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대림 제1주일 주일 강론 모음

 

대림 제1주일




1. 지학순 주교 / 2                    2. 최창무 주교 / 5  


3. 안문기 신부 / 7                    4. 최윤환 신부 / 9  


5. 대림시기 묵상 / 11                 6. 변희선 신부/ 13


7. 깨어 준비하라(가) / 14            8. 강길웅 신부(가) / 16


9. 안충석 신부(가) / 18               10. 염봉덕 신부(가) / 20


11. 김정진 신부(가) / 22             


  1.                 대림절 대림절 메시지           지학순 주교






“하늘은 위로부터 이슬을 내리고 구름은 비처럼 정의를 내리라. 땅은 열리어 구원을 싹트게 하라. 태양이 떠오르듯이 우리 구세주 돋으시고, 비가 풀 위에 내리듯 동정녀 품에 내려오시리라.”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대림시기는 구세주를 기다리는 때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5천년 동안이나 구세주가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렸으며 빨리 오시어 어둠과 고난과 죽음의 결박에서 저들을 해방시켜 주도록 초조히 고대하였습니다. 바빌론의 억압 아래 신음하고, 이집트 땅에 노예로 끌려가 채찍질 당하면서,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착취당하고, 헤롯의 폭정 밑에 허덕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치 9년 가뭄에 비를 기다리듯, 10년 장마에 햇빛을 기리듯이, 그토록 애타게 구세주 오시기를 갈망하고 기원하였던 것입니다.




하늘이 저 아득히 높은 곳으로부터 땅위의 시들은 한 포기 물위에까지 이슬을 내리시어 이윽고 그 풀을 싱싱하게 되살리듯이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불의와 부정의 무리에게 고난받고 상처 입은 가난한 민중, 목마른 민중에게 의로운 이를 비처럼 내리시어 그이로 하여금 불의의 무리를 물리쳐 민중을 구원토록 하늘에 빌고 간절히 기다리는 곳에 바로 대림절의 신비로운 참뜻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이 땅의 현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저 5천년의 고난의 역사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듯, 간악한 불의의 무리가 하늘 두려운 줄 모르고 날뛰어 마구 민중을 업신여기고 인륜을 더럽히며 자연의 질서를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은 분명 창생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을 만큼 정의를 벗어났습니다. 온 민중이 일용할 양식을 얻지 못하고, 뜻대로 무슨 일을 할 수도 없고 직업을 구할 수도 없으며 문화적 향상이나 사회적 정치적 활동의 가능성은 근원적으로 봉쇄되어 삶의 의의를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분명히 나치스 지배하의 독일처럼 “인간의 기본권을 유린하고 국가의 공동선을 극도로 해치는 명백한 폭군적 압제”(민족들의 발전) 아래 있지 않다면 어떻게 민중이 이처럼 불행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의로운 이가 이 땅에 오시어 불의를 몰아내어 물러가게 함이 없이는 그 어떤 희망도 장래도 생각할 수 없는 암흑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타는 가시덤불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고 시나이산에서 그에게 당신의 법을 주셨듯이 가득히 팔을 펴시어 고난에 신음하는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천주께 간절히 기구할 때입니다. 의로운 이를 비처럼 내리시어 어둠과 빈곤과 고통과 죽음의 그늘에 갇혀있는 민중을 그 결박에서 풀어주시도록 마음을 다하여 빌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이미 구세주를 모셨습니다. 현대의 크리스천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들음으로써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우리가 듣고 들음으로써 구원받은 그 복음을 이웃 속에 널리 전하고 다만 전할뿐 아니라, 행동을 통해 나날이 모범적으로 실천함에 의하여 그것을 전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바로 그 의로운 사람으로 되고 제2의 구세주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천주 앞에 나아가 비처럼 의로운 이를 내리시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그 의로운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영예로운 사도로 되어 이 어두운 세상의 악과 불의에 목숨 바쳐 저항하겠노라는 투사로서의 맹세, 실천의 맹세인 것입니다 .




기구는 실천이며 실천이 곧 기구입니다. 신앙 없는 행동이 의미가 없듯이 행동 없는 신앙은 쓸모 없는 신앙, 말뿐인 신앙, 저 혼자만 위한 이기적인 신앙 즉 올바르지 못한 신앙입니다.


무기력하고 올바르지 못한 말뿐인 신앙을 극복하고 복음정신의 실천에로 힘차게 정진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행동하는 정의의 사람이 됩시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이르는 도처에서 온갖 불의에 단호히 반대하고 의롭지 못한 것에 결코 동조하지 말며 부정과 거짓과 독선과 타락을 비판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정의를 위하여 불의한 권력과 싸우시다가 고난받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신 우리 주 그리스도의 그 피묻은 길을 우리가 끝까지 따라감으로써만 비로소 이 땅을 정의의 꽃이 피어나는 땅, 천주성자가 세세에 영원히 생활하시고 왕하시는 땅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구름이 비처럼 정의를 내리고 땅이 열리어 구원을 싹트게 함은 이 의로운 천주의 뜻, 이 의로운 그리스도의 길을 우리가 매일매일 성실하고 경건하고 용기 있게 실천하고 행동함으로써만 드디어 이루어질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지금은 우리 모두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우리 마음을 분발시키어 주님의 길을 닦고 그 지름길을 곧게 할 때입니다. 구세주를 맞기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모든 행동에 앞서 또한 모든 행동과 동시에 우리 스스로를 끊임없이 경건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비판하고 쇄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스스로 깨끗하지 않고 의롭지 않고 굳세지 않고서는 불의를 쳐 물리칠 수 없습니다. 자기자신이 혹시 불의의 무리에 섞여 있지 않은가 돌아보십시오. 가난한 이웃을 멸시하는 일은 없는가. 권력을 가진 자들과 부화뇌동하는 일은 없는가.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어두운 세상, 어려운 때를 당한 크리스천일 수록 원수와의 싸움 이전에 그 자신과의 싸움을 더 날카롭게 치러야만 합니다.


자기 본당의 내부는 순결한가? 자기 본당의 단결은 공고한가? 자기 본당과 다른 본당, 또는 다른 종교인들, 비크리스천들과의 관계는 정당한가? 과연 자기는 민중의 편에 서있는가? 아니면 그들을 구박하고 멸시하는 권력의 무리와 다름없는 것인가?




크리스천이란 세계와 인간이 보다 위대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박해도 달게 받을 수 있으나 그가 인류의 나아갈 길을 방해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욕된 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잘못이 분명히 발견될 때 그것은 스스로 비판하고 회개하고 쇄신하는 일이야말로 오히려 주님을 모시고 정의의 길로 힘차게 나아가는 첫걸음입니다.




그 내부가 순결하고 청빈하며 오직 그리스도 속에서 평등하게 단결된 교회야말로 사회정의를 위한 싸움에서 첫째로 가는 조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을 보장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곧 주님의 길을 닦고 주님의 지름길을 곧게 하는 첫 사업입니다.




경건하고 단결되고 순결하며 행동적인 크리스천, 진보하는 역사의 편에, 인간의 편에, 민중의 편에 서서 불의와 싸우는 크리스천 대부대의 영롱한 모습, 그 모습이야말로 다름 아닌 이 세상에 오시는 바로 그 구세주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 훌륭한 크리스천들의 물결이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농촌과 어촌에서, 광산과 산과 가난한 거리거리에서 그리고 공장에서 힘차게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을 실천하며 목숨을 바쳐 불의에 항거하여 싸울 때, 그때에 비로소 영원한 빛, 찬란한 광채, 정의의 태양이시며 만민의 임금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과 세계 위에 이슬처럼, 비처럼, 밝아 오는 동녘하늘처럼 오시어 평화로 가득히 채우실 것입니다.




그 날에 모든 산에서 단 것이 방울져 내리고 언덕들에서는 젖과 꿀이 흐를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 모든 성인들과 함께 오시리니 그 날에 곧 빛이 비칠 것입니다. 할렐루야!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구세주 오시는 그 날을 바로 맞이하기 위해 지금은 우리 모두 잠에서 깨어 일어나 열심히 주님의 길을 닦고 그 지름길을 곧게 하는 일에로 분발합시다.


                                                            (1972년 12월 3일)











2.           대림절 특강 : 어서 깨어나 주님을 맞으라!


          우리 곁에 계신 그분을 발견하면,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   


                                                    최창무 주교






여러분 모두에게, 성령의 풍성한 축복을 빕니다. 그분은 2천년 전 영원하신 말씀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취하시어, 사람으로 오실 때 일하신 하느님의 거룩한 능력이시고, 메시아의 길잡이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오시어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하느님 말씀의 신비가 얼마나 깊고, 넓고, 큰 지를 알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일주일이면 구세주 예수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심을 경축하는 성탄 축일입니다. 이 대림절에 교회는 전례적으로 주님의 두 가지 오심에 대해 묵상합니다.




그 하나는 2천년 전 베들레헴 고을에 가난하게 태어나신 구세주 예수의 성탄의 신비이며, 다


른 하나는 세상 마칠 때 영광과 권능을 갖추고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매 주일과 대축일에 다음과 같이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성신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음을 믿으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믿나이다. “


 


예루살렘의 치릴로 주교님은, 처음 오실 때는 – 자비와 온유를 갖추시고 죄스런 인간을 구원하시려 오셨음이며, 두 번 째 오실 때는 – 당신의 왕권을 온전히 세우시려고 심판자로 오신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창세기 2장과 3장의 대조로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지, 인간의 죽음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삶의 길을, 참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의 말씀을 믿지 않고 신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죽음의 길로 유혹하는 자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인간은 결국 죽음에 떨어지고,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이제 심판주가 됩니다. 죽음에 직면한 아담을 찾아주시는 친절하신 하느님께서는 “너 어디 있느냐?”고 찾아 나서시지만, 인간은 “당신이 두려워 숨었습니다”하고 대답하는 관계로 만들고 말았습니다(창세 3,9).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것이 곧 구원자이신 메시아의 약속입니다. 이 메시아의 약속은 인간의 거절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틀림없이 이뤄집니다. 그것이 곧 2천년 전 베들레헴 고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되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람이 되신 말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부활하셨고, 이제 세상 마칠 때에 다시 오셔서 세상을 완성하실 것이고, 그분을 끝까지 거절하는 자에게는 결정적인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며 교리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현실은 늘 주님의 두 가지 오심의 중간시대에 있습니다. 교회가 대림절을 보내는 것은, 주님의 이 두 가지 오심의 진리를 기억하고 중간시대를 뜻 있고 보람차게 지냄으로써,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큰 기쁨과 위로로 맞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달리 말하면, 과거에 오신 주님과 미래에 오실 주님을 현재 우리의 삶 안에 모시고, 우리의 삶 안에서 그분을 발견하며, 이 현실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거둬들이기 위함입니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감상적으로 구유 참배만을 한다든지, 심판주로 오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나마지 현실 도피를 꿈꾸고 ‘휴거’ 소동을 벌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이제 하느님은 단순히 과거에 오신 분, 혹은 미래에 오실 분이 아니라, 실제로 와 계시고,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행복이 약속되고, 이를 못 알아 보거나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현실 삶이 덧없고 희망이 없는 불행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늘 우리를 참 삶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 뵙는 것이 참 삶의 길입니다. 안셀모 성인은 주님을 찾고 발견하는 기도를 다음과 같이 바치십니다.


  “주여, 당신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어 찾는 이에게 당신을 보여 주소서. 당신이 가르쳐 주시지 않으신다면, 당신을 찾을 수 없고, 당신이 당신 자신을 보여주지 않으신다면 내가 당신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내 당신을 갈망할 때 찾고, 찾을 때 갈망하며, 사랑할 때 찾아내고 찾아낼 때 사랑하게 하소서.”




