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 4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4주일




         19. 이정운 신부(다)/ 32                  20. 수원교구(다)/ 34


         21. 함세웅 신부(다)/ 35                  22. 강영구 신부(다)/ 36


         23. 강길웅 신부(다)/ 40                  24. 교구 주보(다)/ 42


         25. 허  근 신부(다)/ 43












19                     연중 제4주일   루가 4,21-30 (다)


주여 당신은 나의 믿음 나의 희망 나의 굳셈이시나이다.


       이정운 신부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억눌린 사람들을 놓아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30)




갈릴래아 호수(일명 티베리아 호수, 또는 겐네사렛 호수) 서남쪽으로 약 70리 떨어진 그곳엔 우리들이 강론에서, 아니면 이야기속에서만 나누던 마리아와 요셉의 본향이며 예수께서 성장하신 ‘나자렛’ 촌락이 있습니다(마태 2,23; 루가 1,26; 요한 1,45). 오늘날 이 마을에 가면 중세 유명한 미술가 미켈란젤로의 성화에서 마리아가 어깨너머로 흰 수염 난 요셉에게 아기예수를 넘겨주는 그런 화목한 성가족의 온정을 마음에 느끼게 됩니다. 고대 나자렛의 유일한 샘이요, 마리아가 조석으로 이 물을 길어다가 성가족의 밥을 지었다는 ‘마리아의 샘터’를 보면 소년 예수께서 성모님의 치마깃을 붙들고 따라다녔을 영상이 떠오르게 됩니다.




오늘날의 나자렛 거리는 옛날과는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그 거리를 오다가다 보면 옛날이나 다름없는, 양을 등에 업고 가는 사람들을 보게 되고, 소년 예수는 그들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녔을 생각도 나게 합니다.




당시 로마군사들에 의해서 대제국하에 속하게 된 이 거리는 로마에 반항하는 유대교 광신자들이 거리에서 그들의 교통을 어지럽게 할 때에 소년 예수도 그 길 위에 있었으리라는 생각도 들게합니다. 나자렛의 어린이들은 지금도 이 놀이를 하고, 그 광경을 볼 때마다 소년 예수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나타나게도 됩니다.




1914년에 세웠다는 성요셉 기념 성전에서 층계를 따라 내려가면 요셉의 목공소와 성가족의 곳간이 있을 것이라는 두 개의 토굴에서 전형적인 나자렛의 집안 살림을 연상하며 몇 개의 질항아리와 부엌과 침실을 겸하고 있는 채색된 돗자리와 뒤주, 그리고 몇 개의 밥그릇을 연상케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이 나자렛 거리의 목공의 생계를 보면 현재 인구 3만을 헤아리는 거리에 목수의 하루 품삯이 오백원 내지 천원꼴로서 7명의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애로를 말하는 그 생활을 미루어 보면서 당시 3, 4백의 주민이 살고 있던 그 마을의 목수 요셉의 생계를 짐작하면 오늘날보다 더 궁핍한 생활을 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께서 성전 헌금상자에 헌금하는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은 바로 당신의 가난을 이야기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이곳 성전 계단을 오르내리는 주민이며 순례객들은 두 무릎에 자학하는 신앙의 표를 드러내며,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하는 신앙의 고향(?) 나자렛에서는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는’ 신앙을 체험하게 한다고 성지 순례를 한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자렛에서 자란 청년 예수는 항상 어머니 마리아와 양부 요셉과 함께 안식일마다 다니시던 나자렛 회당에서, 공생활 중 여기저기 다니시다가 고향에 들르시면 이 나자렛 회당에서 성서를 낭독하여 주셨습니다(루가 4,16-30).




고향 사람들이 청년 예수의 말에 감탄하고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가 4,22; 마태13,54-57; 마르 ,1-6)하며 수군거렸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그들의 심사를 일깨워 구약시대의 예언자인 엘리야(1열왕 17,1; 18,1; 야고 5,17)와 엘리사(2열왕 5,14)시대를 예를 들어 그들의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두운 점을 책망하시며 구약시대로부터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을 이스라엘 백성에게뿐 아니라 만민에게 미치고 있음을 나타내시며, 도한 하느님의 참 듯을 알아듣지 못할 때에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보다 이방인들에게 미친다는 경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자렛 동남방으로 약 3km쯤 가며 이때에 청중이 예수님을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던 벼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벼랑으로 끌고 가 것은 그들의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두웠음을 볼 때 우리는 멀리서나마 그 벼랑을 연상하면서 그 벼랑 가까이 서서 나는 주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 사람인지를 반성해야겠습니다.




나는 신앙의 눈이 멀고 귀가 막힌 귀머거리가 아닌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기쁨과 환희,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외면하고 나자렛 회당으로부터 그분을 멀리 끌고가 사형에 처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신앙을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가?












20               연중 제4주일   루가 4,21-30 (다) 영원한 사랑.        


                                                   수원교구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되 끝끝내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원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란 하느님이 우리에게 심어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혹독한 형벌을 받으며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달게 받으신 최고의 사랑을 가르쳐주신 예수님을 보라. 그래서 죽기까지 사랑한다고 한다.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으로 통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영원한 사랑을 갈망한다. 남을 사랑하되 끝끝내 사랑하는 사람, 조국을 사랑하되 끝끝내 사랑하는 사람, 가정과 직업을 사랑하되 끝끝내 사랑하는 사람, 하느님을 사랑하되 끝끝내 사랑하는 사람, 목숨을 내걸고 사랑의 실천을 하는 이가 인생의 승리자라고 본다.




누구든지 한 평생을 바쳐서 끝끝내 사랑한다면 이보다 더 보람있는 삶이 어디 있겠느냐?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교자들을 볼 때 위대한 사랑의 승리자라고 하지않느냐? 오늘은 사랑하고 내일은 사랑치 않는 현대인의 요사스런 겉치레 사랑이 교회 안에도 스며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바빠서, 나는 갓 장가들어서, 나는 장사해야 먹고 살기 때문에, 나는 밭을 샀기 때문에, 나는 좀더 세상일에 몰두하다가…등등. 핑계 많은 현대인들이 교회를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끝끝내 사랑은커녕 목숨이 아까와 하루도 못 견딜 것이다.




