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사이파의 배경

1. 바리사이파에 관한 역사적 배경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리사이파라는 말은 부정적으로 쓰인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이야말로 성전파괴라는 비극과 시련을 극복하고 그리스도교의 적수로서 끝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던 유일의 집단이었으며 또한 그후 발전되어 나온 정통 유대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후기에 속하는 이 무렵에도 루가는 예수에게 호감을 가졌었던 바리사이파인들을 이야기 하였으며(루가 13,31), 가믈리엘은 물론이고(사도 5,34 ; 26,5)후에 그리스도교인으로 개종한 바리사이파인들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언급하고 있다.(사도15,5). 따라서 우리는 바리사이들을 예수를 무조건 반대하고 죽이려는 원수들로 보는 일이 없도록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 실상 당시의 역사적인 실정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바리사이파들이 어떠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관행과 습속 그리고 그들의 교리특징들이 무엇이었던가를 정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실상 자료의 부족으로 정확하게 밝혀내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만큼 ‘바리사이’라는 별명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집단을 가리킬 수 있었던 것이다. 기원 후 1세기에 이 말은 이렇다 할 경멸적이거나 비방적인 말로 어김없이 널리 사용되었으니 그 좋은 증거가 바로 요세푸스와 신약성서이다. 그러나 이 바리사이파들이 집단을 꿈란의 공동체처럼 조직도 엄연하고 엄격한 일종의 수도단체나 종파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실상, 이들은 종교적인 계율을 비교적 엄격하게 준수하는 여러 사회단체에 속하면서 일반의 종교적인 태도와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일종의 파벌 또는 사상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샤를르 뻬로 , 『예수와 역사』, 박양래(역), 서울 : 가톨릭 출판사, 1958, P. 143. 참조.

바리사이파라는 용어는 히브리어 ‘프루쉼’(מיꚄוּד꘰)과‘페리쉰’(ןיꚄיꕉ꘴), 그리고 아람어 ‘프리쉬’(איꚄיꕉ꘸)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말은 ‘분리된 자’ 혹은 ‘구별된 자’라는 뜻이다. 랍비문학에서도 바리사이파 라는 용어는 부정적으로 이단자들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지만 요세푸스의 저서나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바리사이파들과 같은 용어로 호칭되었다. 요세푸스(F.Josephus,37/38-100)의 저서와 신약성서에서는 그리스어 ‘파리사이오이’(Φαρισαιοι)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한국 가톨릭 대사전 편찬위원회(편), 『한국 가톨릭 대사전』 제 5 권, 서울 : 한국 신학 연구소, 1995, P. 3049. 참조.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용어가 기원전 2세기 중엽부터 율법에 대한 보다 엄격한 해석으로 자신들은 구별하기 시작한 무리들에게 적대자들이 붙여준 이름으로 여긴다.
바리사이파라는 용어가 적대자들에 의하여 경멸조로 붙여진 명칭이라면, ‘하시딤’(ꗫיꙞי꘏ꖖ)은 바리사이파들과 에세네파의 조상들이 자신들에게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바로 그들은 마카베오 반란 당시에 하시딤으로부터 부상한 단체들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에버렛 퍼거슨, 『초대교회 배경사』, 박경범(역), 서울 : 은성, 1993, P. 496 참조.
하시딤은 마카베오를 따르던 무리들로 조상들의 관습에 따랐고, 유대교를 박멸하려고 했던 에피파네스와 예루살렘의 부패한 사제들에게 대항한 마카베오를 도와 독립투쟁에서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후 그들은 타락한 마카베오 후예들에게 등을 돌리고 율법의 엄격한 해석과 실천에 더욱 열성을 쏟았다.
이처럼 바리사이파는 마카베오 후예들과 하시딤의 갈등 속에서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바리사이파들은 자신들을 ‘하베림(מיꕉꔪꕟ)’ ‘하베림’(מיꕉꔪꕟ)은 ‘동지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앞의 책, P. 3046.
이라고 생각하였다. ‘하베르(ךꔪꕗ)’란 율법 가운데서도 특별히 레위기의 정결 예법과 사제의 의무 조항을 엄격하게 지키던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들 전체가 하베림에 속한 것은 아니었다. 하베림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도시 가까운 곳에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계약의 형제들로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공동체라고 자부하였다. 하베르로서의 바리사이파는 ‘암 하레츠'(ץꕋאָꖎ מאּ) 암 하레츠‘(ץꕋאָꖎ מאּ)는 바리사이파는 율법을 모르거나 준수하지 않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앞의 책, P. 3046.
나 이방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으며, 한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나눌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바리사이파들은 이외에도 ‘서기관‘(דפיס)이나 ’현인‘( מꔧꖎ )이란 이름을 선호하기도 했다. 마태 23, 2. 7. 13. 15. 23. 25. 27. 29 참조.

1.1. 바리사이파의 역사

바리사이파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유대교의 유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바리사이파가 누구로부터, 또는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뚜렷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1.1.1. 페르시아 시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대교는 페르시아 시기 초기에 에즈라로 인해 탄생되었다. 이때 유대에는 정치적으로, 해외에서 페르시아의 지원을 업고 귀국한 ‘해외파’와 계속 살고 있던 ‘국내파’가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율법서와 예언서에서는 이 주도권 싸움을 ‘땅’의 문제로 신학화하였다. 또한 에즈라서에서 ‘국내파’는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사마리아 사람들이며 우상숭배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암 하야에츠’인 것처럼 왜곡되었다. 요세푸스는 이때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사제들이 세겜의 그리짐 산 정상에 사마리아인 성전을 짓고 사마리아 공동체를 형성했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이끄는 포로 귀환 공동체가 사제들의 권위를 훨씬 뛰어넘어 엄격한 결혼 예법을 적용하고 있었다. 또한 율법(Torah)을 공개적으로 가르쳤고, 정결 예법과 십일조를 자신들의 법해석에 따라서 실시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비율법적인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과 구별하여 생활하였다. 반면에 제 3이사야의 예언 그룹은 사제들과 정치적인 대결을 벌이기보다는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예루살렘 성전이 참된 하느님의 집이 되리라는 것과 그때에 자신들만이 의로운 존재로 인정받게 되리라는 종말론적 사고와 행위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여러 그룹들이 그리스 시대에 와서 어떤 모습으로 발전했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시기에 예루살렘의 사제들과는 다른 평신도 조직인 서기관 그룹이 형성되어, 사제들의 위치를 대신한 랍비들이 회당을 중심으로 율법을 교육시키고 종교 생활을 관장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편) 앞의 책 P. 3048 참조.

