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
1. 구약에서의 하느님과 가난한 사람들과의 관계
출애급기에서 하느님은 에집트에서 고생하고 억압을 받으며 울부짖는 당신의 백성의 편이 되셨다(출애 3,7-8 참조). 구약성서의 법조문들 계약의 법전(출애 20,22-23.19), 신명기 법전(신명 12-16장), 거룩함의 법전(레위 17-26장).
은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에 대하여 천명하고 있다. 각 개인은 위격적인 존재로서 ‘신의 친구’가 될 수 있다. 각 개인에게, 특히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각자에게, 저녁에 추위를 막을 겉옷이 없는 자에게, 사정없이 학대받는 과부에게, 철면피의 인간에게, 구박받는 고아에게, 하느님은 유별난 관심과 사랑을 기울이신다. 서인석, ꡔ성서의 가난한 사람들ꡕ, 분도출판사, 1979, 89면.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 무시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수호자이시라는 사상이 구약성서 전체에 깔려있는 위대한 중심사상 중의 하나로 자리 잡는다. Alvario Barreiro, 앞의 책, 45면 참조 ; 홍경완, ꡔ가난한 사람들-수난당하는 개념의 명료화를 위하여ꡕ, 광주가톨릭대학 대학원, 1994, 45면에서 재인용.
신명기에서는 곡식 추수와 포도따기 계절이 지난 후 남은 것은 가난한 자들의 몫, 즉 그들의 귄리라고 강조하고 있다. 신명 24,19-21; 레위 19,9-10.
예언자들을 통하여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옹호하며 그들의 입장을 변호하였다.
내 백성의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빼앗고
과부들을 털어보고 고아들을 수탈하는구나
성문서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여러 가지 각도에서 노래하고 있다.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anawim)이 출현한 시기는 유배 이후이다. 원래 아나윔이란 용어는 하느님의 구원만을 기다리는 ‘경건한 사람들’을 의미했다. 오랜 기간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억압과 소외를 당하는 고통스런 체험 때문에 하느님만을 의지하게 된 것이다. Alvario Barreiro, 앞의 책, 78면 참조.
그래서 이들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나는 가난하고 불쌍하오니,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나를 돕고 구하시는 당신이시니, 내 주 하느님 더디지 마시옵소서.(시편 40,17)
2.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시는 예수
이제 가난한 사람들의 메시아로서 하느님이 육화되어 오심으로써 하느님과 가난한 사람들의 관계가 더욱 깊어진다. Gutierrez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의 육화 사건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구원 열망을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다. 그 육화 사건은 구약성서에 나타나듯이 모세법, 예언자들, 현자들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해 주시고, 손수 그들의 대변인이 되어 주시고, 그들의 기쁨이 되어 주셨던 하느님께서 이제 당신 아들을 직접 파견하셔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 희망의 메시지를 알린 사건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몸소 가난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삼는 낮춤과 비움의 자세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과 생명을 나눔으로써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당신의 메시아적 사명을 수행하셨다. 홍경완, 앞의 책, 26면 참조.
예수의 지상에서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밝혀주고 있는 대목 루가 4,18; 이사 61장 참조.
과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인지를 궁금해 했던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시켜 질문을 한 것에 대하여 예수가 대답을 했던 대목 루가 7,22.
에서도 에수와 가난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한지를 알 수 있다.
(1) 병자․가난한 자
예수의 공생활 동안의 예수의 관심은 가난한 사람들 – 작은 무리들(마르 9,42; 마태 10,42; 18,10;. 14)과 순박한 사람들(마태 11,25 명행), 중노동자들과 짐끈들(마태 11,28) – 에게 쏠렸다. Walter Kasper, 앞의 책, 143면 참조.
예수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고 측은히 여겨 돌본다- 약자․병자․천민․소외자들을. 그때도 물론 이런 사람들은 천대받고 있었다. 약골․병자라면 귀찮은 존재, 나환자․귀신들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꺼리게 마련이었다. 경견한 꿈란 승려들은 (또 비슷하게 일부 율사들도)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처음부터 배척하는 회칙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미치광이․정신이상자․천치․바보․소경․불구자․절름발이․벙어리․미성년자 – 그중의 누구도 공동체에 입회할 수 없으니 거룩한 천사들이 그 속에 있음이니라: Hans Küng, 앞의 책, 152면.
이 모든 사람들을 예수는 외면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물리치지 않는다. 병자를 죄인 취급하지 않고 고쳐 주며 받아들인다. 위의 책, 151-152면.
