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발생의 요인 – 사상적 요인

 

조선의 性理學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상하 차별적 신분제로 귀착시켰으며, 또 그 상하 차별적 신분제를 원리적으로 합리화・유지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성리학은 관료제와 신분제를 매개로 하여 봉건경제체제를 유지케하는 고도로 세련된 지배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위와 같은 사회적 변동기에 직면하여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성리학은 어떤 식으로든 여기에 대응할 새로운 체제유지 논리를 제시하여야 했으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데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한편 實學이 제기되었으나 이러한 상황을 전면적으로 극복하기에는 사상적으로도 한계가 있었고, 또 이를 추구할 추진세력이 없었다는 점에서 역시 현실을 타개할 논리나 사상에 이르지 못했다.


또 양요가 자주 일어난 19세기 중엽에는 중앙 관료들마저 극복방안에 대한 특별한 대책이 없자, 재야 보수유생 중 일부에서 척사위정론을 부르짖어 위기에 몰린 체제를 부여잡으려 하였다. 이 중 대표적으로 華西 李恒老(1792∼1868)는 춘추대의의 大一統을 주장하면서 「闢異端崇正學」을 앞세운 「正」과 「邪」의 이원적 세계관으로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 했으나 현실적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전통체제의 유지・강화라는 공허한 논리를 펴는데 머물고 말았다.


조선왕조는 억불숭유책을 시행하였음에도 불교는 종교적 기능을 발휘하였다. 사망 후의 기원이나 질병을 고치는 등 불교행사를 통하여 이 신앙이 민중 사이에 전승되어 왔다. 그러나 19세기에 와서 불교는 타락한 모습을 보여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사찰은 재・불공・기복・위안처 등의 의식이나 기피의 장소로 둔갑되기도 하였다. 주요 사찰 유지는 정부의 비호까지 받았던 일이 있었지만 자체 수익으로 인해 징세의 대상이 된 일도 있었다. 그러나 하층 승려들은 사회적 지위의 저하, 냉대와 함께 경제적으로도 영세화를 면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대부분의 승려는 製紙등 수공업에 종사하면서 걸식 상태에 이르러 노비 계층 바로 윗자리에 위치할 정도였다. 더우기 승려들의 동냥 행위나 사찰의 미신화 경향은 불교의 위신을 그만큼 실추시켜 민심의 이반을 가져온 바도 있었다.


도교사상은 노장사상의 한국적 재현으로 은둔사상과 연결, 학식 높은 선비들의 피난, 담소처로 이용되기도 하며 그나마 일반 민중에게는 안주할 수 있는 신앙적 제공처가 될 수 있었다.1) 이렇게 지배계급 안에서 사상적 대안이 여러 갈래로 나타나면서 새로운 사회로의 전망을 제시하는 데 미흡하자, 기층 대중 사이에는 異端思想, 이른바 민중사상2)이 나타나 사회 저변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19세기로 오면서 정감록적 도참사상이 도시와 시골 구석구석까지 더욱더 파고 들어갔다.3) 「궁중의 과부가 자기 뜻대로 하고 어린 임금이 왕위에 오르면 나라 일은 장차 어긋난다」, 「조선왕조가 곧 멸망하고 정씨왕조가 들어선다」, 「정씨왕조의 우두머리인 鄭眞人(혹은 정도령)이 海島에서 군사를 길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러 나온다」, 「몸을 보존할 땅이 열군데(十勝地) 있다」, 「십승지에 들어가면 가난한 사람은 살고 부자는 죽는다」고 하는 정감록의 주장은 당시 정치현실을 잘 드러낸 것이었고, 따라서 정감록에서 제시하는 방안은 그럴듯한 것으로 보였다. 이는 또한 새로운 사회변혁을 암시하여 지배층에 대한 노골적인 반역심을 선동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민중 심리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4)


또 일반 기층 대중들은 삼국시대부터 전해오는 미륵신앙에서 예언하는 미륵의 출현에 한가닥 기대를 걸기도 하였다. 그러한 믿음은 당시 고통스런 생활을 영위하던 기층 대중의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다른 한편으로 좀더 나은 사회를 바라게 하였다.


또 기층 대중 사이에는 後天開闢說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이는 마치 일상생활에서 오전 오후가 번갈아 오듯이 세상에도 先天과 後天이 서로 순환하는데, 지금의 운수는 신분이 높고 부패한 자들이 잘 먹고 잘사는 선천이 끝나고 후천이 시작되고 있다고 하였다. 후천이 오면 병도 없어지고 관리들의 수탈마저도 사라져 무지렁이가 오히려 권세와 힘을 누리면서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仙境이 실현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민중사상의 전파와 병행하여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 역시 당시 사회적 상황에 대응하는 하나의 방안으로 생각되었다. 19세기 초에 여러 차례 사옥을 통하여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계속 조선사회에 침투하여 신도수를 늘려나가 1850년대 말과 1860년대 초에는 상당한 신도들을 각 계층 속에 확보하였다.5) 이와 같은 신도의 증가 추세는 천주교에 대한 당시 조정의 대책없는 방임자세와 관련이 있었고, 천주교 신부들이 주요 도시에 세운 施藥所에서 제공하는 시혜행위에 기층 대중들이 끌린 탓이었다.6) 또 영・불 연합군의 중국 침략으로 야기된 사회적 위기의식이 천주교에 대한 가수요까지 창출하는 상황에서 기층 대중들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비상하게 달라졌다. 그때 조선에 온 천주교 신부들은 만약 중국을 침략한 군함이 조선 근해에 나타났다면 천주교는 포교의 자유를 얻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다.7) 어쨌든 천주교는 착실히 교세를 넓히면서 서구 세계를 조선사회에 소개하고 있었다.


즉, 수운의 동학 발생은 이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그 분위기가 성숙할 대로 성숙된 오묘한 지경에 놓여 있음에서 가능하였다. 불우한 처지에서 새로운 민족구원을 염원하던 수운에게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배경이 시의에 맞아 「운수」의 실현과 「후천개벽」의 전개가 눈앞에 닥쳐온 것으로 평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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