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활 신앙
그리스도교에 있어 예수 부활은 신앙의 원천이고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노 과르디니(R. Guardini)는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주변적인 현상도 아니고 역사적인 이유에서 만들어진, 따라서 후에 신앙의 본질을 손상시키지 않고 제거 할 수 있는 신화적 산물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R. Guardini,『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인물』, 남현옥․박재순(역) (서울: 바오로 딸, 1995), 594면.
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 설립의 근거이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예수의 부활에 대해 사람들은 적지 않은 의문들을 가진다. 즉, 예수 부활에 대한 신앙적 주장에 저항감을 가지거나 그 사건 자체를 하나의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것으로 여기려 하기도 한다. 위의 책, 591-592면 참조.
따라서 예수 부활 신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대단한 중요성을 가지며 또한 당연히 요청된다.
1. 부활 신앙의 이해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부활 사상이 예수로부터 처음 생겨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먼저 성서 본문의 성서 인용은 다음의 번역 성서를 따랐음. 구약성서는 대한성서공회,『공동번역 성서』, 1986. 신약성서는 200주년 신약성서 번역위원회,『200주년 신약성서』, 분도출판사, 1992. 다른 번역성서를 인용할 경우에는 별도로 표시함.
를 중심으로 구약시대부터 예수 당시까지의 부활사상 형성 과정을 간략하게 언급하겠다.
구약성서에서 종말론적 부활 희망을 분명하게 가리키는 곳은 상당히 적으며, 있다해도 후대의 기록들이 대부분이다. 구약에서 부활에 대한 지배적인 이미지는 ‘잠에서 깨어남’이다(다니12,2 참조). 부활이라는 용어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고대인들의 개념 속에 죽음도 잠으로 생각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구약성서는 죽었다가 살아난 세 사람을 기록하고 있다. 사렙다에 살던 과부의 아들(1열왕17,17 이하), 수겜 여인의 아들(2열왕4,32 이하), 엘리사의 무덤에 시체로 던져졌던 사람(2열왕13,21 이하)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신약의 ‘부활’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이들의 부활은 일시적 부활, 즉 시․공간 차원의 현세로의 복귀를 말한다. 이것은 부활이라는 개념보다 소생의 개념에 가깝다. 따라서 구약성서에서 명시적으로 부활한 자의 사실적이고 직접적인 기록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부활 사상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나타나는 곳은 몇 군데 있다. 구약성서에서 부활에 관한 분명한 언급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은 이사야서 26장 19절이다. 제1이사야서는 유배 이전의 작품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사야서 24-27장은 기원전 3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묵시문학적 표현으로 된 이 작품은 전(前)세대의 의인들도 역사의 완성에 참여하기 위하여 죽음에서 부활할 것(이사26,19)이라는 마지막 심판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있다. 또한 이 표현은 사악한 사람들이 마지막 심판을 피할 수 없고, 의로운 사람들이 그들의 충실성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일반적인 (모든 사람의) 부활교리로 확대되었다. 유배 직후 에제키엘이 이스라엘 전체의 부활에 대해(에제37장) 언급하고 있는 반면, 이러한 사상이 개인적 부활로 표현되어 나타나고 있는 곳은 이사야 26장에서 처음이다. 또한 기원전 168년경에 기록된 다니엘서 12장 1-2절에서도 부활에 관한 적극적인 표현이 나타난다. 여기서 저자는 육신(즉 자기자신)의 부활은 마지막 때, 역사의 드라마가 성취되는 바로 그때에 일어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여기서는 당시의 그리스 학설의 영혼 불멸성과는 달리 묵시문학적 완성의 때에 관한 교리가 이스라엘에 등장했음을 확실히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카베오 후서는 기원전 1세기에 속한 것으로, 여기서 일곱 순교자 형제들 중 처음 세 형제가 죽으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대목들(2마카7,6.9.14.)에는 죽은 자의 부활사상이 확실히 드러나며, 적어도 부활한 자의 종말론적 새로운 존재가 육체적인 것임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는 부활이 율법에 충실한 히브리인의 상급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부활에 대한 확실한 언급보다 조금 약한 표현으로 부활 사상을 드러내는 곳도 있다. 욥기 19장 25-27절에서도 종말론적 희망의 표현, 즉 자기의 명예를 되찾아 줄 뿐 아니라 하느님을 보게 해 줄 속량자의 지고한 현존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실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여기서의 모든 구절들은 대단히 모호하기에 사자(死者)의 부활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 외에 구약성서에서 부활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 구절들, 즉 신명32,39; 1사무2,6; 시16,9-11. 49,15; 73,34등의 구절들은 실제로는 죽음 이후의 부할 사상이 분명히 표현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많은 모호성을 가지고 있다. 결국 모든 인간의 부활이라는 사상은 바룩의 묵시록이라는 위경과 신약성서에 와서 비로소 나타난다. 유대인들의 전통은 영혼과 육신을 갈라서 생각하지 않았기에 부활은 육신부활이 아니고 인간의 부활을 뜻한다. S. B. Marrow, art. Resurrection of the Dead, in NCE 12(1981), pp. 419-422; J. Schmid, art. Resurrection of the Body, in SM 5(1970), pp. 333-338; T. H. Gaster, “부활: 신약이전의 부활,”『기독교대백과사전(제7권)』, 제2판 (서울: 기독교문사, 1984), 1208-1212면; B. W. Anderson, 『구약성서의 이해Ⅲ』, 이성배(역), 200주년 성서별책, 제10권, 제2판 (서울: 바오로딸, 1995), 301-356면; C. Brown, “부활: 구약성서,”『신약편 성서원어대전(제4권)』, (서울: 브니엘출판사), 48-61면; K. Schubert, “그리스도 이전의 부활사상,” 전망, 7호(1969.12), 18면; 이제민, “부활,”『한국가툴릭대사전(제6권)』(서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3645-3646면; J. Radermakers & P. Grelot, “부활,”『성서신학사전』(광주: 광주가톨릭대학전망편집부, 1984), 217-218면 참조.
