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존재 증명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존재 증명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존재 증명
(1-4:우주론적 증명방법,5:목적론적 증명방법)
1.운동에 의한 방법-부동의 원동자 – 신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스스로 운동할 수 없고 다른 어떤것에 의해 움직이 고 있다. 즉 운동에는 움직이게 하는 원인이 있다. 이 원인을 추구해 보면 최종적으로 다른것에서부터 원인받지 않는 최초의 부동의 원동자가 있다. 그 부동의 원동자가 신이다.
2.능동인에 의한 방법
이 방법은 엄격한 의미에선 인과율의 법칙으로서 존재하는것은아무것도 스스 로 원인이 될수 없고 그것을 규정하는 원인이 있는것인데 이러한 원인을 거 슬러 올라가면 맨 마지막의 원인(능동인)이 있는데 이 원인이 신인 것이다. 이 방법은 존재이유에 대한 충족 이유 원리에 기초한다.
3.우연성에 의한 방법
모든 존재자는 존재하지 않을수도있었던 것들이다.필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이러한 가능적인 존재(가능유,우연유)를 현실적인 존재(필연유)로 변화 시켜 주는 스스로 필연적이 존재자가 있어야하는데 이 존재가 신이다.
이 방법은 후대 철학자들이 가장 완벽한 증명방법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4.완전성의 단계에 의한 방법
사물은 나름대로 온전성의 단계를 가지고 있으며 더 완전하고 덜 완전한 모 든 존재의 배후에는 최고의 완전한 한 존재가 있는데 그 존재가 신이고 그 최고로 완전한 자는 모든 존재의 근거이기도 하다.
5.세계질서에 의한 증명방법-목적론적 증명방법
마치 화살이 궁수에 의해 목표로 향해지는것과 같이 세계에는 질서가 있고 목 표를 달성 하려는 노력이 있다. 사물이 그에 의해 목적에로 질서지어주는 지 성적이고 인식능력이 있는 존재가 있는것이며 그 존재가 곧 신이다.


근대철학과 하느님 논증에 대한 비판
경향 – 인간은 스스로 검토하기 이전에는어떤권위난이론도 받아들이지 않으려함
따라서 인간은 이제 모든 전통적인 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함

1. 칸트 – 순수이성비판에서 전통적인 하느님의 존재 논증 비판
그는 안셀무스의 논증을 비판하면서
아무리 온전한 최고의 개념이라할지라도 개념은 어디까지나 개념에 지나지 않 으며 존재와는 별개라는 것. 따라서 아무리 완전한 개념일지라도 거기서 실제 로 있는 존재를 이끌어 낼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존재 에 대한 존재론적 논증은 그 효력을 상실한다고 봄

그는 우주론적 논증도 비판
그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경험의 세계에서난 통용할 수 있는 것이지 경험의 세계를 벗어나서는 아무런의미를 지니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와같이 인간은 신 의 존재를 논증할 수 없다고 주장

2.포이에르바하
신이란 결국 인간의 자기투사에 불과하다고 주장.