1.1.2. 마카베오 왕조 시기

마카베오 왕조 시기로 넘어와서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ⅣEpipanes, 기원전 175~164)의 유대교 박멸정책과 성전 모독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을 지원하게 함으로써 예루살렘 성전과 타락한 대사제장직을 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요나단이 대제사장직을 강탈하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성전과 대사제장직의 정통성에 대해 의문과 반감을 갖게 되었다. 대부분들의 학자들은 유대교 분파들이 싹트게 된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반란이 성공한 후, 만일 누군가 정치적인 생활을 버리고 꿈란인들이 한 것처럼 광야로의 은둔생활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율법에 관한 한 두 가지 중 한가지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즉 전통적인 법전이 새로운 상황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확장되고 새로운 신념들과 조화되기 위해 재해석이 되는 입장을 취하거나, 또는 이러한 경험들은 율법의 권위의 한계 밖에 두고 새로운 사상들은 인정되지 않는 입장 등이다. 첫 번째의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바리사이파가 되었고, 두 번째의 입장을 취한 자들은 사두가이파가 되었다.” 에버렛 퍼거슨, 앞의 책, P. 496.

1.1.3. 하스모네 왕가 시기

요세푸스에 따르면, 요한 히르키누스 1세(기원전 134~104)가 통치하던 시기에 바리사이파인들과 사두가이파인들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마카베오 시대에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는 대립적인 두 정당의 모습으로 출현하고 있다.
사독(Sadok)의 후손들로 자처하는 사두가이파는 대사제 그룹과 귀족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제, 대사제, 그리고 귀족들이 다 사두가이파는 아니었으며, 바리사이파들도 많았다. 그들은 조상들의 관습과 율법에 대한 열정때문에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는데, 히르키누스의 그리스식 군주제에 식상한 바리사이파들이 왕에게 대사제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함으로써 왕과 바리사이파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Ant.Ⅷ.288~298) 이로 인해 히르카누스는 바리사이파들이 제정한 율법들을 폐기하고 종교적으로 타협적이었던 사두가이파의 편으로 기울어졌다(M.Maaser Sheni,5, 15:Sotah,9, 10).
하스모네 왕가와 바리사이파 사이의 갈등은 히르카누스의 셋째 아들인 알렉산더 얀나이(기원전 103~76) 때 절정을 이루었다. 백성들에게 알렉산더가 대사제로서 자격이 없다고 선동한 바리사이파들은 초막절 축제 예식 때 그에게 레몬을 던져서 의식을 방해하도록 하였으며(Ant.Ⅻ,372 f.;BJ. I,88). 알렉산더는 이 일로 6,000명의 바리사이파들을 학살하였다. 그 후 왕이 전쟁으로 피난하였을 때 바리사이파들은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6년 동안 내전이 계속 되었는데, 그때 목숨을 잃은 유대인은 5만이 넘었다(Ant.Ⅻ,376).
하스모네 왕가와 바리사이파와의 사이의 평화는 알렉산더 얀나이의 아내며 후계자이자 살로메 알렉산드라 (기원전 76~67)시기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알렉산더가 임종하면서 아내에게 바리사이파들과의 화해를 유언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살로메는 바리사이파였던 자신의 아들 히르카누스2세(기원전 63~43)를 대사제로 임명하였으며 회당을 바리사이파에게 맡겼다. 이로써 실권을 잡은 바리사이파는 해외로 망명했던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포로들을 석방하였으며, 알렉산더 얀나이에게 협조한 많은 귀족들을 처형하였다.(Ant.Ⅻ409). 그러나 사두가이파의 사주를 받은 살로메의 맏아들 아리스토블루스 2세(기원전 67~63)가 바리사이파의 정책에 반대하여 하스모네 왕가는 결국 두 형제간의 싸움으로 몰락하였으며, 팔레스티나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편), 앞의 책 P. 3049 참조.

1.1.4. 로마 시기

로마시기에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의 갈등으로 이득을 본 것은 로마와 헤로데였다. 유대의 통치자로 헤로데 대왕(기원전 37~서기 4)이 되었을 때 바리사이파였던 폴리온(Polion)과 사마이아스(Samaais)는 동료 유대인들에게 헤로데의 통치를 받아들이도록 권하였다. 그 이유는 헤로데의 지배를 불순종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로 생각했기 때문이다.(Ant.ⅩⅤ,4). 이 일로 바리사이파들은 헤로데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헤로데 궁전의 여인들에게까지 특별한 영향을 미쳤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로데 시대 때 유대에는 6,000명의 바리사이파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유대 전쟁(66~74)이 발발하기 직전 대사제그룹과 연대하여 열성당원(Zealots)들에게 전쟁을 일으키지 말도록 호소하는 평화적 중재자들로 묘사되었다 (BJ.Ⅱ,410~417). 그러나 모든 바리사이파들이 평화주의자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리사이파의 지도자들 중에는 유대 전쟁이 일어나자 혁명에 가담한 사람도 꽤 있었다.
유대교의 형성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70년의 예루살렘 멸망과 132~135년에 있었던 바르 코크바(BarKochba)의 항쟁이었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팔레스티나 지역의 유대인 사회가 이방화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유대적인 삶의 함양과 보존을 위하여 구전되어 오던 율법을 문서화하였고, 그것을 후손들에게 교육시키려는 랍비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바리사이파의 유산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70년 이후 바리사이파들은 성전으로부터 독립한 종교생활의 중심지를 유대인들에게 부여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바 코흐바의 폭동이후 얌니아와 우샤에 있던 바리사이파 학자들은 유대인인의 내부생활을 지배하는 단체로서 로마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따라서 바리사이파는 다시금 정치적인 권력과 종교적인 영향력을 소유한 당파가 되었다. 생존한 유대교는 주로 바리사이파쪽의 유대교였다.” 에버렛 퍼거슨, 앞의 책, P. 497.