부활 사상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나타나는 곳은 이사야서 26장 19절과 다니엘서 12장 1-2절, 마카베오 후서 7장 6.9.14절 등이다. 이렇게 볼 때 구약성서에서 부활사상에 대해 표현되고 있는 것은 모두 유배이후 후기 유대교 사상에서만 일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겪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결실로서 종말론적 희망이 표현된 후기 유대교의 고유한 사상이라고 하겠다. 발트 카스퍼(W. Kasper)는 후기 유대교의 죽은 자들에 대한 부활의 희망은 “구약전래(舊約傳來)의 신앙에 나중에 갖다 붙인 첨가물도 아니요, 외래적(外來的)인 도입물(導入物)도 아니다. 이 신앙의 근원은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 W. Kasper,『예수 그리스도』, 박상래(역), 신학총서, 제13권 (왜관: 분도출판사, 1981), 254면.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 부활 외에 죽었다가 살아난 이들에 관한 기사를 몇 군데 찾아 볼 수 있다. 실제로 복음서에서 아이로의 딸(마르5,35 이하), 과부의 아들(루가7,11 이하), 나자로(요한11,1 이하) 이렇게 세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남을 볼 수 있고, 사도행전에서도 도르가(사도9,36 이하)와 유디코(사도20,7 이하)가 죽었다가 살아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부활은 예수 부활의 표적(表迹)에 불과한 소생의 개념이다. 그렇지만 구약성서의 부활 사상과 비교할 때, 신약성서의 부활 사상에는 분명한 특이점이 있다. 즉, 신약성서에서 특별한 점은 부활 개념이 구약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 부활을 바탕으로 하는 확고한 신념 아래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요한5,28.29; 사도17,31; 로마14,10; 2고린5,10; 묵시11,5; 20,11-15 등). J. A. Schep, “부활: 성서적 의미,”『기독교대백과사전(제7권)』, 제2판 (서울: 기독교문사, 1984), 1202면 참조.
이제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활 신앙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예수 당시의 유대교 사고에서는 역사 안에 오신 나자렛 예수와 주님 그리스도와의 일치된 사상이 매우 낯선 것임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런 중에서도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압도적인 그 분의 종교적 의식이 그 추종자들의 기대와 일치하여 그들의 ‘무의식’ 속에 예수와 그리스도가 일치된 하느님 상을 가지게 했고, 이러한 사상은 그 추종자들이 예수의 죽음이라는 좌절을 극복하게 했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R. Guardini, 앞의 책, 593면 참조.
즉, 종교적 충격의 이런 결과가 흥분 된 몇 해 동안 또는 몽롱한 정신 상태에서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과 뗄 수 없이 결합된 그리스도교,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닌 그리스도교 세력이 그러한 단순한 종교적 충격에 의한 몇몇의 추종자들에 의해 생겨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의 책, 같은 면 참조.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은 예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수의 부활은 신약성서에서 발견되고, 초기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우리들에게 대대로 계승된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적인 주장이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일으켜(부활)지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실상 헛된 것이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이 되는’(1고린15,14) 예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J. A. Fitzmyer, 앞의 책, 108면.
복음서보다 수 십 년 앞서 서술되기 시작한 바오로의 서간 사도 바오로의 고린토 전서는 그의 세 번째 선교 여행 중 에페소에서 쓰여진 것으로 55-56년 봄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15장은 그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초대 Kerygma인 부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서보다 적어도 15-20년 이상 앞서 기록된 초대 교회의 부활 신앙을 기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홍기,『사도 바울로의 생애와 편지』, 성서입문 3 (왜관: 분도출판사, 1986), 91, 105-106면; M. Brändle, “초대교회 신자들의 부활관,” 최철영(역),『신학전망 7호』(1969. 12), 22-23면 참조.
에서 벌써 초대교회의 부활 신앙이 뚜렷이 드러남을 볼 수 있는데 그 서간에 의하면,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3년 이내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께서 살아있음을 봤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고린15장 참조). 또한 바오로의 개종을 가져다 준 다마스커스의 환시(사도9장)는 이 개인적인 특별한 한 체험으로 인하여 그에게 부활 신앙을 갖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신비로운 계시의 사건-다마스커스의 환시-은 선택받은 인간들의 ‘종말론적 존재 양상’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체험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바오로로 하여금 종말 때에 살아 계실 성자를 체험함으로써 종말의 단계를 파악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M. Brändle, 앞의 글, 24면.
이와 같은 예수 부활에 대한 해석학적인 이해는 부활 사건의 역사적 사실과 부활 신앙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펼치고 있다. W. Kasper, 앞의 책, 228-243면 참조; 현대 신학에서 말하고 있는 부활 증언에 대한 해석학적 토론에 대하여 여러 신학자들의 견해를 통해 예수 부활에 대한 어떤 징표들이 전하는 의미들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 부활의 역사성을 중심으로 하는 부활 신앙을 중심 주제로 삼고자 하지는 않겠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전하는 부활 신앙 즉, 부활의 체험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승되어 온 부활 신앙은 현재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할 뿐이다. 결론적인 대답을 미리 하자면, 2천년을 이어온 교회의 믿음인 부활 신앙은 초대교회 각 신자들 뿐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도 항상 결단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을 척도로,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가 느끼는 방식에 기초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다면 이것은 하나의 종교적 산물로, 허구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척도로 삼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한 그 부활 신비가 각자에게 분명한 현실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R. Guardini, 앞의 책, 595-597면 참조.
부활 체험은 그 주체가 인간에게 있지 않았다.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이들의 원의와 관계없이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신앙을 형성한 것이 아니다. 즉, “신앙이 부활이라는 현실을 밑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제자들에게 밀어닥치는 부활하신 분의 현실이 신앙을 밑받침하는 것이다.” W. Kasper, 앞의 책, 250면.
이 신앙에 대해 우리는 결단을 내릴 뿐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증언 : 발현 보도와 부활 복음 선포(Kerygma)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이며 핵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실, 예수의 공생활, 수난, 죽음과 같은 대목과는 달리 복음사가 어느 누구도 부활 자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신약성서 어디에서도 예수가 무덤에서 나오는 것이라든가 죽은 이들 가운데 살아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기사는 없다. H. Hendrickx,『예수 부활 이야기』, 황종렬(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1985), 8면 참조.