신구약 성경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초강대국 앗시리아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함락시키려 하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위기에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사야 예언자에게 내립니다.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 7,14). 그리고 이 말씀은 역사 안에서 성취 되였습니다. 그로부터 7백여년후 나자렛 고을에서, 나라를 잃고 로마의 속국이 되어 신음하고 있던 이스라엘에 메시아 왕이 태어나십니다.


 


태어나신 구세주는 예언자들을 통해 알려진 때에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


의 소식이 되어 주셨고, 당신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을 바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는 데 두고자 하셨습니다.


  그저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화려한 성탄을 지낸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중간의 오심,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뜻을 성실하고 진실한 매일매일의 삶 안에서 받들면, 바로 우리를 통해서 주님은 새롭게 오십니다. 이것이 나와 이웃에게 보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성탄을 마련하는 것이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기쁨과 희망의 성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3.             대림절     대림의 삶과 준비


                                             안문기 신부




「그리스도이신 주님이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탄생하시지만 만일 내 마음에 태어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초대의 교회 학자 오리게네스가 당시의 신학자들에게 한 질문이다. 우리는 매년 예수성탄 대축일, 소위 크리스마스를 경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축체를 일생동안 수십번 맞이한다고 하여도 예수님이 단 한번 내 마음 속에 태어나지 않는다면 무슨 가치가 있는지 자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과거에 한번 오셨지만 지금도 오시고 계시며 또 세상 마칠 때에 다시 오실 것이다. 이 오시는 주님을 교회에서는 매년 예수성탄 전 4주간을 설정하고 공동으로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네 주간을 대림절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림절은 두 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대림절은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처음 온 성탄축제에 대한 준비기간이며, 동시에 이 기억을 통하여, 종말에 올 그리스도의 재림을 마음으로부터 기다리는 시기이다. 이 두 가지 이유에서 대림은 진심으로 기쁜 기다림의 시기가 된다」 새 로마 교회력의 설명이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이 오면, 우리나라에서는 마음의 준비보다 겉치레가 성행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최근 몇 십년동안 이 성탄축제는 주인공이 없는 나그네들의 잔치 같았다. 성탄축제가 「사랑하는 하느님 대신 상품과 부질없는 호기심으로 쏠리고, 거기에 부응한 상인들의 고객봉사로 뒤바뀌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젊은 세대의 흔들리는 신앙은 더 이상 하느님이 고통과 수난을 허락했다고 보지 않으며 그 고장이나 디스코홀에서 온 몸을 흔들어 대면서, 사랑과 봉사는 낡은 장식처럼 밖으로 떨쳐버리고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오늘, 아니 지금 이 순간이 나의 전부다」라고 외쳐대는 것이다. 대림의 참뜻이 잘 보존된 유럽 중남부에서는 이런 시끄러운 광란의 분위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들은 거리나 호텔 댄스홀이 아닌 교회와 가정에서 크리스마스를 준비한다. 한마디로 대림과 성탄의 온상은 가정이다. 시장에서 자료와 물건을 사다가 가정에서 온 식구가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고 기다린다. 부모들은 자녀들과 더불어 선물을 마련하고 성탄에 관한 동화나 전설, 성경이야기를 나눈다.




「부활이 그리스도교 주년의 중심이라고 한다면 크리스마스는 믿음에 대한 최대의 인간축제일 것이다. 그것은 이날 우리가 하느님의 인간성을 가장 깊이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신학자 랏씽어는 말하였다. 누구나 마음 가볍게 만날 수 있는 구유의 아기예수, 삼왕의 경배와 예물, 천사의 합창에서 시작된 크리스마스 캐럴, 친근한 구조자인 산타클로스의 전설과 이야기들, 이 모든 면모는 크리스마스를 떠나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기다림 속에서 탄생한 분이다. 기다림이 때로는 괴롭고 슬프다. 그러나 기다림 속엔 기쁨과 희망이 있다. 미사드리는 사제의 제의가 자색으로 바뀐 것도 기다리는 자의 준비로서 회개와 보속을 뜻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의 자세 이외에 구체적으로 가정에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 가정에서 온 식구가 함께 손을 모아 준비할 몇가지 사항을 소개한다.




첫째, 대림환을 만들어 봅시다.


우리는 대림환을 교회나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십자가가 신앙의 상징이고 촛불이 희망의 상징이라 한다면, 대림환은 승리의 상징이다. 푸른 환은 이미 옛 헬레니즘 시대에도 승리의 환 월계관으로 사용되었다. 로마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도 지하 묘지 까다꼼바 안에 신심의 표시로 신도들이 만들어 놓았었다. 약 50년 전부터 우리 교회에서도 대림환에 네 개의 초를 꽂아 네주간 동안 하나씩 불을 붙여 불빛 속에서 성탄을 맞는다. 대나무나 소나무로, 플라스틱제품으로, 환을 만들고 그 위에 네 개의 초 또는 꼬마전구를 꽂으면 된다.




둘째, 성탄선물과 카드준비.


예수의 성탄은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선물이다. 이 사랑의 선물 행위가 사람들 사이에서 모방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따라서 진정한 성탄선물은 사랑의 나눔이어야 한다. 원래 선물은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가령 편지 또는 신문배달원, 청소부, 식모와 하급 직원들에게 전해졌다. 또한 산타클로스를 통해 부모가 어린이들에게 좋은 선물을 하였다. 현대 가정에서는 주변의 외로운 사람에게 돌아갈 마음의 일부인 선물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성탄카드도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성도들로서의 마음과 사랑이 담긴 글의 전달이고 화해의 한 도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크리스마스트리와 구유.


서양의 신자 가정 대부분은 대림절이 되면 방 또는 응접실에 트리와 구유를 꾸민다. 푸른 나무를 구하기 어려운 곳에서는 플라스틱 제품들이 사용된다. 시편(96)에 보면 「숲의 나무들도 환성을 올려라」란 표현이 있다. 숲의 나무들 중 하나가 성탄나무이다.




이 나무 아래에 흔히 작은 구유가 놓여진다. 구유는 예수탄생의 구체적인 한자리를 상징할 뿐이다. 그러나 구유 없는 트리는 처량하다. 성탄구유를 중심으로 한 성탄나무 장식은 가정에서 식구들끼리 재료를 구하여 매년 새롭게 만들어 보고 특히 우리의 풍속과 맞는 구유를 꾸며보기 바란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내 가정에 탄생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자기 손으로 준비하고 맞이해야 할 것이다.


구유는 나무나 조각 또는 밀가루 반죽으로 만들 수도 있다.




넷째, 성탄음악과 이야기


성탄절을 전후하여 특별히 불리우는 노래를 크리스마스 캐럴이라고 한다. 캐럴 중에는 교회의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구별된다. 교회의 미사나 집회에서 음악은 하느님 찬미의 도구이다. 음악은 축제의 기본요소이고 하느님과 인간의 상통을 표시한다.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본성 즉 비탄, 간청, 신뢰, 기도, 감사, 찬양을 말과 노래로 표현하였다.


성탄절을 전후하여 생긴 여러가지 전설과 이야기가 있다. 따라서 외인들에게 전교하기 좋은 이야기가 많다.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을 초청하여 이 시기에 예수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가장 큰 전교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4.                       대림절              최윤환 신부






5세기 중엽에 동방교회에서 시작되어 12세기 말기에 일반적으로 실시됨.




계절의 변화는 자연의 현상이지만, 자연을 안고 역사 속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생활과 마음에도 이상야릇한 변화를 느끼게 합니다. 기대와 희망 속에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 어머니이신 교회는 자기 자녀들에게 ‘기다림의 계절’이 왔음을 일깨워주고, 복잡한 우리 생활에 또 다시 희망을 안겨주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믿기 시작했을 때보다 구원이 우리에게 더 가까이 와 있습니다.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웠습니다”(로마 13,11)라고 바울로 사도의 입을 빌어 외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전례력은 대림절이 왔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제구는 자색으로 바뀌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우리 마음의 초조함을 상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쳇바퀴 돌아가듯 매년 맞이하는 대림절이 아닌가? 과연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되신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즉 예수님의 성탄축일을 준비하며 그분의 탄생을 재촉하며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미 2천년 전에 인류역사 안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재촉하며 기다리고 있다니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만일 누가 이미 역사상에 오신 나자렛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면 참으로 우스운 일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을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역사적 인물로서 2천년 전에 이 지상에 오셨던 나자렛의 예수이시며(마태오 1,18-25; 루가 2,1-7; 요한 1,1-18), 둘째로, 세말에 오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이며(마태오 24,29-31; 마르코 13,24-27; 루가 21,25-28), 셋째로, 우리 일상생활 안에 오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오 18,20.28,20; 요한 14,20-24). 대림절 전례텍스트는 이상 세 가지 모양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다 포함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2천년 전에 인류역사 안에 오셨던 예수님은 우리 구원과 영생의 완성을 위한 원동력이며 세말에 오실 그리스도는 그의 완성을 뜻합니다.




대림절은 위에서 지적한 세 가지 모양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다 말하고 있으나, 그 중에도 주가 되는 생각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입니다. 이러한 신앙진리를 우리 모두가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천주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동정녀 마리아 몸에서 잉태되어 나시고…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사도신경). 그리스도는 이미 우리 인류세계에 와 계시지만, 완전한 일치에서 이루어질 그의 완성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마치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와 있지만, 그 완성은 아직 오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주님의 기도 참조).




이 완성을 즉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을 기다림은 가톨릭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완성의 대열 속에 우리가 참여하여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현재 순간순간의 생활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탄생과 그분의 재림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의 현재 생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나’라는 이 작은 우주가 완성되느냐, 멸망되느냐가 달려 있고, 우리 공동체의 흥망성쇠도 달려 있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 말이 전제하듯이, 오시는 분을 위하여 합당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대림절은 바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타당하게 영접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자모이신 성교회는 대림절을 통하여 새로운 정신과 새 생활로 그리스도를 입은 새 사람이 되라고 권고하십니다. 즉 어두움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광명의 갑옷을 입고 묵은 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와 같이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로마 13,13-14; 에페소 4,21-24).




인류역사 안에 오셨던 나자렛 예수의 탄생을 회상하며, 참회로써 새로운 삶의 은총을 얻고, 우리의 생활을 은총에 넘치는 새 생활로 바꾸어 현재의 생활 안에 오시는 그리스도, 또 세말에 영광 중에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기가 곧 대림절의 참된 뜻이라 하겠습니다.












5.              대림 제1주일           <대림시기 묵상>




‘영원한 삶’과 연관된 생활




  준비기도를 한다. 준비기도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 기도가 잘되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이 상태에 머무는 것이 좋다.


  대림은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시기다. 일차적으로는 역사적으로 약 2000년 전에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주 예수님의 탄신일(예수 성탄 대축일)을 생각하면서 그 대축일을 통해 영적인 이익을 얻기 위하여 준비하며, 이차적으로는 세상 종말에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다.




  우리는 주님의 탄신일과 종말에 오실 그분을 아무런 준비 없이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합당한 준비를 갖추어 기다려야 한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깨어 있으시오. 사실 여러분의 주인이 어떤 날에 올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마르 13,33)


이렇게 깨어 있다는 말은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뜻이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시기에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속에 집착하기보다는 주님께 집착해야 한다. 주님의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는 영혼은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 집착하기보다는 영원한 사물에 집착한다.