1.1.3 근대철학과 하느님 논증에 대한 비판
근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은 스스로 검토하기 이전에는 어떤 권위나 이론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이제 모든 전통적인 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칸트(Kant 1724-1804)는 그이 「순수이성비판」에서 전통적인 하느님의 존재 논증을 비판한다.
우선 <존재론적 논증>에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최고의 존재라는 개념부터 존재를 이끌어 내는 존재론적 논증은 ‘가장 완전한 개념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가장완전한 개념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에는 오류가 개입되어 있다고 보았다.
아무리 완전하 최고의 개념일지라도, 개념은 어디까지나 개념에 지나지 않으며, 존재와는 별개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완전한 개념일지라도 거기서 실제로 있는 존재를 이끌어 낼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논증>은 그 효력을 상실한다고 보았다.
칸트는 이어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논증>도 비판한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경험의 세계에서나 통용할 수 있는 것이지, 경험의 세계를 벗어나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와같이 인간은 신의 존재를 논증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칸트 이후 포이에르바하(Feuerbach 1804-1872)는 신이란 결국 인간의 자기투사(自己投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론이 나오기까지에는 테카르트부터 준비작업이 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자신의 철학의 깃점으로 삼았다. 여기서존재가 사유에서 출발한다는 논리가 따라 나오게 된다. 결국 신의 존재도 인간의 사유, 생각에서 생겨나게 되었다는 주장을 하게된다. 물론 데카르트는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 이후의 계몽주의자들, 볼테르, 룻쏘에서도 그리스도교가 비판되고 있긴 하지만 하느님의 존재가 부정되지는 않았다. 본격적인 무신론은 변증법론자였던 헤겔의 두부류의 제자들 가운데 그 좌파였던 포이에르바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헤겔안에도 무신론적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종교와 종교적 진리의 속성을 순수 개념설과 같은 철학과 비교하여 보다 낮은 인간의 표상이나 감정에 귀속시킨 점이라든가, 자연과 역사의 양태에서 신의 내재가 이루어진 다는 것이 그렇다. 하느님이 세상에 있는 것,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존재요, 생명이고 진리인 까닭에 하느님은 자연과 역사의 양태안에 존재하고, 나타남에 자신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없이 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닌 것이다.
결국 형이상학적 신은
나타남 밖에는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은 또 시간적일 수 밖에 없다.
이처럼 헤겔에서 신은 범신론적 경향을 띠고 나타난다. 이미 젊은 시절에 그는 “신과 사람은 다만 하나의 사물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적극적인 무신론자 포이에르바하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자신을 자기 밖에로 정립케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기와는 독립된 어떤 존재로 간주한다. 즉 신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나서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경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의식은 인간의 자기 의식이며, 신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자기 인식이다’라고 주장한다. 결국 신은 인간의 자기투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Homo homini Deus est (사람은 사람에게 신이다).
이러한 포이에르바하의 이론은 그 이후의 무신론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무신론이 관념적이고 심리적인 입장이었다고 한다면, 카알 막스(Karl Marx 1818-1883)는 종교를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실재의 기초 위에서 고찰한다.
그의 무신론적 입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천상에로의 환상적인 인간은 천상에서 초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반영만을 발견하였다. 인간은 자기자신의 나타남 뿐만 아니라 참된 자기 실재를 찿으며 찿아야 하는 것이다. 종교가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종교를 만드는 것이다. 종교는 바로 인간의 자기에 대한 자의식과 감정인 것이다.
다시말해 종교는 세계와 거짓 사회의 산물인 것이다.
종교는 인간 본질의 환상적 실현이며 종교 안에서 인간 본질은 어떤 참된 실재를 지니지 못한다.
인간은 인간의 세계이며, 국가요, 사회이다. 이런 국가 또는 사회가 종교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종교의 비참은 한편으로는 참된 비참의 표현이며 다른 편으로는 참된 비참에 대한 항거이다.
종교는 불행으로 눌린 피조물의 탄식며, 정신없는 시대의 정신인 것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지난 세기말 니이체 (F.W Nietzsche 1844-1900)는 마침내 ’신의 죽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신의 부재를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니이체에 의하면 일체의 사유는 우리 생활력을 증진 시키는 상징과 신화를 자기를 위해 형성한다는 목적만을 갖고 있다. 그리고 신 존재의 신념은 가장 해로우며, 인간 생명력에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비존재는 인간 생명의 요청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만일 초월적이고 영적인 신이 존재한다면 이 물질적 세계와 생물학적 생명은 그 실재로서의 물질적 가치를 상실하게 되며 더우기 그런 것은 악으로 간주될 것이다.그러므로 신 신앙은 자연의 가치 부정을 말하며 생명의 적인 것이다. 신은 인자하고 약자를 도우며 도덕율에 의해 특정의 인간만의 강력하고 유효한 이익을 방해하며 약자에 대한 자비를, 적에 대해서는 사랑을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신은 강자를 제어하려는 약자의 발명이며, 건전한 생의 적인 것이다. 만일 신이 존재하고 그 섭리에 의해 모든 것을 지배한다면 사람이 할일이란 아무것도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신앙은 우리 인간이 갖는 일체의 강한 영웅적인 전투적 노력을 방해하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절대적 독립성에 대립한다.
1.1.4 현대철학과 신의 문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서 인간의 세계는 점점 더 자율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세계는 이제 어떤 작업가설에도 의존함 없이 자기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나가려 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철학 역시 신의 문제에 개입하기를 꺼리고 있다. 심지어 오늘날 신의 문제를 들고 나선다는 것이 무의미한 짓이요, 시대착오라는 비난을 벗어날 길 없어 보인다.
사르트르(J.P Sartre 1905-1980)의 무신론을 요약하면, 자유를 기초로 하고 있다. 자유가 Cogito의 존재를 선행하며 그 존재에 기초를 마련해준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신적이며, 인간존재는 신의 거부로서의 본연의 자유에 성립한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나는 내가 자유롭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신론적 성격을 두고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실존주의란 일관된 무신론적 입장에서 모든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한 노력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입장은 결코 인간을 절망에로 이끌어 가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무신앙의 태도를 그리스도교들처럼 절망이라고 부른다면 이런 입장은 근원적 절망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를 노력한다는 의미로 무신론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신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것을 선언한다. 이것이 우리의 관점이다. 우리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의 존재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기자신을 재발견하며, 또 신의 존재의 유효한 증명이 있을 지라도 아무 것도 인간을 인간자신에서 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 시켜야한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실존주의는 낙관론이며 행동의 교의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자기자신들의 절망과 우리들의 절망을 혼동하여 우리들을 절망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기만에 의한 것이다”.