또한 예수의 부활 그 자체에 대한 자세한 현상학적 언급은 더 더욱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의 부활을 증언할 수 있는가? 앞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부활의 역사성이나 실제성에 대한 사변적 논쟁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 보다도 예수 부활에 대한 증언이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한 것인지 그 의미를 알아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초기그리스도 공동체에서 전하고 있는 부활의 증언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예수 부활에 관한 신약성서에서의 언급은 빈 무덤 이야기와 발현설화, 그리고 부활 선포(Kerygma)로 나눌 수 있다. 신약성서의 복음서에는 여섯 가지 다른 부활 설화가 있다. ①마르16,1-8〈빈 무덤 이야기, 흰 옷입은 젊은이의 부활 선언〉, ②마태28,1-20〈빈 무덤 이야기, 막달라 여가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 앞에서의 예수의 발현, 갈릴래아에서 열한 제자들 앞에서 발현〉, ③루가24,1-53〈빈 무덤 이야기, 부활 선포, 엠마오에서의 발현, 예루살렘에서의 발현, 승천기사〉, ④요한20,1-29 〈빈 무덤 이야기, 막달라 마리아에게 발현, 예루살렘에서 열한 제자들 앞에서 발현, 그리고 다시 열두 제자들 앞에서 발현〉, ⑤요한 복음서 부록(21,1-23)〈갈릴래아에서 일곱 제자들 앞에서 발현〉, ⑥마르코 복음서 보유(補遺)(16,9-20)〈부활한 일요일에 예루살렘 또는 그 근교에서 세 번 나타남, 승천기사〉. 이렇게 네 복음서를 중심으로 부활기사에 대한 내용을 살펴 볼 때, 빈 무덤 이야기, 발현(승천 포함), 부활 선포로 나눌 수 있겠다. J. A. Fitzmyer, 앞의 책, 108-114면 참조.
그러나 여기에서 빈 무덤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부활에 대한 분명한 증언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고 본다. 빈 무덤 이야기는 양식학적으로 볼 때 ‘의식 원인담’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며 부활의 결과로 드러난 징표로 본다. W. Kasper, 앞의 책, 222-228면 참조.
따라서 빈 무덤 이야기를 제외한 발현사화와 부활 복음 선포를 중심으로 예수 부활에 대한 증언들을 살펴보겠다.
사도 바오로의 1고린 15장 5-8절에 예수 발현에 대한 보도가 나타난다. “과연 부활한 예수의 현현에 관한 1고린 15장 및 복음서 전승들은 부활 신앙을 잉태시킨 어떤 역사적 현현 사건을 반영하고 있는가?” 김경희, “현현 보도와 부활 선포,”『종교신학연구 1호』, (왜관: 분도출판사, 1988. 11), 154면 참조.
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문제를 풀어보자. 1고린 15장 5-8절에 나타난 발현 목격자들에 대한 목록은 문학적으로 가장 옛 증인일 뿐 아니라 전승사적으로도 아주 오래된 현현(顯現)에 관한 증언을 가진다고 본다. 위의 글, 154-155면 참조.
그러나 이 현현 목록을 자세히 살펴 볼 때, 이 현현 발언의 관심이 현현 경험자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심의 초점은 현현 자체가 아니고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하는 데에 있다. 즉, 이 현현 발언들은 초대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들이 예수의 현현을 통해 그들의 권위를 근거 지으려는 것이었다. 이 현현목록에 하면 현현경험자는 베드로-12제자-500여명-야고보-모든 사도들의 순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5-7절의 현현 명단이 원래 유기적 통일체가 아니라 여러 독자적 발언들의 복합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또한 더욱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명단의 순서가 모든 사도라는 포괄적 명단 앞에 나타나는 명단들이 우선적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의 글, 154-158면 참조.
이렇게 볼 때 “1고린 15장 5.7절의 현현 발언들이 원래 부활을 증언하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았다면, 이 현현 발언들은 이미 예수가 부활했다는 신앙의 근거 위에 형성되었다고 봐야하게 된다. 현현 경험자들은 예수의 현현에 직면하여 예수가 부활했다는 의식에로 유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부활하심을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에게 합당한 사도직과 사도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위의 글, 157-158면.
또한 복음서에 나타난 현현 보도들(마태28,16-20; 루가24,36-49; 요한20,11-18)의 초점도 부활한 자의 현현에 의한 파견과 제자들의 전권 부여에 있다. 이 보도들은 사도직의 합법화를 위한 행위이며 예수의 부활은 이미 현현 경험자들에게는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심(루가24,13-35),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심(요한21,1-14),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요한20,11-18)과 같은 현현 경험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는 것에 관한 보도에서 예수 부활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증언을 발견할 수 있다. 위의 글, 162-165면 참조.
즉, ‘알아봄 보도 형식’의 현현보도에서 그 형식의 의도가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나 부활하심 자체를 나타내 보이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낯은 사람이 다름 아닌 예수로 밝혀지면서 예수의 참 정체성이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죽은 예수가 하느님에게서 살며 하늘로부터 현현한다는 것, 예수가 하늘 실존을 향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의 글, 164-165면.
요셉 라찡거(J. Ratzinger)는 이러한 ‘알아봄 보도 형식’에 대한 성서의 미묘한 묘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화학적 및 생물적 법칙에 더는 맞출 수 없으며 때문에 사멸가능성(死滅可能性) 밖에, 즉 사랑이 베푸는 저 영원(永遠)에 있는 종국적 생명(終局的 生命)으로 부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외의 상봉(相逢)은 <발현(發現)>이며 이틀 전에 같이 상을 받고 식사를 했던 자를 그의 친지들도 알아보지 못하였고, 또 알아본 연후에도 생소했던 것이다. 오직 ‘그’가 보도록 해주는 경우에만 그는 ‘보이고’ 오직 그가 눈을 열어주고 마음을 열어주어야만 우리의 이 사계(死界) 가운데에서도 죽음을 극복하는 영원한 사랑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되며, 이 사랑 안에 새로운 다른 세계, 내임자(來臨者)의 세계(世界)가 비치게 된다. 그렇기에 복음성서로서도 부활한 자와의 상봉을 묘사하기가 그토록 어려웠고 거의 불가능했다.” J. Ratzinger,『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장익(역) (왜관: 분도출판사, 1974), 244면.
