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11주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11주일






         1. 최기산 신부(가)/ 2                2. 최봉원 신부(가)/ 4


         3. 병의 승화(가)/ 6                  4. 김창석 신부(가)/ 7


         5. 허영업 신부(가)/ 9                6. 교구 주보(가)/10


         7. 최인호 작가(가)/11               


1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이 시대의 사도


                                                        최기산 신부





대통령이 특사를 뽑아서 보낼 때는 잘난 사람을 뽑아서 보내기 마련이다. 적어도 대통령의 의중을 분명히 깨닫고 그의 뜻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큰 회사의 사장을 대신하여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도 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배움도 부족하고 주변머리도 부족한 사람이거나 말솜씨도 거칠고 침을 아무 데서나 뱉는 사람이 특사나 대변인으로 채용되면 지나가던 개도 웃을 것이다. 더구나 그가 횡령을 하고 깡패처럼 칼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들 말할까! 한심하다고 말할 것이다. 안나오는 기침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12사도




예수님께서는 늘상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차 계셨다. 고난받고 있는 사람들이 안쓰러워 바삐 움직이셨다. 이 동네 저 동네 다니시며 병든 자를 치료하셨고 마귀 들려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서 마귀를 쫓아버리셨다. 그분은 인간들이 참 자유를 느낄 수 있도록 즉 병고로부터의 해방, 고난으로부터의 해방, 악마로부터 해방되기를 늘 갈망하셨다. 예수님은 병 고치는 일을 혼자 하셨다. 혼자의 몸으로 여러 지방에 있는 사람들을 동시에 고치실 수 없으시기에 늘 마음 아파하시며 제자들을 뽑으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은 특사로 보내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으로 부족했다. 그야말로 어중이떠중이들이 뽑혔다. 참으로 의외의 인물들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어부들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어부들은 어군 탐지기나 무전기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아무나 어부가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시대의 어부들은 대부분 문맹이고, 가난하고 예의 없고 거칠었다.




특히 갈릴래아 사람들은 이스라엘에서도 하층민이었고 천한 말을 즐겨했다. 어부가 아니더라도 마태오 같은 사람은 세리였다. 당시 세리는 세금을 거둬 로마에 바쳤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았다. 또 그들은 세금을 슬금슬금 횡령하여 자기네 배를 채웠다. 예나 지금이나 시체가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이고 돈이 있는 곳엔 유혹이 뒤따르고 부정이 난무하게 마련이다. 시몬은 어떠한가? 그는 혁명당원 출신이었다. 그는 로마인들을 박살내겠다며 칼을 품고 다니는 무리 중의 하나였다.




유대의 경우에도 혁명당원 출신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은 다 시원찮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용감하지도 못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고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는 모두 줄행랑쳤다. 어쨌든 이런저런 상황으로 볼 때 예수님은 시시한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셨다.




왜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셨을까? 여러 가지 가설을 내세울 수 있다. 우선 부족한 사람들을 뽑아야 전적으로 주님만을 의지할 것이기에 그들을 뽑으셨을 것이다.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잘난 사람은 오만해져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는커녕 자신의 영광을 탐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부족한 사람도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주님께서 만일 잘난 사람만을 뽑으셨다면 부족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을 늘상 한탄하며 살 것이다. 부족한 사람도 희망은 있다. 부족한 사람을 주님은 사랑하신다.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더 염려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절대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 자신의 부족함을 비관해서도 안 된다.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든 어떤 상태에 있든 주님은 남들과 똑같은 사랑을 주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에 누구를 사도로 뽑으셨는가? 일차적으로 성직자들이다. 성직자는 예수님의 특사로서 대변인으로 뽑혔다. 아마도 부족한 인간을 뽑으시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사정책이기에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ꡒ나는 잘난 사람이기에 당연히 뽑힐만하기에 뽑혔다ꡓ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의 실수였다고 강변하는 것밖에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사람들을 뽑으시어 그들에게 병 고치는 능력과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주셨다. 그러므로 오늘도 부족한 사제들을 뽑으시어 병 고치는 능력과 마귀를 몰아내는 능력을 주셨다. 왜 오늘의 사제는 병을 고쳐주지 못하는가? 혹시나 인간적인 능력을 내세워서가 아닌가? 약한자 안에서 당신의 능력을 발휘하시는 예수님을 잊은 것은 아닌가!




