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승천에 관한 전승은 예수에 관하여 국한되는 최초의 사건이 아니다. 구약성서를 비롯하여 고대 근동지방의 신화에도 나타날뿐더러 신약에 와서는 성모 마리아의 몽소 승천 교리가 교의로 선포되기도 했다. 따라서 예수 승천 전승 외에 일반적으로 어떤 승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는지 먼저 살펴본 뒤 예수 승천에 대한 보도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1. 일반적인 승천 이야기
구약시대에 “유다인의 세계관과 인간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인간은 사후에 한번씩은 명부에 꼭 내려간다’고 믿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적 규칙에도 이스라엘 민족의 사고를 반전시켰던 몇 몇 예외가 있다.” A. Marchadour,『성서에 나타난 죽음과 삶』, 고봉선(역) (서울: 가톨릭 출판사, 1991), 58면.
사실, 하늘이 신들이 머무는 곳이라는 사고는 세계 모든 민족들이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기도 하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성서 도처에 이러한 사고 방식이 반영되고 있다. P. Benoit, et al., “승천,”『성서신학사전』(광주: 광주가톨릭대학전망편집부, 1984), 334면 참조.
일반적으로 구약성서에서 승천에 관한 대표적 인물은 에녹과 엘리야이다. 창세기 5장 21-24절을 살펴보면 에녹은 모두 삼백육십오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데려가신 것으로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에녹은 노아 홍수 이전의 족장들 중 한 명이며 그의 생애는 그러한 인물들의 햇수(700-800년 사이)에 비해 좀 짧은 것 같다. 그러나 에녹은 “태양년인 356년을 살았는데, 이 햇수는 사실 완전한 수를 상징한다. 또한 그는 인간들의 공통적 운명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하느님이 그를 직접 데려가셨기 때문이다.” A. Marchadour, 앞의 책, 같은 면.
여기서 원어를 살펴 볼 때 “중요한 동사 라카흐(חקל)는 ‘취하다’(take)를 의미한다. 마틴 아카드는 여기에서 이 단어가 ‘하느님께로 인간을 떠맡긴다는 뜻을 가진 전문적 표현어구’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데려간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다.” C. Brown, “부활,”『신약편 성서원어대전(제4권)』(서울: 브니엘출판사, 1986), 51면.
그리고 70인역본에서는 동사 μετατὶθημι(위치를 변화시키다, 자리를 옮기다)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승천’이란 곧 바꿈과 변화를 의미하며 더 나은 상태에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에녹의 생에 대한 창세기 5장 21-24절의 단순한 진술이 후기 유대교에서 에녹을 지혜와 의(義)의 모델로 보는 견해로 뚜렷이 발전되었으며 정리된 승천이론의 정점을 이루게 된다고 볼 수 있겠다.” 위의 책, 51-52면 참조; 그러나 이에 대한 다른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즉, 창세5,24에서는 아직 에녹의 승천이 생각되지 않는다고 K. Berger는 말한다. חקל는 ‘데려감’=‘죽음’이라는 뜻으로 흔히 나타난다(지혜4,18-20; ASS Mos10,12: receptio)고 말하고 있다. K. Berger, Die Auferstehung des Propheten und die Eröhung des Menschensohnes, Göttingen, 1976, P.570, 주416 참조. 김경희, 앞의 글, 166면, 주33 재인용.
2열왕 2장 1절-14절은 엘리야의 승천에 관한 대목이 언급된다. 11절에 엘리사와 엘리야 두 사람이 길을 가는데 불 말이 불 수레를 끌고 그들 사이에 나타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지면서 엘리야는 회오리바람 속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간다. 여기서도 ‘승천’을 표현한 말로 라카흐(חקל)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실 이 동사는 에녹, 엘리야 승천과 시편 49편과 73편에서 똑같이 보게된다. A. Marchardour, 앞의 책, 같은 면 참조.
그러나 이러한 표현이 신약에서와 같은 승천을 묘사하는 단어라고 말하기에는 많은 의문이 남는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기사에서 두 가지 측면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즉, 하나는 그들이 지상 생활의 끝에 야훼의 면전으로 나아갔고 또 야훼께서 친히 그 진취적인 자들을 이끌어 올리셨다는 적극적인 면이며, 또 다른 한 측면은 둘 중 어느 경우에도 죽음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소극적인 면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두 기사의 저자들은 분명 적극적인 측면에 주의를 집중시키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병철, 앞의 책, 53면 참조.
또한 이러한 “현양 내지 ‘천계납치’(天界拉致)라는 표상은 이승에서 살다간 한 인간이 종말적 사건들이 일어날 때 한 몫을 하리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당대 유대교가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범주였다.” W. Kasper, 앞의 책, 263면.
요약하자면, 구약성서의 승천이야기는 하느님과 함께 살며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다가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하늘에 올려진 특은을 받은 사람들의 종말에 관한 기사이다. 이들에 관한 승천의 표현이 부활의 삶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는 보기 힘들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하늘이라는 신적 세계로 불려진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임은 분명하다.
또한 고대 로마 신화에서 전하는 로물루스 로물루스(Romulus)는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설했다고 전하는 신화상의 인물. 이 이름은 단지 ‘로마인’이라는 뜻이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모두 그리스 신화에서 도입된 것이다. M. Grant & J. Hazel (Eds), “로물루스(Romulus),”『그리스․로마 신화 사전』, 김진욱(역) (서울: 범우사, 1993), 79면 참조.
와 같은 이교도 영웅의 승천 이야기도 있다. 그의 최후에 관한 로마 신화의 내용은 상당히 흥미롭다. 이 신화에 따르면 “로물루스는 40년 동안 평화롭고 번영된 통치를 끝낸 후 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카플라(‘암산양’이라는 뜻)의 늪지 가까이 있는 캄푸스 마르티우스(‘마르스의 평원’)에서 열병식을 거행하고 있을 때, 갑자기 뇌성과 번개가 일어나면서 그는 구름에 싸여 시야에서 모습이 사라졌다. 이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환호를 하며 로물루스가 신이 되었다고 갈채를 보냈다. 그후 얼마 동안 로물루스는 율리우스 프로클루스라는 이름의 사나이 앞에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나타나, 로마는 만사가 순조로울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리고 로마인에게 무예를 숭상하고, 앞으로 자기를 퀴리누스신으로 받들라고 고했다” 위의 글, 82-83면.
는 것이다. 또한 이와 비슷한 고전의 내용들의 예로 헤라클레스(Herakoes),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이 모든 ‘승천 이야기’의 경우에 있어서 특징적인 면은 관중 또는 그 증인들의 눈앞에서 그 당사자가 사라져 버리는 장면이 그때마다 그들 앞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대부분 그 당사자는 구름에 감싸여 하늘로 올라간다. 이러한 모든 장면은 어떤 산 위에서, 아니면 언덕 위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개는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주위 사람들에게 중요한 과제를 건네주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한다.” G. Lohfink,『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 신교선․이석재(역), 제2판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3), 20면.
따라서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승천에 관한 전승이 그리스도교만의 유일한 것만이 아님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예수의 승천 전승 또한 이러한 고전들의 영향을 받아 기인된 것임을 의심할 수 없다 위의 책, 21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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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승천을 말한다면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아의 승천에 관해 말하려면 우선 용어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예수의 승천을 ‘Ascensio’(상승, 오름, 올라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마리아의 승천은 ‘Assumptio’(올림을 받음)로 표현하며 구별하고 있다. 즉 예수의 승천은 능동성을 드러내는 데 비해서 마리아의 승천은 수동성을 드러낸다. 과거 한국 교회는 이러한 구별을 위하여 마리아의 승천을 ‘몽소승천’(夢召昇天)이라 하였다. 즉 마리아는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것이다.” 조규만,『마리아, 은총의 어머니: 마리아 교의와 공경의 역사』(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8), 378면.