1세기경 바리사이파는 사제들과 평신도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조상들로부터 구전된 전승들과 모세 율법을 모두 권위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1.2. 바리사이파의 사상

바리사이파들의 특징과 신학에 관한 기록은 쿰란 문서(QpNah,3 1~4. 6~7.9b~11). 랍비 문학(mYad 4, 6~8:mHag.2, 7:mSot.3, 4등), 요세푸스(Ant.ⅩⅤⅢ, 12~15:BJ.Ⅱ.162~163), 그리고 신약성서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문서들 대부분의 자료들은, 그 기록 목적이 논쟁적이었기 때문에 자료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으나 바리사이파의 사상에 대하여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1.2.1. 생활

바리사이파들의 사상은 그들의 생활에서 반영되었다. 요세푸스는 바리사이파들을 검소한 생활을 하며 전혀 사치하지 않는 사람들로 묘사하였다. 그들은 교리에 따라서 선을 행하며, 계명의 준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또 그들은 특별히 조상들을 존경하며 순종하였고 그들의 교훈을 거스르려고 하지 않았다(Ant.ⅩⅤⅢ.12).
이처럼 바리사이파들은 그 종교적인 열성이 대단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매우 활성적인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질박한 생활과 부에 대한 그들의 경멸적인 태도를 높이 찬양하였다. 유대인들의 전통을 보면, 바리사이파들이야말로 일의 형식주의적이며 위선적이고 과시적인 경건성을 배척하는 데 가장 앞장을 섰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완벽하게 따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위험에 빠질 우려가 많았던 것이다. 예수도 이러한 사이비 경건심을 맹렬하게 공격했다는 점에서는 바리사이파들과 맥락을 함께 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공격 대상이 바리사이파 그 자신들이라는 사실만이 다를 뿐이다. 마태 23,1 이하 루가 11,39 이하 참조.

“가명-필로의 「성서 고사기」가 증언해 주듯이 바리사이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일단 내면적으로 깊이 깨달은 다음 활력 있고 열렬한 경건심으로 이를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하였다.”13) 샤를르 뻬로 , 앞의 책, P. 144.
그들의 성서 이해는 많은 부분에서 예언자들의 메시지에서 힘입었고 또 실상 이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수록해 놓은 소위 예언서들의 독서를 시나고가 예절에 도입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
이 바리사이파 체계의 두 기둥은 “토라 토라(가르침, 또는 율법)는 주로 모세 오경이었다.-에버렛 퍼거슨, 앞의 책, P. 497.
와 전통”이었다. 기록된 율법은 해석되고 적용되어야만 한다. 토라는 수록된 가르침을 적용하는 과정은 새로운 법령과 관련되었다. 바리사이파들은 율법의 해석과 적용에 대한 신의 권위가 주어짐에 대하여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입장을 달리했다.
바리사이파들은 토라는 모든 이스라엘에 주어진 것이지 제사장들에게만이 아니며, 그러므로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져 있다고 생각했다. 즉 바리사이파들은 말씀, 즉 하느님의 이 계명들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에 응답을 보내고 이 계명을 지켜야할 의무도 모든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이 바리사이파들의 확신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종교를 ‘비성직자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샤를르 뻬로, 앞의 책, P. 145 참조.
여기에 서기관 서기관들은 토라에 대한 공식적인 학자들이었다.- 에버렛 퍼거슨, 앞의 책, P. 497.
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바리사이파들과 동일하지 않았지만, 왜 서기관들과 바리사이파들이 복음서에서 함께 등장하는지에 대해서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서기관들은 바리사이파들의 원칙들을 받아들였고 바리사이파들은 서기관들의 해석에서 유래된 가르침을 따랐다. 게다가 바리사이파들은 만약 율법 적용이 구속력을 지니려면, 토라 자체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느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들은 기록된 율법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는 구전율법의 견해였다.
바리사이파들은 유대인들에게 조상들로부터 전승되어 온 규례와 율법의 해석(구전 율법)을 모세의 율법과 같은 권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였던 것이다. (Ant.ⅩⅢ,297). 반면에 사두가이파인들은 이 점에서 바리사이파와 의견을 달리하였다. 바리사이파들이 조상들의 전승을 중요시한 사실은 예수와 바리사이파의 논쟁 부분에도 잘 암시되어 있다(마르 7, 3 5-8 : 참조 : 갈라 1,14).
요세푸스가 바리사이파인들은 대중으로부터 전적인 신뢰와 지지를 얻고 있었다고 전한 (Ant.ⅩⅢ,298 ; ⅩⅤⅢ, 1) 반면에, 사두가이파인들은 일부의 부유 계층을 제외하고는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어떤 직무를 수행하려고 할 때 비록 그것이 자신들의 마음에는 내키지 않더라고 바리사이파를 신뢰하는 일반인들의 눈이 두려워서 바리사이파의 가르침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바리사이파의 가르침은 도시에 사는 일반 대중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모든 기도와 예배의 주요 부분은 바리사이파의 해석에 따라서 거행되었다.(Ant.ⅩⅤⅢ,15)
바리사이파들은 성전의 제의생활을 좀더 매력있게 당시의 실정에 알맞도록 적용시키는데 효과적으로 기여했다. 그 예로서 바리사이파들은 전례력(典禮歷)을 일부 개혁하는데 성공하였으며(오순절 축제 일자), 초막절의 전례행사 중에서도 여러 가지를 개선하였다. 바리사이파들은 무엇보다도 성서의 본문을 주의깊게 해석함으로써 자기 시대 사람들의 종교 및 사회생활을 좀더 견디기 쉽고 좀더 실정에 맞게 해나갈수 있도록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점에 있어서 좀더 경직되어 있던 꿈란의 사람들은 바리사이파들을 ‘편의만을 찾는 사람들’로 취급하면서 이들을 이따금 비난하곤 하였다. 하지만 1세기 바리사이파들은 제사장 백성의 나라라는 원리에 기초를 두고서, 레위기에 기록된 제사장들을 위해 전개된 제례의 순수함에 대한 규정들을 회원들에게 적용시키려 했다. 그들은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행했던 것과 똑같은 정결함의 조건들에 맞추어 개인식사를 했다. 그러므로, 예식의 정결함, 음식의 적절한 준비, 농사에 관한 율법들의 신중한 준수, 세심한 십일조에 관한 상당한 관심이 있었다. 이처럼 바리사이파들은 ‘토라’의 모든 계율들을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따르려 했음이 분명하다. 실상 그들은 이 미세한 계율까지도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한 하느님의 뜻의 표현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율사들이 율법의 중요점, 그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강조할 줄 모르고 자구적인 율법의 실천에만 매달렸던 것은 아니다. 한 예로 힐렐이 이방인을 개종시킨 이야기는 유명하다. 힐렐의 “황금률”의 부정적인 형태이다. 율법을 가능한한 가장 적은 숫자의 원리들로 줄이는 것이(마태 22:36) 랍비들의 문제였다. 어떤 이야기에 의하면, 어느 이방인은 자기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전체 모세오경을 가르쳐 주면 개종하겠다고 말했다. 힐렐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그를 개종시켰다: “너에게 싫은 것을 네 이웃에게 행치 말라. 그것이 토라의 모든 것이고, 나머지는 주석이다. 가서 배우라”( b Shabbath 30b) – 에버렛 퍼거슨, 앞의 책, P. 499.
기원후 135년에 순교자로 죽은 랍비 아끼바(Aquiba)는 같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은 바로 이웃 사랑이다.” 루가 10,25-28에서도 어느 율법학자가 똑같은 사상을 표명하고 있다(마르 12,32-33참조).
그런데 복음서 중에서 특히 마태오 복음은 논쟁 대상으로 바리사이파를 지목하고 있다. “율사들과 바리사이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않아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은 모두 행하고 지키시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을 따라 행하지는 마시오. 사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습니다.”(마태 23, 2-3). 또한 바리사이파에 대한 원시 그리스도교의 논쟁은 요한 복음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요한 8,39-47). 이 같은 논쟁은, 한편으로는 1~2세기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벌어졌던 다양한 종교적 그룹들간의 알력과 견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바리사이파가 이 시기에 율법에 대한 그들의 지식과 경건으로 인하여 다른 유대인 그룹에 비해서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는 점을 암시해 주고 있다.