참말로 사랑하는 이를 위한다면 세상에 아까울 것이 없다. 목숨까지 내던지며 사랑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희생없는 사랑은 거짓 사랑이다. 희생! 누구를 위한 희생이냐? 이 희생이 메말라갈 때 인간사회는 거칠어지고 지옥화하는 것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 사회에서 조그마한 희생이라도 달게 바치자! 하루하루 생활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의 희생을 실천할 수 있는가? 목숨과 견줄 만큼 희생을 한다면 안될 일이 없다.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다가 영원한 삶을 목표로 할 때 보람되고 값진 삶이 된다. 나의 지금의 삶이 영원한 삶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닫고 끝끝내 사랑하는 생활을 실천하는 이에게만 하느님은 사랑의 나라를 약속하신다. 사랑은 영원하도다.




21     연중 제4주일   루가 4,21-30 (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함세웅 신부




지난 주일의 복음(루가 1,1-4: 4,14-21)은 루가가 기록한 성경(루가 복음과 사도행전)가운데 제 1편의 서두로 시작해서 예수님 안에 이루어진 구약 예언서의 완성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오늘의 복음(루가 4,21-30)은, 그 구세주 예수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자연적인 반발 또는 무시당하는 과정을 그려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 저것으로 변명하지 않으시며, 또다시 구약의 예를 들어 하느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선민이다’ , ‘이스라엘 백성이다’, ‘유태인이다’하는 자연적 기원에 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고, ‘착한 뜻’과 ‘믿음’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유명한 격언이 된 말씀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라는 함축적인 표현으로 구원사와 인간사에 있어서의 공통점을 보여 주시기도 합니다.


 


루가가 기록한 성경의 특징은 고대 희랍의 서간체 형식을 취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당시 로마 제국의 고관이었던 테오필로에게 ‘기쁜 소식’을 그대로 알려 주어 그것이 사실이며 따라서 신앙을 가지고 구원의 길로 들어오라는 초청의 내용입니다.


 


똑같은 문체의 서두가 루가복음의 제 2편인 ‘사도 행전’에 기술되어있습니다. 테오필로는 그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공통적 견해입니다. 이러한 서두가 끝난 다음, 즉시 루가는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다리 역할의 요한 세자에 대하여


언급하며 예수의 탄생 내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중간 과정을 뛰어넘어 4장 후반이 우리가 묵상해야 할 내용입니다. 즉 ‘기쁜 소식’의 내용이 무엇이며 그 ‘기쁜 소식’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어떠한 모양으로 이루어졌고 이루어질 것인지를 말해 주려 합니다. ‘기쁜 소식’은 이미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께로부터 약속되었고(창세기 3,15), 예언자들에 의해서도 선포된 것입니다. (이사야 61, 1-12)


 


사실 창세기로부터 구약 47권의 모든 성경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 모든 역사적인 사건, 인물, 예언을 언급하고 있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구원사의 주인공인 ‘예수’ 즉 ‘메시아’를 그리기 위해서 열거된 것입니다. 그 구약의 기다림의 주인공이 이제는 실현된 주인공이라는 것을, 그 주인공은 이스라엘이라는 좁은 무대를 위해서 연기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관중, 즉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 은총과 사랑을 받는 기준은 이제는 더 이상 혈통적, 종족이 아니고 ‘신앙’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는 하느님이 사람으로 되신 분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탄생이, 인간의 생애가, 인간의 고통이, 삶의 과정이, 인간의 죽음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 주고 실증하기 위해서 ‘내가 걷고, 우리 모두가 걷는 이 모든 어려운 인생살이의 과정’을 거치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분명 하느님의 놀라우신 계획, 교육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즉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실제로 보는 것이 더 낫다’, 또는 ‘백 번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한 번 모범으로 실천해주는 것이 더 낫다’라는 이 진리를 일깨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 나는 왜 이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하느님, 나는 왜 가난해야 합니까? 하느님, 어찌할 수 없는 이 인간사의 부조리는 무엇입니까? 하느님, 왜 나는 무시와 천대를 당해야 합니까? 하느님, 사랑하는 우리들은 왜 서로 싸우고, 죽이고, 또 갈라지며 그리고 죽어야만 합니까?”하는 물음표가 달린 원성은 무한히 계속됩니다.


 


그것은 우리만의 원성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 사막과 광야에서 고통받았던 이스라엘, 바빌론으로 유배갔던 이스라엘,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의 원성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사랑하고 뽑았던 선민 이 었습니다.


 


그 원성에 하느님은 해답을 주겼습니다. 예수를 보냈습니다. 그 예수는 갓난아기로 탄생되어, 우리와 똑같은 어려운 생활을 하였고, 결국은 억울하게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매어 달린 예수! 그 예수는 우리의 모든 원성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고통을, 어려움을 그대로 수락하여 이겨낼 때, 그 예수는 부활의 예수로 우리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 과정을 이스라엘 백성은 미처 깨닫지 못했고, 신앙인인 나도 가끔은 잊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라’, ‘이웃을 사랑해라’, ‘기도를 잘 바쳐라’ 등등, 웃어른들의 올바른 가르침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그 웃어른들이 착한 사람이 아니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기도조차 바치지 않을 때, 자녀들은 오히려 비웃을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로써 신앙이 무엇인지를 제 3자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 신앙 때문에 어리석은 이들의 비웃음을 받는다 해도 그것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2   연중 제4주일-주의 봉헌 축일   루가 2,22-40 (다) 구세주를 알아보는 형안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4 주일이자 주의 봉헌 축일입니다. 오늘은 지난 성탄 대축일 이후 꼭 40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구약성서 레위기 12장 1-4절에는 출산한 산모가 지켜야 할 규정이 나옵니다. 그 규정에 의하면 사내아이를 낳은 산모는 출산 후 40일이 되는 날 정결례(淨潔禮)를 치러야 했습니다. 여인이 사내아이를 낳으면 40일 동안, 그리고 계집아이를 낳으면 80일 동안 성전 출입이 금지되었습니다. 아이를 낳아서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결 예식을 치르고, 몸이 깨끗해진 것을 증명하고 난 후에야 성전 출입이 허락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결 예식을 치르는 그 날, 맏아들은 하느님께 바쳐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12절은 이스라엘의 모든 맏아들과 가축의 첫배에서 난 새끼들은 하느님의 소유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어 나오는 날 야훼 하느님께서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들과 가축의 첫배에서 난 새끼들을 모조리 치셨지만, 이스라엘의 맏아들들과 가축들은 손대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정결례와 더불어 아기 예수의 봉헌식도 가졌습니다.