성모 승천의 교의는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의 사도 헌장「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통해 장엄하게 선언되었다. 이 회칙이 선포되기까지는 사실 오랜 세기를 걸쳐 마리아의 승천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성모 승천 교의 선포의 역사적 과정’에 대해서는 위의 책, 379-393면을 참조하라.
그러나 이 회칙에서 “전 세계의 주교들은 복된 동정 마리아의 육체적인 승천의 진리가 거룩하고 가톨릭적 신앙으로 정의되어야 할 것을 한결같이 요청하였다. 이 진리는 성서에 그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고 신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오래 전부터 전례예배로 인정되어 왔으며, 다른 여러 진리들과도 완전히 일치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신학자들의 연구와 지식과 지혜로써 명쾌하게 전개되었고 설명 되어왔다.” “the bishops from all over the world ask almost unanimously that the truth of the bodily Assump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into heaven be defined as a dogma of divine and catholic faith; this truth is based on Sacred Scripture and deeply embedded in the minds of the faithful; it has received the approval of liturgical worship from the earliest times; it is perfectly in keeping with the rest of revealed truth, and has been lucidly developed and explained by the studies, the knowledge and wisdom of theologians.”(DS 714). J. Neuner & J. Dupuis (Eds), The Christian Faith, London: Collins, 1983, p.207.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마리아에 관한 교회 안에서의 위치를 확실히 밝히고 있다. 교의 헌장(LUMEN GENTIUM)(1964년)에서는 구세사업 안에서 마리아의 역할을 통해 성모 승천의미를 말한다. 즉, “그녀의 역할은 예수의 유년기 신비(57항)와 그분의 공생활(58항)속에서 조금씩 밝혀진다. 그 역할은 성령강림날 교회 한가운데에 계셨던 마리아의 현존 안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승천에서 완성된다(59항).” “Her role is unfolded in the mysteries of the infancy of Jesus (57) and in His public life (58). It is fulfilled in her presence in the midst of the Church on Pentecost, and finally in the Assumption (59).” Ibid., p.208. LG 57-59 참조.
마리아의 승천이 교의로 인정된 것은 마리아가 지상 삶을 살아간 후 거의 이 천년이 지난 뒤의 일이지만, 사실은 오랜 세월동안 교회와 대중적 신심과 전례를 통하여 표현된 마리아의 승천에 관한 믿음을 개진한 것이다. 마리아 승천 교의의 의미에 대해 볼프강 바이너르트(W. Beinert)는 “마리아의 승천은 마리아가 그의 구세사의 목표, 즉 구원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인간이 하느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졌음을 뜻한다. 여기서 마리아의 하느님의 어머니로서의 의미가 더욱 강조된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기에 거룩하게 되셨고, 그 목표인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규만, 앞의 책, 394면.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의 승천과 같은 의미로 여길 수 있는 사건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즉, ‘성모 승천의 교의에 대한 신앙의 본래 본질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하더라도 성서에 명시적으로 증언되어 있지도 않고, 또 초기 전통에서도 명료하지 않았다는 점과 또 교황 비오12세의 회칙은 마리아의 죽음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의 승천과의 차이를 보게된다. 다시 말해, 마리아의 승천이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생략하고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결코 이 교의를 쉽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께서 친히 당신 자신의 삶을 통해, 즉 당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원한 삶에 대한 보증을 주시고, 또 우리에게 그것을 희망하길 바라시는 당신 뜻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의의 발전 과정과 축일 명칭 변화 과정을 볼 때, 즉 마리아의 잠드심(永眠), 이주(移住), 천상탄일, 승천으로 발전해 왔다는 점에서 성모 승천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은 분으로 마지막에 얻게 될 영광의 선취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모 승천은 마리아론적 의미와 교회론적이며 종말론적 의미를 가진 교회의 믿음이며 희망이라고 볼 수 있다.’ 위의 책, 395면 참조.
마리아의 승천 교의에 대해 칼 라너(K. Rahner)는 말하기를 “어쨌든 여기서 신앙의 본래 본질에 원칙적으로 모순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자신들 모두에게 있어서 자기들의 희망으로써 신앙 고백하는 것을 마리아에게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몽소승천’은 바로 이 한 사람의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행위의 완성인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 행위와 은총의 완성이고, 우리는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도 희망하는 것이다.” K. Rahner,『그리스도교 신앙 입문: 現代 가톨릭 神學 基礎論』, 이봉우(역), 사목총서 15 (왜관: 분도출판사, 1994), 500면.
따라서, 예수의 승천과 성모 승천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닌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2.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한 분석 : 루가 전승을 중심으로
예수 부활에 관한 보도와는 달리 예수의 승천에 관한 기사는 신약성서 전반에서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혹자는 ‘아버지께로 올라가심’, ‘올림’, ‘높임’, ‘영광 속에 올림 받음’ 등의 표현이 예수의 승천을 표현하는 구절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부활 신비를 표현하는 두 가지 양식의 특징을 인정한다면, ‘올림을 받으셨다’, ‘높임을 받으셨다’, ‘올라가셨다’는 표현은 부활 후의 사건이 아니라 부활을 표현하는 현양의 표시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승천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고 잘못 이해된 성서 구절들이 그 만큼 줄어 들 것이다. 문세화, 앞의 글, 8면 참조.
이제 우리는 현양과 승천을 동일시하지 않고 구분하여 성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렇게 볼 때 “현양에 관한 표현들이 성서 전체에 사용되고 있는 반면에 승천이란 전승은 엄밀히 말해서 루가 작품에만 전하고 있다” 위의 글, 같은 면.
는 것을 알 수 있다.
2.2.1. 루가 복음서의 승천대목
현양과 승천의 표현을 동일시하지 않을 때 예수 승천 전승이 유일하게 루가 전승에서만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 승천에 관해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전승을 전하고 있다. 대목을 비교해 보면 용어와 시간 문제 등 상반되는 내용을 접하게 되고 승천에 관한 많은 의문을 제시할 수밖에 없게 된다.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원래 단행본으로 편집되었으나 교회가 2세기경 4개 복음서를 같이 편찬할 때에 앞부분(복음서)과 뒷부분(사도행전)을 분리시켜 승천을 묘사하는 복음서의 결론 부분(루가24,50-53)을 첨가했고, 사도행전 1장 1-5절 대목을 뒷부분의 머리말로 작성했다는 가설이 있다.” 위의 글, 9면.
이러한 가설은 루가의 승천에 관한 두 전승의 차이점에 관해 의혹을 상당히 해소하기도 하지만, “문헌비판과 문학양식의 연구 결과로 보아 복음서의 결론과 사도행전의 머리말은 루가의 조작임이 확실한 것 같다.” 위의 글, 같은 면.
결국, 이러한 관점에서 두 문헌을 비교해 볼 때, “복음서의 끝 부분과 사도행전의 앞부분이 서로 통한다는 것은 루가의 작품이 단행본으로 편집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복음서의 승천 대목은 예수를 중심으로, 사도행전의 승천 대목은 제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작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루가는 복음서에서 지상생활을 전하고 난 후 사도행전에서는 이제 사도들의 활동과 교회의 발전을 묘사해 준다.” 위의 글, 14면.