1.2.2. 율법의 실천

바리사이파는 율법의 정확한 해석과 그 엄격한 실천을 자랑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B.J. Ⅱ, 162). 이 점은 사도 바오로가 언제나 자신이 바리사이파로 살아왔음을 자랑하였다 사도 22, 3 : 26, 5 : 갈라 1, 14 :필립 3, 5-6.
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또한 마태오 복음 23장 15-26절은 안식일법과 정결 예법, 결혼․개종에 관한 것, 각종 서약과 십일조 등 바리사이파들의 엄격한 율법 조항들이 삶의 전반에 두루 걸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에세네파는 동료 유대인들의 율법 준수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신성함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 나름대로 성서를 해석하였다. 복음서는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초기 예수 공동체도 이와 마찬가지 모습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에서 바리사이파는 율법에 대한 엄격성으로 인해 동료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그들과 분리된 생활을 하였다. 한국가톨릭 대사전 편찬위원회, 앞의 책, P.3050 참조.

1.2.3. 신학

“바리사이파들은 토라를 발전해가는 역동적인 사회적 영향력으로서 보았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이 죽은 의식이 되지 않도록 지키며 또한 그것에게 새로운 의미와 새 영을 부여하려 했다. 따라서 그들은 교리적으로 보다 새로운 진전들―즉, 몸의 부활, 최후의 심판, 내세의 상급과 징벌 등―에 개방적이었다.” 에버렛 퍼거슨, 앞의 책, P.498.

바리사이들의 신학적인 생각은 영혼은 불멸하다고 믿었으며, 선한 삶을 산 사람과 악행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보상과 징벌이 주어진다고 믿었다. 악한 영혼들은 영원히 감금되는 형벌을 받지만 선한 영혼들은 다른 삶으로 이어지는 평탄한 길을 부여받는다고 확신하였다(Ant. ⅩⅤⅢ,14). 의인은 마지막 날 부활하여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리라는 바리사이파의 응보와 부활 사상은, 다니엘서 12장 2절에서처럼 랍비적 유대교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사두가이파는 부활 사상을 믿지 않었으며 마태 22,23 ; 마르 12, 18 ;루가 20, 27 ; 사도 23, 8.
영혼 불멸 사상이나 이승에서의 보상과 징벌, 영과 사람의 직접적인 통교(사도 23,9)도 받아들이지 않았다.(B.J.Ⅱ,165). 또한 사두가이파는 영혼은 그 몸과 함께 소멸된다고(Ant.ⅩⅧ,16)가르쳤고, 천사와 영의 존재도 부인하였다(사도 23, 8). 그러나 바리사이파들은 메시아 대망론자들이었다.(Ps. Sol., 17, 23~18, 9). 이 같은 사실은 예수에게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올 것인지 묻는 그들의 질문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루가 17, 20).
바리사이파의 토라에 대한 융통성은 운동과 자유의지의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도 볼 수 있다. 바리사이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운명론자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 만사는 하느님과 운명에 달려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의지가 신의 섭리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Ant.ⅩⅧ,13), 세상 만사 가운데 어떤 일들은 신의 섭리이지만, 어떤 일들은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하였다(Ant.ⅩⅢ,172). 반면에 사두가이파는 운명을 철저하게 부인하였다. 그들은 선과 악은 인간의 선택에 달린 것이며, 이 일을 행하거나 저 일을 행하는 것도 오로지 자신의 판단에 달려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B.J.Ⅱ,164). 그러나 에세네파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철저하게 신의 섭리라고 믿었다. 또한 그들은 바리사이파처럼 영혼 불멸과 부활을 믿었다. 따라서 신의 섭리와 인간의 의지를 모두 인정한 바리사이파는 에세네파와 사두가이파의 중간 입장을 취했다.
요세푸스에 의해 특징이 묘사된 것처럼, 이 문제에 대한 유대 사회의 세 가지 주요한 “철학파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구분되었다. 사두가이파는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했고 에세네파는 모든 것을 운명으로 보았고, 바리사이파는 운명과 자유의지 양쪽으로 보았다. “요세푸스는 희랍 철학의 용어들을 빌어서 말하길, 운명에 관해서는 사람은 하느님의 지배하심, 또는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비교, 사도 5:38-39에 있는 가말리엘의 조언.-에버렛 퍼거슨, 앞의 책, P.498.
랍비 아키바가 표현했듯이, “모든 것은 예견되나 자유는 수여된다(아봇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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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파의 배경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1. 바리사이파에 관한 역사적 배경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리사이파라는 말은 부정적으로 쓰인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이야말로 성전파괴라는 비극과 시련을 극복하고 그리스도교의 적수로서 끝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던 유일의 집단이었으며 또한 그후 발전되어 나온 정통 유대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후기에 속하는 이 무렵에도 루가는 예수에게 호감을 가졌었던 바리사이파인들을 이야기 하였으며(루가 13,31), 가믈리엘은 물론이고(사도 5,34 ; 26,5)후에 그리스도교인으로 개종한 바리사이파인들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언급하고 있다.(사도15,5). 따라서 우리는 바리사이들을 예수를 무조건 반대하고 죽이려는 원수들로 보는 일이 없도록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 실상 당시의 역사적인 실정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바리사이파들이 어떠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관행과 습속 그리고 그들의 교리특징들이 무엇이었던가를 정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실상 자료의 부족으로 정확하게 밝혀내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만큼 ‘바리사이’라는 별명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집단을 가리킬 수 있었던 것이다. 기원 후 1세기에 이 말은 이렇다 할 경멸적이거나 비방적인 말로 어김없이 널리 사용되었으니 그 좋은 증거가 바로 요세푸스와 신약성서이다. 그러나 이 바리사이파들이 집단을 꿈란의 공동체처럼 조직도 엄연하고 엄격한 일종의 수도단체나 종파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실상, 이들은 종교적인 계율을 비교적 엄격하게 준수하는 여러 사회단체에 속하면서 일반의 종교적인 태도와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일종의 파벌 또는 사상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샤를르 뻬로 , 『예수와 역사』, 박양래(역), 서울 : 가톨릭 출판사, 1958, P. 143. 참조.