(2) 여자 · 어린이
당시 유대사회에서 하찮은 존재인 여자와 어린이에게도 풍습과 관례에 개의치 않고 상종하신다. 당시 유대인들의 여자 멸시를 말해 주는 사료는 허다하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여자란 어느 모로 보나 남자모다 열등하다. 여자라면 자기 아내하고라도 되도록 말을 적게 하라 했다. 여자는 되도록 대중을 멀리하며 살았다. 성전에서는 “여자들의 앞뜰”까지밖에 들어갈 수 없었고 기도 의무에 있어서는 노예와 동렬에 있었다 : Hans Küng, 앞의 책, 189면.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의 여자 관계를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해준다. 여자를 멸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놀랄만큼 스스럼없이 대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까지 늘 여자들이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을 따라다녔고(마르 15,40; 루가 8,1-3; 참조: 사도 1,14) 여자들과의 개인적 친분도 예수에게는 생소한 일이 아니었으며(루가 10,38-42; 요한 11,3.5.28-29.36), 그리고 아무 권리도 없던 어린이를 예수는 우대한다. 제자들의 저지를 물리치고 맞아들여 어루만져주며 축복해 준다(마르 10,13-16). 유대인에게는 생각도 못하게도 어린이를 어른의 본보기로 내세운다(마르 10,15).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들(마태 11,25; 21,16), “작은” 이들이나 “보잘 것 없는” 이들(마르 9,42)이야말로 예수의 칭송을 받는 사람들이다. Hans Küng, 앞의 책, 188-189면 참조.
(3) 죄인
아무래도 용납될 수 없던 예수의 처신이 있었다. 그것은 병자․불구자․나병환자․귀신들린 자를 돌본다는 것도, 여자․무식꾼과 가까이한다는 것도, 또 가난한 못난이들을 편든다는 것만도 아니고 불경․불륜의 패덕자들과 어울린다는 것이다. 그가 즐겨 사귀던 사람들은 흔히는 멸시받던 세리들과 죄인들(마르 2,16 병행; 마태 11,9 병행; 루가 15,1) 혹은 세리들과 창녀들 당시의 여러 죄인들이 있었지만 이들 중 가장 두드러진 죄인들이 바로 창녀와 세리들인데, 4복음서의 저자들은 죄인들의 대표자로 언제나 이들을 등장시킨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두 죄인들에 대해서 하느님의 구원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로 간주하였다. 이들에 대한 설명은: 정태현, 앞의 책, 53-54면 참조.
(마태 21,32) 혹은 그저 죄인들(마르 2,17; 루가 7,37. 39; 15,2; 19,7)이라고 불리던 사람들 이들은 죄에의해 억눌리고 탐욕스런 소유욕에 얽매여있는 측면에서 해방이 필요한 이들이며, 사회에서 소외된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속하는 이들이다.
이었다. 한마디로 이들은 불경견한 자들이었다. 이 불경건한 자들이란 공공연하게 하느님의 계명을 업신여기는 자들이었고 그러기에 남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었다. 이밖에도 일반적으로 보아서 으례 부도덕한 짓을 하게 마련인 것으로 생각되던 몇몇 직업, 가령 세리나 창녀들과 함께 목동 예수는 누구보다도 먼저 가난한 목동들을 당신 “집”으로 초대하셨다. 예수께서 가난하게 탄생하시어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다 : 정태현, 앞의 책, 75-76면 참조.
들도 이런 불경건한 자들로 간주되는 것이 상례였다. ‘암 하아레쓰’ ‘시골 백성’이라는 뜻. ‘촌놈, 시골뜨기, 낮은 백성’이라는 나쁜 뜻으로 쓰였음.
로 불리던 사람들, 곧 가난하고 교양이 없으며 문맹(文盲)이기 때문에 복잡한 율법의 규정을 알 수도 없거니와 설사 안다고 하여도 율법을 실천할 수 없었던 사람들, 그러기에 이른바 경건한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아왔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모조리 이 불경건한 자들의 부류에 계산되었었다. 이들은 팔자가 사나와서 혹은 자신들의 과오로 혹은 기존 사회의 편견 때문에 이 세상이라는 틀에 끼어들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당대 유대교의 응보교리에 의하면 이들은 자기네 딱한 사정을 하느님의 처벌로 감수해야 했고 따라서 자기네가 처해 있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갖지 못했던 만큼 이들의 운명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세상으로부터는 물론이요 하느님으로부터도 이렇다 하게 기대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Walter Kasper, 앞의 책, 143-144면.
그런데 예수의 적대자들이 그분을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로구나.”(마태 11,19)했을 정도로 그분은 그들과 가까이 지내셨다. 마태오복음 9장에서 보고하기를 “마태오”라는 세관의 집에서 음식을 드시게 되었는데 마침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분 제자들과 함께 상을 받았다. 이를 보고 바리사이들이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먹습니까?’ 유대 사회에 있어 공동 식사는 종교적 성격을 갖는 공동체 예식으로 거룩한 일치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다. 공동 식사는 참여한 사람들을 한 동아리로 묶는 것을 뜻했으므로 부정한 사람들과의 식사는 그들의 부정한 생활에도 함께 참여하는 것이고 그 자신도 부정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격분하여 따지고 든 것이다 : Romano Guardini, 앞의 책, 91면.
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의사는 건장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앓는 사람들에게 필요합니다. … 사실 나는 의인을 부르로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습니다.(마태 9,9-13 참조)
예수께서 뽑은 당신의 제자들도 가난하고 무식한 편이었으며 세리들 중에서 몇몇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고 그 중 한 사람은 열두사도의 공동체에 끼어들었다.
