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사순절에는 꼭 아침을 단식한다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먹고 싶지만 단식을 하면서 그 고통을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과 함께한 그 고통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봉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런다고 다른 사람들이 다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게 사람들을 대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니까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그런 마음을 접고서 대했으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와서 물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주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모범을 따라 엄격한 참회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낙타털옷을 입고 들꿀과 메뚜기를 먹고 살았던 세례자 요한을 생각해보면 그 제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일반적인 규정을 넘어서서 스스로에게 특별한 계율을 부여한 점에 있어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오해했을 것입니다. 군중들에게는 높은 완덕을 가르치시면서도 그분과 그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말씀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분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잔치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의 내적인 의미는 슬픔이지만 지금은 기쁨의 때입니다. 신랑의 친구들이 결혼 잔치에 초대받아 올 때 그들은 장례식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신랑은 이미 와 있으며 자기와 함께 기쁨을 나누도록 주위에 손님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러기에 단식이란 여기서 전혀 무의미한 것입니다. 지금은 기쁨과 환희의 때이기에 단식은 이 독특한 시간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곧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빼앗긴다는 말은 폭력에 의한 이별을 뜻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최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느 가정에서 함께 모여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 요한이가 꾸벅꾸벅 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딸 마리아가 아빠를 톡톡 건드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오빠 졸고 있어. 난 안 졸아!”


그러자 아빠가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네가 차라리 졸았으면 좋겠구나!”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나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나는 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그는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내 틀에 혹시 그를 가둬두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그도 그의 틀에 나를 가두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2.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고 있는 나는 요즘 어떻게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내가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 있으며, 재의 수요일 이후의 마음의 변화는 어떠한지 함께 나눠 봅시다.





이 글은 카테고리: 복음 나눔 5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