  이런 영혼은 하루하루의 삶을 성 베르나르도처럼 영원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성인은 자주 이렇게 질문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이것이 영원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렇다. 내가 하는 일 하나하나가 영원한 삶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성찰하면서 살아가는 영혼은 행복하다.」



  깨어있는 영혼은 행복하다




  깨어 있는 영혼은 일상의 삶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주님의 일에 관심을 두면서 살아간다.“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가?” “내 삶은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깨어 있는 영혼이 자주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런 영혼은 우선적으로 자신의 삶을 청산한다.




  사도 성 바오로는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어둠의 행실을 멀리하고 언제나 대낮처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무기를 갖춥시다. 대낮처럼 단정하게 거닙시다. 폭식과 폭음,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새움을 멀리 합시다.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새 옷으로 입으시오. 그리고 욕정을 만족시키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로마 13,13-14)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은 올바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울리는 적절한 말씀이다.


  우리나라 교회에는 판공성사 제도가 있어 이를 잘 이용하면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교회는 대림시기를 지내는 그리스도인들을 주님께 돌아가라고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깨우치고 있다.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장가들고 시집가곤 했으나,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인자의 내림 때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마태 24,38-39)




   세상일에도 충실해야‥‥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주님은 우리가 먹고 마시며 일하는 세상일들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다. 세상엔 사는 한 우리는 세상일을 충실히 해야 한다. 세상이 끝나는 그 날까지 우리는 우리의 일을 충실히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 주님의 정신에 따라 살아가는 생활, 일상사를 늘 영원한 삶과 연관시켜 성찰하는 생활 등을, 주님께서 원하신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의 생활태도를 묵상한 바 있다. 그 어리석은 부자는 오로지 부자 되는 일에만 관심을 두다가 낭패를 당하지 않았던가? 재산과 명예와 쾌락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생에 나아가는 길을 찾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선적으로 이 길을 택하여 걸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림시기에 늘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것은 온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고 그분의 일에 관심을 두면서 살아가는 삶이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 주님의 정신에 따라 살기로 결심하면서 “마라나타(오소서, 주님!)”라고 기도


하자. 그리고 언제나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다하자. “여러분도 준비하고 있으시오. 사실 여러분이 생각지도 않은 시간에 인자는 옵니다.”(마태 24,44)











6.     대림 제1주일 <마태 24,37-44> 너희는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


                                                              변희선 신부




  때는 무더운 여름이었고, 장소는 미국의 옥수수 밭이 광활하게 펼쳐진 아이오와주 시골의 분도회 피정의 집이었다. 당시 신학생이었던 나는 연례 피정을 하느라고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그 곳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오후 시계를 보니, 지도 신부님과의 면담시간이 5분도 채 안 남아 있는게 아닌가! 면담 장소까지 달려가더라도 7~8분은 족히 걸릴 것이고, 더구나 소변이 마렵다는 것을 실감한 나는 상당히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빠르게 머리를 굴리면서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나의 몸 동작들을 미리 그리기 시작하였다. 우선 왼손으로 화장실의 문을 열면서 동시에 오른 손으로는 바지의 지퍼를 내리고, 왼손에 시계를 걸치고 신발을 신으면서 화장실의 변기에 접근하였다.


가능한 최대한의 속도를 내어 소변을 마치기 직전에 왼손으로는 물을 내리고 동시에 오른 손으로는 바지와 지퍼를 올리려 하는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너무 급히 소변을 보다 보니 소변이 모두 배출되기 전에 지퍼를 울린 것이고, 둘은 왼손으로 변기의 물을 내리는 순간, 왼손에 대충 걸려 있던 시계가 변기에 빠지고 만 것이다. 급류에 휩쓸려서 밑으로 빠져나가는 손목 시계를 급히 집으려 하자, 미처 못 올릴 지퍼 속에서도 약간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중요한 것은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피정 지도 신부님께 빨리 달려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3분 정도 늦게 면담실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많은 생각과 묵상을 할 수 있었다. 조그마한 이 사건을 통해 내 정신이 깨어나게 된 것이다. 




  조금 전에 겪은 사건을 대략 들으신 지도 신부님의 웃음과 함께 무더운 여름의 피로감을 저 멀리로 사라짐을 느꼈다. 그리고 아직도 그 때의 장면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떠올릴 수 있는 점이 고맙다. 더욱 소중한 것은 그 때에 묵상했던 말씀이었다. 「깨어 있어라」




  우리들 대부분은 여러 모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타성에 젖어서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 나머지 감성은 무디어지고, 지성은 진실과 거짓을 혼동하며, 가치관은 자기중심적인 쾌락으로 만족하며, 행동 양식은 극히 이기적이면서도 양심의 가책조차 못 느끼며 무책임을 반복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랑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과는 거리가 멀다. 왜 그런가? 스코틀랜드의 신학자 윌리암 바클레이는 세 명의 마귀 이야기를 해준다. 악마 두목인 사탄은 세 마귀를 불러서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속이고 구렁텅이에 빠뜨릴 것인가를 질문하였다.


첫째 마귀는 말하기를 “나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득할 계획입니다.”


둘째 마귀는 “본인은 지옥이 없다고 선전할 생각입니다”


마지막 마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방법은 약간 유치합니다. 나는 하느님도 있고, 지옥도 있다고 말하지만, 단지 죽을 날이 멀었다고 말할 계획입니다”


만족한 웃음을 한 사탄은 말하기를 “내 아들아! 가서 그리하여라. 너는 많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으리라!”




  세상에는 뒤로 미를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절대로 뒤로 미를 수 없는 일도 있다. 돈을 버는 일, 결혼하는 일,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는 일 등등은 매우 중요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미룰 수도 있다.


  만일에 내가 10분 후에 죽을 예정이라면 돈을 버는 일, 장가나 시집가는 일, 장례를 치르는 일 등은 급한 일이라 할 수 없는 노릇일 것이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오늘밤에 재림하신다면 우리가 먼저 j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정신 차려 깨어날 때에 비로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에 대비할 수 있다.










7.        대림 제1주일 <마태 24, 37-44> (가) “깨어 준비하라!”






  지난 여름 한반도를 오르락 내리락하며 퍼붓던 장대비는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특히 지리산 자락에서 야영하던 많은 사람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친구들 혹은 가족들이 어울려 술 마시고. 노래하고 떠들던 한 여름밤의 아름답던 추억이 단잠으로 이어졌을 그 밤이었다. 후두둑! 소리와 함께 퍼붓던 빗줄기는 순식간에 수마가 되어 많은 텐트를 덮쳐버렸다. 아마 지금도 그 언저리 어디에선가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 어느 시신이 썩어가고 있을 것이다.




  중부지방도 마찬가지였다, 개울가의 나지막한 집들은 형태마저 사라져 버렸다.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니다. 얼마 전 중남미를 휩쓸고 간 허리케인은 1만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지난 여름의 슬픈 추억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또한 사건들을 통해서도 참 많은 것을 배운다. 그렇다, 전날까지만 해도 건강하게 웃고 떠들던 사람이 하루 사이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가슴 깊이 배운다. 인간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갑자기 세상을 떠난 사람들 중에는, 전날 돈 걱정, 세상 걱정을 많이 한 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서 남을 미워하고 마음 아파하기도 했을 것이다.




  혹자는 많은 미래의 설계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5년 뒤, 10년 뒤의 계획을 아름답게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 인간이 세운 계획들이 얼마나 쉽게, 무참히 깨어질 수 있는지 배운다. 예수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하신 .말씀이 새롭게 느껴진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




  노아 시대에는 바가 40일간 쏟아져서 온 누리가 물 속에 잠겼다. 비가 오기 전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하다가 홍수에 휩쓸렸다. 그 뿐이었겠는가! 그들은 비가 오는 중에도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욕하고, 욕심부리고, 사기치고, 시기하고, 비난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미신행위를 했을 것이고, 음욕의 노예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홍수에 휩쓸렸다.




  과연 그들이 추구하고 즐겼던 것들이 무슨 소용인가? 그들에게 심판을 준비하라는 경고는


무시되었다. 그리고 무시한 결과는 참담하였다.




  오늘 복음은, 세상사에 눈이 어두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올 종말, 최후의 심판을 망각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내린다. 눈앞에 보이는 것, 현실의 향락만을 가치롭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종말과 최후의 심판은 준엄하게 내려질 것이라는 경고다.


  겉보기에는 두 사람이 같은 침상에 누워있는 것이 같아 보이지만, 하나만 데려간다 하였다. 같이 맷돌질을 하고 있다면 하나만 데려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뽑힌 사람은 누구일까? 깨어 살아가는 사람, 준비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깨어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자신을 자주 바라보며 산다는 의미가 아닐까? 나는 왜 이렇게 하고 있는가? 나는 왜 여기 있나? 궁극적으로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물으며 사는 사람이, 깨어 사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깨어남은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온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갑자기 들이닥칠 그 날에 하느님 좌에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으로 나설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1데살 3,13)라고 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 되게 할 것이다.




  깨어 산다는 것의 의미




  깨어 사는 사람은 철저한 준비를 하게될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준비의 핵심이다. 이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하는가는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그 모양새가 다르게 드러날 것이다. 준비 없는 시험은 보나마나다. 운동시합에 나가는 사람이 준비가 없었다면 그 결과는 뻔한 일이다. 준비 없는 심판 맞이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최후의 심판은 가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언젠가 내게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과연 나는 그 날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김이 새겨 볼 주제다.










8.            대림 제1주일 (가해)   하느님의 때를 준비하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2,1-5 (주께서 영원한 평화의 하느님 나라로 모든 민족들을 모아 들이신다)


제2독서 로마 13,11-14a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왔습니다.)


복 음 마태 24,37-44 (너희는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




하느님의 계산은 인간의 계산과는 다릅니다. 정말 다릅니다. 신앙인은 진정 하느님의 계산을 늘 염두에 두고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기쁨과 은혜는 바로 그것을 아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은혜를 모르면서 사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신앙을 자꾸 인간의 계산으로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외롭고 팍팍하며 또 믿는 것만큼 고달픕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제 또 기다림의 자세로 성탄을 준비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가슴 조이며 기다리고 있고 또 그 준비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인생은 그 자체가 기다림이고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기다리셨습니다.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하느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너무도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성서가 전하고 있는 중요한 단어는 시간입니다. 즉 때를 말합니다. 그것도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계획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보통 때가 아닙니다.




세상 만사는 다 때가 있습니다. 전도서(3장)의 말처럼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메뚜기도 철이 있다고 사업이나 장사도 때를 놓치면 큰 손해를 봅니다. 공부도 그렇고 사는 삶의 여러 부문이 그렇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구원의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또 그분이 원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중요한 때를 카이로스(Kairos)라고 합니다. 여기서 카이로스라는 말은 충분히 찬 시간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곡식이 익은 것은 익을 만한 시간과 노력이 충분히 차 있었기에 익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 때가 되어 오신 것입니다. 이게 카이로스며 또 때가 차면 재림하십니다. 이것이 카이로스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때는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섭리요 계획입니다.




이처럼 대림절은 두 가지 형태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그 분을 영접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닦고 생활을 준비하는 경건한 때입니다. 그리고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시간이 됩니다.




어떻게 보면 대림절은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때이지만 더 분명하게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기를 뜻 없이 헛되게 지내서는 안됩니다.




1독서에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희망의 메시지가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북쪽의 이스라엘은 이미 망해 있었고 남쪽의 유다 왕국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 격이었습니다.