오늘 우리는 성소자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를 느낀다. 때로는 왜 일류대학에 갈만한 실력을 갖춘 자들만 신학생으로 뽑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다르시다. 주님의 뜻은 더 깊고 더 심오하시다. 약한 자 안에서 주님의 영광은 드러나는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




광의로 보면 세례 받은 우리 모두는 이 시대에 예수님의 대변인으로 뽑힌 사람들이다. 이 시대의 사제들은 물론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내적으로 육적으로 고난받는 사람들을 치유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주님께서는 누구든 사랑하신다는 소식을 전하여 영적치유를 해주고, 미움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과 기쁨, 평화를 전하여 내적인 병을 치유하며 병자를 위해 함께 기도하면서 병원에 보내어 고쳐주는 치유를 우리가 함께해야 한다. 오늘의 사탄은 뱀에 붙어있지 않고 인간이 좋아하는 돈에 붙어있다. 사람들은 돈에 모든 가치를 두고 있다. 돈에서 해방시키는 것, 그리고 주님께 모든 가치의 우선을 두도록 하는 것이 마귀로부터의 해방이 아닐까!






2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부르심을 따라


                                                              최봉원 신부




크리스챤은 모두 파견 받은 자임


오늘 복음은 예수님 사업의 일꾼으로 뽑힌 열 두 제자들의 파견에 대한 내용을 들려줍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 권능을 주신 후, 가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성부께서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성자는 제자들을 보내시며(요한 20,21) 만방에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만약 오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당신 제자들을 다시 뽑으신다면 우리들 중에 누가 뽑히겠습니까? 요즈음 여성 해방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고, 사회 각 분야에 침투된 그들의 활동이 지대하기에 혹시 여자들을 부르실지, 아니면 상호 유익성을 생각하시어 혼성으로 부르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우리들 중에 평범한 사람들이 제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파견 받은 열 두 제자들은 사실 그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로서 성격과 재능도 각각 달랐습니다. 고기잡이 어부들이 있었는가 하면 세리도 있었으며, 보수파 유대인이 있었는가 하면 열렬한 혁명 당원도 있었습니다. 또 야심 많기로 유명한 사람, 물욕(物慾)이 많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서민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 중엔 형제가 함께 불리운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다양성은 누구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으며 또 각자의 고유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말로써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행동으로써 병을 고쳐 주며 악령들을 쫓아 내 주었습니다. 오로지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서 타고 난 재능과 소질을 충분히 발휘하여 사명 수행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으며, 병자가 치유되고 죽은 자가 살아났으며, 마귀들이 도망을 치기도 했습니다.




또 하느님의 정의는 결국 악을 멸하고 선을 이룰 것이라는 점을 사람들은 깨달았으며, 병을 고치고 악령을 쫓아내는 권능은 새 시대, 곧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표(보증)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과 현존으로써 우리 안에 나타났다는 것이지만, 그 완성을 기다려야 하며, 곧 실현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느님 나라의 특징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명한 “사람을 죽이지 말라. 도둑질을 하지 말며, 간음(姦淫)하지 말라”는 등 불의(不義)를 금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선 가져야 할 마음의 태도는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의 정신(마태 5,3-10)이며,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 없이는