그러나 초대 공동체에서 이러한 ‘알아봄 보도 형식’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언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선포가 반드시 이와 같은 류의 현현 발언을 동반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가령 마르코 복음서에는 빈 무덤 이야기만으로 예수 부활의 선포가 이뤄지고 있다. 사실 이런 류의 현현발언은 복음서 외의 신약성서에서는 1고린15장의 현 편집과 사도행전의 설교 중 10,40과 13,31에서만 발견된다. 이는 이런 류의 현현 발언에 대한 관심은 아주 개별적일 뿐만 아니라 또 이런 현현 발언들이 부활 Kerygma를 위해 불가결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김경희, 앞의 글, 172면 참조.
즉, “‘알아봄 보도’들이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 부활 Kerygma의 동인(動因)이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 보도들은 ‘예수의 부활’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로부터 유발시키지 못했다. 이 현현 텍스트들은 현현 환시를 통해 예수의 부활 자체를 증명-간접적으로-하고 있으나 오히려 부활 Kerygma를 근거로 생겨난 이야기들이다.” 위의 책, 같은 면.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 부활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을 사실적이고,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그 어떤 사건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주도하에 성취된 구원 업적이며, 이 세상의 차원을 넘어서는 초월적이며, 종말론적인 계시임을 알 수 있다.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자들은 자기들이 따르던 그분이 바로 주님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초대교회는 많은 설명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부활의 이해는 초월적인 것이기에 유비적인 이해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예수 부활에 대한 증언에서 ‘빈 무덤’이나 ‘발현보도’, ‘부활 복음선포’보다 훨씬 더 중요한 증명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부활의 증인들이 자기네 신앙을 위하여 생활과 죽음을 통해서 제시한 실존적인 신빙성의 증명” W. Kasper, 앞의 책, 228면.
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기에 예수 부활 그 자체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없다하더라도 역사적 실제성을 분명히 가진다. 예수 부활은 믿는 이들 안에서, 즉 신앙 안에서 증명되어지는 일이다. 왜냐하면 예수 부활은 예수 부활을 믿는 모든 이들로부터 체험되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체험에 대해 신앙할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이 증언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라는 개인적 결단에 달려있다. 매순간 요청되는 결단의 순간에 부활 신앙에로 방향 지움은 우리 자신들이 세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우리 자신들의 부활, 즉 ‘죽은 자들의 부활’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가톨릭과 개신교 현대 신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들을 열거하고 종합한 다음 논문을 참조하라. 최태영, “죽은 자의 復活에 대한 硏究,” 장로교신학대학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8.
에 대한 신뢰의 바탕을 얻게 되는 것이다.
3. 부활 신비를 표현하는 두 가지 양식
예수 부활 사건은 신앙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므로 역사적으로 검증하거나 물증을 들어 밝혀 질 수 있는 그런 사건이 아님을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예수 부활이 완전히 인간 역사를 너머 ‘초역사적’이고 ‘초현실적’인 사건만은 아니다. 다시 말해, 예수 부활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묻히신 예수라는 인물에 국한된 역사적 한계성을 가지는 사건이다. 이 한계가 부활을 비역사적인 사건이며, 순전히 어떤 신앙의 사건으로만 치부하는 것을 막아준다. W. Kasper, 앞의 책, 259면 참조.
이러한 예수 부활의 양면성은 인간 이성으로 완전한 인식이 불가능한 역사적 사실의 이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 놓았다. “십자가에 처형되신 분과 부활하신 분 사이의 계속성과 동일성(同一性)은 홀로 하느님의 창조 및 계약에 대한 신의(信義)에만 근거하고 있다” 위의 책, 같은 면.
라고 발트 카스퍼(W. Kasper)는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신앙 안에서 설명한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초대교회의 신앙 고백에 의하면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에 승리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살아계신다는 이 신비스러운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교회는 두 가지 양식을 이용하고 있다. 즉, 교회는 예수 부활 신비를 첫 번째로 예수께서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죽음에서 깨셨다’는 표현과 두 번째로 ‘죽음에서 영광 속에 들어올림을 받으셨다’, ‘죽음에서 높임을 받으셨다’, ‘아버지께로 올라가셨다’는 두 가지 종류의 표현 양식을 따랐다. 문세화, “사도행전에 있어서의 승천 의미,”『신학전망 53호』, (1981. 6), 7면 참조.
이 첫 번째 표현들은 시간 개념에 따라 전․후 도식으로 개발된 것으로 보이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가 바로 부활하여 살아 계시는 예수임을 강조한 것이다. 즉, ‘지상 생활을 하신 예수와 부활하신 예수의 동일성을 강조’ 위의 글, 같은 면.
하게 된 것이고, 발현 대목일 경우 예수의 정체 확인에 역점을 둔 것이다. 두 번째 표현들은 공간 개념을 중심으로 상․하 도식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현양 양식, 즉 예수께서 영광 속에 올림을 받았다는 표현은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권능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받으시고 우리의 주님이 되셨음을 고백하는 표현이다. “첫 양식은 사실을 강조하고 둘째 양식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위의 글, 같은 면.
이렇게 부활과 현양의 표현은 부활 신비의 두 가지 관점으로 보아야 하지만, 두 번째 양식이 첫 번째 양식에 흡수되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부활과 현양이 시간 속에 전개되는 개별적 사건으로 인식될 수도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초대 교회는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 모든 주권을 가진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살아계신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두 가지 양식을 사용하였다. 즉, 예수 부활의 신비를 ‘예수께서 죽음에서 일어나셨다’는 부활의 표현과 ‘죽음에서 높임을 받으셨다’는 현양의 표현이 사용되었다. 전자는 예수에 대한 역사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며 후자는 예수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표현으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이는 부활은 ‘하느님께서 충실한 의인(義人)을 일으켜 주시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보다 나은 상태로 회복시키신다’는 뜻이며, 현양은 묵시문학적 의미에 따라 비하상태와 대조적인 ‘의인의 높임’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 현양의 개념은, 인간의 표현으로는 결코 온전히 설명될 수 없는 예수 부활의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죽음에서 일으켜지다’라는 일반적인 표현을 사용치 않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한을 받으시고 살아계신 우리의 주님이 되심을 고백하는 예수 부활 신비의 또 다른 표현이다.