루가 복음 24장 50-53절은 예수의 고별 축복과 승천 기사로써, 이것은 복음서의 결론 부분이며 부활 후 발현 기사들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예수의 승천 기사는 예수의 마지막 발현이며 승천과 더불어 예수는 영광에 싸여 하늘의 주님으로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며(루가24,50-51), 제자들은 예수께 경배하고 기쁨을 느끼며 하느님을 찬양하며 지내게 된다(루가24,52-53). 여기서 주된 본문 비판의 문제는 ‘본래부터 승천에 대한 기록을 포함하고 있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라고 헤르만 헤드릭(H. Hendrickx)은 말한다. 그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위 서방 사본군이나 다른 몇몇 사본들은 ‘그가 그들을 축복하면서 그들을 떠나갔다’라고 전하고 있다. 또 다른 사본들은 여기에다 ‘그리고 하늘로 올림을 받았다’라는 구절을 첨가한 경우 원문 비판에 있어서 ‘하늘로 올림을 받으셨다’(και ἀνεφερὲτο εἱς Τὸν οὐρανὸν)는 문구를 문제로 삼을 수 있다. 4세기의 사본(Vaticanus Sinaiticus)들과 5세기의 사본(Alexandrinus), 그리고 5세기와 10세기 사이에 필사된 소위 ‘대문자 사본’들이 예외 없이 이 문구를 전해주고 있다. 다만 Sinaiticus의 초안과 소위 ‘서부본문’(西部本文)을 전하는 사본(Bezae의 사본, 5-6세기)에는 이 문구가 누락되어 있다. 위의 글, 9면.
도 있다. 하지만 본문 비판학자들이나 주석학자들은 점차 긴 본문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긴 본문을 취하는 데 따른 필사 증거는 뚜렷하다. 오히려 서방 사본군에서 그것이 생략된 것조차 쉽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루가 24장과 사도행전 1장 사이에 보이고 있는 뚜렷한 모순을 제거하고 싶었던 데에 그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루가 24장에 의하면 예수는 그가 부활한 지 24시간 안에 승천한 것 같아 보인다. 반면에 사도행전 1장에는 그가 하늘로 올림을 받은 것은 부활 후 40일이 지나서였다고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1장에서는 짧은 본문으로라도 루가 24장의 승천에 대해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즉 ‘(그가) 승천하셨다’는 특별한 구절로 나타나는 사도행전 1장 2절은 루가 24장 51절의 ‘(그가) 그들을 떠났다’는 귀절과 관계된 것으로서 그것은 바로 이 복음서 귀절에 대한 해석이기도 한 것이다.” H. Hendrickx, 앞의 책, 174면.
루가는 예수께서 더 이상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지 않는 이 마지막 자리에서 서슴없이 ‘(그는) 하늘로 올라 가셨다’라고 덧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위의 책, 176면 참조.
루가는 분명히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구분하고 있다. 이것은 마르코나 마태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루가의 경우, 승천은 그가 일종의 ‘여행’으로 본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뚜렷한 경계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지상 예수의 시대와 교회 시대 사이에 그어진 뚜렷한 경계선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표현은 완전히 루가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 의거한 것이다.” 위의 책, 177면.
루가 24장 52-53절의 내용, ‘그들은 예수께 엎드려 절한 다음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언제나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지냈다’는 구절이 예수 승천 후 바로 이어지고 있음은 ‘지상 예수의 시대’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시기’로 넘어감을 상징하는 구절이라 하겠다. 또한 “승천 대목은 온 복음서의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마지막 발현은 공동생활과 설교활동의 끝이고 제자들과의 이별이다.” 문세화, 앞의 글, 10면.
고별 축복과 승천 기사는 루가 복음서의 첫 장과 일치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당신 손을 들어 축복해 주셨다’는 구절은 예수를 메시아로서의 대사제를 표현하는 것 같다. 아론이 백성을 축복하는 레위기 9장 22절과 유사한 표현이며, 이보다 집회서 50장에서의 축복하는 사제와 그에 응답하는 공동체의 모습 “그런 다음 시몬이 내려와 이스라엘인들 회중 전체를 향하여 손을 쳐들고 입술로 주님의 복을 빌어주며 그분의 이름을 현양하였다. 사람들은 지존하신 분께 복을 받기 위하여 두 번째로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집회50,20-21). 주교회의 성서위원회(편),『집회서- 구약성서 새 번역 6』, 정태현(역)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206면, 50장 20-21절.
과 더욱 흡사하다.
2.2.2. 사도행전의 승천대목
예수 승천에 관한 또 하나의 기사인 사도행전 1장 6-11절에서 예수 승천에 관한 연구를 더욱 깊이 할 수 있다. 루가는 사도행전 첫 머리에 사도행전의 취지를 간략히 설명한 다음 교회의 출발점, 원천을 묘사함으로써 사도들로부터 이어지는 초대 교회사를 기록해 간다. “교회는 획기적인 사건에서 발생되었다. 이 원초적인 사건은 바로 예수의 승천과 성령강림이다.” 문세화,『사도행전 해설서: 세상 끝까지 나의 증인들』(광주: 성신출판사, 1981), 95면.
그러나 이 원초적인 사건에 대한 성서의 보도는 우리에게 한 가지 의문을 갖게 한다. 즉, 이 큰 사건에 대해 ‘다른 복음사가들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왜 다른 복음서 전승에서는 보도해 주지 않는가? 이에 대한 답은 앞으로 상세히 다루어지겠지만 미리 결론지어 말한다면, 루가의 이 특별한 전승은 예수 부활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이고 이해하기 쉽게 해명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활은 단지 시체의 소생이 아니라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의 계시이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부활시키시고 성령을 파견하셨다는 사실을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신비이며 인간 역사 속에서 표징을 남겨 준 사건이다.’ 위의 책, 같은 면.
루가 전승, 특히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승천과 성령강림이 시간적 순서에 따라 마치 실재적이고 환시적인 묘사를 하고 있는 것은 루가 복음사가의 예수 부활 신비에 대한 독특한 표현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루가의 독창적이고 주관적인 창작의 표현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의 유대 사고 방식 안에서 보편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현양 사상’ 현양이라는 표상은 오늘의 우리에게는 생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후기 유대교에 있어서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슈바이써가 고증(考證)한 바와 같이, 거기서는 고난을 받다가 현양된 의인(義人)에 관한 표상이 커다란 구실을 떠맡고 있었다. 엘리아, 에녹, 그리고 그밖의 다른 의인들이 하늘로 높이 끌려간 것은 그곳 하늘에서 대기(待機)하고 있다가 바룩 처럼 최후심판 때에 증인으로 나설 수 있기 위함이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엘리아가 다시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마태11,14; 16,14; 17,10). W. Kasper, 앞의 책, 262-263면 참조.
을 당시 선교 대상자들에 대한 교육적 차원에서 그러한 표현을 기록했던 것이다.
루가는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 즉 하느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다시 말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에 통용되고 있던 상징적인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그의 전승에 나타나는 ‘구름’이라는 표현도 성서적 의미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뜻한다. 출애13,21-22; 다니7,13 참조.
사실 초대교회 신자들도 이러한 표현을 상징적으로 알아들었다. 문세화, 앞의 책, 99면 참조.
루가는 사도행전에서 복음서와는 다른 각도로 예수의 승천을 묘사한다. 사도행전 1장 6-11절의 승천에 관한 묘사는 앞서 복음서와의 시간이나 장소의 일치에 전혀 관계없이 실재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실 루가의 이 두 전승은 한 사건이라고 말하기에 어려울 정도의 모순되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즉, 사도행전에서 루가는 예수의 승천 장면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과 흰 옷 입은 두 사람의 등장, 그리고 루가 복음서의 예수 승천 장소는 베다니아 근처인데 반해 사도행전에서는 올리브산이라는 점,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에서 전하는 40일간의 시간적 차이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루가가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승천을 설명하며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도를 잠시 살펴 본 후 그가 묘사하는 구절들의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루가는 현양 교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화를 꾸미고, 이 사화의 각 요소에 드러나는 상징적인 의미를 통해 부활의 의의를 드러내고자 한다. ‘다시 말해 루가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효과에서 출발하여 볼 수 없는 사건의 의미를 밝혀 준다. 그 첫 단계로 루가는 승천하신 예수와 대기하는 사도단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를 묘사하고, 그 다음 단계로 교회 발전 과정에 활약하게 되신 성부, 성자, 성령과 사도들과 그 공동체를 등장시킨다. 즉 루가는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교회사의 주인공들을 소개하고 있다.’ 위의 책, 96면 참조.