    바리사이파라는 용어는 히브리어 ‘프루쉼’(מיꚄוּד꘰)과‘페리쉰’(ןיꚄיꕉ꘴), 그리고 아람어 ‘프리쉬’(איꚄיꕉ꘸)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말은 ‘분리된 자’ 혹은 ‘구별된 자’라는 뜻이다. 랍비문학에서도 바리사이파 라는 용어는 부정적으로 이단자들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지만 요세푸스의 저서나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바리사이파들과 같은 용어로 호칭되었다. 요세푸스(F.Josephus,37/38-100)의 저서와 신약성서에서는 그리스어 ‘파리사이오이’(Φαρισαιοι)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한국 가톨릭 대사전 편찬위원회(편), 『한국 가톨릭 대사전』 제 5 권, 서울 : 한국 신학 연구소, 1995, P. 3049. 참조.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용어가 기원전 2세기 중엽부터 율법에 대한 보다 엄격한 해석으로 자신들은 구별하기 시작한 무리들에게 적대자들이 붙여준 이름으로 여긴다.
    바리사이파라는 용어가 적대자들에 의하여 경멸조로 붙여진 명칭이라면, ‘하시딤’(ꗫיꙞי꘏ꖖ)은 바리사이파들과 에세네파의 조상들이 자신들에게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바로 그들은 마카베오 반란 당시에 하시딤으로부터 부상한 단체들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에버렛 퍼거슨, 『초대교회 배경사』, 박경범(역), 서울 : 은성, 1993, P. 496 참조.
    하시딤은 마카베오를 따르던 무리들로 조상들의 관습에 따랐고, 유대교를 박멸하려고 했던 에피파네스와 예루살렘의 부패한 사제들에게 대항한 마카베오를 도와 독립투쟁에서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후 그들은 타락한 마카베오 후예들에게 등을 돌리고 율법의 엄격한 해석과 실천에 더욱 열성을 쏟았다.
    이처럼 바리사이파는 마카베오 후예들과 하시딤의 갈등 속에서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바리사이파들은 자신들을 ‘하베림(מיꕉꔪꕟ)’ ‘하베림’(מיꕉꔪꕟ)은 ‘동지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앞의 책, P. 3046.
    이라고 생각하였다. ‘하베르(ךꔪꕗ)’란 율법 가운데서도 특별히 레위기의 정결 예법과 사제의 의무 조항을 엄격하게 지키던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들 전체가 하베림에 속한 것은 아니었다. 하베림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도시 가까운 곳에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계약의 형제들로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공동체라고 자부하였다. 하베르로서의 바리사이파는 ‘암 하레츠'(ץꕋאָꖎ מאּ) 암 하레츠‘(ץꕋאָꖎ מאּ)는 바리사이파는 율법을 모르거나 준수하지 않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앞의 책, P. 3046.
    나 이방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으며, 한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나눌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바리사이파들은 이외에도 ‘서기관‘(דפיס)이나 ’현인‘( מꔧꖎ )이란 이름을 선호하기도 했다. 마태 23, 2. 7. 13. 15. 23. 25. 27. 29 참조.

    1.1. 바리사이파의 역사

    바리사이파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유대교의 유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바리사이파가 누구로부터, 또는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뚜렷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1.1.1. 페르시아 시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대교는 페르시아 시기 초기에 에즈라로 인해 탄생되었다. 이때 유대에는 정치적으로, 해외에서 페르시아의 지원을 업고 귀국한 ‘해외파’와 계속 살고 있던 ‘국내파’가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율법서와 예언서에서는 이 주도권 싸움을 ‘땅’의 문제로 신학화하였다. 또한 에즈라서에서 ‘국내파’는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사마리아 사람들이며 우상숭배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암 하야에츠’인 것처럼 왜곡되었다. 요세푸스는 이때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사제들이 세겜의 그리짐 산 정상에 사마리아인 성전을 짓고 사마리아 공동체를 형성했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이끄는 포로 귀환 공동체가 사제들의 권위를 훨씬 뛰어넘어 엄격한 결혼 예법을 적용하고 있었다. 또한 율법(Torah)을 공개적으로 가르쳤고, 정결 예법과 십일조를 자신들의 법해석에 따라서 실시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비율법적인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과 구별하여 생활하였다. 반면에 제 3이사야의 예언 그룹은 사제들과 정치적인 대결을 벌이기보다는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예루살렘 성전이 참된 하느님의 집이 되리라는 것과 그때에 자신들만이 의로운 존재로 인정받게 되리라는 종말론적 사고와 행위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여러 그룹들이 그리스 시대에 와서 어떤 모습으로 발전했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시기에 예루살렘의 사제들과는 다른 평신도 조직인 서기관 그룹이 형성되어, 사제들의 위치를 대신한 랍비들이 회당을 중심으로 율법을 교육시키고 종교 생활을 관장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편) 앞의 책 P. 3048 참조.