백성들도 공포와 불안에 떨었으며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 이사야가 나타나서 하느님께서 다시 찾아오신다는 기쁨과 희망의 소식을 전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새 길이 열립니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독서의 말씀에서도 깨어나야 할 때가 왔다고 바오로 사도가 외치고 있는데, 성 아우구스띠노가 바로 이 성서 구절을 읽고는 완전히 변화되며 새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는 본래 행복은 쾌락에 있다 하여 온갖 탐욕적인 생활을 다 했지만 그러나 그럴수록 더 허전하고 삶은 메마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번민과 몸부림 끝에 우연히 “집어서 읽어라.”라는 말을 듣고는 얼른 방으로 달려가 바오로 서간경을 펼쳐 보니 바로 로마서 13장 13절이 나왔습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그때까지 눈물 속에서 몹시 괴로워하던 아우구스띠노는 바로 이 대목에서 너무도 큰 하느님의 은총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드디어 찾던 것을 찾았고 만나고자 하던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실로 구원의 때를 만났던 것입니다.




대림절은 우리가 지난 1년을 반성하면서 보다 더 성숙하고 새롭게 변화되는 은혜로운 시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림절은 성장의 시기이고 또한 회개의 시기입니다.




하느님의 계산은 우리의 계산하고는 다릅니다. 정말 다릅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에 그분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불쑥 오십니다. 따라서 늘 단정한 몸과 마음으로 깨어 준비하도록 합시다. 그것이 축복의 길이요 또한 아름답고 멋지게 사는 길입니다.












9.                  대림 제1주일 마태 24,37-44 (가) 기도


                                                      안충석 신부




어느새 구세주 대림절로 접어들어 기다림만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달력으로는 주님과 함께 오늘부터 대망의 1976년 새해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주님의 역사적 탄생을 기념하고 또한 우리 가운데 일상생활인으로 계신 주님의 현존을 새롭게 하며 끝으로 마지막 날에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시기를 말합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일년 동안 우리들이 안간힘을 쓰며 기구하여온 기다림이 과연 얼마나 이뤄지고 있는 것입니까?




당신들은 우리들이 저지른 죄와 벌의 세계 저 건너 멀리 떨어져 계시기만 하시는 분이십니까? 아니 오히려 우리들 자신 편에서 날로 비인간화되어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가기만 한다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저 십자가 사형수로 처형당하시고 무기력하게 끝장나시는 것을 보고 절망과 실의에 젖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엠마오로 가고 있는 제자들처럼 우리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지조차 그 아무도 모릅니다.




생활하신 희망과 약속의 실현으로 실의에 젖은 두 제자들과 함께 걸으시던 주님, 우리 앞길에도 삶의 열의와 새 생명을 주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들은 어리석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가 이 모든 고난을 겪어야 그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쓰라린 경험은 우리의 기도를 계속했어도 우리가 보아온 것은 방향이 조금이라도 바로 잡혀가는 현실이 아니라 날로 오리무중 속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곁에 서서 쳐다보고 있는 동안 지도자들은 주님을 조롱하며 “이 사람이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께서 뽑으신 구세주라면 어디 자신도 살려 보라지”하는 식으로 악은 악의 존립을 위해서 보다 더 큰 그 악의 질과 양을 마냥 일변도로 확대하여 가고만 있을 뿐입니다.


하오나 오늘도 우리 신앙인들은 “구세주 빨리 오사 어두움을 없이하며 동정녀 마리아께서 탄생하옵소서. 성조에게 허락하신 메시아를 보내소서. 어지러운 세상에 방황하는 우리들의 간구함을 들으사 보내 주옵소서.” 애소하며 기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여 당신은 어떻게 오셨습니까? 당신은 당신 자신의 것으로 우리의 인생을 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우리가 버리고자 하였던 바 곧 온전히 연약하고 죽음인 우리의 가련한 인생을 당신이 오심으로써 당신은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며 바라는 것과는 반대로 당신은 예외 없이 인간 수고, 수난의 노력의 정도를 따라 좁고 피흘리는 길을 가셨습니다. 바로 당신은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같은 분이시며 우리와 함께 인생의 길을 걸으셨다는 이유로 우리 인생에도 기다릴 것이 있다는 말입니까? 이런 우리의 삶에도 구원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단 말입니까?




정확하게 바로 말씀드려 이런 우리의 삶의 긍정은 주님의 인간적인 삶에 대한 나의 “아멘”하는 생활입니다. 한편 나의 기대와는 아주 반대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주님의 인간적인 내림에 대한 나의 “예”라는 응답인 것입니다. 주님, 어찌하여 멀리 계시나이까? 하필이면 이 곤경에 숨으시나이까? 무도한 자 그 등쌀에 들볶이고 꾸며낸 그 흉계에 빠져들지 않나이까?




간단없이 기구를 드리는 심정입니다. 오소서! 우리들이 살아날 한 줄기 생명의 빛으로, 속시원하게 트이는 어느 한 구석이 되시고 비록 오늘 울지라도 내일 웃으며 살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리게 하소서! 그리고 온갖 거짓과 죄악이 머리 위에 되돌아오고 그 폭행은 정수리에 떨어지리라는 당신의 정의의 팔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소서.




당신은 아직도 너무나도 답답하고 장기적으로, 저변확대로 흐려진 눈에는 안 띄게 엄숙히 다가오고 계십니다. 당신의 강생으로부터 이 세대 종말까지는 단지 시간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반드시 오시고야 마는 주님, 우리 모두에게 정의와 진리와 자유에 대한 신념을 우리 일상생활에 뿌리박아 주십시오. 내가 이 세상에 오지 않았더라면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도 죄악이 되지 않았으나 이미 내가 이 세상에 왔으므로 나를 믿지 않으면, 진리와 법도대로 살지 않으면 그 사실 자체라도 이미 너희는 이 세상에서 단죄 받는 것이라고 지적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의노와 벌로써 우리들의 세상에서의 얼마나 큰 보속과 무죄한 자들의 희생 위에 오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들에게는 이미 주어진 결정 때문에 이제 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한 마귀가 다른 일곱 마귀를 더 데리고 와서 우리들을 옴싹달싹 못하게 묶어 놓고 처음보다 더 언짢게 된 현실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께서는 오십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말이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너희가 나를 택하지 않고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고 주님은 대답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내림은 지나가지도 않았고 미래의 것도 아니고 지금 당신 이 자리에서 내게 일어난 일로서 주님의 내림이 완성되어갈 따름입니다. 지금은 아직도 이 세상 암흑의 권세 하에 유일한 희망과 약속의 실현인 당신 내림의 대림 시기입니다.




우리 또한 당신께서 참으로 오셨음을 또한 우리와 함께 일상생활 권한 가운데 살아 오셨음을 비로소 완전히 깨닫게 될 날이 반드시 언젠가 오고야 말 것입니다. 대림하실 주님, 어서 빨리 나의 진정한 구세주되시고 기다릴 것이 있는 내 삶의 지주와 기력으로 오소서! 지금 대림의 시기에 착히 살 은총과 기다리는 삶의 용기를 우리 모두에게 주소서. 아멘.












10.              대림 제1주일 마태 24,37-44 (가) 새로운 신앙설계


                                                          염봉덕 신부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대림 첫 주일을 맞이하여 새로운 A해의 첫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대림 첫 주일을 맞은 우리는 우선 대림절의 의미를 묵상하고 새로운 A해의 신앙 설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묵상해 보아야겠습니다.




대림절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례적으로 두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의 탄생을 의미하고 또 다른 의미는 세말의 심판관으로 재림하실 그리스도 오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기쁨을 묘사하기보다는 세말의 심판을 위한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한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 말씀은 한마디로 항상 준비하고 깨어있으라고 경고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을 때에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일 년간의 생활을 회고해 볼 때 가까운 친척, 친지 형제들이 갑자기 주님 곁으로 불려 가신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그 날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 거룩한 미사성제가 봉헌되는 순간에, 혹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니면 고요히 잠든 한밤중에 우리를 부르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 흔히 쓰이는 용어 가운데 유비무환(有備無患)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평소에 준비가 있으면 큰 일을 당해도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항상 깨어 있고, 준비하고 있다면 언제 주님께서 재림하시더라도 기쁘게 맞이할 수 가 있을 것입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이제까지 대림절의 의미와 주님의 말씀을 간단히 묵상해 보았습니다. 이제는 대림절 첫 주일 – 지나간 한 해와 새로운 해의 분기점에서 지나온 일 년을 청산하고 다가온 새해를 더욱 보람있고 유익한 한 해가 되기 위해 A해의 신앙 설계를 어떻게 세워야 될지를 생각해 봅시다. 새로운 A해가 신앙 도약의 한 해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점에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첫째로, 우리는 과거의 죄악을 청산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들이 오래 묵은 죄악을 가슴속에 담고 다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죄악을 속죄하지 않기 때문에 죄악이 누적되고 죄의식을 가져와 그것이 마음속의 즐거움을 상실케하고 용기와 희망을 잃게 합니다.


오늘날 정신 의학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심장병, 위장병, 신경통, 암과 같은 병에 걸리는 원인 중에 하나는 그 사람들이 과거에 깊이 느꼈던 죄책감을 청산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감추어 둠으로써 그것이 육신의 병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이 시간 과거의 죄책감을 청산하고 앞으로 전진해나가는 용기있는 신자가 되어야겠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어떤 뚜렷한 목표를 정하고 앞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년 C해를 보내면서 뒤에 것만 잊고 빈손들고 허수아비가 되어서는 아니되며, 뒤에 것은 잊어버리는 만큼 가벼운 마음과 몸으로 앞의 목표를 향하여 뛰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는 여러분께서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나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년 A해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수첩에 분명한 목표를 세워야겠습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새로운 해에는 좀더 성화되고 교회와 이웃에 봉사하는 아름다운 성도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워 봅시다.




셋째로,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느님에게 감사해야겠습니다. H.Louise Ha Skim이 쓴 유명한 「제야」의 시를 한번 들어봅시다. “그리고 나는 신년의 문턱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게 등불을 주시오. 그것으로 나는 미지의 세계로 안전하게 걸어가리다.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캄캄한 어둠으로 그냥 가세요. 그리고 그대 손을 하느님께 맡기세요. 그것이 등불을 갖고 가는 것보다 안전하리이다.”




이 시인은 미지의 삶을 살아갈 때에 등불과 지식과 지혜를 갖기보다는 즉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수단 방법으로 살기보다는 당신의 손을 하느님께 맡겨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더욱 안전하다고 가르쳐줍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A해에는 이제까지의 모든 죄악을 청산하고, 뚜렷한 목표를 세워,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노력합시다.










11.        대림 제1주일 마태 24,37-44 (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김정진 신부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세상 종말의 날과 공심판의 시간은 아무도 모르며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사람의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이신 성부께서만이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가리켜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시는 이유도 우리들 인간 세계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실제로 세말에 관하여 전혀 몰라서 사람의 아들도 그 일시를 모른다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부들의 해석에 의하면 첫째, 그 날짜를 알리는 것이 결코 우리에게 하등 이익이 못된다는 의미로 둘째,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은 그것을 모르신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셋째, 그 일시를 알리는 것은 천주 성부께서 하실 일이지 당신의 사명이 아니란 말씀으로 받아드려야 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여하튼 예수님이 목적하시는 바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공심판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데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노아 홍수 때의 사람들에 관한 말씀이나 밤도둑에 관한 말씀이나 사람의 아들은 당신들이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두 우리로 하여금 공심판에 대해서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점을 누차 강조하신 것으로 풀이해야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내림에 관하여 우리는 세 가지로 알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약 2천년 전에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탄생하심으로, 둘째는 매일 미사 때마다 제대 위에 내려오심으로, 셋째는 오늘 복음의 중심 줄거리가 되는 세말에 공심판하러 오시는 등, 이상 세 가지 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기억해야 될 점은 예수님의 첫째와 둘째 내림은 어디까지나 구원과 자비와 용서로 충만된 사랑의 내림임에 비하여 셋째 내림은 엄위와 공의와 심판으로 두려움의 내림이란 사실입니다.




