과 배반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 결코 모세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세는 그들을 파라오의 손에서 건져낸 그들의 구원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배은망덕하고 불평불만에 사로잡힌 이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습니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백성들은 모세에게 와서 간청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민수21,7)
이스라엘 백성의 이 모습을 보면 마치 파라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파라오도 어려움이 닥치면 그때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재앙이 사라지면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그런 백성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민수21,8)
하느님의 말씀대로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습니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물린 사람은 구리로 된 불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왜 뱀일까요? 당시 주변에는 뱀을 신으로 섬기는 민족들이 많이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하던 이집트도 뱀을 신성시 했습니다. 자칫하면 뱀을 섬기는 우상 숭배로 빠질 위험도 있었습니다.
첫째, 성경에서 뱀은 죽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은 결국 하느님과 인간을 갈라놓았고, 아담과 하와에게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 마음을 품게 하였습니다. 끊임없이 불평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 윗자리에 앉으려는 이 백성의 모습은 뱀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불 뱀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어떻게 되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행동하는 이들은 유혹에 빠진 것이고, 그 유혹의 끝은 죽음이라는 것을 불 뱀을 통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둘째, 불 뱀에게 물린 사람들은 모세에게 불평하며 하느님께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죽어가는 상태에서 자비를 청하며 구리로 만든 불 뱀을 바라보게 됩니다. 지금 이들은 살기 위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구리로 만든 불 뱀은 “하느님의 표현이거나 숭배의 대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을 살리시기 위한 표징인 것입니다. 구리로 만든 불 뱀이 이 백성을 살린 것이 아니라 용서를 청하며 하느님께 매달렸기에 하느님께서 살려 주신 것입니다.
셋째, 이 불 뱀 사건은 십자가에 달리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미리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3,1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3,16)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광야에서 자기 죄 때문에 불 뱀에 물린 이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청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자비를 청하며 구리로 만든 불 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로부터 생명을 얻었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구리로 만든 불 뱀을 보며 자비를 청하여 하느님께로부터 다시 생명을 얻었듯이, 이제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차례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나아갈 때, 그렇게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나눔 43: 약속의 땅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이스라엘 백성의 절망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죄를 지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지만 인간인지라 늘 용서받고 싶습니다. 또한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라는 절망과 불평을 내 안에서 찾아보고, 이 절망과 불평을 어떻게 희망과 감사로 바꿀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 봅시다.
하느님 백성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삶의 방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절망과 고통은 구원과 부활을 향해 나아가는데 있어서 밟고 지나가야 할 발판 중의 하나라는 것을 시간이 지난 후에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2.5. 주님의 종 모세의 죽음(신명 31,14-34,12)
주님께서는 모세의 마지막 때가 가까워지자 모세와 여호수아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백성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세와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자, 이제 너는 조상들과 함께 잠들 것이다. 그러나 이 백성은 저 땅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낯선 신들을 따르며 불륜을 저지르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나를 저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나의 계약을 깨뜨릴 것이다.”(신명31,16)
하느님께서는 이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느님을 잊고, 우상숭배에 빠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느님의 구원과 업적을 기억할 수 있도록 노래로 적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끝까지 이 백성의 지도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날 모세는 이 노래를 적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① 모세의 노래(신명32,1-43)
노래에는 부르는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잘 알고 있는 모세는 노래로 하느님께서 누구신지를 알려 줍니다. 모세가 알고 있는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자애가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용서를 청할 때 언제나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모세는 이것을 노래에 담았습니다. 모세의 인생에는 많은 눈물이 담겨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많은 눈물을 흘린 사람이라면 모세의 노래가 가슴 깊이 와 닿을 것입니다. 모세의 노래는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이 백성을 구원하신 하느님만을 참된 하느님으로 섬기며 우상숭배에 빠지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자비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라는 내용입니다. 모세는 그 내용을 노래로 만들어 부모는 자녀에게, 공동체는 다음 공동체에게 전해 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모세의 노래를 전해 주어야 하는 이유는 기억하기 위해서이고, 하느님의 구원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이 백성이 하느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노래를 만들고 있는 모세의 모습은 큰 감동을 줍니다. 약속의 땅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모세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백성들을 위하여 노래를 지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그 노래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섬김의 리더쉽은 자기 때에 결실을 거두려고 하는 삶이 아니라 열매를 맺도록 거름을 주고, 나무를 다듬어서 다음 사람이 결실을 거둘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② 느보산에서의 모세(신명 32,48-52)