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활 신앙
그리스도교에 있어 예수 부활은 신앙의 원천이고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노 과르디니(R. Guardini)는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주변적인 현상도 아니고 역사적인 이유에서 만들어진, 따라서 후에 신앙의 본질을 손상시키지 않고 제거 할 수 있는 신화적 산물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R. Guardini,『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인물』, 남현옥․박재순(역) (서울: 바오로 딸, 1995), 594면.
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 설립의 근거이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예수의 부활에 대해 사람들은 적지 않은 의문들을 가진다. 즉, 예수 부활에 대한 신앙적 주장에 저항감을 가지거나 그 사건 자체를 하나의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것으로 여기려 하기도 한다. 위의 책, 591-592면 참조.
따라서 예수 부활 신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대단한 중요성을 가지며 또한 당연히 요청된다.
1. 부활 신앙의 이해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부활 사상이 예수로부터 처음 생겨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먼저 성서 본문의 성서 인용은 다음의 번역 성서를 따랐음. 구약성서는 대한성서공회,『공동번역 성서』, 1986. 신약성서는 200주년 신약성서 번역위원회,『200주년 신약성서』, 분도출판사, 1992. 다른 번역성서를 인용할 경우에는 별도로 표시함.
를 중심으로 구약시대부터 예수 당시까지의 부활사상 형성 과정을 간략하게 언급하겠다.
구약성서에서 종말론적 부활 희망을 분명하게 가리키는 곳은 상당히 적으며, 있다해도 후대의 기록들이 대부분이다. 구약에서 부활에 대한 지배적인 이미지는 ‘잠에서 깨어남’이다(다니12,2 참조). 부활이라는 용어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고대인들의 개념 속에 죽음도 잠으로 생각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구약성서는 죽었다가 살아난 세 사람을 기록하고 있다. 사렙다에 살던 과부의 아들(1열왕17,17 이하), 수겜 여인의 아들(2열왕4,32 이하), 엘리사의 무덤에 시체로 던져졌던 사람(2열왕13,21 이하)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신약의 ‘부활’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이들의 부활은 일시적 부활, 즉 시․공간 차원의 현세로의 복귀를 말한다. 이것은 부활이라는 개념보다 소생의 개념에 가깝다. 따라서 구약성서에서 명시적으로 부활한 자의 사실적이고 직접적인 기록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부활 사상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나타나는 곳은 몇 군데 있다. 구약성서에서 부활에 관한 분명한 언급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은 이사야서 26장 19절이다. 제1이사야서는 유배 이전의 작품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사야서 24-27장은 기원전 3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묵시문학적 표현으로 된 이 작품은 전(前)세대의 의인들도 역사의 완성에 참여하기 위하여 죽음에서 부활할 것(이사26,19)이라는 마지막 심판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있다. 또한 이 표현은 사악한 사람들이 마지막 심판을 피할 수 없고, 의로운 사람들이 그들의 충실성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일반적인 (모든 사람의) 부활교리로 확대되었다. 유배 직후 에제키엘이 이스라엘 전체의 부활에 대해(에제37장) 언급하고 있는 반면, 이러한 사상이 개인적 부활로 표현되어 나타나고 있는 곳은 이사야 26장에서 처음이다. 또한 기원전 168년경에 기록된 다니엘서 12장 1-2절에서도 부활에 관한 적극적인 표현이 나타난다. 여기서 저자는 육신(즉 자기자신)의 부활은 마지막 때, 역사의 드라마가 성취되는 바로 그때에 일어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여기서는 당시의 그리스 학설의 영혼 불멸성과는 달리 묵시문학적 완성의 때에 관한 교리가 이스라엘에 등장했음을 확실히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카베오 후서는 기원전 1세기에 속한 것으로, 여기서 일곱 순교자 형제들 중 처음 세 형제가 죽으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대목들(2마카7,6.9.14.)에는 죽은 자의 부활사상이 확실히 드러나며, 적어도 부활한 자의 종말론적 새로운 존재가 육체적인 것임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는 부활이 율법에 충실한 히브리인의 상급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부활에 대한 확실한 언급보다 조금 약한 표현으로 부활 사상을 드러내는 곳도 있다. 욥기 19장 25-27절에서도 종말론적 희망의 표현, 즉 자기의 명예를 되찾아 줄 뿐 아니라 하느님을 보게 해 줄 속량자의 지고한 현존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실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여기서의 모든 구절들은 대단히 모호하기에 사자(死者)의 부활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 외에 구약성서에서 부활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 구절들, 즉 신명32,39; 1사무2,6; 시16,9-11. 49,15; 73,34등의 구절들은 실제로는 죽음 이후의 부할 사상이 분명히 표현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많은 모호성을 가지고 있다. 결국 모든 인간의 부활이라는 사상은 바룩의 묵시록이라는 위경과 신약성서에 와서 비로소 나타난다. 유대인들의 전통은 영혼과 육신을 갈라서 생각하지 않았기에 부활은 육신부활이 아니고 인간의 부활을 뜻한다. S. B. Marrow, art. Resurrection of the Dead, in NCE 12(1981), pp. 419-422; J. Schmid, art. Resurrection of the Body, in SM 5(1970), pp. 333-338; T. H. Gaster, “부활: 신약이전의 부활,”『기독교대백과사전(제7권)』, 제2판 (서울: 기독교문사, 1984), 1208-1212면; B. W. Anderson, 『구약성서의 이해Ⅲ』, 이성배(역), 200주년 성서별책, 제10권, 제2판 (서울: 바오로딸, 1995), 301-356면; C. Brown, “부활: 구약성서,”『신약편 성서원어대전(제4권)』, (서울: 브니엘출판사), 48-61면; K. Schubert, “그리스도 이전의 부활사상,” 전망, 7호(1969.12), 18면; 이제민, “부활,”『한국가툴릭대사전(제6권)』(서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3645-3646면; J. Radermakers & P. Grelot, “부활,”『성서신학사전』(광주: 광주가톨릭대학전망편집부, 1984), 217-218면 참조.