루가는 부활 신비를 표현하는 승천을 묘사하면서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심이 제자들을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양상으로 그들과 함께 하시며(사도1,11), 하느님이며 인간이신 예수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으로 활약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제 루가가 이러한 의도 아래 승천을 묘사한 각 구절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사도행전 1장 9-11절에 “예수의 승천이 단 한마디로 표현되어 있지만(ἐπὴρθη) 엄격히 말해서 승천에 관한 묘사라고 볼 수 없다. 예수께서 올라가시자 ‘구름에 싸여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문구는 루가의 의도를 충분히 밝혀 주고 있다. 제자들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올라가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승천은 현양의 상징이니 만큼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문세화, 앞의 글, 12-13면.
따라서 사도행전에서 드러나고 있는 루가의 의도인 상징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동안 제자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올라간다’(ἐπαὶρω)는 말과 ‘쳐다본다’(βλὲπω)는 말은 구약의 승천인물인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와의 대화가 어떤 의미를 전해 준다. 2열왕 2장 9-10절에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야훼께서 이제 나를 데려 가실 터인데, 내가 자네를 두고 떠나기 전에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는가?”하고 묻자 엘리사는 “스승님, 남기실 영검에서 두 몫을 물려주십시오”라고 청한다. 그러자 엘리야는 “내가 떠나는 것을 자세히 본다면 소원대로 되겠지만, 보지 못한다면 그렇게 안 될 것일세”라는 말을 주고받은 후 엘리야는 하느님으로부터 하늘로 들어 올려진다(2열왕9-10 참조). “루가는 예수를 자주 새로운 엘리야로 소개한다(루가7,16; 9,42). 예수께서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하늘에 올라가시는 것을 본 사도들은 틀림없이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 사도들이 예수께서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으니까 예수의 사명을 이어받기 위하여 예수의 얼, 즉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 문세화, 앞의 책, 100-101면.
또한 구름이라는 표현은 앞서 말했듯이 하느님의 현존을 뜻하는 성서적 표현이다. 그리고, 흰 옷 입은 두 사람의 등장은 천사들이 그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루가24,4에서 여자들이 예수의 빈무덤에서 만난 ‘번쩍이는 옷을 입은 두 남자’를 24,23에서는 천사들이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루가는 천사의 표현을 이런 식으로 묘사하면서 그들의 역할이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전달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또 루가1,26 이하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느님의 명(命)으로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의 탄생을 미리 알리는 장면에서도 루가 복음사가가 인식하고 있는 천사의 개념과 역할을 알 수 있다.
루가는 이렇듯 천사들의 등장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그들의 역할과 하느님 구원의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R. F. O’Toole,『루가 신학의 통일성: 루가 복음과 사도 행전의 분석』, 유철(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1991), 37-38면 참조.
또한 천사들이 제자들에게 전한 말씀은 ‘주님의 재림을 예고하며 더불어 사도들에게 그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헛되이 기다리지 않도록 사도들의 삶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있다.’ 위의 책, 39면 참조.
다음으로 이제 승천 장소 문제에 관해서 살펴보자. 승천 장소에 있어 루가 복음은 ‘베다니아 근처’라고 전하는데 반해, 사도행전은 ‘올리브산’이라고 전하는 루가 전승의 차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지리적으로 볼 때 올리브산과 베타니아는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에제키엘서 11장 23절에 야훼의 얼이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 동쪽에 위치하는 산에(올리브산) 머무셨다는 기록과, 즈가리야서 14장 4절에 야훼께서 이 세상에 임하실 때에 올리브 산에 발을 놓으시겠다는 기록을 이용하여 루가는 예수께서 이제 하느님처럼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의 재림을 땅에 엎드려(루가24,53)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파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문세화, 앞의 책, 101면.
이제 마지막으로 40일간의 기간 문제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루가 복음이 전하는 예수 승천은 부활하신 날에 이루어지는 듯 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부활하신 후 40일 후에야 승천하신 것으로 전한다. 이러한 차이는 ‘부활과 승천의 불가분의 관계’를 강조하는데 중점을 둔 복음서와는 달리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의 시대’를 열면서 사도들의 활동을 묘사하기 전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보여주신 여러 증거와 가르침에 그 중점을 두었다는 것을 염두 해 둘 필요가 있다. 루가는 사도행전에서 부활 후 40일간의 지상활동 시기를 통해 교회의 시대를 준비하는 교량적 시기를 염두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예수께서 40일 동안 현양을 기다리셨다기 보다(이런 경우에는 40일이라는 말은 승천 대목에 삽입되었을 것이다) 사도들이 40일간 설교 활동을 준비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문세화, 앞의 글, 14면.
또한 이 40일 이라는 기간은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정확한 기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가간’, ‘준비의 기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기간의 전형적인 모형인 것이다. 예를 들어, ‘구약 성서에서 대 홍수 때 40일간 비가 쏟아졌고(창세7,12; 8,6),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모세가 40일간 시나이산에 머물렀고(출애24,18; 34,28), 모세가 파견한 염탐군들은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 전 40일간 염탐했고(민수13,25; 14,34), 예언자 엘리아가 40일간 호렙산에 피신했다(1열왕19,8). 또한 유대교 작품에서 에스드라 역시 40일 동안 환상을 기록했으며(제4에스드라14,24-45), 바룩의 묵시록 이 문헌에 관한 87장으로 된 유일한 완전한 본문은 6세기의 시리아어 사본만이 있으며, 이것은 희랍어 사본에서 번역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희랍어 사본 또한 히브리어 원본을 번역한 것으로 확신하고있으며, 따라서 철저한 유대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본다. M. Rist, “바룩의 묵시록,”『기독교대백과사전(제6권)』, 제2판 (서울: 기독교문사, 1984), 1082면 참조.
6장 1-4절과 아담과 하와의 생애 라틴어 사본으로 된 외경. 저작 연대는 예루살렘 성전이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어서 아마 그리스도교가 시작 될 무렵일 것으로 추정한다. B. J. Bamberger, “아담서,”『기독교대백과사전(제10권)』, 제2판 (서울: 기독교문사, 1984), 793면 참조.
6장에서도 40일이라는 기간은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졌다.’ 문세화, 앞의 글, 14면 참조.
복음서에서도 예수께서 공생활 전 40일간 광야에서 계셨다. 이렇게 40일이라는 기간을 상징적으로 이해되어 짐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루가는 40일 이라는 기록을 통해 예수의 발현 기간을 한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깊게 받는다. 루가의 이러한 표현은 그의 신학적 의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도행전 14장 4절과 14절을 제외하고는 루가는 사도란 호칭을 열두 제자에게만 국한시켜서 사용했고(사도1,2.6; 2,37.42; 6,2; 16,4), 세례부터 승천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공생활을 목격한 제자들에게만 증인 자격을 부여한 셈이다(사도1,22; 10,41). 한 마디로 말해서 루가는 발현 기간을 제한함으로써 증인의 숫자를 한정했다는 인상을 준다.” 위의 글, 15면.
결국, “부활과 승천 사이에 전형적인 기간을 삽입함으로써 루가는 사도들의 활동과 교회의 성장기간을 암시했다. 40일간 성령을 약속하시고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시는 예수의 모습을 묘사해 주면서, 루가는 부활 후에 일어난 여러 가지 현상을 재해석하여 예수의 개선을 애타게 기다리는 신자들의 초조함을 풀어주고, 종말 문제를 재검토한다.” 위의 글, 같은 면.