하이덱거 (Heidegger) 역시 칸트적 흐름 속에서 신을 긍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문제는 철학적 문제가 아니고 종교적경험의 대상으로 보고, 철학에 있어서 신문제에 관해 중립적 내지는 무관심적 태도를 취한다.
그의 철학사유는 주어진 한계, 즉 현상안에 국한 되어 존재하는 것의 원인 혹은 존재진리의 원인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죤 듀이 (J. Dewey 1859-1952)는 종교란 자연적 역경에 있어서의 무능한 원신인들의 공포서 기인한다는 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종교란 인간의 이상적 원망(願望)투사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투사는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초자연적 차원에 존재론적 실재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필요에서 있게 된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무능 혹은 무지, 물리적 결핍 또는 무서움에서 존재하게 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신이란 말은 한편 특정의 실재자를 의미하는 데만 사용된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 그것이 원망(願望)과 행동으로 우리를 촉구해가는 모든 이상적 목적의 개념을 의미할 뿐이다.
듀이는 초월적 인격적 존재로서의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은 재래종교들이 생각하는 바와같이 존재론적 실체가 아니다. 신은 여러가지 양태의이상적 가치의 통일을 나타낸다. 결국 존 듀이에게도 신은 인간 사유의 산물인 것이다. 인간 본성 안에는 願望의 대상을 종래의 문화 안에서 우월했던 신앙과 결부시켜 마치 벌써 존재하고 있어 실재자로 변화시키는 성향이 있다. 신관념은 이상적 특성의 실재라로의 인격화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의 문제는 현대철학 상황 속에서 그 디딜 땅을 잃고 만 인상을 주고있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신의 부재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인간의 세게에서는 신을 발견해 낼수 없다는 것이다. 검증가능한 것만을 다루고자 하는 이러한 현대상황을 비유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두 사람의 탐험가가 원시림 속에 있는 빈터에 도착하였다. 거기에는 각양각색의 꽃이 만발해 있었고, 또 많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들 중 한사람이 말하기를, 어떤 정원사가 이 빈터를 돌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정원사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리하여 그들은 천막을 치고 망을 보았다. 그러나 정원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정원사는 보이지 않는지도 모른다”라고 첫번째 사람이 말했다. 이제 그들은 거기에 철망을 두루고 전류를 흐르게 한 후 사냥개를 앞세우고 순찰을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비명소리도, 개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가시철망이 움직이는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자 첫번째 사람은,“그러나 정원사는 있다. 보여질 수도 없고, 느껴질수도 없으며, 또한 감전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냄새도 없고, 소리를 내지도 않으나 이 정원을 돌보기 위해서 남몰래 여기에 온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두번째 사람이 외쳤다. “도대체 네가 주장하는 것 중에서 무엇이 남아 있는가? 네가 말하는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으며 영구히 확인될 수 없는 그정원사와 아무도 없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오늘의 사조를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1.5 현대 무신론적 사고속에서 신의 문제에로의 접근
오늘을 살고 있는 인간은 어떤 양식으로든지 검증할 수 없고, 확증할 수 없는 그러한 일에는 자기자신을 개입시키려하지 않는다. 결국 무의미한 것으로 끝나버릴 그런 문제를 두고서 괜스레 시간과 노력을 소비한다는 것은 비경제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기술과 기계문명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보다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살 수있고 또 편리하게 살 수 있을까’하는 데 골몰한 나머지, 의미의 문제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오늘날 기술과 기계문명이 발달한 나라일 수록 사람들은 다시 의미의 문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왜? 그리고 무엇때문에 살아가는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만일 언젠가 영구히 무로 변해버린다면 결국,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의 구별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불의를 거슬러 정의로운 투쟁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우리는 이세상에서 체험하건대, 어떤 사람은 잘난 것없이 다섯 탈렌트를 받고 태어나고, 또 삶을 살아간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못난 것도 없이 꼭 한탈렌트만을 받고 태어난다. 지지리 못사는 나라에, 별볼일 없는 집안에, 가진 재주도 없고, 그저 건강하나만을 재산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잘한게 없는데 영웅대접을 받으며 삶을 마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착하게만 살았고, 억울할 정도로 희생적으로 살았는데도 아무도 모르는 개죽음을 당한 사람도 있다.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죽음으로 모든게 끝장이라면, 도대체 우리들의 삶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그러나 사실상 인간은 누구나 ’의미‘를 전재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전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어서, 만일 이 전제가 사라져 버린다면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사라져 버리고 만다. 