부활 사상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나타나는 곳은 이사야서 26장 19절과 다니엘서 12장 1-2절, 마카베오 후서 7장 6.9.14절 등이다. 이렇게 볼 때 구약성서에서 부활사상에 대해 표현되고 있는 것은 모두 유배이후 후기 유대교 사상에서만 일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겪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결실로서 종말론적 희망이 표현된 후기 유대교의 고유한 사상이라고 하겠다. 발트 카스퍼(W. Kasper)는 후기 유대교의 죽은 자들에 대한 부활의 희망은 “구약전래(舊約傳來)의 신앙에 나중에 갖다 붙인 첨가물도 아니요, 외래적(外來的)인 도입물(導入物)도 아니다. 이 신앙의 근원은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 W. Kasper,『예수 그리스도』, 박상래(역), 신학총서, 제13권 (왜관: 분도출판사, 1981), 254면.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 부활 외에 죽었다가 살아난 이들에 관한 기사를 몇 군데 찾아 볼 수 있다. 실제로 복음서에서 아이로의 딸(마르5,35 이하), 과부의 아들(루가7,11 이하), 나자로(요한11,1 이하) 이렇게 세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남을 볼 수 있고, 사도행전에서도 도르가(사도9,36 이하)와 유디코(사도20,7 이하)가 죽었다가 살아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부활은 예수 부활의 표적(表迹)에 불과한 소생의 개념이다. 그렇지만 구약성서의 부활 사상과 비교할 때, 신약성서의 부활 사상에는 분명한 특이점이 있다. 즉, 신약성서에서 특별한 점은 부활 개념이 구약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 부활을 바탕으로 하는 확고한 신념 아래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요한5,28.29; 사도17,31; 로마14,10; 2고린5,10; 묵시11,5; 20,11-15 등). J. A. Schep, “부활: 성서적 의미,”『기독교대백과사전(제7권)』, 제2판 (서울: 기독교문사, 1984), 1202면 참조.
이제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활 신앙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예수 당시의 유대교 사고에서는 역사 안에 오신 나자렛 예수와 주님 그리스도와의 일치된 사상이 매우 낯선 것임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런 중에서도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압도적인 그 분의 종교적 의식이 그 추종자들의 기대와 일치하여 그들의 ‘무의식’ 속에 예수와 그리스도가 일치된 하느님 상을 가지게 했고, 이러한 사상은 그 추종자들이 예수의 죽음이라는 좌절을 극복하게 했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R. Guardini, 앞의 책, 593면 참조.
즉, 종교적 충격의 이런 결과가 흥분 된 몇 해 동안 또는 몽롱한 정신 상태에서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과 뗄 수 없이 결합된 그리스도교,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닌 그리스도교 세력이 그러한 단순한 종교적 충격에 의한 몇몇의 추종자들에 의해 생겨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의 책, 같은 면 참조.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은 예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수의 부활은 신약성서에서 발견되고, 초기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우리들에게 대대로 계승된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적인 주장이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일으켜(부활)지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실상 헛된 것이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이 되는’(1고린15,14) 예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J. A. Fitzmyer, 앞의 책, 108면.
복음서보다 수 십 년 앞서 서술되기 시작한 바오로의 서간 사도 바오로의 고린토 전서는 그의 세 번째 선교 여행 중 에페소에서 쓰여진 것으로 55-56년 봄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15장은 그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초대 Kerygma인 부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서보다 적어도 15-20년 이상 앞서 기록된 초대 교회의 부활 신앙을 기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홍기,『사도 바울로의 생애와 편지』, 성서입문 3 (왜관: 분도출판사, 1986), 91, 105-106면; M. Brändle, “초대교회 신자들의 부활관,” 최철영(역),『신학전망 7호』(1969. 12), 22-23면 참조.
에서 벌써 초대교회의 부활 신앙이 뚜렷이 드러남을 볼 수 있는데 그 서간에 의하면,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3년 이내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께서 살아있음을 봤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고린15장 참조). 또한 바오로의 개종을 가져다 준 다마스커스의 환시(사도9장)는 이 개인적인 특별한 한 체험으로 인하여 그에게 부활 신앙을 갖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신비로운 계시의 사건-다마스커스의 환시-은 선택받은 인간들의 ‘종말론적 존재 양상’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체험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바오로로 하여금 종말 때에 살아 계실 성자를 체험함으로써 종말의 단계를 파악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M. Brändle, 앞의 글, 24면.
이와 같은 예수 부활에 대한 해석학적인 이해는 부활 사건의 역사적 사실과 부활 신앙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펼치고 있다. W. Kasper, 앞의 책, 228-243면 참조; 현대 신학에서 말하고 있는 부활 증언에 대한 해석학적 토론에 대하여 여러 신학자들의 견해를 통해 예수 부활에 대한 어떤 징표들이 전하는 의미들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 부활의 역사성을 중심으로 하는 부활 신앙을 중심 주제로 삼고자 하지는 않겠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전하는 부활 신앙 즉, 부활의 체험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승되어 온 부활 신앙은 현재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할 뿐이다. 결론적인 대답을 미리 하자면, 2천년을 이어온 교회의 믿음인 부활 신앙은 초대교회 각 신자들 뿐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도 항상 결단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을 척도로,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가 느끼는 방식에 기초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다면 이것은 하나의 종교적 산물로, 허구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척도로 삼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한 그 부활 신비가 각자에게 분명한 현실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R. Guardini, 앞의 책, 595-597면 참조.
부활 체험은 그 주체가 인간에게 있지 않았다.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이들의 원의와 관계없이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신앙을 형성한 것이 아니다. 즉, “신앙이 부활이라는 현실을 밑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제자들에게 밀어닥치는 부활하신 분의 현실이 신앙을 밑받침하는 것이다.” W. Kasper, 앞의 책, 250면.
이 신앙에 대해 우리는 결단을 내릴 뿐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증언 : 발현 보도와 부활 복음 선포(Kerygma)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이며 핵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실, 예수의 공생활, 수난, 죽음과 같은 대목과는 달리 복음사가 어느 누구도 부활 자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신약성서 어디에서도 예수가 무덤에서 나오는 것이라든가 죽은 이들 가운데 살아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기사는 없다. H. Hendrickx,『예수 부활 이야기』, 황종렬(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1985), 8면 참조.