우리는 성탄 대축일 후 40일째가 되는 오늘 아기 예수의 봉헌을 기념하기 위하여 성당에서 1년 동안 사용할 초를 봉헌하였습니다. 초는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촛불이 켜져 있는 곳에 어둠은 물러가게 됩니다.


 


오늘 마리아의 품에 안겨서 하느님께 봉헌되신 아기 예수는, 이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고, 새로운 광명을 가져다 줄 구세주이자 빛입니다. 오늘 아기 예수의 봉헌식에 함께 참례하게 된 의로운 노인 시므온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시므온 노인의 노래대로 성전에 봉헌되신 아기 예수는 죄와 죽음으로 뒤덮인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입니다. 빛이신 주님이 계시는 곳에는 어둠이 없습니다. 주님 그분이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봉헌한 초는, 성전에 봉헌되신 아기 예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헌한 초처럼 예수께서는 당신의 삶 모두를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 초가 자신을 불태워 빛을 내듯이, 오늘 성전에서 봉헌되신 예수도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불태워 죄와 죽음 그리고 악마의 어두운 세력을 몰아내시고 인류에게 밝은 삶을 주셨습니다. 마리아의 품에 안겨 하느님께 봉헌되신 예수는 당신의 전 생애를 인간에 대한사랑으로 불태우시고 십자가위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치심으로써 봉헌(奉獻)된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러나 봉헌의 끝이었던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시어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한 자루의 촛불처럼 빛을 내시고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계시


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의 암흑 속에서 방황하던 인류가 사랑으로 불타던 예수를 보고 새 삶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빛이신 그분의 인도를 따라서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는 그분의 빛으로 구원의 길을 걷게 된 사람들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두 노인을 만납니다. 한 사람은 시므온이라는 노인이고, 또 다른 사람은 아셀 지파에 속하는안나라는 여자 예언자입니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나기까지, 그들의 삶은 참으로 파란 만장한 것이었습니다. 온갖 풍상(風霜)을 다 겪으면서도 구세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시므온은 죽음을 눈앞에 둔 나이에 이르기까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던 죄와 죽음의 세력을 보아야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길을 찾고 있음을 보아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과 권력에서, 어떤 사람은 명예와 찰나적인 향락에서 구원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나는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너는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여라……”라는 이사야서 49장 6절의 말씀을 믿고 있었고, 그 말씀이 성취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죽음을 눈앞에 둔 나이에 이르기까지 하늘을 향해 한점 부끄럼이 없는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아기 예수의 봉헌식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도, 또 형안(炯眼)으로 아기 예수가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힐 빛이요 구세주라는 사실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도 때묻지 않은 그 의 삶, 하느님께 봉헌된 삶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매일같이 젊은 부인들의 정결례가 있었고 수많은 아기들의 봉헌식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섞여 정결례와 봉헌식을 치르는 초라한 행색의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를 온 세상의 어둠을 밝힐 구원의 빛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수많은 예언자들이 있었지만 시므온 노인과 같은 축복을 받은 예언자는 없었습니다. 다른 예언자들은 구세주의 오심을 선포할 수는 있었지만, 정작 자신들이 선포한 구세주를 만나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수많은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그 구세주를 자신의 눈으로 보았고 품에 안아도 보았습니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시므온의 이 노래는, 우리의 노래여야 합니다. 우리도 어느 날엔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에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라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우리는 모두 이렇게 노래 부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빛 속에 살고 있고, 주님의 성찬에 참여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시므온 노인이 그 어떤 예언자들보다 축복받은 분이지만, 우리는 시므온 노인보다 더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한편 아셀 지파에 속하는 여자 예언자 안나도 아기 예수 봉헌식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는데, 안나 역시 남다른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안나가 축복을 받았다는 것은 남다른 부귀 영화를 누려서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잘 말해 주듯 안나는 세속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불행한 여인이었습니다. 결혼한지 일곱 해 만에 남편이 죽어서 청상 과부가 될 만큼 박복(薄福)한 여인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후손도 없었습니다.




과부가 된 후 84살이 되도록 그녀는 기도와 단식과 성전 참배로 살아왔습니다 그녀가 그 긴 세월을 수절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는 기댈 남편이나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기댈 곳이 있었더라면 하느님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면서 좀더 편하기 위해, 좀더 많은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 좀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애쓰고 있을 때, 안나는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 섬기기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안나가 아기 예수의 봉헌식에 참여하고 자신의 눈으로 이 세상의 구세주가 되실 분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던 안나가 당연히 받아야 했던 축복이었습니다. 자신의 삶 모두를 하느님께 봉헌했던 안나가 받아야 할 축복이었습니다.


 


오늘 하느님의 성전에서 봉헌되신 아기 예수는 인류의 희망이자 구원입니다. 그리고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안나는 자신의 삶에 걸맞는 축복을 받았고 감사드리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널리 전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하느님 대전에 무엇을 봉헌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마리아의 품에 안겨 성전에 봉헌되신 예수는 당신의 전 생애를 하느님 나라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봉헌하셨습니다. 오늘 어린아기로 봉헌되신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그 봉헌을 완결시키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봉헌된 그분의 삶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도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헌한 초는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치 한 자루의 촛불이 자신을 태워서 어둠을 밝히듯,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나 자신을 희생하면서, 이웃과 형제들을 비추는 이타적(利他的)인 삶이 될 때,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 봉헌되는 삶이 됩니다.


오늘 성전에 봉헌되신 예수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촛불처럼 어둠을 밝히는 생활을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시므온이 불렀던 노래를 우리의 노래로 부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23             연중 제4주일   루가 2,22-40 (다) 도전받는 예언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예레 1,4~5.17~19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 


제2독서 Ⅰ고린 12,31~13,13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복 음 루가 4,21~30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용기있게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언자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부패되어 있으면 부패된 것만큼 더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진리를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고통이 여기에 있었으며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오늘 1독서의 내용은 예레미야가 소명받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BC 600년대에 활약했던 이스라엘의 대 예언자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에 나라는 멸망되어 가고 있었고 사회는 썩어 부정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에 예언자가 걸어야 할 길은 참으로 고달팠습니다.