루가는 예수의 승천을 통해 신자들에게 예수의 다시 오심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종말론적임을 이해하도록 나아가고 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승천에 관한 전승은 예수에 관하여 국한되는 최초의 사건이 아니다. 구약성서를 비롯하여 고대 근동지방의 신화에도 나타날뿐더러 신약에 와서는 성모 마리아의 몽소 승천 교리가 교의로 선포되기도 했다. 따라서 예수 승천 전승 외에 일반적으로 어떤 승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는지 먼저 살펴본 뒤 예수 승천에 대한 보도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1. 일반적인 승천 이야기
구약시대에 “유다인의 세계관과 인간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인간은 사후에 한번씩은 명부에 꼭 내려간다’고 믿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적 규칙에도 이스라엘 민족의 사고를 반전시켰던 몇 몇 예외가 있다.” A. Marchadour,『성서에 나타난 죽음과 삶』, 고봉선(역) (서울: 가톨릭 출판사, 1991), 58면.
사실, 하늘이 신들이 머무는 곳이라는 사고는 세계 모든 민족들이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기도 하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성서 도처에 이러한 사고 방식이 반영되고 있다. P. Benoit, et al., “승천,”『성서신학사전』(광주: 광주가톨릭대학전망편집부, 1984), 334면 참조.
일반적으로 구약성서에서 승천에 관한 대표적 인물은 에녹과 엘리야이다. 창세기 5장 21-24절을 살펴보면 에녹은 모두 삼백육십오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데려가신 것으로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에녹은 노아 홍수 이전의 족장들 중 한 명이며 그의 생애는 그러한 인물들의 햇수(700-800년 사이)에 비해 좀 짧은 것 같다. 그러나 에녹은 “태양년인 356년을 살았는데, 이 햇수는 사실 완전한 수를 상징한다. 또한 그는 인간들의 공통적 운명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하느님이 그를 직접 데려가셨기 때문이다.” A. Marchadour, 앞의 책, 같은 면.
여기서 원어를 살펴 볼 때 “중요한 동사 라카흐(חקל)는 ‘취하다’(take)를 의미한다. 마틴 아카드는 여기에서 이 단어가 ‘하느님께로 인간을 떠맡긴다는 뜻을 가진 전문적 표현어구’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데려간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다.” C. Brown, “부활,”『신약편 성서원어대전(제4권)』(서울: 브니엘출판사, 1986), 51면.
그리고 70인역본에서는 동사 μετατὶθημι(위치를 변화시키다, 자리를 옮기다)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승천’이란 곧 바꿈과 변화를 의미하며 더 나은 상태에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에녹의 생에 대한 창세기 5장 21-24절의 단순한 진술이 후기 유대교에서 에녹을 지혜와 의(義)의 모델로 보는 견해로 뚜렷이 발전되었으며 정리된 승천이론의 정점을 이루게 된다고 볼 수 있겠다.” 위의 책, 51-52면 참조; 그러나 이에 대한 다른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즉, 창세5,24에서는 아직 에녹의 승천이 생각되지 않는다고 K. Berger는 말한다. חקל는 ‘데려감’=‘죽음’이라는 뜻으로 흔히 나타난다(지혜4,18-20; ASS Mos10,12: receptio)고 말하고 있다. K. Berger, Die Auferstehung des Propheten und die Eröhung des Menschensohnes, Göttingen, 1976, P.570, 주416 참조. 김경희, 앞의 글, 166면, 주33 재인용.
2열왕 2장 1절-14절은 엘리야의 승천에 관한 대목이 언급된다. 11절에 엘리사와 엘리야 두 사람이 길을 가는데 불 말이 불 수레를 끌고 그들 사이에 나타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지면서 엘리야는 회오리바람 속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간다. 여기서도 ‘승천’을 표현한 말로 라카흐(חקל)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실 이 동사는 에녹, 엘리야 승천과 시편 49편과 73편에서 똑같이 보게된다. A. Marchardour, 앞의 책, 같은 면 참조.
그러나 이러한 표현이 신약에서와 같은 승천을 묘사하는 단어라고 말하기에는 많은 의문이 남는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기사에서 두 가지 측면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즉, 하나는 그들이 지상 생활의 끝에 야훼의 면전으로 나아갔고 또 야훼께서 친히 그 진취적인 자들을 이끌어 올리셨다는 적극적인 면이며, 또 다른 한 측면은 둘 중 어느 경우에도 죽음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소극적인 면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두 기사의 저자들은 분명 적극적인 측면에 주의를 집중시키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병철, 앞의 책, 53면 참조.
또한 이러한 “현양 내지 ‘천계납치’(天界拉致)라는 표상은 이승에서 살다간 한 인간이 종말적 사건들이 일어날 때 한 몫을 하리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당대 유대교가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범주였다.” W. Kasper, 앞의 책, 263면.
요약하자면, 구약성서의 승천이야기는 하느님과 함께 살며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다가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하늘에 올려진 특은을 받은 사람들의 종말에 관한 기사이다. 이들에 관한 승천의 표현이 부활의 삶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는 보기 힘들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하늘이라는 신적 세계로 불려진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임은 분명하다.
또한 고대 로마 신화에서 전하는 로물루스 로물루스(Romulus)는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설했다고 전하는 신화상의 인물. 이 이름은 단지 ‘로마인’이라는 뜻이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모두 그리스 신화에서 도입된 것이다. M. Grant & J. Hazel (Eds), “로물루스(Romulus),”『그리스․로마 신화 사전』, 김진욱(역) (서울: 범우사, 1993), 79면 참조.
와 같은 이교도 영웅의 승천 이야기도 있다. 그의 최후에 관한 로마 신화의 내용은 상당히 흥미롭다. 이 신화에 따르면 “로물루스는 40년 동안 평화롭고 번영된 통치를 끝낸 후 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카플라(‘암산양’이라는 뜻)의 늪지 가까이 있는 캄푸스 마르티우스(‘마르스의 평원’)에서 열병식을 거행하고 있을 때, 갑자기 뇌성과 번개가 일어나면서 그는 구름에 싸여 시야에서 모습이 사라졌다. 이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환호를 하며 로물루스가 신이 되었다고 갈채를 보냈다. 그후 얼마 동안 로물루스는 율리우스 프로클루스라는 이름의 사나이 앞에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나타나, 로마는 만사가 순조로울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리고 로마인에게 무예를 숭상하고, 앞으로 자기를 퀴리누스신으로 받들라고 고했다” 위의 글, 82-83면.
는 것이다. 또한 이와 비슷한 고전의 내용들의 예로 헤라클레스(Herakoes),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이 모든 ‘승천 이야기’의 경우에 있어서 특징적인 면은 관중 또는 그 증인들의 눈앞에서 그 당사자가 사라져 버리는 장면이 그때마다 그들 앞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대부분 그 당사자는 구름에 감싸여 하늘로 올라간다. 이러한 모든 장면은 어떤 산 위에서, 아니면 언덕 위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개는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주위 사람들에게 중요한 과제를 건네주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한다.” G. Lohfink,『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 신교선․이석재(역), 제2판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3), 20면.
따라서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승천에 관한 전승이 그리스도교만의 유일한 것만이 아님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예수의 승천 전승 또한 이러한 고전들의 영향을 받아 기인된 것임을 의심할 수 없다 위의 책, 21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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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승천을 말한다면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아의 승천에 관해 말하려면 우선 용어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예수의 승천을 ‘Ascensio’(상승, 오름, 올라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마리아의 승천은 ‘Assumptio’(올림을 받음)로 표현하며 구별하고 있다. 즉 예수의 승천은 능동성을 드러내는 데 비해서 마리아의 승천은 수동성을 드러낸다. 과거 한국 교회는 이러한 구별을 위하여 마리아의 승천을 ‘몽소승천’(夢召昇天)이라 하였다. 즉 마리아는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것이다.” 조규만,『마리아, 은총의 어머니: 마리아 교의와 공경의 역사』(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8), 378면.