또한 예수의 부활 그 자체에 대한 자세한 현상학적 언급은 더 더욱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의 부활을 증언할 수 있는가? 앞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부활의 역사성이나 실제성에 대한 사변적 논쟁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 보다도 예수 부활에 대한 증언이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한 것인지 그 의미를 알아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초기그리스도 공동체에서 전하고 있는 부활의 증언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예수 부활에 관한 신약성서에서의 언급은 빈 무덤 이야기와 발현설화, 그리고 부활 선포(Kerygma)로 나눌 수 있다. 신약성서의 복음서에는 여섯 가지 다른 부활 설화가 있다. ①마르16,1-8〈빈 무덤 이야기, 흰 옷입은 젊은이의 부활 선언〉, ②마태28,1-20〈빈 무덤 이야기, 막달라 여가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 앞에서의 예수의 발현, 갈릴래아에서 열한 제자들 앞에서 발현〉, ③루가24,1-53〈빈 무덤 이야기, 부활 선포, 엠마오에서의 발현, 예루살렘에서의 발현, 승천기사〉, ④요한20,1-29 〈빈 무덤 이야기, 막달라 마리아에게 발현, 예루살렘에서 열한 제자들 앞에서 발현, 그리고 다시 열두 제자들 앞에서 발현〉, ⑤요한 복음서 부록(21,1-23)〈갈릴래아에서 일곱 제자들 앞에서 발현〉, ⑥마르코 복음서 보유(補遺)(16,9-20)〈부활한 일요일에 예루살렘 또는 그 근교에서 세 번 나타남, 승천기사〉. 이렇게 네 복음서를 중심으로 부활기사에 대한 내용을 살펴 볼 때, 빈 무덤 이야기, 발현(승천 포함), 부활 선포로 나눌 수 있겠다. J. A. Fitzmyer, 앞의 책, 108-114면 참조.
그러나 여기에서 빈 무덤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부활에 대한 분명한 증언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고 본다. 빈 무덤 이야기는 양식학적으로 볼 때 ‘의식 원인담’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며 부활의 결과로 드러난 징표로 본다. W. Kasper, 앞의 책, 222-228면 참조.
따라서 빈 무덤 이야기를 제외한 발현사화와 부활 복음 선포를 중심으로 예수 부활에 대한 증언들을 살펴보겠다.
사도 바오로의 1고린 15장 5-8절에 예수 발현에 대한 보도가 나타난다. “과연 부활한 예수의 현현에 관한 1고린 15장 및 복음서 전승들은 부활 신앙을 잉태시킨 어떤 역사적 현현 사건을 반영하고 있는가?” 김경희, “현현 보도와 부활 선포,”『종교신학연구 1호』, (왜관: 분도출판사, 1988. 11), 154면 참조.
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문제를 풀어보자. 1고린 15장 5-8절에 나타난 발현 목격자들에 대한 목록은 문학적으로 가장 옛 증인일 뿐 아니라 전승사적으로도 아주 오래된 현현(顯現)에 관한 증언을 가진다고 본다. 위의 글, 154-155면 참조.
그러나 이 현현 목록을 자세히 살펴 볼 때, 이 현현 발언의 관심이 현현 경험자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심의 초점은 현현 자체가 아니고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하는 데에 있다. 즉, 이 현현 발언들은 초대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들이 예수의 현현을 통해 그들의 권위를 근거 지으려는 것이었다. 이 현현목록에 하면 현현경험자는 베드로-12제자-500여명-야고보-모든 사도들의 순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5-7절의 현현 명단이 원래 유기적 통일체가 아니라 여러 독자적 발언들의 복합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또한 더욱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명단의 순서가 모든 사도라는 포괄적 명단 앞에 나타나는 명단들이 우선적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의 글, 154-158면 참조.
이렇게 볼 때 “1고린 15장 5.7절의 현현 발언들이 원래 부활을 증언하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았다면, 이 현현 발언들은 이미 예수가 부활했다는 신앙의 근거 위에 형성되었다고 봐야하게 된다. 현현 경험자들은 예수의 현현에 직면하여 예수가 부활했다는 의식에로 유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부활하심을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에게 합당한 사도직과 사도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위의 글, 157-158면.
또한 복음서에 나타난 현현 보도들(마태28,16-20; 루가24,36-49; 요한20,11-18)의 초점도 부활한 자의 현현에 의한 파견과 제자들의 전권 부여에 있다. 이 보도들은 사도직의 합법화를 위한 행위이며 예수의 부활은 이미 현현 경험자들에게는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심(루가24,13-35),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심(요한21,1-14),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요한20,11-18)과 같은 현현 경험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는 것에 관한 보도에서 예수 부활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증언을 발견할 수 있다. 위의 글, 162-165면 참조.
즉, ‘알아봄 보도 형식’의 현현보도에서 그 형식의 의도가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나 부활하심 자체를 나타내 보이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낯은 사람이 다름 아닌 예수로 밝혀지면서 예수의 참 정체성이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죽은 예수가 하느님에게서 살며 하늘로부터 현현한다는 것, 예수가 하늘 실존을 향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의 글, 164-165면.
요셉 라찡거(J. Ratzinger)는 이러한 ‘알아봄 보도 형식’에 대한 성서의 미묘한 묘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화학적 및 생물적 법칙에 더는 맞출 수 없으며 때문에 사멸가능성(死滅可能性) 밖에, 즉 사랑이 베푸는 저 영원(永遠)에 있는 종국적 생명(終局的 生命)으로 부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외의 상봉(相逢)은 <발현(發現)>이며 이틀 전에 같이 상을 받고 식사를 했던 자를 그의 친지들도 알아보지 못하였고, 또 알아본 연후에도 생소했던 것이다. 오직 ‘그’가 보도록 해주는 경우에만 그는 ‘보이고’ 오직 그가 눈을 열어주고 마음을 열어주어야만 우리의 이 사계(死界) 가운데에서도 죽음을 극복하는 영원한 사랑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되며, 이 사랑 안에 새로운 다른 세계, 내임자(來臨者)의 세계(世界)가 비치게 된다. 그렇기에 복음성서로서도 부활한 자와의 상봉을 묘사하기가 그토록 어려웠고 거의 불가능했다.” J. Ratzinger,『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장익(역) (왜관: 분도출판사, 1974), 244면.