‘좋은 약이 입에 쓰다.’고, 백성을 회개시키고자 하는 예레미야의 노력이 오히려 비난과 오해를 받아서 감옥에도 갇혔으며 도망도 다녔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처음부터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절까지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는 핑계도 변명 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래서 박해와 고난 속에서 평생 을 외롭게 걸어가야 했습니다.


이처럼 예언자의 길은 참으로 고달픕니다. 모세도 그랬고 이사야도 그랬으며 아모스나 호세아도 그랬고 세례자 요한이나 사도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걷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하게 선택하신 자들만이 그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따라서 예언자가 된 다는 것은 고달픈 길이면서도 또한 은혜로운 일입니다. 하느님의 기대와 꿈이 가득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마저도 고향과 동족들로부터 배척받았다는 사실이 예언자 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빵을 좋아하며 기적을 좋아하고 명예와 권력을 좋아합니다. 자기들 동네에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나왔다 하면 환영을 합니다. 하다못해 고시에 합격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해도 동네의 자부심이 세워집니다.




사람들이 대체로 환영하는 것은 예수님이 광야의 유혹에서 다 배척하셨던 것입니다. 예언자는 빵을 약속하지 않으며 명예와 권력 을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것이면 그것이 사람들 가슴에 쓰든지 시든지, 용기있게 전파해야 하는 것이 책임이요 사명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언자들은 백성들의 반대와 비난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지난 주일 복음 내용의 연장입니다. 사람들 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감동되었으며 하느님의 성령이 그분 위에 내리신 것을 보고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자기들 고향에서 그만한 인물이 나왔다는 것에 큰 자랑과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라는 한 인간의 조건을 봤을 땐 별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목수의 아들이었고 또한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구름을 타고 내려온 ‘사람의 아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곧 잘 하시던 기적도 자기 고향에서만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혜택 이 자기들 동네에는 없었습니다. 여기에 불만을 가졌으며 예수를 잘 안다는 자들이 예수님을 더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 의 빈정거림이 예수님의 귀에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이 어떻게 하느님을 저버리고 벌을 받았는지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에 대한 큰 모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군중들이 들고일어나 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그분을 벼랑으로 끌고가기까지 했습니다.




세상이 그 모양입니다. 올바른 소리를 싫어합니다. 사회가 썩어 있으면 더 그렇습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 독재정권 시대를 경험하면서 시대의 예언자들의 용기가 얼마나 훌륭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독재자의 말로가 또한 어떠했는지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언의 직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교회가 가진 사명 중에 첫째 가는 것이 예언직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외치며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부정에 물들지 않는 깨끗하고 양심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 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것을 지적해서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실로 배척의 연속이었습니다. 헤로데의 칼부림으로부터 십자가의 창끝에 이르기까지 그분은 백성과 세상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런 희생을 통해서 세상을 건지셨습니다. 당신을 죽인 그 세상과 백성을 건져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 희생, 용기를 배워서 예언의 직무에 참여해야 합니다.












24              연중 제4주일   루가 2,22-40 (다) 환영 받지 못한 예수님




1. 복음이야기(루가 4,21-30)


예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하셨습니다(루가 4,16-21).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설교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신 것은 물론이거니와 친척들과 고향사람들 심지어 제자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은총의 말씀에 고향사람들 모두가 놀라면서도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고작 요셉의 아들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 “의사여, 네 자신부터 고쳐라”라는 속담을 들이대면서 가파르나움에서 하신 기적들을 나자렛에서도 행하라고 강권합니다. 그러자 예수는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라는 속담을 말씀하시면서 이적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아무런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고향사람들의 불신 때문이었습니다(마르 6,6).




기원전 9세기에 예언자 엘리야는 많은 이스라엘 과부들을 제쳐두고 오직 이방인 과부를 돌보았습니다(1열왕 18,7-16). 그 제자 엘리사 역시 많은 이스라엘 나병환자들을 제쳐두고 이방인 나병환자를 고쳐 주었습니다.


이렇듯 예수께서도 복음을 전하셨지만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음을 배척한데 비해서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고향과(24절) 동족을(25-27절) 경시하는 말씀을 하시자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분통을 터뜨리면서 그분을 도시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에는 복음서 작가 루가의 구원사관이 담겨 있습니다. 루가 복음서 작가는 자신이 이방계 그리스도인으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복음서를 썼습니다. 본디 예루살렘에서 탄생한 원시교회의 신도들은 모두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먼저 유다인들을 상대로 전도했지만 큰 성과가 없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와 사도 바울로의 개심을 계기로 이방인들을 상대로 한 전도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했지만 이방인들은 잘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동족과 고향사람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으셨으나 이방인들과 타향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는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루가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를 주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보다 믿음 안에서 교회의 미래를 올바로 바라보는 예언자적인 슬기를 모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적인 예언의 정신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자들의 목소리는 함께 수용해야 하며,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것에 치우쳐 믿음 없이 교회를 바라보는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충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오늘 복음에 담겨 있다 하겠습니다.