세상을 변형시켜 하느님께 바칠 수 없으며 하느님 나라의 완성도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성직자나 수도자가 아닌 평신도의 길을 걷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불리움을 받은 여러분들은 어떠한 사명을 띠고 있습니까? “평신도들은 본래 현세적 일에 종사하여 하느님을 뜻대로 모든 것을 관리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즉 복음의 정신대로 자신들의 임무를 성실히 이행함으로써 세상의 성화를 위해 마치 누룩과도 같이 내부에서 작용하여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빛으로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도록 불리운 자들입니다.”(교회헌장 31)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업을 완수하시기 위해 많은 일꾼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의 일을 돕는 것은 수도자나 성직자만이 하는 일이 아니라 세례 받은 모든 이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운 크리스챤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가서 그리스도를 전하여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열 두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직제자로 뽑히지는 않았으나, 오늘과 같은 시기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 모두는 주님의 제자로 뽑혀 각자 삶의 터전으로 파견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가정에서, 학생은 학교에서, 회사원은 회사에서, 직공은 공장에서 자기 생활에 충실함으로써 각자 누룩이 되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해야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고, 들어야만 믿을 수 있으며, 복음 전파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믿음은 곧 구원과 생명을 얻는 것이고, 거절함은 심판과 죽음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믿고 믿지 않고는 듣는 이들의 자유이지만 복음 전파는 파견 받은 크리스챤의 중대한 사명임을 깨달아 하느님 나라의 복음 전파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아멘.




















3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병(病)의 승화(昇化)






어느 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형수에게 사형집행을 하는데, 집행장에서 우선 눈을 가리우고 손을 뒷짐지게 하였다. 그리고는 그를 기둥에 붙들어 맺다.




다음에는 목구멍을 뾰족한 연필로 찔렀다. 피는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집행자는 말로만 “어이구, 피가 흘러내리네!” 하고는 즉시 그 피를 담을 그릇을 목에 매달았다. 10분 후에 와서 “어이구, 그릇에 다 찾네!” 하며 그릇을 다시 떼었다가 그대로 걸어 주었다. 사형수는 그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고, 피가 한 그릇 나온 것으로만 알았다. 사형 당하는 입장에서는 10분이 한 시간 이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10분 후에 다시 와서 같은 말과 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세 번째 또 와서 두  번째와 같이 되풀이했다. 그러자 그 사형수는 쓰러졌다. 사실은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죽은 것이다. 위의 이야기는 정신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밖에도 담을 뛰어 넘었다든지, 장정 넷이서 간신히 들 수 있는 무거운 물건을 혼자 들었다든지 꼼짝 못하던 환자가 백리길을 걸었다든지 하는 예도 위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창세기에 따르면,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하느님과 유사하게 만들어졌다.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 가능성은 대개 발휘되지 못하고 인간에게만 부여된 이런 특권을 무위로 끝내는 수가 흔하다. 참으로 아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대개 기(氣)가 병들었을 때, 병자가 되는 만큼 병중에 있을 때나 의사나 약에만 의존하지 말고 병을 극복하도록 노력함도 좋을 것이다. 이것을 투병이라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의사도 약도 병원도 필요 없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아담이 낙원에 있을 때 병도 없었고 죽지도 않았던 상태를 한 번 쯤은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우리가 병들게 되는 원인을 생각하면 결국 무리와 불합리가 많다는 것을 시인하게 된다. 무리라면 과로를 들 수 있겠다.




불합리라면 분수에 넘치는 일을 욕심내서 했을 경우를 들 수 있겠다. 병원에서의 치료는 의사의 인술이나 약의 효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병원에 오가고 또 입원해서 심신을 쉬게 하는 때문이기도 하다. 의술이나 약은 쉬며 조절하는 데에서 치료시키는, 자연을 돕는 역할을 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도 “중용”이란 말을 꺼낼 수 있겠다. 중용을 견지하지 못한 데에서 심신의 균형을 잃고 병이 생긴다면 이제 처방은 뻔하다. 중용을 견지하는 일은 보통 의지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 중용을 곧잘 견지하게 된다. 신자라고 병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움과 병고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이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는 어딘가 다르다. 고통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병 앞에서 뿐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태연할 수 없다. 우리 선조 순교자들의 예만 보아도 알 일이다.