    1.1.2. 마카베오 왕조 시기

    마카베오 왕조 시기로 넘어와서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ⅣEpipanes, 기원전 175~164)의 유대교 박멸정책과 성전 모독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을 지원하게 함으로써 예루살렘 성전과 타락한 대사제장직을 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요나단이 대제사장직을 강탈하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성전과 대사제장직의 정통성에 대해 의문과 반감을 갖게 되었다. 대부분들의 학자들은 유대교 분파들이 싹트게 된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반란이 성공한 후, 만일 누군가 정치적인 생활을 버리고 꿈란인들이 한 것처럼 광야로의 은둔생활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율법에 관한 한 두 가지 중 한가지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즉 전통적인 법전이 새로운 상황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확장되고 새로운 신념들과 조화되기 위해 재해석이 되는 입장을 취하거나, 또는 이러한 경험들은 율법의 권위의 한계 밖에 두고 새로운 사상들은 인정되지 않는 입장 등이다. 첫 번째의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바리사이파가 되었고, 두 번째의 입장을 취한 자들은 사두가이파가 되었다.” 에버렛 퍼거슨, 앞의 책, P. 496.

    1.1.3. 하스모네 왕가 시기

    요세푸스에 따르면, 요한 히르키누스 1세(기원전 134~104)가 통치하던 시기에 바리사이파인들과 사두가이파인들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마카베오 시대에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는 대립적인 두 정당의 모습으로 출현하고 있다.
    사독(Sadok)의 후손들로 자처하는 사두가이파는 대사제 그룹과 귀족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제, 대사제, 그리고 귀족들이 다 사두가이파는 아니었으며, 바리사이파들도 많았다. 그들은 조상들의 관습과 율법에 대한 열정때문에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는데, 히르키누스의 그리스식 군주제에 식상한 바리사이파들이 왕에게 대사제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함으로써 왕과 바리사이파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Ant.Ⅷ.288~298) 이로 인해 히르카누스는 바리사이파들이 제정한 율법들을 폐기하고 종교적으로 타협적이었던 사두가이파의 편으로 기울어졌다(M.Maaser Sheni,5, 15:Sotah,9, 10).
    하스모네 왕가와 바리사이파 사이의 갈등은 히르카누스의 셋째 아들인 알렉산더 얀나이(기원전 103~76) 때 절정을 이루었다. 백성들에게 알렉산더가 대사제로서 자격이 없다고 선동한 바리사이파들은 초막절 축제 예식 때 그에게 레몬을 던져서 의식을 방해하도록 하였으며(Ant.Ⅻ,372 f.;BJ. I,88). 알렉산더는 이 일로 6,000명의 바리사이파들을 학살하였다. 그 후 왕이 전쟁으로 피난하였을 때 바리사이파들은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6년 동안 내전이 계속 되었는데, 그때 목숨을 잃은 유대인은 5만이 넘었다(Ant.Ⅻ,376).
    하스모네 왕가와 바리사이파와의 사이의 평화는 알렉산더 얀나이의 아내며 후계자이자 살로메 알렉산드라 (기원전 76~67)시기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알렉산더가 임종하면서 아내에게 바리사이파들과의 화해를 유언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살로메는 바리사이파였던 자신의 아들 히르카누스2세(기원전 63~43)를 대사제로 임명하였으며 회당을 바리사이파에게 맡겼다. 이로써 실권을 잡은 바리사이파는 해외로 망명했던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포로들을 석방하였으며, 알렉산더 얀나이에게 협조한 많은 귀족들을 처형하였다.(Ant.Ⅻ409). 그러나 사두가이파의 사주를 받은 살로메의 맏아들 아리스토블루스 2세(기원전 67~63)가 바리사이파의 정책에 반대하여 하스모네 왕가는 결국 두 형제간의 싸움으로 몰락하였으며, 팔레스티나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편), 앞의 책 P. 3049 참조.

    1.1.4. 로마 시기

    로마시기에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의 갈등으로 이득을 본 것은 로마와 헤로데였다. 유대의 통치자로 헤로데 대왕(기원전 37~서기 4)이 되었을 때 바리사이파였던 폴리온(Polion)과 사마이아스(Samaais)는 동료 유대인들에게 헤로데의 통치를 받아들이도록 권하였다. 그 이유는 헤로데의 지배를 불순종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로 생각했기 때문이다.(Ant.ⅩⅤ,4). 이 일로 바리사이파들은 헤로데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헤로데 궁전의 여인들에게까지 특별한 영향을 미쳤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로데 시대 때 유대에는 6,000명의 바리사이파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유대 전쟁(66~74)이 발발하기 직전 대사제그룹과 연대하여 열성당원(Zealots)들에게 전쟁을 일으키지 말도록 호소하는 평화적 중재자들로 묘사되었다 (BJ.Ⅱ,410~417). 그러나 모든 바리사이파들이 평화주의자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리사이파의 지도자들 중에는 유대 전쟁이 일어나자 혁명에 가담한 사람도 꽤 있었다.
    유대교의 형성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70년의 예루살렘 멸망과 132~135년에 있었던 바르 코크바(BarKochba)의 항쟁이었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팔레스티나 지역의 유대인 사회가 이방화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유대적인 삶의 함양과 보존을 위하여 구전되어 오던 율법을 문서화하였고, 그것을 후손들에게 교육시키려는 랍비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바리사이파의 유산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70년 이후 바리사이파들은 성전으로부터 독립한 종교생활의 중심지를 유대인들에게 부여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바 코흐바의 폭동이후 얌니아와 우샤에 있던 바리사이파 학자들은 유대인인의 내부생활을 지배하는 단체로서 로마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따라서 바리사이파는 다시금 정치적인 권력과 종교적인 영향력을 소유한 당파가 되었다. 생존한 유대교는 주로 바리사이파쪽의 유대교였다.” 에버렛 퍼거슨, 앞의 책, P. 497.