한국교회는 21세기를 맞고 있습니다. 과거의 부흥에 안주하지 말고 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는 많은 지성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늘 새롭게 태어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25              연중 제4주일   루가 2,22-40 (다) 할머니의 소원


                                                   허 근 신부


                                             


어느날, 양로원을 방문했을 때 할머니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한 후 “할머니, 할머니의 제일 큰 소원이 무엇이지요?”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때 한 할머니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제 소원은 누구하고 실컷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정말 뜻밖의 대답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저는 몇 번이고 되뇌었습니다. 노인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위로랍시고 조그마한 선물 상자를 안고 찾아갔던 제 모습이 그렇게 초라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이나미 선생은 「사랑의 독은 왜 달콤한가?」라는 책 속에서 우리 부모님들은 아버지 이전에 남자이며 어머니 이전에 여자이고, 뜨거운 감정을 가진 분들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식들의 생각만으로 효도를 다한 것인양 착각하고 있는 것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이나미 선생은 노인의 이성에 대한 사랑을 터부시하는 것은 오히려 주제 넘는 억압이고 편견이라고 말합니다. 또 박완서 님의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는 60세 홀어머니의 연애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속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난 노신사와의 달콤한 만남. 자신도 잊었던 여성의 이미지를 다시 발견하는 어머니, 그 후에도 만남은 이루어지고, 자녀들이 어머니의 재혼을 권고는 하지만…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이 있을 때 진정한 삶의 의미를 느낍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선이라는, 또 효도라는 미명아래 오히려 이웃들에게 상처를 안겨 주고, 부모에게 외로움을 안겨 드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물질적 도움만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자녀들. 저 역시 본당에서 사목을 할 때 노인대학을 설립하고, 일년에 한두 차례 위로 잔치 베푸는 것으로 노인들에 대한 사목을 훌륭하게 했다고 자부했었습니다. 그러나 노인들의 진정한 소원을 도외시하고 자선의 미명아래 오히려 외로움만을 더해 드렸음을 늦게야 알았습니다.


  


참된 나눔은 참된 사랑이 바탕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고, 이웃이 필요한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제발이지 새해에는 정이 그리워 외로움에 우는 이웃이 없었으면 합니다.




한마디만 더 한다면 서울역 노숙자가 일하기 싫어서 저런다고 탓하기 전에 내가 그들의 아픔을 덜어 줄 일은 무엇인지 찾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알코올 중독증에서 회복되고도 가족을 포함한 우리들의 선입견과 냉대 때문에 고뇌하는 치유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도 생각해 볼 일입니다.




홀로된 부모님의 외로움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황혼의 결혼을 생각하는 자녀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와 알아보실 때 핑계를 버리고 자주 찾아보기로 결심하는 자녀들이 많이 많이 탄생하는 사회복지주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 글은 카테고리: 복음 나눔 8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다해 연중 제 4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다해 연중 제 4 주일  말씀과 전례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제 1 독서 : 예레 1,4-5. 17-19

    제 2 독서 : 1고린 12,31-13,13

    복     음 : 루가 4,21-30


    해 설

    루가복음은 에수께서 안식일에 나자렛 회당에 가신 이야기를, 사람들이 예수를 갈릴래아의 한 동네 밖 산벼랑에 밀어 떨어뜨려 살해하려는 장면으로 끝맺고 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은 본래는 서로 흩어져 잇었던 것들이 의도적으로 한데 모야져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 한 예로 예수께서 앞서 읽으신 이사야 예언(이사 61,1-2)이 자신을 통해 실현됐다고 선언하신 후(21절)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22절의 내용-“사람들이 모두 예수를 칭찬하였고 그가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하며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과 그 뒤에 오는 다른 구절들(28절 이하)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들의 적개심과의 사이에 어떤 심리적 대립이 있다는 점만을 생각해 보아도 알수 있다. 사람들의 감정이 이렇듯 갑작스레 백팔십도로 돌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룩가복음사가가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했던 예수와 그의 고향사람들과의 두 번의 만남을 묶어놓고 있다는 말인가? 아마도 후자가 더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마태오복음(13,53-58)과 마르코복음(6,1-6)에서는 예수와 그의 고향사람들과의 만남이 계속적으로 ‘논쟁적’인 형태로 언급되고 있다.


    모든 참된 예언자는 불편한 존재인가!


    어쨌든 이와 같은 문제는 별 문제로 하고 볼 때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루가복음사가가 처음부터 메시아의 미래 운명-성부께로부터 성령의 힘을 통해 가난한 이들과 억눌린 이들을 해방하고 구원할 사명을 수행하고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4,18-19)파견되지만, 바로 파4견된 그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되는-을 감추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구절을 자신에게 적용하시며서 자신의 ‘예언적’ 사명을 천명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또한 모든 예언자와 마찬가지로, 예언자라는 존재를 항상 자신들의 조용한 삶을 들쑤셔 피곤한 다른 삶을 제시하여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길로 방향전환을 시키러 오는 ‘불편스러운’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지불해야 할 대가를 치러야 하실 것이다.

    참된 예언자는 항상 다른 세계를 열어준다. 그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다 변모되아야 하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히 우선적으로 예언자들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고 그 다음에는 격렬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즉 그 예언자를 제거하거나 침묵케 함으로써 그의 말을 통해 깨어나기 시작했거나 문제화되기 시작한 자신의 의식도 조용히 가라앉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사실을 당신 자신의 절대적 의식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구약의 여러 예언자들의 역사-그중 한 좋은 예로 오늘 제 1독서에서 제시되고 있는 예레미야 예언서의 내용(1,4-5. 17-19)을 들 수 있다-를 통해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다. 예수의 이러한 입장은 그분께서 예루살렘을 향한 끝없는 먼 여정을 가고 계셨을 때, 헤로데가 그를 죽이려 하니까 피해야 한다고 간하였던 사람에게 하신 대답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 여우에게 가서 전하여라…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수 있겠느냐”(루가 13,32-33). 이것은 그가 예언자로서 장차 받게 될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루가는 그 일을 요한이 말하듯이(요한 2,4 등 참조)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로서 이야기한다.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모두 화가 나서 들고 일어나 예수를…산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루가 4,28-30). 그리스도께서는 필사적으로 날뛰는 반대자들 앞에서 참으로 태연하시다. 이것은 미움과 죽음의 세력 자체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기 이전에 이미 ‘주님’이시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이 있기 전에 ‘죽음’을 지배하고 계신 예수님의 명백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서도 해 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더 나아가 예수를 반대하는 고향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예수를 죽이려고까지 하는 그렇듯 심한 반감에 사로잡히게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조금 전까지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던 한 사람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두드러지게 돋보이게 된다는 사실에 직면해서 어떤 질투심 같은 것이 생겼을 것이다. 그들이 수군대는 이야기-“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절)-는 이와 같은 감정이 깔려 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두가지 현실, 즉 예수가 평범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사실, 아니 어쩌면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비천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사실과 자신을 주님의 신비로운 사자에 대한 이사야서의 내용을 실현시킨 장본인이라고 주장하는(21절) 사실이 도저히 조화될 수 없었다.

