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발생의 요인 – 사회,경제적 요인

 

조선사회는 후기로 오면서 생산력 증대와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점차 해체과정에 직면하였다. 여기에 부세운영의 문란과 군사력・치안의 공백까지 겹쳐 체제는 심각한 위기에 몰렸다. 이에 따라 통치기강은 날로 해이해졌고, 농촌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농민항쟁과 변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와해되어가고 있던 체제에 재차 타격을 가했다.


19C 초의 권력을 장악한 양반 세도가들은 정치 외에 경제적인 부를 이루기 위해 민중수탈을 강화하였다. 양반들의 축재 수단으로 첫째 떠오른 것은 고리대라는 착취 수단이었다.1) 이 당시 채권에 관한 소송이 양민 사이에 성행하였던 이유도 고리대로 인해 민중들 사이에 피해가 컸음을 시사하는 것이다.2)


더우기 삼정 가운데 田政의 문란은 더욱 극심하여 본래 20년마다 실시하던 양전이 철종 때는 그 이전부터 130여 년이나 중단되어 전지의 경계의식마저 혼돈 속에 있었다.


지역적으로는 곡창 지대인 호남이 더욱 자심하여 「민생이 도탄에서 허덕이기에 비록 어떤 좋은 계책이 있어도 수습할 수 없다」3)는 말이 정부 고위 공직자의 입에서 공공연히 나올 정도였다.


따라서 수운 같은 몰락 양반의 후예는 잔반한사가 되어 정부로부터 이반되는 현상을 일으키곤 하였다. 여기에 전염병의 만연이라는 자연적 재해까지 겹쳐 농촌인구를 앗아감으로써 사회적 위기의식을 부채질하였다. 1821년과 1822년의 콜레라는 전국에서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내었고, 1859년 9월 말(양력)에는 서울에 콜레라가 침입하여 많은 사람이 희생되기도 하였다.4) 설상 가상격으로 기근과 질병・한발 등이 겹쳐 기우제가 성행하였으며 주술적 기원 행위가 있었다. 또한 초적・화적 등 도적이 빈발하며 요언 괴서사건 등이 발생하여 민심은 동요와 침체 상태에서 맴돌고 있었다.5)


이런 시기에 홍경래의 반란(1811), 경기도 화성의 掛凶書사건(1819), 철종 때의 임술민란 등이 계속 일어나 어지러운 사회를 더욱 혼미케 하였다.


이와 같은 국내외 상황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었고, 조선인들은 여기에 대응할 방안을 각자의 정치의식과 사회적・경제적 기반에 따라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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