성모 승천의 교의는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의 사도 헌장「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통해 장엄하게 선언되었다. 이 회칙이 선포되기까지는 사실 오랜 세기를 걸쳐 마리아의 승천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성모 승천 교의 선포의 역사적 과정’에 대해서는 위의 책, 379-393면을 참조하라.
그러나 이 회칙에서 “전 세계의 주교들은 복된 동정 마리아의 육체적인 승천의 진리가 거룩하고 가톨릭적 신앙으로 정의되어야 할 것을 한결같이 요청하였다. 이 진리는 성서에 그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고 신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오래 전부터 전례예배로 인정되어 왔으며, 다른 여러 진리들과도 완전히 일치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신학자들의 연구와 지식과 지혜로써 명쾌하게 전개되었고 설명 되어왔다.” “the bishops from all over the world ask almost unanimously that the truth of the bodily Assump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into heaven be defined as a dogma of divine and catholic faith; this truth is based on Sacred Scripture and deeply embedded in the minds of the faithful; it has received the approval of liturgical worship from the earliest times; it is perfectly in keeping with the rest of revealed truth, and has been lucidly developed and explained by the studies, the knowledge and wisdom of theologians.”(DS 714). J. Neuner & J. Dupuis (Eds), The Christian Faith, London: Collins, 1983, p.207.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마리아에 관한 교회 안에서의 위치를 확실히 밝히고 있다. 교의 헌장(LUMEN GENTIUM)(1964년)에서는 구세사업 안에서 마리아의 역할을 통해 성모 승천의미를 말한다. 즉, “그녀의 역할은 예수의 유년기 신비(57항)와 그분의 공생활(58항)속에서 조금씩 밝혀진다. 그 역할은 성령강림날 교회 한가운데에 계셨던 마리아의 현존 안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승천에서 완성된다(59항).” “Her role is unfolded in the mysteries of the infancy of Jesus (57) and in His public life (58). It is fulfilled in her presence in the midst of the Church on Pentecost, and finally in the Assumption (59).” Ibid., p.208. LG 57-59 참조.
마리아의 승천이 교의로 인정된 것은 마리아가 지상 삶을 살아간 후 거의 이 천년이 지난 뒤의 일이지만, 사실은 오랜 세월동안 교회와 대중적 신심과 전례를 통하여 표현된 마리아의 승천에 관한 믿음을 개진한 것이다. 마리아 승천 교의의 의미에 대해 볼프강 바이너르트(W. Beinert)는 “마리아의 승천은 마리아가 그의 구세사의 목표, 즉 구원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인간이 하느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졌음을 뜻한다. 여기서 마리아의 하느님의 어머니로서의 의미가 더욱 강조된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기에 거룩하게 되셨고, 그 목표인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규만, 앞의 책, 394면.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의 승천과 같은 의미로 여길 수 있는 사건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즉, ‘성모 승천의 교의에 대한 신앙의 본래 본질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하더라도 성서에 명시적으로 증언되어 있지도 않고, 또 초기 전통에서도 명료하지 않았다는 점과 또 교황 비오12세의 회칙은 마리아의 죽음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의 승천과의 차이를 보게된다. 다시 말해, 마리아의 승천이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생략하고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결코 이 교의를 쉽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께서 친히 당신 자신의 삶을 통해, 즉 당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원한 삶에 대한 보증을 주시고, 또 우리에게 그것을 희망하길 바라시는 당신 뜻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의의 발전 과정과 축일 명칭 변화 과정을 볼 때, 즉 마리아의 잠드심(永眠), 이주(移住), 천상탄일, 승천으로 발전해 왔다는 점에서 성모 승천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은 분으로 마지막에 얻게 될 영광의 선취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모 승천은 마리아론적 의미와 교회론적이며 종말론적 의미를 가진 교회의 믿음이며 희망이라고 볼 수 있다.’ 위의 책, 395면 참조.
마리아의 승천 교의에 대해 칼 라너(K. Rahner)는 말하기를 “어쨌든 여기서 신앙의 본래 본질에 원칙적으로 모순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자신들 모두에게 있어서 자기들의 희망으로써 신앙 고백하는 것을 마리아에게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몽소승천’은 바로 이 한 사람의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행위의 완성인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 행위와 은총의 완성이고, 우리는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도 희망하는 것이다.” K. Rahner,『그리스도교 신앙 입문: 現代 가톨릭 神學 基礎論』, 이봉우(역), 사목총서 15 (왜관: 분도출판사, 1994), 500면.
따라서, 예수의 승천과 성모 승천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닌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2.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한 분석 : 루가 전승을 중심으로
예수 부활에 관한 보도와는 달리 예수의 승천에 관한 기사는 신약성서 전반에서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혹자는 ‘아버지께로 올라가심’, ‘올림’, ‘높임’, ‘영광 속에 올림 받음’ 등의 표현이 예수의 승천을 표현하는 구절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부활 신비를 표현하는 두 가지 양식의 특징을 인정한다면, ‘올림을 받으셨다’, ‘높임을 받으셨다’, ‘올라가셨다’는 표현은 부활 후의 사건이 아니라 부활을 표현하는 현양의 표시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승천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고 잘못 이해된 성서 구절들이 그 만큼 줄어 들 것이다. 문세화, 앞의 글, 8면 참조.
이제 우리는 현양과 승천을 동일시하지 않고 구분하여 성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렇게 볼 때 “현양에 관한 표현들이 성서 전체에 사용되고 있는 반면에 승천이란 전승은 엄밀히 말해서 루가 작품에만 전하고 있다” 위의 글, 같은 면.
는 것을 알 수 있다.
2.2.1. 루가 복음서의 승천대목
현양과 승천의 표현을 동일시하지 않을 때 예수 승천 전승이 유일하게 루가 전승에서만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 승천에 관해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전승을 전하고 있다. 대목을 비교해 보면 용어와 시간 문제 등 상반되는 내용을 접하게 되고 승천에 관한 많은 의문을 제시할 수밖에 없게 된다.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원래 단행본으로 편집되었으나 교회가 2세기경 4개 복음서를 같이 편찬할 때에 앞부분(복음서)과 뒷부분(사도행전)을 분리시켜 승천을 묘사하는 복음서의 결론 부분(루가24,50-53)을 첨가했고, 사도행전 1장 1-5절 대목을 뒷부분의 머리말로 작성했다는 가설이 있다.” 위의 글, 9면.
이러한 가설은 루가의 승천에 관한 두 전승의 차이점에 관해 의혹을 상당히 해소하기도 하지만, “문헌비판과 문학양식의 연구 결과로 보아 복음서의 결론과 사도행전의 머리말은 루가의 조작임이 확실한 것 같다.” 위의 글, 같은 면.
결국, 이러한 관점에서 두 문헌을 비교해 볼 때, “복음서의 끝 부분과 사도행전의 앞부분이 서로 통한다는 것은 루가의 작품이 단행본으로 편집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복음서의 승천 대목은 예수를 중심으로, 사도행전의 승천 대목은 제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작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루가는 복음서에서 지상생활을 전하고 난 후 사도행전에서는 이제 사도들의 활동과 교회의 발전을 묘사해 준다.” 위의 글, 14면.