실제로 ‘의미’의 문제를 전제로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고, 또 삶을 설계하고 보다 값진 삶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끝나버릴 수 없으며, 또한 헛된 것으로 끝나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강력한 ‘의미요청’은 우리 인간을 지탱할 수 있는 마지막 토대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신이 문제를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절대자를 앞세워 살고있다. 어떤 사람은 학문을, 어떤 사람은 기업을, 정치이념을, 운동을 자신의 생활의 절대자로 삼고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 행가과 행동으로 집약되는 삶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절대자가 필요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절대자가 기한부라는데 문제가 된다. 정치가가 죽는 순간까지 정치인일 수 없고, 축구선수가 죽는 순간까지 축구선수일 수 없다. 여기서 실망에 부딪치게된다. 따라서 무신론자들 역시 절대자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종교인들이 믿어 온 신이 절대자가 아니고, 그 대신 유물론적 사회주의는 인민의 물질생활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실증론적 사회주의는 인류자체를, 국수주의자들은 국가나 민족자체를, 황금만능주의자들은 돈을, 쾌락주의자들은 쾌락을 하느님의 대치물로 삼고 있는 셈이다. 이런점에서 유
신론과 무신론이 서로 다른 입장이면서도 인류의 진정한 행복과 정의 구현을 주장하는 태도가 선의적이고 진실이라면 어떤 대화의 실마리를 찿을 수도 있다.
또 현대세계가 보이고 있는 세가지 입장:
유일신론, 다신론, 무신론안에 신문제의 접근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
무신론은 겉으로만 신이라는 주제를 끝장낸 것처럼 보인다. 실상은 인간이 신에 대한 물음에 임하는 한가지 형태에 불과하다. 오히려 적극적이고 정열적인 표현일 수 있다. 무신론의 가장 효능적인 형태인 막스주의는 모든 존재를 물질로 선언함으로써 현존재 안에서의 존재의 단일성을 매우 엄격한 형식으로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존재 자체인 하나로서의 종래의 신개념과 하나로서의 물질은 차이가 있지만 동시에 절대성을 분명케하는 속성을 갗주어 다시금 신관념을 연상케한다. 다신론은 특히 신화에서부터 시작해서 전개되는 신의 문제에 대해 임하는 표현인데,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유일신으로 접근한다. 가령 그리이스 제신들은 인간이 현상적으로 체험한 신적 표현의 다양성이었으며 결국 제우쓰 신을 정점으로 수렴하고 있음을 본다. 숭배와 희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여러 신들은 결코 절대자 그 자신은 아니었다. 여기서 이런 뭇 권세들의 이면에 마침내는 어디엔가 하나인 존재가 있다는 것이, 즉 존재라는 것은 하나이거나 아니면 어쨌든 하나의 역원리의 그지없는 대립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유일신론이건, 다신론이건, 무신론이건 모두 궁극적으로는 절대자의 단일성과 유일성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가지 이론은 인류가 체험한 두가지 거점이 있다.
첫째는 자신을 끊임없이 초월하여 자신과는 전혀 다른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가리키고 있는 자신의 실존에 대한 체험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체험은 인간실존과 마찬가지로 여러층에서 다양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실제로 인간의 힘에 한계에 응급수단으로 두었다가 우리 자신이 한계에 다다르면 불러대는 구멍메꾸기의 하느님은 치워버려야 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을 우리 실존의 곤궁과 실패 안에서 찿을 것이 아니라 지상현실과 삶의 현실의 충만 가운데서 찿아야 한다는 말이다. 신을 는 인간적 노력의 역사가 둘다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 실존의 궁핍도 그렇지만 인간 실존의 충만도 신을 지시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모든 갈구를 채워주지 못한다는 체험만이 신의 체험에로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충만함에 있어서도, 기쁨에서도 마찬가지로 신 체험을 가능케한다는 점이다. 결국 인간은 인간의 삶 속에서 얼마든지 신체험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4:우주론적 증명방법,5:목적론적 증명방법)
1.운동에 의한 방법-부동의 원동자 – 신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스스로 운동할 수 없고 다른 어떤것에 의해 움직이 고 있다. 즉 운동에는 움직이게 하는 원인이 있다. 이 원인을 추구해 보면 최종적으로 다른것에서부터 원인받지 않는 최초의 부동의 원동자가 있다. 그 부동의 원동자가 신이다.
2.능동인에 의한 방법
이 방법은 엄격한 의미에선 인과율의 법칙으로서 존재하는것은아무것도 스스 로 원인이 될수 없고 그것을 규정하는 원인이 있는것인데 이러한 원인을 거 슬러 올라가면 맨 마지막의 원인(능동인)이 있는데 이 원인이 신인 것이다. 이 방법은 존재이유에 대한 충족 이유 원리에 기초한다.
3.우연성에 의한 방법
모든 존재자는 존재하지 않을수도있었던 것들이다.필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이러한 가능적인 존재(가능유,우연유)를 현실적인 존재(필연유)로 변화 시켜 주는 스스로 필연적이 존재자가 있어야하는데 이 존재가 신이다.
이 방법은 후대 철학자들이 가장 완벽한 증명방법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4.완전성의 단계에 의한 방법
사물은 나름대로 온전성의 단계를 가지고 있으며 더 완전하고 덜 완전한 모 든 존재의 배후에는 최고의 완전한 한 존재가 있는데 그 존재가 신이고 그 최고로 완전한 자는 모든 존재의 근거이기도 하다.
5.세계질서에 의한 증명방법-목적론적 증명방법
마치 화살이 궁수에 의해 목표로 향해지는것과 같이 세계에는 질서가 있고 목 표를 달성 하려는 노력이 있다. 사물이 그에 의해 목적에로 질서지어주는 지 성적이고 인식능력이 있는 존재가 있는것이며 그 존재가 곧 신이다.