주님께서는 모세를 느보산으로 부르시어 이 백성이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백성을 그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사십 년 동안 그 힘든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보여 주기만 하시고, 모세에게는 그곳에 못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선조들 곁으로 간 것처럼, 너도 네가 올라간 산에서 죽어 선조들 곁으로 가야 한다. 그것은 너희가 친 광야에 있는 므리밧 카데스 샘에서, 이스라엘 자손들 한가운데에서 나를 배신하였고, 이스라엘 자손들 한가운데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는 땅을 멀리 바라보기만 할 뿐 들어가지는 못한다.”(신명 32,50-52)
므리바에서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몰려와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어쩌자고 당신들은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고약한 곳으로 데려왔소? 여기는 곡식도 무화과도 포도도 석류도 자랄 곳이 못 되오. 마실 물도 없소.”(민수20,5) 모세와 아론은 공동체 앞을 떠나 만남의 천막 어귀로 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지팡이를 집어 들고, 너의 형 아론과 함께 공동체를 불러 모아라. 그런 다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저 바위더러 물을 내라고 명령하여라. 이렇게 너는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하여, 공동체와 그들의 가축이 마시게 하여라.”(민수20,8)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주님 앞에 있는 지팡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모세는 공동체를 바위 앞에 불러 모은 다음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반항자들아, 들어라. 우리가 이 바위에서 너희가 마실 물을 나오게 해 주랴?”(민수20,10)
서운함이 밀려오거나 화가 났을 때는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화가 난 상태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게 되면 반드시 실수하게 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화가 나 있는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을 절제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마치 자신이 바위에서 물이 쏟아지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말하였습니다. 감정을 절제하지 못한 모세가 지팡이로 그 바위를 두 번 치자, 많은 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것 또한 모세의 실수입니다. 모세는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칠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팡이를 들고 바위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령만 하면 충분했습니다. 바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여 물이 터져 나오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은 모세가 바위에서 쏟아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쏟아지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잘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지적하시며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공동체에게 주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민수20,12)
주님의 종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해야 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주님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주님의 종에게는 죄가 됩니다. 그런데 민수기와 탈출기의 내용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민수기와는 달리 탈출기에서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그 바위를 치면 그곳에서 물이 터져 나와, 백성이 그것을 마시게 될 것이다.”(탈출17,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가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평범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피조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신 분, 피조물을 창조하신 분, 그분께만 “거룩함”이 온전히 해당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은 모세가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방법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온전한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냄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했습니다. 바위에서 물이 쏟아지게 만드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심을 드러냈어야 했는데, 모세는 므리밧 카데스 샘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약속의 땅을 보여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 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신명34,4-5)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번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종에게 장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그곳이 바로 약속의 땅이요,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느보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모세는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죽어간 동족들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이유는 자신이 들어가야 동족들도 광야에서 생을 마치지 않고 약속의 땅을 밟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죽어간 이들도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받고 있었던 하느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 백성에게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고, 모세로 하여금 광야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랑의 등불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종 모세는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았고, 역경 속에서도 원망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였습니다.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 땅에서 죽었습니다.
③ 하느님 백성의 지도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세 가지
하느님의 종 모세의 삶은 하느님을 위한 삶이었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모세의 삶은 하느님 백성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광야에서의 삶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고통이 아니라 모세에게도 큰 고통이었습니다. 모세는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이 백성을 이끌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는 부르신 분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부르신 분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모세의 뒤를 잇는 여호수아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제 모세는 자신의 일을 내려놓고 여호수아에게 나머지 일을 맡겨야 할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여호수아를 사랑한 모세는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다음 이 세 가지를 분명하게 여호수아에게 이야기해 주었을 것입니다.
첫째, 하느님의 일을 할 때는 하느님께서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는 것을 굳게 믿고 행동하라.
둘째,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이들은 공동체의 반대 속에서도 당당하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수행해야 한다.