    1세기경 바리사이파는 사제들과 평신도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조상들로부터 구전된 전승들과 모세 율법을 모두 권위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1.2. 바리사이파의 사상

    바리사이파들의 특징과 신학에 관한 기록은 쿰란 문서(QpNah,3 1~4. 6~7.9b~11). 랍비 문학(mYad 4, 6~8:mHag.2, 7:mSot.3, 4등), 요세푸스(Ant.ⅩⅤⅢ, 12~15:BJ.Ⅱ.162~163), 그리고 신약성서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문서들 대부분의 자료들은, 그 기록 목적이 논쟁적이었기 때문에 자료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으나 바리사이파의 사상에 대하여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1.2.1. 생활

    바리사이파들의 사상은 그들의 생활에서 반영되었다. 요세푸스는 바리사이파들을 검소한 생활을 하며 전혀 사치하지 않는 사람들로 묘사하였다. 그들은 교리에 따라서 선을 행하며, 계명의 준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또 그들은 특별히 조상들을 존경하며 순종하였고 그들의 교훈을 거스르려고 하지 않았다(Ant.ⅩⅤⅢ.12).
    이처럼 바리사이파들은 그 종교적인 열성이 대단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매우 활성적인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질박한 생활과 부에 대한 그들의 경멸적인 태도를 높이 찬양하였다. 유대인들의 전통을 보면, 바리사이파들이야말로 일의 형식주의적이며 위선적이고 과시적인 경건성을 배척하는 데 가장 앞장을 섰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완벽하게 따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위험에 빠질 우려가 많았던 것이다. 예수도 이러한 사이비 경건심을 맹렬하게 공격했다는 점에서는 바리사이파들과 맥락을 함께 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공격 대상이 바리사이파 그 자신들이라는 사실만이 다를 뿐이다. 마태 23,1 이하 루가 11,39 이하 참조.

    “가명-필로의 「성서 고사기」가 증언해 주듯이 바리사이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일단 내면적으로 깊이 깨달은 다음 활력 있고 열렬한 경건심으로 이를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하였다.”13) 샤를르 뻬로 , 앞의 책, P. 144.
    그들의 성서 이해는 많은 부분에서 예언자들의 메시지에서 힘입었고 또 실상 이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수록해 놓은 소위 예언서들의 독서를 시나고가 예절에 도입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
    이 바리사이파 체계의 두 기둥은 “토라 토라(가르침, 또는 율법)는 주로 모세 오경이었다.-에버렛 퍼거슨, 앞의 책, P. 497.
    와 전통”이었다. 기록된 율법은 해석되고 적용되어야만 한다. 토라는 수록된 가르침을 적용하는 과정은 새로운 법령과 관련되었다. 바리사이파들은 율법의 해석과 적용에 대한 신의 권위가 주어짐에 대하여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입장을 달리했다.
    바리사이파들은 토라는 모든 이스라엘에 주어진 것이지 제사장들에게만이 아니며, 그러므로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져 있다고 생각했다. 즉 바리사이파들은 말씀, 즉 하느님의 이 계명들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에 응답을 보내고 이 계명을 지켜야할 의무도 모든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이 바리사이파들의 확신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종교를 ‘비성직자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샤를르 뻬로, 앞의 책, P. 145 참조.
    여기에 서기관 서기관들은 토라에 대한 공식적인 학자들이었다.- 에버렛 퍼거슨, 앞의 책, P. 497.
    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바리사이파들과 동일하지 않았지만, 왜 서기관들과 바리사이파들이 복음서에서 함께 등장하는지에 대해서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서기관들은 바리사이파들의 원칙들을 받아들였고 바리사이파들은 서기관들의 해석에서 유래된 가르침을 따랐다. 게다가 바리사이파들은 만약 율법 적용이 구속력을 지니려면, 토라 자체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느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들은 기록된 율법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는 구전율법의 견해였다.
    바리사이파들은 유대인들에게 조상들로부터 전승되어 온 규례와 율법의 해석(구전 율법)을 모세의 율법과 같은 권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였던 것이다. (Ant.ⅩⅢ,297). 반면에 사두가이파인들은 이 점에서 바리사이파와 의견을 달리하였다. 바리사이파들이 조상들의 전승을 중요시한 사실은 예수와 바리사이파의 논쟁 부분에도 잘 암시되어 있다(마르 7, 3 5-8 : 참조 : 갈라 1,14).
    요세푸스가 바리사이파인들은 대중으로부터 전적인 신뢰와 지지를 얻고 있었다고 전한 (Ant.ⅩⅢ,298 ; ⅩⅤⅢ, 1) 반면에, 사두가이파인들은 일부의 부유 계층을 제외하고는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어떤 직무를 수행하려고 할 때 비록 그것이 자신들의 마음에는 내키지 않더라고 바리사이파를 신뢰하는 일반인들의 눈이 두려워서 바리사이파의 가르침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바리사이파의 가르침은 도시에 사는 일반 대중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모든 기도와 예배의 주요 부분은 바리사이파의 해석에 따라서 거행되었다.(Ant.ⅩⅤⅢ,15)
    바리사이파들은 성전의 제의생활을 좀더 매력있게 당시의 실정에 알맞도록 적용시키는데 효과적으로 기여했다. 그 예로서 바리사이파들은 전례력(典禮歷)을 일부 개혁하는데 성공하였으며(오순절 축제 일자), 초막절의 전례행사 중에서도 여러 가지를 개선하였다. 바리사이파들은 무엇보다도 성서의 본문을 주의깊게 해석함으로써 자기 시대 사람들의 종교 및 사회생활을 좀더 견디기 쉽고 좀더 실정에 맞게 해나갈수 있도록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점에 있어서 좀더 경직되어 있던 꿈란의 사람들은 바리사이파들을 ‘편의만을 찾는 사람들’로 취급하면서 이들을 이따금 비난하곤 하였다. 하지만 1세기 바리사이파들은 제사장 백성의 나라라는 원리에 기초를 두고서, 레위기에 기록된 제사장들을 위해 전개된 제례의 순수함에 대한 규정들을 회원들에게 적용시키려 했다. 그들은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행했던 것과 똑같은 정결함의 조건들에 맞추어 개인식사를 했다. 그러므로, 예식의 정결함, 음식의 적절한 준비, 농사에 관한 율법들의 신중한 준수, 세심한 십일조에 관한 상당한 관심이 있었다. 이처럼 바리사이파들은 ‘토라’의 모든 계율들을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따르려 했음이 분명하다. 실상 그들은 이 미세한 계율까지도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한 하느님의 뜻의 표현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율사들이 율법의 중요점, 그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강조할 줄 모르고 자구적인 율법의 실천에만 매달렸던 것은 아니다. 한 예로 힐렐이 이방인을 개종시킨 이야기는 유명하다. 힐렐의 “황금률”의 부정적인 형태이다. 율법을 가능한한 가장 적은 숫자의 원리들로 줄이는 것이(마태 22:36) 랍비들의 문제였다. 어떤 이야기에 의하면, 어느 이방인은 자기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전체 모세오경을 가르쳐 주면 개종하겠다고 말했다. 힐렐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그를 개종시켰다: “너에게 싫은 것을 네 이웃에게 행치 말라. 그것이 토라의 모든 것이고, 나머지는 주석이다. 가서 배우라”( b Shabbath 30b) – 에버렛 퍼거슨, 앞의 책, P. 499.
    기원후 135년에 순교자로 죽은 랍비 아끼바(Aquiba)는 같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은 바로 이웃 사랑이다.” 루가 10,25-28에서도 어느 율법학자가 똑같은 사상을 표명하고 있다(마르 12,32-33참조).
    그런데 복음서 중에서 특히 마태오 복음은 논쟁 대상으로 바리사이파를 지목하고 있다. “율사들과 바리사이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않아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은 모두 행하고 지키시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을 따라 행하지는 마시오. 사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습니다.”(마태 23, 2-3). 또한 바리사이파에 대한 원시 그리스도교의 논쟁은 요한 복음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요한 8,39-47). 이 같은 논쟁은, 한편으로는 1~2세기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벌어졌던 다양한 종교적 그룹들간의 알력과 견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바리사이파가 이 시기에 율법에 대한 그들의 지식과 경건으로 인하여 다른 유대인 그룹에 비해서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는 점을 암시해 주고 있다.