근대철학과 하느님 논증에 대한 비판
경향 – 인간은 스스로 검토하기 이전에는어떤권위난이론도 받아들이지 않으려함
따라서 인간은 이제 모든 전통적인 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함

1. 칸트 – 순수이성비판에서 전통적인 하느님의 존재 논증 비판
그는 안셀무스의 논증을 비판하면서
아무리 온전한 최고의 개념이라할지라도 개념은 어디까지나 개념에 지나지 않 으며 존재와는 별개라는 것. 따라서 아무리 완전한 개념일지라도 거기서 실제 로 있는 존재를 이끌어 낼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존재 에 대한 존재론적 논증은 그 효력을 상실한다고 봄

그는 우주론적 논증도 비판
그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경험의 세계에서난 통용할 수 있는 것이지 경험의 세계를 벗어나서는 아무런의미를 지니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와같이 인간은 신 의 존재를 논증할 수 없다고 주장

2.포이에르바하
신이란 결국 인간의 자기투사에 불과하다고 주장.

1.1.3 근대철학과 하느님 논증에 대한 비판
근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은 스스로 검토하기 이전에는 어떤 권위나 이론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이제 모든 전통적인 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칸트(Kant 1724-1804)는 그이 「순수이성비판」에서 전통적인 하느님의 존재 논증을 비판한다.
우선 <존재론적 논증>에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최고의 존재라는 개념부터 존재를 이끌어 내는 존재론적 논증은 ‘가장 완전한 개념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가장완전한 개념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에는 오류가 개입되어 있다고 보았다.
아무리 완전하 최고의 개념일지라도, 개념은 어디까지나 개념에 지나지 않으며, 존재와는 별개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완전한 개념일지라도 거기서 실제로 있는 존재를 이끌어 낼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논증>은 그 효력을 상실한다고 보았다.
칸트는 이어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논증>도 비판한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경험의 세계에서나 통용할 수 있는 것이지, 경험의 세계를 벗어나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와같이 인간은 신의 존재를 논증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칸트 이후 포이에르바하(Feuerbach 1804-1872)는 신이란 결국 인간의 자기투사(自己投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론이 나오기까지에는 테카르트부터 준비작업이 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자신의 철학의 깃점으로 삼았다. 여기서존재가 사유에서 출발한다는 논리가 따라 나오게 된다. 결국 신의 존재도 인간의 사유, 생각에서 생겨나게 되었다는 주장을 하게된다. 물론 데카르트는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 이후의 계몽주의자들, 볼테르, 룻쏘에서도 그리스도교가 비판되고 있긴 하지만 하느님의 존재가 부정되지는 않았다. 본격적인 무신론은 변증법론자였던 헤겔의 두부류의 제자들 가운데 그 좌파였던 포이에르바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헤겔안에도 무신론적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종교와 종교적 진리의 속성을 순수 개념설과 같은 철학과 비교하여 보다 낮은 인간의 표상이나 감정에 귀속시킨 점이라든가, 자연과 역사의 양태에서 신의 내재가 이루어진 다는 것이 그렇다. 하느님이 세상에 있는 것,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존재요, 생명이고 진리인 까닭에 하느님은 자연과 역사의 양태안에 존재하고, 나타남에 자신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없이 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닌 것이다.
결국 형이상학적 신은
나타남 밖에는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은 또 시간적일 수 밖에 없다.
이처럼 헤겔에서 신은 범신론적 경향을 띠고 나타난다. 이미 젊은 시절에 그는 “신과 사람은 다만 하나의 사물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적극적인 무신론자 포이에르바하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자신을 자기 밖에로 정립케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기와는 독립된 어떤 존재로 간주한다. 즉 신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나서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경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의식은 인간의 자기 의식이며, 신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자기 인식이다’라고 주장한다. 결국 신은 인간의 자기투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Homo homini Deus est (사람은 사람에게 신이다).
이러한 포이에르바하의 이론은 그 이후의 무신론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무신론이 관념적이고 심리적인 입장이었다고 한다면, 카알 막스(Karl Marx 1818-1883)는 종교를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실재의 기초 위에서 고찰한다.
그의 무신론적 입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천상에로의 환상적인 인간은 천상에서 초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반영만을 발견하였다. 인간은 자기자신의 나타남 뿐만 아니라 참된 자기 실재를 찿으며 찿아야 하는 것이다. 종교가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종교를 만드는 것이다. 종교는 바로 인간의 자기에 대한 자의식과 감정인 것이다.
다시말해 종교는 세계와 거짓 사회의 산물인 것이다.
종교는 인간 본질의 환상적 실현이며 종교 안에서 인간 본질은 어떤 참된 실재를 지니지 못한다.
인간은 인간의 세계이며, 국가요, 사회이다. 이런 국가 또는 사회가 종교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종교의 비참은 한편으로는 참된 비참의 표현이며 다른 편으로는 참된 비참에 대한 항거이다.
종교는 불행으로 눌린 피조물의 탄식며, 정신없는 시대의 정신인 것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지난 세기말 니이체 (F.W Nietzsche 1844-1900)는 마침내 ’신의 죽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신의 부재를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니이체에 의하면 일체의 사유는 우리 생활력을 증진 시키는 상징과 신화를 자기를 위해 형성한다는 목적만을 갖고 있다. 그리고 신 존재의 신념은 가장 해로우며, 인간 생명력에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비존재는 인간 생명의 요청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만일 초월적이고 영적인 신이 존재한다면 이 물질적 세계와 생물학적 생명은 그 실재로서의 물질적 가치를 상실하게 되며 더우기 그런 것은 악으로 간주될 것이다.그러므로 신 신앙은 자연의 가치 부정을 말하며 생명의 적인 것이다. 신은 인자하고 약자를 도우며 도덕율에 의해 특정의 인간만의 강력하고 유효한 이익을 방해하며 약자에 대한 자비를, 적에 대해서는 사랑을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신은 강자를 제어하려는 약자의 발명이며, 건전한 생의 적인 것이다. 만일 신이 존재하고 그 섭리에 의해 모든 것을 지배한다면 사람이 할일이란 아무것도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신앙은 우리 인간이 갖는 일체의 강한 영웅적인 전투적 노력을 방해하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절대적 독립성에 대립한다.