여태까지 그처럼 자애스럽고 용서하시려만 들던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는 엿볼 수가 없습니다. <그때에 하늘에는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고 땅에서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을 것이다. 이어 사람의 아들이 하늘의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사람들은 보게 될 것이다.>(마태 24:30)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신자 여러분! 세상 종말은 돌발적으로 터질 듯 닥쳐올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천지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곧 해가 어두워지고 달은 제 빛을 잃을 것이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므로 사람들은 모두 불안과 공포에 떨 것입니다. 또한 지진과 성난 물결이 노호할 때 사람들은 낙담하고 공포에 싸여 기절하고 말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종말이며 이로써 그리스도의 원수들도 종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또한 후세 천국을 생각지 않고 지상생활이 다라는 듯이 세상의 영화와 쾌락과 재물 탐욕만을 일삼던 자들은 크게 실망하여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루가복음해설 514면 참조).




신자 여러분! 세상 종말은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끝이 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공경하지도 않은 원수들에게만 그러한 것이지 진실로 예수님을 기다리고 굳은 신앙과 열성과 기도를 다하여 종말을 맞이하는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그날이야말로 곧 해방의 날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몸을 일으키고 머리를 드시오.




당신들이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입니다(루가 21:28). 예수님의 원수들에게 공포를 의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곧 평화입니다. 저들에게 종말은 모든 사물의 전도이며 전복이며 죄악으로 추하게 된 온갖 형태의 파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 종말을 생각하고 그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날엔 <사랑과 그의 업적만 남는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우리는 민감해야 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생활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종말이 공포의 날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돌아오신다는 즐거운 소식과 함께 기쁨의 시작이 될 것이며 영광과 승리와 개선의 날이 될 것이며 그처럼 바라마지 않던 천국으로 향해서 영원한 복과 상을 받는 최고의 영예의 날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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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대림 제1주일 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대림 제 1 주일

    제1독서 : 이사  2, 1-5

    제2독서 : 로마 13,11-14a

    복   음 : 마태 24,37-44


    제 1 독서 기원전 8세기에 예루살렘은 남왕국 유대라는 아주 작은 나라의 수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예루살렘은 주변의 민족들-특히 앗시리아와 이집트-에 의해 늘 위협을 받고 있었고,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백성의 믿음이 점점 더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런 때에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영광된 미래를 서슴없이 선포한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로 돌아오고 그분께 굳은 믿음을 가진다면 예루살렘은 만국의 중심이 되리라는 것이다.

    대림절 동안 제1독서에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메시지가 메아리치게 될 것이다. 이사야는 기원전 740년에서 700년 사이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했다. 예루살렘 귀족 가문출신인 이사야 예언자의 임무는 위기 중에 있는 백성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인도하는 데 있었다.

    “장자 어느 날엔가”(이사 2,2)는 비교적 먼 미래를 뜻하는 표현법이며, 또한 새로운 질서와 연관된 종말론적인 의미도 포함한다. 율법(tora)은 시온에서 나오고 주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때에는 모든 나라가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산으로 물밀듯이 밀려와 하느님의 법을 배울 것이고, 더 이상 칼을 들어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자는 내다본다.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는 이러한 법적인 기능은 메시아적 왕의 기능이다. 민족들이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종말론적 시대의 표징이다. 민족들이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전쟁 무기를 폐기시키는 이러한 평화는 예루살렘(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이름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고 출발점으로 삼아 하느님 계시의 보편적인 현시가 이루어지리라는 예견이다. 이사야 2,1-5에서 예언자는 축제 때 예루살렘으로의 순례를 염두에 두고, 미래에 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가 이런 순례에 참여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사야 2,1-5의 강조점은 올바로 살기 위한 가르침을 찾는 데에 있고, 주님의 말씀이야말로 올바른 길임을 부각시킨다.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평화와 정의의 나라는 거저 오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의 마음이 새롭게 바뀌는 가운데에 그 나라는 도래할 것이다.


    제 2 독서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주는 사도 바오로의 종말론적 교훈이다.

    그리스도 신자들이 사는 때는 성서에 마지막 때라고 명명된 “종말론적 때”(Kairos)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때는 이미 시작되었고 새 세상도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자들이 사는 때는 구원의 시기이다. 그에 맞는 새로운 삶이 신자들에게 당연히 요구된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도래를 기다리는 가운데 그분이 이미 가까이 와 계신다고 생각했다(1고린 7,29; 1베드 4,7).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낮’은 단순히 시간 구분상의 낮이 아니라 주님의 날이다. 즉 마지막 때를 뜻하는 표현이다. 이런 종말론적인 동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윤리적인 교훈을 이끌어 낸다. 대낮의 자녀이고 하늘나라의 시민인 그리스도 신자들은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음, 과식, 탐욕, 방탕, 분쟁, 시기 등이 어둠의 행실에 속하는 목록이다. 신자들은 이런 행실을 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어 그분으로 무장해야 한다.

    세례를 통하여 신자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입었지만(갈라 3,27),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각자의 양심과 윤리생활에서 행실로 드러나야 한다. 즉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입음으로써 성령의 궁전이 되었으므로(1고린 6,19)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 믿는 이의 사명이다.


    복  음 마태오 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오심에 대해 언급한다. 약간은 묵시문학적 문체를 사용하며 갑작스런 방문, 흔들림, 뒤집어짐 등이 그 주제를 이룬다. “아무도 주님께서 오시는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모른다.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이 원칙이 마태오 24,37-44를 풀어 나가는 주제이다.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예를 들면서 늘 깨어 준비하라고 강조하신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홍수를 당한 이야기, 두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도둑의 비유는 깨어 있으라는 교훈으로 연결된다. 준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당하지 않으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인 것이다. 이 세 가지 이야기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은 간단하다. “사람의 아들이 언제 올지 모르니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44절). 신자들은 경계 경보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오시는 그때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깨어 기다리는 삶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교회력으로 한해의 첫 주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가해’로 불리는 올 한 해가 오늘로서 시작된 것입니다. ‘시작이 반이다.’ 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어떤 일에 있어서나 시작은 중요한 것이며 또한 그 시작은 이미 끝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정의와 사랑으로 시작한 것은 반드시 좋은 끝을 맺어 유종의 미를 거두지만,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세력 다툼으로 시작한 것은 반드시 비극적 결과로 끝나고 맙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한 해의 첫걸음을 세상의 진리, 세 속의 교묘한 지혜에서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지혜, 인간의 힘으로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자, 올라가자, 야훼의 산으로, 야곱의 하느님께서 계신 전으로! 사는 길을 그에게서 배우고 그 길을 따라가자. 법은 시온에서 나오고, 야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오느니”(이사 2,3).

    구세주 아기 예수의 오심을 손꼽아 기다리는 대림절은 바로 이런 천상의 진리가 우리 안에서 스며들어 오고,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가는 시기임을 깨닫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2천여 년 전에 오셨던 구세주가 우리 안에 다시 오셔서 종말에 오실 그분의 재림을 준비시켜 주시리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입니다.

    이분이 오셔서 모든 민족의 분쟁과 분규를 조정해 주시고, 칼과 창을 보습과 낫으로 만들어 전쟁이나 싸움을 그치게 해주시고 진정한 평화를 이룩해 주실 것입니다. 이 평화의 주님은 서로가 소로에게 적이 되고 경쟁 상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벗이 되고 이웃이 되게끔 이끌어 주는 사랑의 원천,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2,5은 “오, 야곱의 가문이여, 야훼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자.”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매우 언짢은 얼굴로 소크라테스를 찾아왔습니다.  “소크라테스 선생, 당신 친구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소? 내 말 좀 들어보시오, 글세 ……” “잠깐만!” 소크라테스가 그의 말을 막았습니다. “당신이 이야기하려는 내용을 세 가지 체에 걸러 보았소?” “세 가지 체라니요?” 그 사람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습니다. “그렇소, 당신의 이야기가 세 가지 체에 걸러지는지 어디 한 번 봅시다. 첫 번째 체는 진실이라는 체요. 당신이 지금 하려는 이야기가 모두 진실이라는 증거가 있소?” “아니오. 나도 전해 들었을 뿐이오.” “그렇다면 두 번째 체로는 걸러 보았소? 그것은 선한 체요. 당신이 하려는 이야기가 진실이 아니라면 최소한 선한 것이요” 그 사람은 머뭇거리며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할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세 번째 체로 당신의 이야기가 꼭 필요한 것인지 걸러 봅시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내게 이야기하려고 하는 내용이 진실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고, 꼭 필요한 것도 아니라면 잊어버리시오. 그런 것 때문에 마음 고생할 필요가 없소.”

    대림시기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점은,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서로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고 부담이 되기보다는 기쁨을 주고 사랑을 꽃피우게 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지 말고 대낮으로 생각하며 단정하게 살아야”(로마 13,13) 하는 것입니다. 단정하게 산다는 것은 진정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고 사는 삶, 거기에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진솔한 삶이 있고 바쁜 가운데에서도 여유를 즐길 줄 아는 멋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마태 24,37-44)은 오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그리스도교 신자는 늘 깨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세상의 일들에 마음을 쓰기보다는 주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면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 안에서 주님의 모습을 대하듯이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 깨어 기다림은 단순히 눈을 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과 죄 많음을 마음 깊이 느끼면서 속죄하는 생활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진실하고 선한 체하지 않고 늘 겸허한 마음으로 복음에 비추어 자신을 철저히 되돌아보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림절은 자신의 우상과 거짓 그리고 허상을 깨뜨리는 시기이며,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겼다고 고백한 사도 바오로의 정신에 따라 자신을 철저히 부수는 시기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모든 욕망과 위선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거듭나는 삶을 살 때 그리스도는 내 안에서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2. user#0 님의 말:

     

    대림 제 1 주일

    제1독서 : 이사  2, 1-5

    제2독서 : 로마 13,11-14a

    복   음 : 마태 24,37-44


    제 1 독서 기원전 8세기에 예루살렘은 남왕국 유대라는 아주 작은 나라의 수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예루살렘은 주변의 민족들-특히 앗시리아와 이집트-에 의해 늘 위협을 받고 있었고,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백성의 믿음이 점점 더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런 때에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영광된 미래를 서슴없이 선포한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로 돌아오고 그분께 굳은 믿음을 가진다면 예루살렘은 만국의 중심이 되리라는 것이다.

    대림절 동안 제1독서에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메시지가 메아리치게 될 것이다. 이사야는 기원전 740년에서 700년 사이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했다. 예루살렘 귀족 가문출신인 이사야 예언자의 임무는 위기 중에 있는 백성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인도하는 데 있었다.

    “장자 어느 날엔가”(이사 2,2)는 비교적 먼 미래를 뜻하는 표현법이며, 또한 새로운 질서와 연관된 종말론적인 의미도 포함한다. 율법(tora)은 시온에서 나오고 주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때에는 모든 나라가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산으로 물밀듯이 밀려와 하느님의 법을 배울 것이고, 더 이상 칼을 들어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자는 내다본다.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는 이러한 법적인 기능은 메시아적 왕의 기능이다. 민족들이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종말론적 시대의 표징이다. 민족들이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전쟁 무기를 폐기시키는 이러한 평화는 예루살렘(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이름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고 출발점으로 삼아 하느님 계시의 보편적인 현시가 이루어지리라는 예견이다. 이사야 2,1-5에서 예언자는 축제 때 예루살렘으로의 순례를 염두에 두고, 미래에 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가 이런 순례에 참여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사야 2,1-5의 강조점은 올바로 살기 위한 가르침을 찾는 데에 있고, 주님의 말씀이야말로 올바른 길임을 부각시킨다.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평화와 정의의 나라는 거저 오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의 마음이 새롭게 바뀌는 가운데에 그 나라는 도래할 것이다.