그러나 초대 공동체에서 이러한 ‘알아봄 보도 형식’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언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선포가 반드시 이와 같은 류의 현현 발언을 동반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가령 마르코 복음서에는 빈 무덤 이야기만으로 예수 부활의 선포가 이뤄지고 있다. 사실 이런 류의 현현발언은 복음서 외의 신약성서에서는 1고린15장의 현 편집과 사도행전의 설교 중 10,40과 13,31에서만 발견된다. 이는 이런 류의 현현 발언에 대한 관심은 아주 개별적일 뿐만 아니라 또 이런 현현 발언들이 부활 Kerygma를 위해 불가결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김경희, 앞의 글, 172면 참조.
즉, “‘알아봄 보도’들이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 부활 Kerygma의 동인(動因)이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 보도들은 ‘예수의 부활’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로부터 유발시키지 못했다. 이 현현 텍스트들은 현현 환시를 통해 예수의 부활 자체를 증명-간접적으로-하고 있으나 오히려 부활 Kerygma를 근거로 생겨난 이야기들이다.” 위의 책, 같은 면.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 부활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을 사실적이고,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그 어떤 사건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주도하에 성취된 구원 업적이며, 이 세상의 차원을 넘어서는 초월적이며, 종말론적인 계시임을 알 수 있다.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자들은 자기들이 따르던 그분이 바로 주님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초대교회는 많은 설명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부활의 이해는 초월적인 것이기에 유비적인 이해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예수 부활에 대한 증언에서 ‘빈 무덤’이나 ‘발현보도’, ‘부활 복음선포’보다 훨씬 더 중요한 증명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부활의 증인들이 자기네 신앙을 위하여 생활과 죽음을 통해서 제시한 실존적인 신빙성의 증명” W. Kasper, 앞의 책, 228면.
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기에 예수 부활 그 자체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없다하더라도 역사적 실제성을 분명히 가진다. 예수 부활은 믿는 이들 안에서, 즉 신앙 안에서 증명되어지는 일이다. 왜냐하면 예수 부활은 예수 부활을 믿는 모든 이들로부터 체험되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체험에 대해 신앙할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이 증언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라는 개인적 결단에 달려있다. 매순간 요청되는 결단의 순간에 부활 신앙에로 방향 지움은 우리 자신들이 세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우리 자신들의 부활, 즉 ‘죽은 자들의 부활’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가톨릭과 개신교 현대 신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들을 열거하고 종합한 다음 논문을 참조하라. 최태영, “죽은 자의 復活에 대한 硏究,” 장로교신학대학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8.
에 대한 신뢰의 바탕을 얻게 되는 것이다.
3. 부활 신비를 표현하는 두 가지 양식
예수 부활 사건은 신앙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므로 역사적으로 검증하거나 물증을 들어 밝혀 질 수 있는 그런 사건이 아님을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예수 부활이 완전히 인간 역사를 너머 ‘초역사적’이고 ‘초현실적’인 사건만은 아니다. 다시 말해, 예수 부활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묻히신 예수라는 인물에 국한된 역사적 한계성을 가지는 사건이다. 이 한계가 부활을 비역사적인 사건이며, 순전히 어떤 신앙의 사건으로만 치부하는 것을 막아준다. W. Kasper, 앞의 책, 259면 참조.
이러한 예수 부활의 양면성은 인간 이성으로 완전한 인식이 불가능한 역사적 사실의 이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 놓았다. “십자가에 처형되신 분과 부활하신 분 사이의 계속성과 동일성(同一性)은 홀로 하느님의 창조 및 계약에 대한 신의(信義)에만 근거하고 있다” 위의 책, 같은 면.
라고 발트 카스퍼(W. Kasper)는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신앙 안에서 설명한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초대교회의 신앙 고백에 의하면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에 승리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살아계신다는 이 신비스러운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교회는 두 가지 양식을 이용하고 있다. 즉, 교회는 예수 부활 신비를 첫 번째로 예수께서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죽음에서 깨셨다’는 표현과 두 번째로 ‘죽음에서 영광 속에 들어올림을 받으셨다’, ‘죽음에서 높임을 받으셨다’, ‘아버지께로 올라가셨다’는 두 가지 종류의 표현 양식을 따랐다. 문세화, “사도행전에 있어서의 승천 의미,”『신학전망 53호』, (1981. 6), 7면 참조.
이 첫 번째 표현들은 시간 개념에 따라 전․후 도식으로 개발된 것으로 보이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가 바로 부활하여 살아 계시는 예수임을 강조한 것이다. 즉, ‘지상 생활을 하신 예수와 부활하신 예수의 동일성을 강조’ 위의 글, 같은 면.
하게 된 것이고, 발현 대목일 경우 예수의 정체 확인에 역점을 둔 것이다. 두 번째 표현들은 공간 개념을 중심으로 상․하 도식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현양 양식, 즉 예수께서 영광 속에 올림을 받았다는 표현은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권능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받으시고 우리의 주님이 되셨음을 고백하는 표현이다. “첫 양식은 사실을 강조하고 둘째 양식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위의 글, 같은 면.
이렇게 부활과 현양의 표현은 부활 신비의 두 가지 관점으로 보아야 하지만, 두 번째 양식이 첫 번째 양식에 흡수되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부활과 현양이 시간 속에 전개되는 개별적 사건으로 인식될 수도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초대 교회는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 모든 주권을 가진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살아계신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두 가지 양식을 사용하였다. 즉, 예수 부활의 신비를 ‘예수께서 죽음에서 일어나셨다’는 부활의 표현과 ‘죽음에서 높임을 받으셨다’는 현양의 표현이 사용되었다. 전자는 예수에 대한 역사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며 후자는 예수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표현으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이는 부활은 ‘하느님께서 충실한 의인(義人)을 일으켜 주시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보다 나은 상태로 회복시키신다’는 뜻이며, 현양은 묵시문학적 의미에 따라 비하상태와 대조적인 ‘의인의 높임’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 현양의 개념은, 인간의 표현으로는 결코 온전히 설명될 수 없는 예수 부활의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죽음에서 일으켜지다’라는 일반적인 표현을 사용치 않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한을 받으시고 살아계신 우리의 주님이 되심을 고백하는 예수 부활 신비의 또 다른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