1.1.4 현대철학과 신의 문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서 인간의 세계는 점점 더 자율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세계는 이제 어떤 작업가설에도 의존함 없이 자기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나가려 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철학 역시 신의 문제에 개입하기를 꺼리고 있다. 심지어 오늘날 신의 문제를 들고 나선다는 것이 무의미한 짓이요, 시대착오라는 비난을 벗어날 길 없어 보인다.
사르트르(J.P Sartre 1905-1980)의 무신론을 요약하면, 자유를 기초로 하고 있다. 자유가 Cogito의 존재를 선행하며 그 존재에 기초를 마련해준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신적이며, 인간존재는 신의 거부로서의 본연의 자유에 성립한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나는 내가 자유롭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신론적 성격을 두고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실존주의란 일관된 무신론적 입장에서 모든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한 노력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입장은 결코 인간을 절망에로 이끌어 가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무신앙의 태도를 그리스도교들처럼 절망이라고 부른다면 이런 입장은 근원적 절망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를 노력한다는 의미로 무신론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신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것을 선언한다. 이것이 우리의 관점이다. 우리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의 존재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기자신을 재발견하며, 또 신의 존재의 유효한 증명이 있을 지라도 아무 것도 인간을 인간자신에서 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 시켜야한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실존주의는 낙관론이며 행동의 교의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자기자신들의 절망과 우리들의 절망을 혼동하여 우리들을 절망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기만에 의한 것이다”.





하이덱거 (Heidegger) 역시 칸트적 흐름 속에서 신을 긍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문제는 철학적 문제가 아니고 종교적경험의 대상으로 보고, 철학에 있어서 신문제에 관해 중립적 내지는 무관심적 태도를 취한다.
그의 철학사유는 주어진 한계, 즉 현상안에 국한 되어 존재하는 것의 원인 혹은 존재진리의 원인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죤 듀이 (J. Dewey 1859-1952)는 종교란 자연적 역경에 있어서의 무능한 원신인들의 공포서 기인한다는 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종교란 인간의 이상적 원망(願望)투사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투사는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초자연적 차원에 존재론적 실재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필요에서 있게 된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무능 혹은 무지, 물리적 결핍 또는 무서움에서 존재하게 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신이란 말은 한편 특정의 실재자를 의미하는 데만 사용된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 그것이 원망(願望)과 행동으로 우리를 촉구해가는 모든 이상적 목적의 개념을 의미할 뿐이다.
듀이는 초월적 인격적 존재로서의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은 재래종교들이 생각하는 바와같이 존재론적 실체가 아니다. 신은 여러가지 양태의이상적 가치의 통일을 나타낸다. 결국 존 듀이에게도 신은 인간 사유의 산물인 것이다. 인간 본성 안에는 願望의 대상을 종래의 문화 안에서 우월했던 신앙과 결부시켜 마치 벌써 존재하고 있어 실재자로 변화시키는 성향이 있다. 신관념은 이상적 특성의 실재라로의 인격화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의 문제는 현대철학 상황 속에서 그 디딜 땅을 잃고 만 인상을 주고있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신의 부재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인간의 세게에서는 신을 발견해 낼수 없다는 것이다. 검증가능한 것만을 다루고자 하는 이러한 현대상황을 비유한 이야기가 있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ata2020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존재 증명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존재 증명
    (1-4:우주론적 증명방법,5:목적론적 증명방법)
    1.운동에 의한 방법-부동의 원동자 – 신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스스로 운동할 수 없고 다른 어떤것에 의해 움직이 고 있다. 즉 운동에는 움직이게 하는 원인이 있다. 이 원인을 추구해 보면 최종적으로 다른것에서부터 원인받지 않는 최초의 부동의 원동자가 있다. 그 부동의 원동자가 신이다.
    2.능동인에 의한 방법
    이 방법은 엄격한 의미에선 인과율의 법칙으로서 존재하는것은아무것도 스스 로 원인이 될수 없고 그것을 규정하는 원인이 있는것인데 이러한 원인을 거 슬러 올라가면 맨 마지막의 원인(능동인)이 있는데 이 원인이 신인 것이다. 이 방법은 존재이유에 대한 충족 이유 원리에 기초한다.
    3.우연성에 의한 방법
    모든 존재자는 존재하지 않을수도있었던 것들이다.필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이러한 가능적인 존재(가능유,우연유)를 현실적인 존재(필연유)로 변화 시켜 주는 스스로 필연적이 존재자가 있어야하는데 이 존재가 신이다.
    이 방법은 후대 철학자들이 가장 완벽한 증명방법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4.완전성의 단계에 의한 방법
    사물은 나름대로 온전성의 단계를 가지고 있으며 더 완전하고 덜 완전한 모 든 존재의 배후에는 최고의 완전한 한 존재가 있는데 그 존재가 신이고 그 최고로 완전한 자는 모든 존재의 근거이기도 하다.
    5.세계질서에 의한 증명방법-목적론적 증명방법
    마치 화살이 궁수에 의해 목표로 향해지는것과 같이 세계에는 질서가 있고 목 표를 달성 하려는 노력이 있다. 사물이 그에 의해 목적에로 질서지어주는 지 성적이고 인식능력이 있는 존재가 있는것이며 그 존재가 곧 신이다.