    제 2 독서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주는 사도 바오로의 종말론적 교훈이다.

    그리스도 신자들이 사는 때는 성서에 마지막 때라고 명명된 “종말론적 때”(Kairos)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때는 이미 시작되었고 새 세상도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자들이 사는 때는 구원의 시기이다. 그에 맞는 새로운 삶이 신자들에게 당연히 요구된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도래를 기다리는 가운데 그분이 이미 가까이 와 계신다고 생각했다(1고린 7,29; 1베드 4,7).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낮’은 단순히 시간 구분상의 낮이 아니라 주님의 날이다. 즉 마지막 때를 뜻하는 표현이다. 이런 종말론적인 동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윤리적인 교훈을 이끌어 낸다. 대낮의 자녀이고 하늘나라의 시민인 그리스도 신자들은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음, 과식, 탐욕, 방탕, 분쟁, 시기 등이 어둠의 행실에 속하는 목록이다. 신자들은 이런 행실을 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어 그분으로 무장해야 한다.

    세례를 통하여 신자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입었지만(갈라 3,27),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각자의 양심과 윤리생활에서 행실로 드러나야 한다. 즉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입음으로써 성령의 궁전이 되었으므로(1고린 6,19)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 믿는 이의 사명이다.


    복  음 마태오 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오심에 대해 언급한다. 약간은 묵시문학적 문체를 사용하며 갑작스런 방문, 흔들림, 뒤집어짐 등이 그 주제를 이룬다. “아무도 주님께서 오시는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모른다.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이 원칙이 마태오 24,37-44를 풀어 나가는 주제이다.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예를 들면서 늘 깨어 준비하라고 강조하신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홍수를 당한 이야기, 두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도둑의 비유는 깨어 있으라는 교훈으로 연결된다. 준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당하지 않으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인 것이다. 이 세 가지 이야기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은 간단하다. “사람의 아들이 언제 올지 모르니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44절). 신자들은 경계 경보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오시는 그때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깨어 기다리는 삶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교회력으로 한해의 첫 주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가해’로 불리는 올 한 해가 오늘로서 시작된 것입니다. ‘시작이 반이다.’ 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어떤 일에 있어서나 시작은 중요한 것이며 또한 그 시작은 이미 끝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정의와 사랑으로 시작한 것은 반드시 좋은 끝을 맺어 유종의 미를 거두지만,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세력 다툼으로 시작한 것은 반드시 비극적 결과로 끝나고 맙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한 해의 첫걸음을 세상의 진리, 세 속의 교묘한 지혜에서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지혜, 인간의 힘으로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자, 올라가자, 야훼의 산으로, 야곱의 하느님께서 계신 전으로! 사는 길을 그에게서 배우고 그 길을 따라가자. 법은 시온에서 나오고, 야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오느니”(이사 2,3).

    구세주 아기 예수의 오심을 손꼽아 기다리는 대림절은 바로 이런 천상의 진리가 우리 안에서 스며들어 오고,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가는 시기임을 깨닫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2천여 년 전에 오셨던 구세주가 우리 안에 다시 오셔서 종말에 오실 그분의 재림을 준비시켜 주시리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입니다.

    이분이 오셔서 모든 민족의 분쟁과 분규를 조정해 주시고, 칼과 창을 보습과 낫으로 만들어 전쟁이나 싸움을 그치게 해주시고 진정한 평화를 이룩해 주실 것입니다. 이 평화의 주님은 서로가 소로에게 적이 되고 경쟁 상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벗이 되고 이웃이 되게끔 이끌어 주는 사랑의 원천,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2,5은 “오, 야곱의 가문이여, 야훼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자.”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매우 언짢은 얼굴로 소크라테스를 찾아왔습니다.  “소크라테스 선생, 당신 친구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소? 내 말 좀 들어보시오, 글세 ……” “잠깐만!” 소크라테스가 그의 말을 막았습니다. “당신이 이야기하려는 내용을 세 가지 체에 걸러 보았소?” “세 가지 체라니요?” 그 사람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습니다. “그렇소, 당신의 이야기가 세 가지 체에 걸러지는지 어디 한 번 봅시다. 첫 번째 체는 진실이라는 체요. 당신이 지금 하려는 이야기가 모두 진실이라는 증거가 있소?” “아니오. 나도 전해 들었을 뿐이오.” “그렇다면 두 번째 체로는 걸러 보았소? 그것은 선한 체요. 당신이 하려는 이야기가 진실이 아니라면 최소한 선한 것이요” 그 사람은 머뭇거리며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할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세 번째 체로 당신의 이야기가 꼭 필요한 것인지 걸러 봅시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내게 이야기하려고 하는 내용이 진실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고, 꼭 필요한 것도 아니라면 잊어버리시오. 그런 것 때문에 마음 고생할 필요가 없소.”

    대림시기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점은,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서로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고 부담이 되기보다는 기쁨을 주고 사랑을 꽃피우게 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지 말고 대낮으로 생각하며 단정하게 살아야”(로마 13,13) 하는 것입니다. 단정하게 산다는 것은 진정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고 사는 삶, 거기에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진솔한 삶이 있고 바쁜 가운데에서도 여유를 즐길 줄 아는 멋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마태 24,37-44)은 오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그리스도교 신자는 늘 깨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세상의 일들에 마음을 쓰기보다는 주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면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 안에서 주님의 모습을 대하듯이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 깨어 기다림은 단순히 눈을 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과 죄 많음을 마음 깊이 느끼면서 속죄하는 생활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진실하고 선한 체하지 않고 늘 겸허한 마음으로 복음에 비추어 자신을 철저히 되돌아보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림절은 자신의 우상과 거짓 그리고 허상을 깨뜨리는 시기이며,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겼다고 고백한 사도 바오로의 정신에 따라 자신을 철저히 부수는 시기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모든 욕망과 위선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거듭나는 삶을 살 때 그리스도는 내 안에서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3. user#0 님의 말: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말씀연구>

    대림시기를 맞아 나에게 들려오는 소리는 바로 세례자 요한의 외침이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 왔다.” 그런데 너무 들어서인지 “그런가보다”하는 마음이 듭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난 때는 아마도 기원 후 27년인 듯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례는 28년 1월 즈음이라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광야는 아무도 없는 곳, 버려진 곳이지만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세푸스가 의롭고 자비로운 교사들의 목소리라고 인정했던 사람이다. 대부분의 유다인들은 요한을 비정치적인 가르침을 준 義의 설교가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요한은 로마에 대한 봉기를 요구하지 않고 정의로운 삶, 정의로운 행동, 경건한 헌신을 촉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헤로데 안티파스가 요한을 사형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요세푸스가 그린 요한의 초상은, 당시의 카리스마적 교사들 가운데는 비정치적인 가르침을 전하면서도 당국자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했던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 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것처럼,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세례자는 이전 시대에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위대한 인물들이 하던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그는 광적인 묵시주의자들이나 인본주의적인 지혜교사들, 또는 바리사이적인 엄격주의자들, 랍비적인 전통주의자들, 그리고 왕국을 꿈꾸고 있던 열심당원들의 계열이 아니라 예언자들의 계열에 속했다. 세례자는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그 말씀에 봉사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요한의 일생을 지배하는 힘이었다.


    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 하고 선포하였다.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뿐만 아니라 생활의 개선, 마음의 개선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는 미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 나라”라고 말하지 않고 “하늘 나라”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존경심 때문에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야훼 하느님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주 쓴 말은 “하늘”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야훼 하느님의 이름, 야훼 하느님의 뜻을 말하기 위하여 하늘의 이름, 하늘의 뜻, 하늘의 영광, 하늘의 선물 등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을 상대로 기록한 복음에서는 독자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느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계명을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였으며, 어떻게 실천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의 내 모습을 개선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오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심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이 말씀은 원래 유배지에서 귀환하던 사람들에게 건네졌던 메시지가 새롭게 해석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바빌론에서 구해 내어 고국으로 인도하시면서 앞장서서 행진하셨습니다. 그 길이 나 있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는 그 소리를 듣는 사람들에게 왕의 행차 길을 준비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알리는 그 선구자로서 사람들을 회개시켜 예수님을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바로 잡아 줄 것입니다.

    소아시아의 관습에 따르면 위대한 인물이 올 때에는 특별히 그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한 전령이 일행에 앞서서, 사막의 길을 닦고 작은 길을 평평하게 고르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막에서 외치는 이는 전령이며, 바빌론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히브리인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이 히브리인의 해방은 예수께서 사람을 악령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줄 구원의 징조였습니다. 요한은 그 해방을 위하여 오시는 예수님을 고하는 전령이며 사람의 마음을 회개하게 하고, 곧게 잡아 주는 사명을 띠고 있습니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온 몸으로 표현하는 세례자 요한. 그의 메시지는 그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입은 옷은 가난뱅이와 예언자의 옷이기도 했습니다(열왕기 하1,8; 즈가리야13,4; 히브리서 11,37). 그리고 그가 먹은 음식은 힘겨운 고행의 음식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가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질 수야 있겠습니까? 요한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는 말씀을 미리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먹는 것, 입는 것 또한 한번 돌아볼 때가 아닐까요?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있는지를…,


    그 때에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강 부근의 사람들이 다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 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

    팔레스티나의 수도 예루살렘은 어떤 형태로든 메시아 운동에 관련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선교에 대한 소문을 넓게 전파한 것은 예루살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점점 온 유다로, 곧 팔레스티나의 남방으로 퍼져 갔습니다.

    그들은 요한에게 와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레위기의 규정에 따라서 유다인들은 세례를 깨끗이 씻어 주는 수단, 또는 고행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요르단 강물에 몸을 담금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이 세례는 죄 고백과 함께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회개하겠다는 결심을 인정하는 표시였습니다. 동시에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보증하는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는 다가올 심판을 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례를 받은 사람은 종말에 하느님의 새 백성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고 또 그 길을 잘 준비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진실한 회개와 함께 생활 태도도 참되게 바꾸는 것이 전제 되어어야 합니다.


    요한의 활동무대는 요르단 강 일대로 국한되었는데 강의 남쪽 유역까지도 포함되었습니다. 요한은 이 지방을 돌아다니며 설교하였습니다. 그곳은 좁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팔레스티나를 두루 다니면서 가르치실 것이며, 그 뒤를 이어 사도들은 팔레스티나를 넘어 온 세상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이 전파되는 지역은 점점 확대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자였습니다(어흥…이건 호랑인가요?). 그는 주인보다 앞서 가면서 이루어져야 할 일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요한이 선포한 메시지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회개는 하나의 필수 요건입니다. 인간은 회개함으로써 하느님께 향하게 되고 그분의 현존과 그분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동시에 죄의 길에서 돌아서고 그 죄를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많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 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8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

    백성의 지도자이지만 자신들만을 생각하는 사람들, 부활이 없다고 믿고 있는 사두가이파 사람들, 그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을 위해 있으면서도 백성을 돌보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가르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나라를 막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너희가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고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가 필요하지만 단순한 표면적 의식이나 단순한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언제나 “나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는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이 물음은 한 인간의 회개의 진실성 여부를 보여줍니다. 인간이 생활 태도를 바꾸고 진심으로 회개하였음을 보여 주는 행동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고 가진 것을 나누는 데서 드러납니다.