셋째, 하느님의 일을 할 때는 봉사자들과 함께 해야 하는 것이기에 조직관리를 지속적으로 잘 해야 한다.
여호수아도 섬김의 리더쉽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은 섬김의 대상이기에 하느님 백성과 다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백성은 인도의 대상이기에 강한 훈육과 지속적인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백성이 원하는 것이 언제나 진리는 아닙니다. 백성이 원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허락해서는 안 되고, 절제시켜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의 삶의 모습을 모르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들을 다 받아들여서는 결코 안 됩니다. 모세는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면서 섬김의 리더쉽의 한계와 자신 안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부족함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여호수아에게 자주 이야기해 주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자신의 부족함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도록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위의 세 가지를 반드시 지킬 수 있도록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이들은 다음 세 가지를 분명하게 명심해야 합니다.
첫째, 하느님의 일을 할 때는 하느님께서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는 것을 굳게 믿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모세를 부르신 하느님께서는 모세가 하고자 하는 것에 은총을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모세가 확신을 가진 순간부터 모세는 당당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파라오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갈대 바다 앞에서 당당하게 지팡이를 높이 들어 올려 마른 땅을 밟고 이스라엘 백성이 갈대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습니다. 확신을 가진 하느님의 종은 누군가가 “어떻게 그런 것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한다면, 기쁨에 가득 차서 “제가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신 것입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붙잡으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게 됩니다. 두려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못하게 만들고, 확신의 기초를 흔들어 놓아 하느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굶주림과 갈증 속에서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는 하느님 백성을 향해서도 하느님께서 주신 지팡이를 높이 들어 굶주림과 갈증 속에서도 음식이나 물을 찾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찾아야 한다고 소리를 높여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종은 언제 어디서나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둘째,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이들은 공동체의 반대 속에서도 당당하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수행해야 합니다. 불가능한 것은 인간에게나 불가능한 것이지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약속의 땅을 정탐하고 온 열두 명의 사람들 중에 열 명이 불가능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말을 받아들여 불신자들의 무리로 변해버렸습니다. 하느님의 영을 한 번 받았던 원로들은 모세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폭도들에게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칼렙과 여호수아가 공격당하는 상황에서 모세는 그들 앞에 엎드릴 것이 아니라, 더욱 확신에 차서 지팡이를 높이 들어 올리며 하느님의 뜻을 전해야 했습니다. 폭도로 변한 그들 앞에서 당당하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며, 종살이 하던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를 꾸짖고, 하느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으로 가야 한다고 지팡이를 높이 들어 외쳐야 했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지도자는 폭풍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방향을 비추는 등대처럼 그렇게 하느님을 향한 길을 비추며, 공동체가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셋째, 하느님 백성의 지도자는 홀로 공동체를 이끌 수 없으니 봉사자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봉사자들이 영적으로 눈먼 봉사가 되지 않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교육하며 조직관리를 해야 합니다. 봉사자들을 영적으로 성숙시켜야 하고, 하느님 안에서 일치하며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함께 하던 이들이 등을 돌리게 되면 그 누구보다도 무서운 적이 됩니다. 하느님의 백성도 사람의 무리이기에 지속적인 교육과 조직관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올바른 인성 위에 신앙이 자라게 하고, 그렇게 성숙된 신앙 안에서 봉사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공동체의 리더는 끊임없이 배려해야 합니다.