루가 복음 24장 50-53절은 예수의 고별 축복과 승천 기사로써, 이것은 복음서의 결론 부분이며 부활 후 발현 기사들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예수의 승천 기사는 예수의 마지막 발현이며 승천과 더불어 예수는 영광에 싸여 하늘의 주님으로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며(루가24,50-51), 제자들은 예수께 경배하고 기쁨을 느끼며 하느님을 찬양하며 지내게 된다(루가24,52-53). 여기서 주된 본문 비판의 문제는 ‘본래부터 승천에 대한 기록을 포함하고 있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라고 헤르만 헤드릭(H. Hendrickx)은 말한다. 그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위 서방 사본군이나 다른 몇몇 사본들은 ‘그가 그들을 축복하면서 그들을 떠나갔다’라고 전하고 있다. 또 다른 사본들은 여기에다 ‘그리고 하늘로 올림을 받았다’라는 구절을 첨가한 경우 원문 비판에 있어서 ‘하늘로 올림을 받으셨다’(και ἀνεφερὲτο εἱς Τὸν οὐρανὸν)는 문구를 문제로 삼을 수 있다. 4세기의 사본(Vaticanus Sinaiticus)들과 5세기의 사본(Alexandrinus), 그리고 5세기와 10세기 사이에 필사된 소위 ‘대문자 사본’들이 예외 없이 이 문구를 전해주고 있다. 다만 Sinaiticus의 초안과 소위 ‘서부본문’(西部本文)을 전하는 사본(Bezae의 사본, 5-6세기)에는 이 문구가 누락되어 있다. 위의 글, 9면.
도 있다. 하지만 본문 비판학자들이나 주석학자들은 점차 긴 본문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긴 본문을 취하는 데 따른 필사 증거는 뚜렷하다. 오히려 서방 사본군에서 그것이 생략된 것조차 쉽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루가 24장과 사도행전 1장 사이에 보이고 있는 뚜렷한 모순을 제거하고 싶었던 데에 그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루가 24장에 의하면 예수는 그가 부활한 지 24시간 안에 승천한 것 같아 보인다. 반면에 사도행전 1장에는 그가 하늘로 올림을 받은 것은 부활 후 40일이 지나서였다고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1장에서는 짧은 본문으로라도 루가 24장의 승천에 대해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즉 ‘(그가) 승천하셨다’는 특별한 구절로 나타나는 사도행전 1장 2절은 루가 24장 51절의 ‘(그가) 그들을 떠났다’는 귀절과 관계된 것으로서 그것은 바로 이 복음서 귀절에 대한 해석이기도 한 것이다.” H. Hendrickx, 앞의 책, 174면.
루가는 예수께서 더 이상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지 않는 이 마지막 자리에서 서슴없이 ‘(그는) 하늘로 올라 가셨다’라고 덧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위의 책, 176면 참조.
루가는 분명히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구분하고 있다. 이것은 마르코나 마태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루가의 경우, 승천은 그가 일종의 ‘여행’으로 본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뚜렷한 경계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지상 예수의 시대와 교회 시대 사이에 그어진 뚜렷한 경계선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표현은 완전히 루가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 의거한 것이다.” 위의 책, 177면.
루가 24장 52-53절의 내용, ‘그들은 예수께 엎드려 절한 다음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언제나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지냈다’는 구절이 예수 승천 후 바로 이어지고 있음은 ‘지상 예수의 시대’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시기’로 넘어감을 상징하는 구절이라 하겠다. 또한 “승천 대목은 온 복음서의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마지막 발현은 공동생활과 설교활동의 끝이고 제자들과의 이별이다.” 문세화, 앞의 글, 10면.
고별 축복과 승천 기사는 루가 복음서의 첫 장과 일치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당신 손을 들어 축복해 주셨다’는 구절은 예수를 메시아로서의 대사제를 표현하는 것 같다. 아론이 백성을 축복하는 레위기 9장 22절과 유사한 표현이며, 이보다 집회서 50장에서의 축복하는 사제와 그에 응답하는 공동체의 모습 “그런 다음 시몬이 내려와 이스라엘인들 회중 전체를 향하여 손을 쳐들고 입술로 주님의 복을 빌어주며 그분의 이름을 현양하였다. 사람들은 지존하신 분께 복을 받기 위하여 두 번째로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집회50,20-21). 주교회의 성서위원회(편),『집회서- 구약성서 새 번역 6』, 정태현(역)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206면, 50장 20-21절.
과 더욱 흡사하다.
2.2.2. 사도행전의 승천대목
예수 승천에 관한 또 하나의 기사인 사도행전 1장 6-11절에서 예수 승천에 관한 연구를 더욱 깊이 할 수 있다. 루가는 사도행전 첫 머리에 사도행전의 취지를 간략히 설명한 다음 교회의 출발점, 원천을 묘사함으로써 사도들로부터 이어지는 초대 교회사를 기록해 간다. “교회는 획기적인 사건에서 발생되었다. 이 원초적인 사건은 바로 예수의 승천과 성령강림이다.” 문세화,『사도행전 해설서: 세상 끝까지 나의 증인들』(광주: 성신출판사, 1981), 95면.
그러나 이 원초적인 사건에 대한 성서의 보도는 우리에게 한 가지 의문을 갖게 한다. 즉, 이 큰 사건에 대해 ‘다른 복음사가들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왜 다른 복음서 전승에서는 보도해 주지 않는가? 이에 대한 답은 앞으로 상세히 다루어지겠지만 미리 결론지어 말한다면, 루가의 이 특별한 전승은 예수 부활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이고 이해하기 쉽게 해명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활은 단지 시체의 소생이 아니라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의 계시이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부활시키시고 성령을 파견하셨다는 사실을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신비이며 인간 역사 속에서 표징을 남겨 준 사건이다.’ 위의 책, 같은 면.
루가 전승, 특히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승천과 성령강림이 시간적 순서에 따라 마치 실재적이고 환시적인 묘사를 하고 있는 것은 루가 복음사가의 예수 부활 신비에 대한 독특한 표현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루가의 독창적이고 주관적인 창작의 표현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의 유대 사고 방식 안에서 보편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현양 사상’ 현양이라는 표상은 오늘의 우리에게는 생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후기 유대교에 있어서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슈바이써가 고증(考證)한 바와 같이, 거기서는 고난을 받다가 현양된 의인(義人)에 관한 표상이 커다란 구실을 떠맡고 있었다. 엘리아, 에녹, 그리고 그밖의 다른 의인들이 하늘로 높이 끌려간 것은 그곳 하늘에서 대기(待機)하고 있다가 바룩 처럼 최후심판 때에 증인으로 나설 수 있기 위함이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엘리아가 다시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마태11,14; 16,14; 17,10). W. Kasper, 앞의 책, 262-263면 참조.
을 당시 선교 대상자들에 대한 교육적 차원에서 그러한 표현을 기록했던 것이다.
루가는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 즉 하느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다시 말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에 통용되고 있던 상징적인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그의 전승에 나타나는 ‘구름’이라는 표현도 성서적 의미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뜻한다. 출애13,21-22; 다니7,13 참조.
사실 초대교회 신자들도 이러한 표현을 상징적으로 알아들었다. 문세화, 앞의 책, 99면 참조.
루가는 사도행전에서 복음서와는 다른 각도로 예수의 승천을 묘사한다. 사도행전 1장 6-11절의 승천에 관한 묘사는 앞서 복음서와의 시간이나 장소의 일치에 전혀 관계없이 실재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실 루가의 이 두 전승은 한 사건이라고 말하기에 어려울 정도의 모순되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즉, 사도행전에서 루가는 예수의 승천 장면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과 흰 옷 입은 두 사람의 등장, 그리고 루가 복음서의 예수 승천 장소는 베다니아 근처인데 반해 사도행전에서는 올리브산이라는 점,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에서 전하는 40일간의 시간적 차이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루가가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승천을 설명하며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도를 잠시 살펴 본 후 그가 묘사하는 구절들의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루가는 현양 교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화를 꾸미고, 이 사화의 각 요소에 드러나는 상징적인 의미를 통해 부활의 의의를 드러내고자 한다. ‘다시 말해 루가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효과에서 출발하여 볼 수 없는 사건의 의미를 밝혀 준다. 그 첫 단계로 루가는 승천하신 예수와 대기하는 사도단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를 묘사하고, 그 다음 단계로 교회 발전 과정에 활약하게 되신 성부, 성자, 성령과 사도들과 그 공동체를 등장시킨다. 즉 루가는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교회사의 주인공들을 소개하고 있다.’ 위의 책, 96면 참조.