    “회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매순간순간에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드러냄으로써 자기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즉 군인이 되었든 세금징수원이 되었든, 법률가가 되었든 교황이 되었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머물며 활동하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9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는 말은 아예 할 생각도 말아라. 사실 하느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필요한 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 순종 같은 덕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대통령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히브리 사람, 바리사이파 사람일지라도 옳게 살지 못한다면 하늘 나라에서 배척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돌은 이방인들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막의 돌로서 아브라함의 후예를 일으키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어받은 상속자로 이방인을 세우시는 일도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0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의 운명은 각각 다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찍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주인의 마음을 외면했다는 것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망각했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른 이들을 현혹하여 열매맺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나무입니까?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그분은 나보다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군중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모습을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곧 오실 것임을 알립니다. 자신은 메시아의 선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 사이에도 그리이스인이나 로마인과 같이 신을 들고 다니든가 신끈을 풀어 주거나 매주는 가장 낮은 등급의 노예 구실을 하는 종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오실 메시아에 비하면 자신은 그분의 종이라고 하기에도 꺼려야 할 만큼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가 부모님의 자녀라는 것. 한 사람의 배우자라는 것. 선생님의 제자라는 것. 한 직장에서 어떤 사람을 모시고 누구와 함께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 이것을 기억한다면 매 순간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명확해 집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끊임없이 반성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12  그분은 손에 키를 드시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팔레스티나에서는 타작이 끝나 타작마당에 알곡과 쭉정이가 함께 섞여 있을 때 농부들이 키 등을 사용하여 무거운 알곡은 땅에 떨어지게 하고, 쭉정이는 바람에 날아가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타작마당이 깨끗해질 뿐 아니라 알곡과 쭉정이가 가려져서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 버릴 수 있게 됩니다.  군중은 이 비유의 말씀을 잘 알 수가 있었습니다. 키질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 보았기 때문입니다. 키질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알곡이지 쭉정이가 아닙니다.

    타작마당은 이 세상이고 키질하는 사람은 메시아이시고, 알곡은 올바른 사람, 쭉정이는 악인, 곳간은 하늘 나라, 꺼지지 않는 불은 지옥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인 동시에 최고 심판자이십니다. 심판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르치거나 속거나 하는 일이 없으십니다. 알곡이냐 쭉정이냐가 심판으로 가려지면 아버지의 영원한 곳간, 혹은 지옥의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어디로 갈까요? 곳간으로 갈까요? 아니면…,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세례자 요한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2.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이기 위해 내가 실천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4. user#0 님의 말: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말씀연구>

    대림시기를 맞아 나에게 들려오는 소리는 바로 세례자 요한의 외침이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 왔다.” 그런데 너무 들어서인지 “그런가보다”하는 마음이 듭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난 때는 아마도 기원 후 27년인 듯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례는 28년 1월 즈음이라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광야는 아무도 없는 곳, 버려진 곳이지만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세푸스가 의롭고 자비로운 교사들의 목소리라고 인정했던 사람이다. 대부분의 유다인들은 요한을 비정치적인 가르침을 준 義의 설교가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요한은 로마에 대한 봉기를 요구하지 않고 정의로운 삶, 정의로운 행동, 경건한 헌신을 촉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헤로데 안티파스가 요한을 사형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요세푸스가 그린 요한의 초상은, 당시의 카리스마적 교사들 가운데는 비정치적인 가르침을 전하면서도 당국자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했던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 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것처럼,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세례자는 이전 시대에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위대한 인물들이 하던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그는 광적인 묵시주의자들이나 인본주의적인 지혜교사들, 또는 바리사이적인 엄격주의자들, 랍비적인 전통주의자들, 그리고 왕국을 꿈꾸고 있던 열심당원들의 계열이 아니라 예언자들의 계열에 속했다. 세례자는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그 말씀에 봉사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요한의 일생을 지배하는 힘이었다.


    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 하고 선포하였다.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뿐만 아니라 생활의 개선, 마음의 개선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는 미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 나라”라고 말하지 않고 “하늘 나라”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존경심 때문에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야훼 하느님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주 쓴 말은 “하늘”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야훼 하느님의 이름, 야훼 하느님의 뜻을 말하기 위하여 하늘의 이름, 하늘의 뜻, 하늘의 영광, 하늘의 선물 등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을 상대로 기록한 복음에서는 독자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느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계명을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였으며, 어떻게 실천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의 내 모습을 개선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오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심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이 말씀은 원래 유배지에서 귀환하던 사람들에게 건네졌던 메시지가 새롭게 해석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바빌론에서 구해 내어 고국으로 인도하시면서 앞장서서 행진하셨습니다. 그 길이 나 있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는 그 소리를 듣는 사람들에게 왕의 행차 길을 준비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알리는 그 선구자로서 사람들을 회개시켜 예수님을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바로 잡아 줄 것입니다.

    소아시아의 관습에 따르면 위대한 인물이 올 때에는 특별히 그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한 전령이 일행에 앞서서, 사막의 길을 닦고 작은 길을 평평하게 고르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막에서 외치는 이는 전령이며, 바빌론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히브리인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이 히브리인의 해방은 예수께서 사람을 악령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줄 구원의 징조였습니다. 요한은 그 해방을 위하여 오시는 예수님을 고하는 전령이며 사람의 마음을 회개하게 하고, 곧게 잡아 주는 사명을 띠고 있습니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온 몸으로 표현하는 세례자 요한. 그의 메시지는 그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입은 옷은 가난뱅이와 예언자의 옷이기도 했습니다(열왕기 하1,8; 즈가리야13,4; 히브리서 11,37). 그리고 그가 먹은 음식은 힘겨운 고행의 음식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가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질 수야 있겠습니까? 요한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는 말씀을 미리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먹는 것, 입는 것 또한 한번 돌아볼 때가 아닐까요?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있는지를…,


    그 때에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강 부근의 사람들이 다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 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

    팔레스티나의 수도 예루살렘은 어떤 형태로든 메시아 운동에 관련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선교에 대한 소문을 넓게 전파한 것은 예루살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점점 온 유다로, 곧 팔레스티나의 남방으로 퍼져 갔습니다.

    그들은 요한에게 와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레위기의 규정에 따라서 유다인들은 세례를 깨끗이 씻어 주는 수단, 또는 고행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요르단 강물에 몸을 담금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이 세례는 죄 고백과 함께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회개하겠다는 결심을 인정하는 표시였습니다. 동시에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보증하는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는 다가올 심판을 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례를 받은 사람은 종말에 하느님의 새 백성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고 또 그 길을 잘 준비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진실한 회개와 함께 생활 태도도 참되게 바꾸는 것이 전제 되어어야 합니다.


    요한의 활동무대는 요르단 강 일대로 국한되었는데 강의 남쪽 유역까지도 포함되었습니다. 요한은 이 지방을 돌아다니며 설교하였습니다. 그곳은 좁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팔레스티나를 두루 다니면서 가르치실 것이며, 그 뒤를 이어 사도들은 팔레스티나를 넘어 온 세상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이 전파되는 지역은 점점 확대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자였습니다(어흥…이건 호랑인가요?). 그는 주인보다 앞서 가면서 이루어져야 할 일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요한이 선포한 메시지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회개는 하나의 필수 요건입니다. 인간은 회개함으로써 하느님께 향하게 되고 그분의 현존과 그분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동시에 죄의 길에서 돌아서고 그 죄를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많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 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8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

    백성의 지도자이지만 자신들만을 생각하는 사람들, 부활이 없다고 믿고 있는 사두가이파 사람들, 그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을 위해 있으면서도 백성을 돌보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가르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나라를 막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너희가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고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가 필요하지만 단순한 표면적 의식이나 단순한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언제나 “나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는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이 물음은 한 인간의 회개의 진실성 여부를 보여줍니다. 인간이 생활 태도를 바꾸고 진심으로 회개하였음을 보여 주는 행동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고 가진 것을 나누는 데서 드러납니다.

    “회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매순간순간에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드러냄으로써 자기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즉 군인이 되었든 세금징수원이 되었든, 법률가가 되었든 교황이 되었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머물며 활동하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9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는 말은 아예 할 생각도 말아라. 사실 하느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필요한 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 순종 같은 덕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대통령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히브리 사람, 바리사이파 사람일지라도 옳게 살지 못한다면 하늘 나라에서 배척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돌은 이방인들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막의 돌로서 아브라함의 후예를 일으키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어받은 상속자로 이방인을 세우시는 일도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0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의 운명은 각각 다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찍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주인의 마음을 외면했다는 것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망각했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른 이들을 현혹하여 열매맺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나무입니까?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그분은 나보다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군중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모습을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곧 오실 것임을 알립니다. 자신은 메시아의 선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 사이에도 그리이스인이나 로마인과 같이 신을 들고 다니든가 신끈을 풀어 주거나 매주는 가장 낮은 등급의 노예 구실을 하는 종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오실 메시아에 비하면 자신은 그분의 종이라고 하기에도 꺼려야 할 만큼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가 부모님의 자녀라는 것. 한 사람의 배우자라는 것. 선생님의 제자라는 것. 한 직장에서 어떤 사람을 모시고 누구와 함께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 이것을 기억한다면 매 순간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명확해 집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끊임없이 반성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12  그분은 손에 키를 드시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팔레스티나에서는 타작이 끝나 타작마당에 알곡과 쭉정이가 함께 섞여 있을 때 농부들이 키 등을 사용하여 무거운 알곡은 땅에 떨어지게 하고, 쭉정이는 바람에 날아가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타작마당이 깨끗해질 뿐 아니라 알곡과 쭉정이가 가려져서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 버릴 수 있게 됩니다.  군중은 이 비유의 말씀을 잘 알 수가 있었습니다. 키질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 보았기 때문입니다. 키질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알곡이지 쭉정이가 아닙니다.

    타작마당은 이 세상이고 키질하는 사람은 메시아이시고, 알곡은 올바른 사람, 쭉정이는 악인, 곳간은 하늘 나라, 꺼지지 않는 불은 지옥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인 동시에 최고 심판자이십니다. 심판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르치거나 속거나 하는 일이 없으십니다. 알곡이냐 쭉정이냐가 심판으로 가려지면 아버지의 영원한 곳간, 혹은 지옥의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어디로 갈까요? 곳간으로 갈까요? 아니면…,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세례자 요한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2.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이기 위해 내가 실천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5. user#0 님의 말:

     

    대림 제 2 주일

    제 1 독서 : 이사 11, 1-10

    제 2 독서 : 로마 15, 4-9

    복     음 : 마태  3, 1-12


    제 1 독서 : 이사야 예언서의 아름다운 노래 중의 하나인 이 텍스트는 장차 올 메시아의 모습을 알려준다. 잘린 나무 등걸처럼 약해진 유다 왕국과 백성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 이사야는 미래로 눈을 돌려, 오시는 분을 예고한다.

    그는 다윗의 자손이며 주님의 영으로 도유될 것이니, 우리가 소위 ‘성령 칠은’이라고 일컫는 은사를 충만히 받을 것이다. 도유된 자의 왕위를 유지해 주는 것은 정의와 의로움이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세울 것이고 평화가 넘치게 할 것이다. 창세기 1-2장에서 영감을 얻어, 짐승들을 주제로 한 유토피아적 세계 묘사는 사람들 사이에 증오가 사라진 이러한 평화에 대한 표지이다. 의로운 임금이 형제애로 충만한 세상을 이룩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온 세상에는 주님을 하는 지식이 넘칠 것이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을 하는 지식에 대해 더 자세히 언급했다(예레 31,31-34). 새 계약 덕분에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 주지 않아도 온 나라에는 주님께 대한 지식이 넘쳐흐를 것이다. 주님 친히 그들의 가슴에 법을 새겨 줄 것이기 때문이다.