이트로는 모세가 혼자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이트로의 말대로 백성들 중에서 유능한 사람들을 뽑아 천인대장, 백인대장, 오십인대장, 십인대장으로 삼았습니다. 물론 성경의 관심사는 아니겠지만 모세가 뽑은 이들과 백성의 원로들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과 조직관리를 어떻게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만일 모세가 이들이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영안에서 살도록 자극하며,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마음속에 자리 잡도록 해 주었다면, 백성들의 동요와 불신을 잠재우고 모세를 신뢰하며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데 큰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하느님 백성답게 살도록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계명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을 지켰다면 그들은 결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속적으로 계명을 배우고, 배려와 존중을 배워 익혀 삶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책임을 맡은 이들과 함께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했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불평과 불만, 판단과 심판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라 인내와 친절, 사랑과 용서에 익숙한 사람들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막에도 지속적으로 비가 오면 풀이 자라고 꽃이 피게 됩니다. 그러나 그 비가 그치게 되면 다시 모래로 덮이게 됩니다. 하느님 백성은 사막과 같습니다. 사막과 같은 하느님 백성을 끊임없이 돌보며 은총의 비를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이 은총의 비로 말미암아 신앙이 깊이 뿌리 내릴 때, 어떤 시련 속에서도 푸르름을 간직하고, 제때에 풍성한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이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④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모세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자신이 맡았던 무거운 짐을 인계하고 마지막 숨을 내쉬었습니다. 여기까지가 모세가 맡은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느보산에서 모세의 마지막 기도”
저는 “그곳에 들어가지 못 한다” 하시니 여기서 내려놓겠습니다.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주시니 그것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 저의 책임이니,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죽어간 동족들을 위해서라도
저는 저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들을 저곳으로 이끌지 못한 인도자였기에
저는 저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 약속의 땅이 보이기는 하나 눈물에 가려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느보산의 바람이 제 눈에 들어와 눈물을 나게 한 듯 합니다.
긴 시간을 걸어 왔습니다.
돌아보면 잘못한 것들과 부족한 것들이 너무도 많이 있었습니다.
두렵기도 했고, 놀랍기도 했습니다.
“불타는 떨기나무에 가까이 가지 않았었더라면” 하고 후회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불어오는 모래바람은
이 백성의 불평과 불만을 보는 듯하였고,
매일매일 쏟아지는 불평과 불만은
수많은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괴로워하게 만들었습니다.
광야의 밤은 길기만 하였습니다.
제가 사랑한 제 동족은 저보다는 자신들을 더 많이 사랑했고,
제가 사랑한 당신의 백성은 주님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가라 하신 이 길을 오늘까지 걸어왔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백성과 함께한 시간, 사십 년.
부족한 저를 이렇게 써 주셨으니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제 동족을 약속의 땅으로, 자유의 땅으로 이끌 수 있었기에
행복했습니다.
긴 시간을 걸어왔습니다.
파라오의 억압에서 풀려나왔을 때는 저 땅이 눈앞에 있는 듯 했습니다
갈대 바다를 가르며 마른 발로 홍해를 건널 때는
제 자신이 너무도 자랑스러웠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힘차게 저 땅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제 눈에는 오직 주님만 보였습니다.
제 동족들도 너무나 기뻐했고, 저를 존중해 주고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행복한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의 삶은 제 동족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먹어야 했고 마셔야 했기에 그 모든 것이 불편으로 다가왔고,
저를 향한 원성은 날마다 높아만 갔습니다.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어 주셨고,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해 주셨지만
그때뿐이었습니다.
긴 시간 동안의 노예 생활은 존중을 잊게 했고, 배려를 잊게 했고,
섬김과 따름을 잊게 했습니다.
조상의 전통도 모르고, 신앙도 모르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편안해야 했고,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져야 했으며, 자신들을 알아주어야 했습니다.
끊임없는 불평과 불만, 그리고 반란.
그들 입에서 감사가 터져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감사하다며 저에게 염소 새끼 한 마리 가져다 준 적도 없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졌기에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단 말입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백성인 제 동족을 저는 사랑했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그리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긴 시간을 걸어왔습니다.
오늘도 느보산에는 강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 바람에 잠시 몸을 맡기면 요르단강 건너 약속의 땅이련만
“너는 갈 수 없다”라는 말씀하시니 여기서 내려놓겠습니다.
두 손에 가득 잡은 것이라면 쉽게 내려놓을 수 있겠지만
마음이 붙잡은 것이라 “내려놓겠다.” 말씀은 드리지만
한생을 붙잡아 온 것이기에 내려놓으려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저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니,
보여 주시는 것에 감사하며 이곳에서 그저 바라보기만 합니다.
이제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여기에서 눈을 감으렵니다.
영원의 시간도 주님과 함께 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압 평야에서 삼십 일 동안 모세를 생각하며 애곡하였습니다. 주님의 종 모세가 죽은 뒤, 주님께서는 모세의 시종인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모세의 뒤를 이어 이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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