    근대철학과 하느님 논증에 대한 비판
    경향 – 인간은 스스로 검토하기 이전에는어떤권위난이론도 받아들이지 않으려함
    따라서 인간은 이제 모든 전통적인 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함

    1. 칸트 – 순수이성비판에서 전통적인 하느님의 존재 논증 비판
    그는 안셀무스의 논증을 비판하면서
    아무리 온전한 최고의 개념이라할지라도 개념은 어디까지나 개념에 지나지 않 으며 존재와는 별개라는 것. 따라서 아무리 완전한 개념일지라도 거기서 실제 로 있는 존재를 이끌어 낼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존재 에 대한 존재론적 논증은 그 효력을 상실한다고 봄

    그는 우주론적 논증도 비판
    그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경험의 세계에서난 통용할 수 있는 것이지 경험의 세계를 벗어나서는 아무런의미를 지니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와같이 인간은 신 의 존재를 논증할 수 없다고 주장

    2.포이에르바하
    신이란 결국 인간의 자기투사에 불과하다고 주장.

    1.1.3 근대철학과 하느님 논증에 대한 비판
    근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은 스스로 검토하기 이전에는 어떤 권위나 이론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이제 모든 전통적인 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칸트(Kant 1724-1804)는 그이 「순수이성비판」에서 전통적인 하느님의 존재 논증을 비판한다.
    우선 <존재론적 논증>에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최고의 존재라는 개념부터 존재를 이끌어 내는 존재론적 논증은 ‘가장 완전한 개념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가장완전한 개념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에는 오류가 개입되어 있다고 보았다.
    아무리 완전하 최고의 개념일지라도, 개념은 어디까지나 개념에 지나지 않으며, 존재와는 별개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완전한 개념일지라도 거기서 실제로 있는 존재를 이끌어 낼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논증>은 그 효력을 상실한다고 보았다.
    칸트는 이어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논증>도 비판한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경험의 세계에서나 통용할 수 있는 것이지, 경험의 세계를 벗어나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와같이 인간은 신의 존재를 논증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칸트 이후 포이에르바하(Feuerbach 1804-1872)는 신이란 결국 인간의 자기투사(自己投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론이 나오기까지에는 테카르트부터 준비작업이 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자신의 철학의 깃점으로 삼았다. 여기서존재가 사유에서 출발한다는 논리가 따라 나오게 된다. 결국 신의 존재도 인간의 사유, 생각에서 생겨나게 되었다는 주장을 하게된다. 물론 데카르트는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 이후의 계몽주의자들, 볼테르, 룻쏘에서도 그리스도교가 비판되고 있긴 하지만 하느님의 존재가 부정되지는 않았다. 본격적인 무신론은 변증법론자였던 헤겔의 두부류의 제자들 가운데 그 좌파였던 포이에르바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헤겔안에도 무신론적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종교와 종교적 진리의 속성을 순수 개념설과 같은 철학과 비교하여 보다 낮은 인간의 표상이나 감정에 귀속시킨 점이라든가, 자연과 역사의 양태에서 신의 내재가 이루어진 다는 것이 그렇다. 하느님이 세상에 있는 것,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존재요, 생명이고 진리인 까닭에 하느님은 자연과 역사의 양태안에 존재하고, 나타남에 자신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없이 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닌 것이다.
    결국 형이상학적 신은
    나타남 밖에는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은 또 시간적일 수 밖에 없다.
    이처럼 헤겔에서 신은 범신론적 경향을 띠고 나타난다. 이미 젊은 시절에 그는 “신과 사람은 다만 하나의 사물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적극적인 무신론자 포이에르바하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자신을 자기 밖에로 정립케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기와는 독립된 어떤 존재로 간주한다. 즉 신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나서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경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의식은 인간의 자기 의식이며, 신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자기 인식이다’라고 주장한다. 결국 신은 인간의 자기투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Homo homini Deus est (사람은 사람에게 신이다).
    이러한 포이에르바하의 이론은 그 이후의 무신론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무신론이 관념적이고 심리적인 입장이었다고 한다면, 카알 막스(Karl Marx 1818-1883)는 종교를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실재의 기초 위에서 고찰한다.
    그의 무신론적 입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천상에로의 환상적인 인간은 천상에서 초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반영만을 발견하였다. 인간은 자기자신의 나타남 뿐만 아니라 참된 자기 실재를 찿으며 찿아야 하는 것이다. 종교가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종교를 만드는 것이다. 종교는 바로 인간의 자기에 대한 자의식과 감정인 것이다.
    다시말해 종교는 세계와 거짓 사회의 산물인 것이다.
    종교는 인간 본질의 환상적 실현이며 종교 안에서 인간 본질은 어떤 참된 실재를 지니지 못한다.
    인간은 인간의 세계이며, 국가요, 사회이다. 이런 국가 또는 사회가 종교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종교의 비참은 한편으로는 참된 비참의 표현이며 다른 편으로는 참된 비참에 대한 항거이다.
    종교는 불행으로 눌린 피조물의 탄식며, 정신없는 시대의 정신인 것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지난 세기말 니이체 (F.W Nietzsche 1844-1900)는 마침내 ’신의 죽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신의 부재를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니이체에 의하면 일체의 사유는 우리 생활력을 증진 시키는 상징과 신화를 자기를 위해 형성한다는 목적만을 갖고 있다. 그리고 신 존재의 신념은 가장 해로우며, 인간 생명력에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비존재는 인간 생명의 요청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만일 초월적이고 영적인 신이 존재한다면 이 물질적 세계와 생물학적 생명은 그 실재로서의 물질적 가치를 상실하게 되며 더우기 그런 것은 악으로 간주될 것이다.그러므로 신 신앙은 자연의 가치 부정을 말하며 생명의 적인 것이다. 신은 인자하고 약자를 도우며 도덕율에 의해 특정의 인간만의 강력하고 유효한 이익을 방해하며 약자에 대한 자비를, 적에 대해서는 사랑을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신은 강자를 제어하려는 약자의 발명이며, 건전한 생의 적인 것이다. 만일 신이 존재하고 그 섭리에 의해 모든 것을 지배한다면 사람이 할일이란 아무것도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신앙은 우리 인간이 갖는 일체의 강한 영웅적인 전투적 노력을 방해하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절대적 독립성에 대립한다.
    1.1.4 현대철학과 신의 문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서 인간의 세계는 점점 더 자율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세계는 이제 어떤 작업가설에도 의존함 없이 자기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나가려 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철학 역시 신의 문제에 개입하기를 꺼리고 있다. 심지어 오늘날 신의 문제를 들고 나선다는 것이 무의미한 짓이요, 시대착오라는 비난을 벗어날 길 없어 보인다.
    사르트르(J.P Sartre 1905-1980)의 무신론을 요약하면, 자유를 기초로 하고 있다. 자유가 Cogito의 존재를 선행하며 그 존재에 기초를 마련해준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신적이며, 인간존재는 신의 거부로서의 본연의 자유에 성립한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나는 내가 자유롭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신론적 성격을 두고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실존주의란 일관된 무신론적 입장에서 모든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한 노력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입장은 결코 인간을 절망에로 이끌어 가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무신앙의 태도를 그리스도교들처럼 절망이라고 부른다면 이런 입장은 근원적 절망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를 노력한다는 의미로 무신론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신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것을 선언한다. 이것이 우리의 관점이다. 우리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의 존재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기자신을 재발견하며, 또 신의 존재의 유효한 증명이 있을 지라도 아무 것도 인간을 인간자신에서 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 시켜야한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실존주의는 낙관론이며 행동의 교의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자기자신들의 절망과 우리들의 절망을 혼동하여 우리들을 절망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기만에 의한 것이다”.