    어쩌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같은 이와 같은 예수의 고향사람들의 질투심 외에도 예수를 가까이하면서 예수 안에서 대립되고 있는 차원들, 즉 매일매일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요셉의 아들-과 생활과 가르침과 기적들을 통해 나타나는 그의 인간 이상의 어떤 모습이 대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모든 사람들-지금은 예수의 고향사람들이지만, 내일은 사도들이며, 모레는 우리들, 그리고 모든 시대의 사람들일 것이다-이 예수께로부터 느끼게 되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바로 예수 안에 들어 있는 이 신비가 항상 사람들을 혼란케 하고 또한 앞으로도 혼란케 할 것이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이 모든 사실이 보다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마르 6,2-3).

    사람들은 인간적인 이해의 척도를 넘어서 계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알아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분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이러한 태도를 이상하게 여기신다:“그리고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이상하게 여기셨다”(마르 6,6).

    루가복음에서는 사람들이 예수께 대해 적개심을 갖게 되는 동기가 더 미묘한 것 같다. 그것은 지방색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편협한 요구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너회는 필경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는 속담을 들어 나더러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서도 해 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23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의 기적들을 나자렛 대신에 가파르나움에서 행하신 것에 대해 불만을 품는다. 기적이 무슨 선전 운동이나 관광안내와 같은 것이란 말인가! 아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하느님-원하시는 곳에서 원하시는 대상자를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께서 신앙을 이미 갖고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믿고자 하는 자세를 갖춘 사람들에게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표징’으로서 보여주시는 절대로 ‘자유로운’ 하나의 행위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기적들을 팔레스니타 밖에서 이루시고자 하신 것은 바로 당신 백성들이 이와같은 믿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잘 들어라. 엘이야 시대에 삼 년 반 동안이나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고 온 나라가 심한 기근에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는 과부가 많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보내시지 않고 다만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에 사는 어떤 과부에게만 보내주셨다.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환자가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단 한사람도 고쳐 주시지 않고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만을 깨긋하게 고쳐주셨다.”(루가4,24-27). 우리가 이 이야기를 깊이 새겨본다면 그 두 위대한 예언자(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살았던 사렙다 마을의 그 과부(2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이 얼마만큼 큰 신앙을 입증해 보여주었는가를 알 수 있다.

    ‘신앙’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의 영역을 넓혀주고 확장시킨다. 예수를 자신들의 편의와 이익을 위한 기적을 행하시도록 묶어놓고자 했던 나자렛 마을 사람들은 하느님의 보편주의적 계획과 대치되는 아둔한 편협 사상에 자신들을 가두어 두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새롭고 예측하지 못한 일들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문을 열 능력도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고향에서 자라난(16절) 그 ‘예언자“가 선포한 보편적이고도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품게 되었고, 그를 배척하고 마침내 그를 살해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아무리 덤벼도 너를 당하지 못하리라”


    우리는 예언자를 항상 ‘불편한 존재’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항시 하느님의 새롭고도 어려운 요구를 사람들 앞에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붕괴시킬 수 있는 방법은 나자렛 마을 사람들이나 나중에 히브리 사람들이 예수께 행한 것처럼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방법은 그의 말을 듣지 않도록 귀를 막아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간ㅌ은 일은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에게 있었던 일이다:“그 낯가죽이 두꺼운 자들, 그 고집이 센 자들, 그런 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주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고 내 말을 전하여라. 본래 반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이라 듣지도 않겠지만, 듣든 안듣든 내 말을 전하는 자가 저희 가운데 있다는 것만은 알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에제 2,4-5 ;이사 6장 참조).

    시대와 환경과 사회적 교육의 배경에 따라 거절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하지만 참된 예언자는 항상 종교적 사회적 한계성을 벗어나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참된 예언자는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수행해 나가기 위해 하느님의 특별한 ‘힘’을 필요로 한다. 이에 대한 예를 예레미야에게서 볼 수 있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힘겨운 소명을 받고 심리적으로 약화되고 불안에 차서 처음부터 줄곧 그 소명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를 도와주실 것을 엄숙히 선언하심으로써 그를 다그치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주신다:“너는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나의 백성에게 일러주어라 내가 시키는 말을 모두 전하여라. 이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다가 그들 앞에서 오히려 두려워하게 되리라. 유다의 임금이나 고관들, 사제들이나 지방 유지들과 함께 온 나라가 달려들어도 내가 오늘 너를 단단히 방비된 성처럼, 쇠기둥 놋담처럼 세우리니, 아무리 덤벼도 너를 당하지 못하리라. 내가 네 옆에 있어 도와주리라”(예레 1,17-19).

    고관들이나 사제들과 같이 그에게 가까이 있어야 할 사람들까지도 거슬러 싸워햐 한다. 이와 같은 일은 예수께소 나자렛 고향사람들과 만나실 때, 그리고 더욱 놀랍게도 십자ㅅ가상에서 일어나게 된다.

    우리가 이에 대해 깊이 생가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로는 영원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의 태도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일부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특히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예언자시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예언’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자렛 마을 사람들이 하고자 했듯이 폭력을 사용해 내쫓지는 않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는 다른 사람들 즉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투쟁과 변화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우리가 전달해야 할 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것처럼(예레 1,18) 우리의 힘에만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힘과 도움에 의지함으로써 ‘단단히 방비된 놋담처럼’ 우리 자신을 일으켜 세울 힘을 갖추고 있는가? 바야흐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개인이건 교회 공동체건-가 믿고 사랑하는 소수만이 미래를 갖고 있는 이 세계를 향해 외칠 수 있는 용기를 되찾아야 할 때가 다가온 것 같다.

    오늘날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의식속에서 비극적으로 은폐될 위기에 처해 있는 그 어떤 가치들을 현대적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재확인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예언적’능력이 필요하다. 법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태아의 생명에 대한 권리, 혼인의 비신성화, 외설 문학, 보편화된 폭력, 쾌락과 돈에 대한 발작적인 추구 등에 대해 생각해 보라!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말할 것도 없이 가장 강한 ‘예언적’ 증거는 성바울로가 사랑의 찬가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듯이 모든 은총 중에 가장 위대한 은총이며, 어떤 신자에게도 없어서는 안될 은초인 ‘사랑’을 통한 증거다:“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고린 13,1-2,13).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세상에 선포해야 할 사명이 있는 그 ‘불편한’ 예언적 사명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자. “사랑이 없다면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불속에 우리 몸을 던진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신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가? 투쟁과 묵상은 다만 하나의 동일한 근원을 갖고 있다. 즉 사랑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당신이 기도를 한다면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다. 당신이 착취당한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모습을 되찾아주고자 투쟁한다면 그것도 역시 사랑 때문이다”(1974. 8. 30. 떼제의 둘째 편지에서).