    제 2 독서 :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주는 권고를 이끌어 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할례받은 유다인들의 종이 되신 것은 조상들에게 하신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하느님의 진실하심 때문이었지만, 이방인들은 이런 것에서 멀리 있었다. 그러나 이방인들도 구원받도록 불렸는데 그것은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하느님의 진실성 때문이 아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오셨던 그리스도(마태 15,24참조)께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신 것은 하느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아 서로 서로를 받아들이고 한마음 한 목소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라.”는 권고이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한 사랑은 그들이 하느님과 멀리 있을 때에도 하느님께서 그들을 맞아들이신 것처럼 이웃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나타난다. 이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 15,11)는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실천하는 길이다.


    복  음 :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선교의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예수님 이전에 이미 유대교 안에서는 정화와 쇄신의 상징으로 침수 세례를 거행하는 관습이 있었다(예를 들면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들어올 때의 침수 세례, 엣세네파 사람들의 침수 세례 등). 세례자 요한이 베푼 세례는 유대교의 세례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요한의 세례는 일회적이었다는 점에서 또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요한의 설교는 모든 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예언적이며 종말론적인 설교였다. 그의 설교는 불과 성령의 도래를 알려준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였고 그는 하느님의 행동을 지시한다. 그 하느님의 행동은 불로 묘사될 수 있고, 그 불은 성령을 뜻한다. 세상에 이미 타오른 불과 성령은 하느님의 분노와 자비하심을 동시에 말해 준다. 이러한 하느님의 심판은 곧 오실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고, 알곡이냐 쭉정이냐에 따라 메시아는 불로써 정화시키거나 태워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설교는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2절)고 시작된다. 회개하지 않고는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유다인이라는 민족적 권리가 그 나라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근본적인 회개 그리고 불과 성령의 세례를 받아들여야 한다.

    회개는 방향의 전환 즉 하느님께 조건없이 머리를 돌리는 것을 뜻한다. 이런 방향 전환은 죄의 뉘우침과 새로운 삶으로의 투신을 동반한다. 이 두 가지는 하느님 나라가 가져다주는 구원을 얻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는 요한의 선포는 예수님의 설교에서 새롭게 선포될 것이다(마태 4,17; 루가 13,5).



    회개하여라!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자 인권주일입니다. 성탄이 다가오면서 교회는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였던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들려주고 그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도록 하고 있습니다. 유다 광야에서 외친 그의 소리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유효한 회개의 촉구요 외침이며, 죄속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살아가는 무감각하고 무디어진 우리들을 일깨우는 목소리인 것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3,2.10).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다는 세례자 요한의 말씀은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결코 지체하거나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는 급박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지체할 시간,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저주받은 나무처럼 최후의 순간을 맞게 될 것이고 열매를 맺지 못한 까닭에 불 속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드시고 타작 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두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마태 3,12).

    이 상징적 표현은 메시아께서 쭉정이와 알곡을 가려내시듯이 앞으로 행하실 종말의 심판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어둠에서 깨어나지 못한 분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다음에 시간이 나면 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신자들의 가정을 방문하면서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되는데 냉담 교우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와 명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한결같은 이야기가 “성당에 안 나가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나가야지요.”라고 하거나, 심지어 어떤 이들은 “기도를 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으로 합니다.”라고 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은 결코 마음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분명 행동입니다. 어떤 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행동으로 옮겨서 멀리 있는 이라면 편지나 카드를 보낸다거나 전화나 방문, 그리고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서 사랑의 증거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헐벗고 굶주린 형제에게 아무것도 베풀지 않으면서 “편안히 가서 잘 쉬십시오.” 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모독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도 그의 서간에서 행동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랑은 자신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을 바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사랑을 입으로가 아닌 행동으로써 실천하신 사랑의 사도입니다. 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삶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즉 회개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자 예루살렘을 비롯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 강 부근의 사람들이 다 요르단 강으로 몰려들어 세례자 요한에게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요 신약을 열어 준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아주었고 사람들의 회개를 불러 일으켜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역할은 오늘날 교회의 사명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들려주면서 메시아의 도래와 메시아가 인간들 가운데 성취시킬 놀라운 사회적 변혁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야훼 하느님을 통해 나타날 ‘평화’와 ‘정의’의 새로운 세계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이들이 몰고 다니리라”(이사 11,6).

    이러한 시적 표현들은 얼마나 깊은 감명을 주는지 모릅니다. 결코 꿈으로만 볼 수 없는, 언젠가는 우리가 이루어야 할 평화의 모습입니다. 이 평화는 욕심과 죄악과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 하나되어 얼싸안는 바다 같은 마음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제2독서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뜻을 따라 모두 한마음이 되어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미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대림절의 참뜻은 세속의 바쁜 일상생활에 묻혀 잃어버린 진정한 자아를 되찾고 자신의 참모습을 회복하는 것에 있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죄를 고백, 용서를 받는 고해성사와 이 참회를 생활로 증거하는 자선, 기도, 단식 등으로 오시는 주님을 깨끗하게 맞이하도록 합시다.

  6. user#0 님의 말:

     

    대림 제 2 주일

    제 1 독서 : 이사 11, 1-10

    제 2 독서 : 로마 15, 4-9

    복     음 : 마태  3, 1-12


    제 1 독서 : 이사야 예언서의 아름다운 노래 중의 하나인 이 텍스트는 장차 올 메시아의 모습을 알려준다. 잘린 나무 등걸처럼 약해진 유다 왕국과 백성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 이사야는 미래로 눈을 돌려, 오시는 분을 예고한다.

    그는 다윗의 자손이며 주님의 영으로 도유될 것이니, 우리가 소위 ‘성령 칠은’이라고 일컫는 은사를 충만히 받을 것이다. 도유된 자의 왕위를 유지해 주는 것은 정의와 의로움이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세울 것이고 평화가 넘치게 할 것이다. 창세기 1-2장에서 영감을 얻어, 짐승들을 주제로 한 유토피아적 세계 묘사는 사람들 사이에 증오가 사라진 이러한 평화에 대한 표지이다. 의로운 임금이 형제애로 충만한 세상을 이룩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온 세상에는 주님을 하는 지식이 넘칠 것이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을 하는 지식에 대해 더 자세히 언급했다(예레 31,31-34). 새 계약 덕분에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 주지 않아도 온 나라에는 주님께 대한 지식이 넘쳐흐를 것이다. 주님 친히 그들의 가슴에 법을 새겨 줄 것이기 때문이다.


    제 2 독서 :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주는 권고를 이끌어 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할례받은 유다인들의 종이 되신 것은 조상들에게 하신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하느님의 진실하심 때문이었지만, 이방인들은 이런 것에서 멀리 있었다. 그러나 이방인들도 구원받도록 불렸는데 그것은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하느님의 진실성 때문이 아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오셨던 그리스도(마태 15,24참조)께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신 것은 하느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아 서로 서로를 받아들이고 한마음 한 목소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라.”는 권고이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한 사랑은 그들이 하느님과 멀리 있을 때에도 하느님께서 그들을 맞아들이신 것처럼 이웃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나타난다. 이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 15,11)는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실천하는 길이다.


    복  음 :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선교의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예수님 이전에 이미 유대교 안에서는 정화와 쇄신의 상징으로 침수 세례를 거행하는 관습이 있었다(예를 들면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들어올 때의 침수 세례, 엣세네파 사람들의 침수 세례 등). 세례자 요한이 베푼 세례는 유대교의 세례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요한의 세례는 일회적이었다는 점에서 또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요한의 설교는 모든 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예언적이며 종말론적인 설교였다. 그의 설교는 불과 성령의 도래를 알려준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였고 그는 하느님의 행동을 지시한다. 그 하느님의 행동은 불로 묘사될 수 있고, 그 불은 성령을 뜻한다. 세상에 이미 타오른 불과 성령은 하느님의 분노와 자비하심을 동시에 말해 준다. 이러한 하느님의 심판은 곧 오실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고, 알곡이냐 쭉정이냐에 따라 메시아는 불로써 정화시키거나 태워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설교는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2절)고 시작된다. 회개하지 않고는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유다인이라는 민족적 권리가 그 나라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근본적인 회개 그리고 불과 성령의 세례를 받아들여야 한다.

    회개는 방향의 전환 즉 하느님께 조건없이 머리를 돌리는 것을 뜻한다. 이런 방향 전환은 죄의 뉘우침과 새로운 삶으로의 투신을 동반한다. 이 두 가지는 하느님 나라가 가져다주는 구원을 얻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는 요한의 선포는 예수님의 설교에서 새롭게 선포될 것이다(마태 4,17; 루가 13,5).



    회개하여라!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자 인권주일입니다. 성탄이 다가오면서 교회는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였던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들려주고 그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도록 하고 있습니다. 유다 광야에서 외친 그의 소리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유효한 회개의 촉구요 외침이며, 죄속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살아가는 무감각하고 무디어진 우리들을 일깨우는 목소리인 것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3,2.10).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다는 세례자 요한의 말씀은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결코 지체하거나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는 급박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지체할 시간,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저주받은 나무처럼 최후의 순간을 맞게 될 것이고 열매를 맺지 못한 까닭에 불 속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드시고 타작 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두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마태 3,12).

    이 상징적 표현은 메시아께서 쭉정이와 알곡을 가려내시듯이 앞으로 행하실 종말의 심판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어둠에서 깨어나지 못한 분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다음에 시간이 나면 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신자들의 가정을 방문하면서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되는데 냉담 교우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와 명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한결같은 이야기가 “성당에 안 나가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나가야지요.”라고 하거나, 심지어 어떤 이들은 “기도를 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으로 합니다.”라고 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은 결코 마음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분명 행동입니다. 어떤 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행동으로 옮겨서 멀리 있는 이라면 편지나 카드를 보낸다거나 전화나 방문, 그리고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서 사랑의 증거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헐벗고 굶주린 형제에게 아무것도 베풀지 않으면서 “편안히 가서 잘 쉬십시오.” 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모독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도 그의 서간에서 행동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랑은 자신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을 바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사랑을 입으로가 아닌 행동으로써 실천하신 사랑의 사도입니다. 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삶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즉 회개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자 예루살렘을 비롯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 강 부근의 사람들이 다 요르단 강으로 몰려들어 세례자 요한에게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요 신약을 열어 준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아주었고 사람들의 회개를 불러 일으켜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역할은 오늘날 교회의 사명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들려주면서 메시아의 도래와 메시아가 인간들 가운데 성취시킬 놀라운 사회적 변혁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야훼 하느님을 통해 나타날 ‘평화’와 ‘정의’의 새로운 세계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이들이 몰고 다니리라”(이사 11,6).

    이러한 시적 표현들은 얼마나 깊은 감명을 주는지 모릅니다. 결코 꿈으로만 볼 수 없는, 언젠가는 우리가 이루어야 할 평화의 모습입니다. 이 평화는 욕심과 죄악과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 하나되어 얼싸안는 바다 같은 마음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제2독서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뜻을 따라 모두 한마음이 되어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미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대림절의 참뜻은 세속의 바쁜 일상생활에 묻혀 잃어버린 진정한 자아를 되찾고 자신의 참모습을 회복하는 것에 있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죄를 고백, 용서를 받는 고해성사와 이 참회를 생활로 증거하는 자선, 기도, 단식 등으로 오시는 주님을 깨끗하게 맞이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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