    하이덱거 (Heidegger) 역시 칸트적 흐름 속에서 신을 긍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문제는 철학적 문제가 아니고 종교적경험의 대상으로 보고, 철학에 있어서 신문제에 관해 중립적 내지는 무관심적 태도를 취한다.
    그의 철학사유는 주어진 한계, 즉 현상안에 국한 되어 존재하는 것의 원인 혹은 존재진리의 원인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죤 듀이 (J. Dewey 1859-1952)는 종교란 자연적 역경에 있어서의 무능한 원신인들의 공포서 기인한다는 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종교란 인간의 이상적 원망(願望)투사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투사는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초자연적 차원에 존재론적 실재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필요에서 있게 된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무능 혹은 무지, 물리적 결핍 또는 무서움에서 존재하게 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신이란 말은 한편 특정의 실재자를 의미하는 데만 사용된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 그것이 원망(願望)과 행동으로 우리를 촉구해가는 모든 이상적 목적의 개념을 의미할 뿐이다.
    듀이는 초월적 인격적 존재로서의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은 재래종교들이 생각하는 바와같이 존재론적 실체가 아니다. 신은 여러가지 양태의이상적 가치의 통일을 나타낸다. 결국 존 듀이에게도 신은 인간 사유의 산물인 것이다. 인간 본성 안에는 願望의 대상을 종래의 문화 안에서 우월했던 신앙과 결부시켜 마치 벌써 존재하고 있어 실재자로 변화시키는 성향이 있다. 신관념은 이상적 특성의 실재라로의 인격화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의 문제는 현대철학 상황 속에서 그 디딜 땅을 잃고 만 인상을 주고있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신의 부재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인간의 세게에서는 신을 발견해 낼수 없다는 것이다. 검증가능한 것만을 다루고자 하는 이러한 현대상황을 비유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두 사람의 탐험가가 원시림 속에 있는 빈터에 도착하였다. 거기에는 각양각색의 꽃이 만발해 있었고, 또 많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들 중 한사람이 말하기를, 어떤 정원사가 이 빈터를 돌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정원사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리하여 그들은 천막을 치고 망을 보았다. 그러나 정원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정원사는 보이지 않는지도 모른다”라고 첫번째 사람이 말했다. 이제 그들은 거기에 철망을 두루고 전류를 흐르게 한 후 사냥개를 앞세우고 순찰을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비명소리도, 개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가시철망이 움직이는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자 첫번째 사람은,“그러나 정원사는 있다. 보여질 수도 없고, 느껴질수도 없으며, 또한 감전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냄새도 없고, 소리를 내지도 않으나 이 정원을 돌보기 위해서 남몰래 여기에 온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두번째 사람이 외쳤다. “도대체 네가 주장하는 것 중에서 무엇이 남아 있는가? 네가 말하는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으며 영구히 확인될 수 없는 그정원사와 아무도 없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오늘의 사조를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1.5 현대 무신론적 사고속에서 신의 문제에로의 접근
    오늘을 살고 있는 인간은 어떤 양식으로든지 검증할 수 없고, 확증할 수 없는 그러한 일에는 자기자신을 개입시키려하지 않는다. 결국 무의미한 것으로 끝나버릴 그런 문제를 두고서 괜스레 시간과 노력을 소비한다는 것은 비경제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기술과 기계문명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보다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살 수있고 또 편리하게 살 수 있을까’하는 데 골몰한 나머지, 의미의 문제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오늘날 기술과 기계문명이 발달한 나라일 수록 사람들은 다시 의미의 문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왜? 그리고 무엇때문에 살아가는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만일 언젠가 영구히 무로 변해버린다면 결국,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의 구별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불의를 거슬러 정의로운 투쟁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우리는 이세상에서 체험하건대, 어떤 사람은 잘난 것없이 다섯 탈렌트를 받고 태어나고, 또 삶을 살아간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못난 것도 없이 꼭 한탈렌트만을 받고 태어난다. 지지리 못사는 나라에, 별볼일 없는 집안에, 가진 재주도 없고, 그저 건강하나만을 재산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잘한게 없는데 영웅대접을 받으며 삶을 마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착하게만 살았고, 억울할 정도로 희생적으로 살았는데도 아무도 모르는 개죽음을 당한 사람도 있다.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죽음으로 모든게 끝장이라면, 도대체 우리들의 삶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그러나 사실상 인간은 누구나 ’의미‘를 전재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전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어서, 만일 이 전제가 사라져 버린다면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사라져 버리고 만다. 실제로 ‘의미’의 문제를 전제로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고, 또 삶을 설계하고 보다 값진 삶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끝나버릴 수 없으며, 또한 헛된 것으로 끝나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강력한 ‘의미요청’은 우리 인간을 지탱할 수 있는 마지막 토대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신이 문제를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절대자를 앞세워 살고있다. 어떤 사람은 학문을, 어떤 사람은 기업을, 정치이념을, 운동을 자신의 생활의 절대자로 삼고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 행가과 행동으로 집약되는 삶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절대자가 필요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절대자가 기한부라는데 문제가 된다. 정치가가 죽는 순간까지 정치인일 수 없고, 축구선수가 죽는 순간까지 축구선수일 수 없다. 여기서 실망에 부딪치게된다. 따라서 무신론자들 역시 절대자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종교인들이 믿어 온 신이 절대자가 아니고, 그 대신 유물론적 사회주의는 인민의 물질생활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실증론적 사회주의는 인류자체를, 국수주의자들은 국가나 민족자체를, 황금만능주의자들은 돈을, 쾌락주의자들은 쾌락을 하느님의 대치물로 삼고 있는 셈이다. 이런점에서 유
    신론과 무신론이 서로 다른 입장이면서도 인류의 진정한 행복과 정의 구현을 주장하는 태도가 선의적이고 진실이라면 어떤 대화의 실마리를 찿을 수도 있다.
    또 현대세계가 보이고 있는 세가지 입장:
    유일신론, 다신론, 무신론안에 신문제의 접근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
    무신론은 겉으로만 신이라는 주제를 끝장낸 것처럼 보인다. 실상은 인간이 신에 대한 물음에 임하는 한가지 형태에 불과하다. 오히려 적극적이고 정열적인 표현일 수 있다. 무신론의 가장 효능적인 형태인 막스주의는 모든 존재를 물질로 선언함으로써 현존재 안에서의 존재의 단일성을 매우 엄격한 형식으로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존재 자체인 하나로서의 종래의 신개념과 하나로서의 물질은 차이가 있지만 동시에 절대성을 분명케하는 속성을 갗주어 다시금 신관념을 연상케한다. 다신론은 특히 신화에서부터 시작해서 전개되는 신의 문제에 대해 임하는 표현인데,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유일신으로 접근한다. 가령 그리이스 제신들은 인간이 현상적으로 체험한 신적 표현의 다양성이었으며 결국 제우쓰 신을 정점으로 수렴하고 있음을 본다. 숭배와 희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여러 신들은 결코 절대자 그 자신은 아니었다. 여기서 이런 뭇 권세들의 이면에 마침내는 어디엔가 하나인 존재가 있다는 것이, 즉 존재라는 것은 하나이거나 아니면 어쨌든 하나의 역원리의 그지없는 대립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유일신론이건, 다신론이건, 무신론이건 모두 궁극적으로는 절대자의 단일성과 유일성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가지 이론은 인류가 체험한 두가지 거점이 있다.
    첫째는 자신을 끊임없이 초월하여 자신과는 전혀 다른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가리키고 있는 자신의 실존에 대한 체험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체험은 인간실존과 마찬가지로 여러층에서 다양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실제로 인간의 힘에 한계에 응급수단으로 두었다가 우리 자신이 한계에 다다르면 불러대는 구멍메꾸기의 하느님은 치워버려야 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을 우리 실존의 곤궁과 실패 안에서 찿을 것이 아니라 지상현실과 삶의 현실의 충만 가운데서 찿아야 한다는 말이다. 신을 는 인간적 노력의 역사가 둘다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 실존의 궁핍도 그렇지만 인간 실존의 충만도 신을 지시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모든 갈구를 채워주지 못한다는 체험만이 신의 체험에로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충만함에 있어서도, 기쁨에서도 마찬가지로 신 체험을 가능케한다는 점이다. 결국 인간은 인간의 삶 속에서 얼마든지 신체험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