    “교회가 긴히 필요치 않은 것이면 무엇이나 포기하고, 인류 안에서 오직 나눔과 친교의 종이 되고자 한다면 교회는 인류가족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당한 체제를 뒤흔들고, 비관주의의 물결을 밀어내고, 인간 신뢰의 현 위기에 출구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1976. 12. 5. 떼제의 셋째 편지에서).  


  2. user#0 님의 말:

    다해 연중 제 4 주일  말씀과 전례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제 1 독서 : 예레 1,4-5. 17-19

    제 2 독서 : 1고린 12,31-13,13

    복     음 : 루가 4,21-30


    해 설

    루가복음은 에수께서 안식일에 나자렛 회당에 가신 이야기를, 사람들이 예수를 갈릴래아의 한 동네 밖 산벼랑에 밀어 떨어뜨려 살해하려는 장면으로 끝맺고 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은 본래는 서로 흩어져 잇었던 것들이 의도적으로 한데 모야져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 한 예로 예수께서 앞서 읽으신 이사야 예언(이사 61,1-2)이 자신을 통해 실현됐다고 선언하신 후(21절)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22절의 내용-“사람들이 모두 예수를 칭찬하였고 그가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하며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과 그 뒤에 오는 다른 구절들(28절 이하)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들의 적개심과의 사이에 어떤 심리적 대립이 있다는 점만을 생각해 보아도 알수 있다. 사람들의 감정이 이렇듯 갑작스레 백팔십도로 돌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룩가복음사가가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했던 예수와 그의 고향사람들과의 두 번의 만남을 묶어놓고 있다는 말인가? 아마도 후자가 더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마태오복음(13,53-58)과 마르코복음(6,1-6)에서는 예수와 그의 고향사람들과의 만남이 계속적으로 ‘논쟁적’인 형태로 언급되고 있다.


    모든 참된 예언자는 불편한 존재인가!


    어쨌든 이와 같은 문제는 별 문제로 하고 볼 때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루가복음사가가 처음부터 메시아의 미래 운명-성부께로부터 성령의 힘을 통해 가난한 이들과 억눌린 이들을 해방하고 구원할 사명을 수행하고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4,18-19)파견되지만, 바로 파4견된 그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되는-을 감추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구절을 자신에게 적용하시며서 자신의 ‘예언적’ 사명을 천명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또한 모든 예언자와 마찬가지로, 예언자라는 존재를 항상 자신들의 조용한 삶을 들쑤셔 피곤한 다른 삶을 제시하여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길로 방향전환을 시키러 오는 ‘불편스러운’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지불해야 할 대가를 치러야 하실 것이다.

    참된 예언자는 항상 다른 세계를 열어준다. 그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다 변모되아야 하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히 우선적으로 예언자들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고 그 다음에는 격렬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즉 그 예언자를 제거하거나 침묵케 함으로써 그의 말을 통해 깨어나기 시작했거나 문제화되기 시작한 자신의 의식도 조용히 가라앉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사실을 당신 자신의 절대적 의식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구약의 여러 예언자들의 역사-그중 한 좋은 예로 오늘 제 1독서에서 제시되고 있는 예레미야 예언서의 내용(1,4-5. 17-19)을 들 수 있다-를 통해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다. 예수의 이러한 입장은 그분께서 예루살렘을 향한 끝없는 먼 여정을 가고 계셨을 때, 헤로데가 그를 죽이려 하니까 피해야 한다고 간하였던 사람에게 하신 대답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 여우에게 가서 전하여라…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수 있겠느냐”(루가 13,32-33). 이것은 그가 예언자로서 장차 받게 될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루가는 그 일을 요한이 말하듯이(요한 2,4 등 참조)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로서 이야기한다.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모두 화가 나서 들고 일어나 예수를…산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루가 4,28-30). 그리스도께서는 필사적으로 날뛰는 반대자들 앞에서 참으로 태연하시다. 이것은 미움과 죽음의 세력 자체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기 이전에 이미 ‘주님’이시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이 있기 전에 ‘죽음’을 지배하고 계신 예수님의 명백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서도 해 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더 나아가 예수를 반대하는 고향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예수를 죽이려고까지 하는 그렇듯 심한 반감에 사로잡히게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조금 전까지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던 한 사람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두드러지게 돋보이게 된다는 사실에 직면해서 어떤 질투심 같은 것이 생겼을 것이다. 그들이 수군대는 이야기-“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절)-는 이와 같은 감정이 깔려 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두가지 현실, 즉 예수가 평범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사실, 아니 어쩌면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비천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사실과 자신을 주님의 신비로운 사자에 대한 이사야서의 내용을 실현시킨 장본인이라고 주장하는(21절) 사실이 도저히 조화될 수 없었다.

    어쩌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같은 이와 같은 예수의 고향사람들의 질투심 외에도 예수를 가까이하면서 예수 안에서 대립되고 있는 차원들, 즉 매일매일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요셉의 아들-과 생활과 가르침과 기적들을 통해 나타나는 그의 인간 이상의 어떤 모습이 대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모든 사람들-지금은 예수의 고향사람들이지만, 내일은 사도들이며, 모레는 우리들, 그리고 모든 시대의 사람들일 것이다-이 예수께로부터 느끼게 되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바로 예수 안에 들어 있는 이 신비가 항상 사람들을 혼란케 하고 또한 앞으로도 혼란케 할 것이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이 모든 사실이 보다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마르 6,2-3).

    사람들은 인간적인 이해의 척도를 넘어서 계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알아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분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이러한 태도를 이상하게 여기신다:“그리고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이상하게 여기셨다”(마르 6,6).