루가 19장에서는 세관장이었고 또 부자였던 자캐오에게 “자캐오, 얼른 내려오시오, 오늘은 내가 당신 집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하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보고 모두 투덜거리며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다니.”라고 한 것에 대하여 “사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습니다.”라고 예수는 말씀하셨다(루가 19,1-10 참조). 이러한 사실은 요한 복음의 간음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와 루가복음에 나오는 베싸이다의 죄지은 여인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
세리와 창녀들은 당시 사회적으로그리고 종교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수에게 있어서 한마디로 ‘잃어버린 자들’ ‘잃었다’는 표현은 루가복음 15장의 세 비유 이야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길 잃은 양, 잃어버린 동전, 잃었던 아들은 모두 죄인들을 표상한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로 대표되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잃어버린 자들을 율법준수에 바탕을 둔 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하였다. 이에 반하여 예수께서는 구약성서의 연장선상에서 이들의 신분을 야훼의 자비로운 손길만을 고대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무리에 위치시키고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였다 : 정태현, 앞의 책, 52-53면.
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 하나하나가 똑같이 소중한 것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소외당하는 불행한 이들을 하느님께서 특히 돌보시는 것도 그 때문이다. 행복선언을 비롯하여 잃었던 양 한 마리를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루가 15,4-7; 마태 18,12-14), 잃었던 은전을 되찾고 기뻐하는 부인의 비유(루가 15,8-10),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루가 15,32)는 이같은 하느님의 사랑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구약성서는 하느님께서 소외자들의 권리를 보호하시는 것을 의로운 통치자의 개념으로 이해했었다. 이제 예수님은 이 의로움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이 사랑의 하느님이심은 그분이 모든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심을 뜻한다. 양승애, “행복선언(III)”, 『전망』제64호, 1984, 29-30 참조.
(4) 십자가에서의 가난한 자들과 연대
십자가상의 예수의 죽음은 그분의 메시지의 총괄이요 요약이다. Walter Kasper, 앞의 책, 209면 참조.
예수의 가난한 사람과의 연대감은 십자가 위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Klauspeter Blaser, “그리스도교와 맑스주의와 가난한 사람들”, 『전망ꡕ 제56호, 1982. 봄, 46면.
예수께서 고통받고 죄로 가득 찬 인간들과 새로운 연대 관계를 위해서 십자가를 취하신 것이다. 그것을 승화시키고 영원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겪는 이들과 연대 관계를 맺고, 축복과 함께 고난당하는 사랑의 표시로 십자가를 변화시키기 위해 그분은 십자가를 수락하신다. 최영철, ꡔ십자가 신학ꡕ, 성바오로출판사, 1996, 128면.
하느님이 몸소 죽음의 나라로 들어가 죽은 자들과 연대를 이루고 그로써 – 죽음이 하느님을 붙잡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 죽음의 사슬을 끊고 죽음의 권세를 껶을 때, 하느님은 죽은 자들에게도 정의를 회복시켜 줄 수 있다.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 안에서 또한 당신의 부활을 통하여 정말로 죽은 자들과 연대를 맺고 죽음 저 너머에까지 사람들 사이에 참된 연대성을 새로이 수립하였다. Walter Kasper, 앞의 책, 404-405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 수 있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1데살 5,9-10).
(5)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
예수께서는 당신을 어떤 부류의 사람과 동일시하시는 말씀을 여러번 하셨다.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마태 18,5).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걸려넘어지게 하는 자는 불행하여라.(루가 17,2; 마르꼬9,42)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이 말씀들은 작은 이들, 가난한 이들이 얼마나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갖는지를 말해준다. 여기서 ‘작은 이’와 ‘가난한 사람들’이란 루가의 비유(착한 사마리아 비유)를 따르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면 누구나 해당된다. 예수께서 이들과 함께 계신다. 그런 사람 하나에게 해주는 것은 곧 예수께 해드리는 것이다. Carlo M. Martini, 앞의 책, 43면, 337-339면 참조.
A. 바레이토는 가난한 자와 동일시하신 예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메시아가, 거의 모든 기본적 요구가 박탈되어 객관적으로도 고통당하는 모든 인간들 즉, 배고픔과 목마름에 고통당하는 이들, 소외되고 유배된 이들, 결핍되고 병에 시달리는 이들 및 옥에 갇힌 자들과 동일시되었다(마태 25, 35-36). 이 모든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가 지상 생애동안 해방을 선포한, 보호받지 못하고 소외당하며 약탈당하고 억압당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이제 이런 상황에서 “감추어진 채 선포되던 하느님 나라가 세상 끝날에 나타날 나라로 바뀌어서 묘사되며” “모든 민족이 불려나와”(마태 25,32) 즉, 모든 시대의 인간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힘없는 이들을 옹호하면서 아울러, 해방자 메시아가 자기비허(自己卑虛) 속에서, 가장 비참한 모든 인간들과 최대한으로 결속되어 동일시됨으로써 하느님 나라에서 특권받은 이들에게 선포된 해방의 기쁜소식이 예수에 의해서 실현된다. Alvario Barreiro, 앞의 책, 8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