    1.2.2. 율법의 실천

    바리사이파는 율법의 정확한 해석과 그 엄격한 실천을 자랑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B.J. Ⅱ, 162). 이 점은 사도 바오로가 언제나 자신이 바리사이파로 살아왔음을 자랑하였다 사도 22, 3 : 26, 5 : 갈라 1, 14 :필립 3, 5-6.
    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또한 마태오 복음 23장 15-26절은 안식일법과 정결 예법, 결혼․개종에 관한 것, 각종 서약과 십일조 등 바리사이파들의 엄격한 율법 조항들이 삶의 전반에 두루 걸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에세네파는 동료 유대인들의 율법 준수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신성함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 나름대로 성서를 해석하였다. 복음서는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초기 예수 공동체도 이와 마찬가지 모습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에서 바리사이파는 율법에 대한 엄격성으로 인해 동료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그들과 분리된 생활을 하였다. 한국가톨릭 대사전 편찬위원회, 앞의 책, P.3050 참조.

    1.2.3. 신학

    “바리사이파들은 토라를 발전해가는 역동적인 사회적 영향력으로서 보았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이 죽은 의식이 되지 않도록 지키며 또한 그것에게 새로운 의미와 새 영을 부여하려 했다. 따라서 그들은 교리적으로 보다 새로운 진전들―즉, 몸의 부활, 최후의 심판, 내세의 상급과 징벌 등―에 개방적이었다.” 에버렛 퍼거슨, 앞의 책, P.498.

    바리사이들의 신학적인 생각은 영혼은 불멸하다고 믿었으며, 선한 삶을 산 사람과 악행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보상과 징벌이 주어진다고 믿었다. 악한 영혼들은 영원히 감금되는 형벌을 받지만 선한 영혼들은 다른 삶으로 이어지는 평탄한 길을 부여받는다고 확신하였다(Ant. ⅩⅤⅢ,14). 의인은 마지막 날 부활하여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리라는 바리사이파의 응보와 부활 사상은, 다니엘서 12장 2절에서처럼 랍비적 유대교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사두가이파는 부활 사상을 믿지 않었으며 마태 22,23 ; 마르 12, 18 ;루가 20, 27 ; 사도 23, 8.
    영혼 불멸 사상이나 이승에서의 보상과 징벌, 영과 사람의 직접적인 통교(사도 23,9)도 받아들이지 않았다.(B.J.Ⅱ,165). 또한 사두가이파는 영혼은 그 몸과 함께 소멸된다고(Ant.ⅩⅧ,16)가르쳤고, 천사와 영의 존재도 부인하였다(사도 23, 8). 그러나 바리사이파들은 메시아 대망론자들이었다.(Ps. Sol., 17, 23~18, 9). 이 같은 사실은 예수에게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올 것인지 묻는 그들의 질문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루가 17, 20).
    바리사이파의 토라에 대한 융통성은 운동과 자유의지의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도 볼 수 있다. 바리사이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운명론자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 만사는 하느님과 운명에 달려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의지가 신의 섭리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Ant.ⅩⅧ,13), 세상 만사 가운데 어떤 일들은 신의 섭리이지만, 어떤 일들은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하였다(Ant.ⅩⅢ,172). 반면에 사두가이파는 운명을 철저하게 부인하였다. 그들은 선과 악은 인간의 선택에 달린 것이며, 이 일을 행하거나 저 일을 행하는 것도 오로지 자신의 판단에 달려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B.J.Ⅱ,164). 그러나 에세네파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철저하게 신의 섭리라고 믿었다. 또한 그들은 바리사이파처럼 영혼 불멸과 부활을 믿었다. 따라서 신의 섭리와 인간의 의지를 모두 인정한 바리사이파는 에세네파와 사두가이파의 중간 입장을 취했다.
    요세푸스에 의해 특징이 묘사된 것처럼, 이 문제에 대한 유대 사회의 세 가지 주요한 “철학파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구분되었다. 사두가이파는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했고 에세네파는 모든 것을 운명으로 보았고, 바리사이파는 운명과 자유의지 양쪽으로 보았다. “요세푸스는 희랍 철학의 용어들을 빌어서 말하길, 운명에 관해서는 사람은 하느님의 지배하심, 또는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비교, 사도 5:38-39에 있는 가말리엘의 조언.-에버렛 퍼거슨, 앞의 책, P.498.
    랍비 아키바가 표현했듯이, “모든 것은 예견되나 자유는 수여된다(아봇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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