    루가복음에서는 사람들이 예수께 대해 적개심을 갖게 되는 동기가 더 미묘한 것 같다. 그것은 지방색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편협한 요구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너회는 필경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는 속담을 들어 나더러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서도 해 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23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의 기적들을 나자렛 대신에 가파르나움에서 행하신 것에 대해 불만을 품는다. 기적이 무슨 선전 운동이나 관광안내와 같은 것이란 말인가! 아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하느님-원하시는 곳에서 원하시는 대상자를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께서 신앙을 이미 갖고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믿고자 하는 자세를 갖춘 사람들에게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표징’으로서 보여주시는 절대로 ‘자유로운’ 하나의 행위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기적들을 팔레스니타 밖에서 이루시고자 하신 것은 바로 당신 백성들이 이와같은 믿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잘 들어라. 엘이야 시대에 삼 년 반 동안이나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고 온 나라가 심한 기근에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는 과부가 많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보내시지 않고 다만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에 사는 어떤 과부에게만 보내주셨다.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환자가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단 한사람도 고쳐 주시지 않고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만을 깨긋하게 고쳐주셨다.”(루가4,24-27). 우리가 이 이야기를 깊이 새겨본다면 그 두 위대한 예언자(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살았던 사렙다 마을의 그 과부(2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이 얼마만큼 큰 신앙을 입증해 보여주었는가를 알 수 있다.

    ‘신앙’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의 영역을 넓혀주고 확장시킨다. 예수를 자신들의 편의와 이익을 위한 기적을 행하시도록 묶어놓고자 했던 나자렛 마을 사람들은 하느님의 보편주의적 계획과 대치되는 아둔한 편협 사상에 자신들을 가두어 두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새롭고 예측하지 못한 일들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문을 열 능력도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고향에서 자라난(16절) 그 ‘예언자“가 선포한 보편적이고도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품게 되었고, 그를 배척하고 마침내 그를 살해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아무리 덤벼도 너를 당하지 못하리라”


    우리는 예언자를 항상 ‘불편한 존재’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항시 하느님의 새롭고도 어려운 요구를 사람들 앞에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붕괴시킬 수 있는 방법은 나자렛 마을 사람들이나 나중에 히브리 사람들이 예수께 행한 것처럼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방법은 그의 말을 듣지 않도록 귀를 막아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간ㅌ은 일은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에게 있었던 일이다:“그 낯가죽이 두꺼운 자들, 그 고집이 센 자들, 그런 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주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고 내 말을 전하여라. 본래 반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이라 듣지도 않겠지만, 듣든 안듣든 내 말을 전하는 자가 저희 가운데 있다는 것만은 알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에제 2,4-5 ;이사 6장 참조).

    시대와 환경과 사회적 교육의 배경에 따라 거절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하지만 참된 예언자는 항상 종교적 사회적 한계성을 벗어나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참된 예언자는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수행해 나가기 위해 하느님의 특별한 ‘힘’을 필요로 한다. 이에 대한 예를 예레미야에게서 볼 수 있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힘겨운 소명을 받고 심리적으로 약화되고 불안에 차서 처음부터 줄곧 그 소명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를 도와주실 것을 엄숙히 선언하심으로써 그를 다그치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주신다:“너는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나의 백성에게 일러주어라 내가 시키는 말을 모두 전하여라. 이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다가 그들 앞에서 오히려 두려워하게 되리라. 유다의 임금이나 고관들, 사제들이나 지방 유지들과 함께 온 나라가 달려들어도 내가 오늘 너를 단단히 방비된 성처럼, 쇠기둥 놋담처럼 세우리니, 아무리 덤벼도 너를 당하지 못하리라. 내가 네 옆에 있어 도와주리라”(예레 1,17-19).

    고관들이나 사제들과 같이 그에게 가까이 있어야 할 사람들까지도 거슬러 싸워햐 한다. 이와 같은 일은 예수께소 나자렛 고향사람들과 만나실 때, 그리고 더욱 놀랍게도 십자ㅅ가상에서 일어나게 된다.

    우리가 이에 대해 깊이 생가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로는 영원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의 태도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일부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특히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예언자시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예언’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자렛 마을 사람들이 하고자 했듯이 폭력을 사용해 내쫓지는 않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는 다른 사람들 즉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투쟁과 변화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우리가 전달해야 할 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것처럼(예레 1,18) 우리의 힘에만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힘과 도움에 의지함으로써 ‘단단히 방비된 놋담처럼’ 우리 자신을 일으켜 세울 힘을 갖추고 있는가? 바야흐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개인이건 교회 공동체건-가 믿고 사랑하는 소수만이 미래를 갖고 있는 이 세계를 향해 외칠 수 있는 용기를 되찾아야 할 때가 다가온 것 같다.

    오늘날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의식속에서 비극적으로 은폐될 위기에 처해 있는 그 어떤 가치들을 현대적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재확인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예언적’능력이 필요하다. 법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태아의 생명에 대한 권리, 혼인의 비신성화, 외설 문학, 보편화된 폭력, 쾌락과 돈에 대한 발작적인 추구 등에 대해 생각해 보라!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말할 것도 없이 가장 강한 ‘예언적’ 증거는 성바울로가 사랑의 찬가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듯이 모든 은총 중에 가장 위대한 은총이며, 어떤 신자에게도 없어서는 안될 은초인 ‘사랑’을 통한 증거다:“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고린 13,1-2,13).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세상에 선포해야 할 사명이 있는 그 ‘불편한’ 예언적 사명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자. “사랑이 없다면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불속에 우리 몸을 던진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신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가? 투쟁과 묵상은 다만 하나의 동일한 근원을 갖고 있다. 즉 사랑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당신이 기도를 한다면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다. 당신이 착취당한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모습을 되찾아주고자 투쟁한다면 그것도 역시 사랑 때문이다”(1974. 8. 30. 떼제의 둘째 편지에서).

    “교회가 긴히 필요치 않은 것이면 무엇이나 포기하고, 인류 안에서 오직 나눔과 친교의 종이 되고자 한다면 교회는 인류가족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당한 체제를 뒤흔들고, 비관주의의 물결을 밀어내고, 인간 신뢰의 현 위기에 출구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1976. 12. 5. 떼제의 셋째 편지에서).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