루가는 부활 신비를 표현하는 승천을 묘사하면서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심이 제자들을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양상으로 그들과 함께 하시며(사도1,11), 하느님이며 인간이신 예수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으로 활약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제 루가가 이러한 의도 아래 승천을 묘사한 각 구절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사도행전 1장 9-11절에 “예수의 승천이 단 한마디로 표현되어 있지만(ἐπὴρθη) 엄격히 말해서 승천에 관한 묘사라고 볼 수 없다. 예수께서 올라가시자 ‘구름에 싸여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문구는 루가의 의도를 충분히 밝혀 주고 있다. 제자들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올라가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승천은 현양의 상징이니 만큼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문세화, 앞의 글, 12-13면.
따라서 사도행전에서 드러나고 있는 루가의 의도인 상징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동안 제자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올라간다’(ἐπαὶρω)는 말과 ‘쳐다본다’(βλὲπω)는 말은 구약의 승천인물인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와의 대화가 어떤 의미를 전해 준다. 2열왕 2장 9-10절에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야훼께서 이제 나를 데려 가실 터인데, 내가 자네를 두고 떠나기 전에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는가?”하고 묻자 엘리사는 “스승님, 남기실 영검에서 두 몫을 물려주십시오”라고 청한다. 그러자 엘리야는 “내가 떠나는 것을 자세히 본다면 소원대로 되겠지만, 보지 못한다면 그렇게 안 될 것일세”라는 말을 주고받은 후 엘리야는 하느님으로부터 하늘로 들어 올려진다(2열왕9-10 참조). “루가는 예수를 자주 새로운 엘리야로 소개한다(루가7,16; 9,42). 예수께서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하늘에 올라가시는 것을 본 사도들은 틀림없이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 사도들이 예수께서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으니까 예수의 사명을 이어받기 위하여 예수의 얼, 즉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 문세화, 앞의 책, 100-101면.
또한 구름이라는 표현은 앞서 말했듯이 하느님의 현존을 뜻하는 성서적 표현이다. 그리고, 흰 옷 입은 두 사람의 등장은 천사들이 그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루가24,4에서 여자들이 예수의 빈무덤에서 만난 ‘번쩍이는 옷을 입은 두 남자’를 24,23에서는 천사들이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루가는 천사의 표현을 이런 식으로 묘사하면서 그들의 역할이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전달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또 루가1,26 이하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느님의 명(命)으로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의 탄생을 미리 알리는 장면에서도 루가 복음사가가 인식하고 있는 천사의 개념과 역할을 알 수 있다.
루가는 이렇듯 천사들의 등장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그들의 역할과 하느님 구원의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R. F. O’Toole,『루가 신학의 통일성: 루가 복음과 사도 행전의 분석』, 유철(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1991), 37-38면 참조.
또한 천사들이 제자들에게 전한 말씀은 ‘주님의 재림을 예고하며 더불어 사도들에게 그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헛되이 기다리지 않도록 사도들의 삶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있다.’ 위의 책, 39면 참조.
다음으로 이제 승천 장소 문제에 관해서 살펴보자. 승천 장소에 있어 루가 복음은 ‘베다니아 근처’라고 전하는데 반해, 사도행전은 ‘올리브산’이라고 전하는 루가 전승의 차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지리적으로 볼 때 올리브산과 베타니아는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에제키엘서 11장 23절에 야훼의 얼이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 동쪽에 위치하는 산에(올리브산) 머무셨다는 기록과, 즈가리야서 14장 4절에 야훼께서 이 세상에 임하실 때에 올리브 산에 발을 놓으시겠다는 기록을 이용하여 루가는 예수께서 이제 하느님처럼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의 재림을 땅에 엎드려(루가24,53)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파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문세화, 앞의 책, 101면.
이제 마지막으로 40일간의 기간 문제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루가 복음이 전하는 예수 승천은 부활하신 날에 이루어지는 듯 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부활하신 후 40일 후에야 승천하신 것으로 전한다. 이러한 차이는 ‘부활과 승천의 불가분의 관계’를 강조하는데 중점을 둔 복음서와는 달리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의 시대’를 열면서 사도들의 활동을 묘사하기 전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보여주신 여러 증거와 가르침에 그 중점을 두었다는 것을 염두 해 둘 필요가 있다. 루가는 사도행전에서 부활 후 40일간의 지상활동 시기를 통해 교회의 시대를 준비하는 교량적 시기를 염두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예수께서 40일 동안 현양을 기다리셨다기 보다(이런 경우에는 40일이라는 말은 승천 대목에 삽입되었을 것이다) 사도들이 40일간 설교 활동을 준비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문세화, 앞의 글, 14면.
또한 이 40일 이라는 기간은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정확한 기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가간’, ‘준비의 기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기간의 전형적인 모형인 것이다. 예를 들어, ‘구약 성서에서 대 홍수 때 40일간 비가 쏟아졌고(창세7,12; 8,6),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모세가 40일간 시나이산에 머물렀고(출애24,18; 34,28), 모세가 파견한 염탐군들은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 전 40일간 염탐했고(민수13,25; 14,34), 예언자 엘리아가 40일간 호렙산에 피신했다(1열왕19,8). 또한 유대교 작품에서 에스드라 역시 40일 동안 환상을 기록했으며(제4에스드라14,24-45), 바룩의 묵시록 이 문헌에 관한 87장으로 된 유일한 완전한 본문은 6세기의 시리아어 사본만이 있으며, 이것은 희랍어 사본에서 번역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희랍어 사본 또한 히브리어 원본을 번역한 것으로 확신하고있으며, 따라서 철저한 유대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본다. M. Rist, “바룩의 묵시록,”『기독교대백과사전(제6권)』, 제2판 (서울: 기독교문사, 1984), 1082면 참조.
6장 1-4절과 아담과 하와의 생애 라틴어 사본으로 된 외경. 저작 연대는 예루살렘 성전이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어서 아마 그리스도교가 시작 될 무렵일 것으로 추정한다. B. J. Bamberger, “아담서,”『기독교대백과사전(제10권)』, 제2판 (서울: 기독교문사, 1984), 793면 참조.
6장에서도 40일이라는 기간은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졌다.’ 문세화, 앞의 글, 14면 참조.
복음서에서도 예수께서 공생활 전 40일간 광야에서 계셨다. 이렇게 40일이라는 기간을 상징적으로 이해되어 짐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루가는 40일 이라는 기록을 통해 예수의 발현 기간을 한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깊게 받는다. 루가의 이러한 표현은 그의 신학적 의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도행전 14장 4절과 14절을 제외하고는 루가는 사도란 호칭을 열두 제자에게만 국한시켜서 사용했고(사도1,2.6; 2,37.42; 6,2; 16,4), 세례부터 승천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공생활을 목격한 제자들에게만 증인 자격을 부여한 셈이다(사도1,22; 10,41). 한 마디로 말해서 루가는 발현 기간을 제한함으로써 증인의 숫자를 한정했다는 인상을 준다.” 위의 글, 15면.
결국, “부활과 승천 사이에 전형적인 기간을 삽입함으로써 루가는 사도들의 활동과 교회의 성장기간을 암시했다. 40일간 성령을 약속하시고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시는 예수의 모습을 묘사해 주면서, 루가는 부활 후에 일어난 여러 가지 현상을 재해석하여 예수의 개선을 애타게 기다리는 신자들의 초조함을 풀어주고, 종말 문제를 재검토한다.” 위의 글, 같은 면.
루가는 예수의 승천을 통해 신자들에게 예수의 다시 오심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종말론적임을 이해하도록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