예수님이 생존시 병을 낫게 해 주시는 전제 조건이 항상 믿음이었다. 그것은 의지행위이고 마음에 달린 문제란 뜻이다. 예수님 자신이 병으로 앓고 고생하신 일이 있었던가? 치유와 건강을 위해서는 육보다는 영에 치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수 비결 중에 하나가 영육이 균형을 잡는 것이지만 마음을 편히 갖는 것이란 말을 많이 들었다.


                                (1981, 10, 1 월보「가톨릭 중앙의료원」제18호)












4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사랑의 치유(治癒)


                                                김창석 신부






<성서>에 보면 예수가 나환자들을 낫게 해준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요즈음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처럼 병자들을 고쳐 준다고 하면서 실제로 병자들을 낫게 해주는 경우가 있는데, 나병을 고쳐주었다는 말은 아직 들은 적이 없다. 그래서 나도 나환자의 치유를 육체적인 치유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실존적인 치유로 해석하고 싶다.




실존적인 치유라는 의미는 나환자가 실제로 나병은 낫지 않았어도 자기가 나환자라는 것을 잊고 생각하지 않으면 완쾌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사람들로 가득찬 파리 시내의 한 다방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군!”하고 뇌까렸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는데, 그만큼 인간의 생각은 실존과 직결되는 것이다. 하늘이 푸르니까 푸르게 보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내가 푸르게 보니까 푸르다고 하는 주관주의적 입장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같은 이치로 나환자가 스스로 나환자라는 것을 잊고,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나환자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실존적인 치유인 것이다. 그런데 나환자들이 스스로 나환자임을 잊도록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나환자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계기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8년 전 내가 의정부 성당의 주임 신부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한 나환자가 나를 찾아왔다. 자기 친구가 죽게 되었는데 가서 병자 성사를 해달라는 사연이었다. 나는 그를 따라 의정부에서 약 6킬로미터 떨어진 어느 다리 밑으로 갔다. 그곳에는 만신창이인 한 나환자가 죽어가고 있었다. 참혹해서 차마 보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축성된 올리브 기름을 이마에 발라 주어야 하겠는데, 도저히 손을 갖다 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젓가락이나 붓으로 발라 줄까 하다가 그 환자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에라, 모르겠다’하면서 손가락으로 이마에 성유(聖油)를 발라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불쌍한 나환자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나환자들은 물질적으로 아무리 도와 주어도 잘 살기 어렵다. 나환자들이 진짜로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라 정신적인 도움, 즉 인간 대우를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빈손으로라도 나환자 마을을 가끔 찾아가서 그들과 같이 기도하고 식사하고, 또 그들의 방에서 잔다. 그래서 그들은 나와 함께 지내고 대화하는 동안 자신들이 나환자라는 것을 잊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솔직히 말해서 나환자들과 같이 식사하고 그들의 방에서 잔다는 것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지금은 좀 익숙해졌지만 전에는 매우 어려웠다. 악수는 고사하고 그들이 만졌던 문고리를 하이타이로 일일이 씻고, 그들이 가까이 올까 봐 몸을 움츠리곤 하였다. 손가락 없는 뭉툭한 손이 잠긴 막걸리 잔을 받아 마시고, 손가락이 없으니까 잘 닦지 못해 고춧가루나 음식 찌꺼기가 말라붙은 유리컵에 물을 받아 마시면, 뱃속에서 온통 나병 균이 꿈틀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기를 쓰고 그들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마셨다.


잠자리에 들면 닭똥 냄새 같은 이상하고 역겨운 냄새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도 우리와 같은 영혼을 가진 인간이고, 오히려 영혼은 우리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꾹 참았다. 익숙해지니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나환자촌에 갈 때마다 내가 신부라는 것이 매우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이가 옮아 왔다고, 또는 썩는 냄새가 난다고 내 아내가 소위 바가지를 긁는다면 어떻게 할 뻔했나 생각하면 아내가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신부니까 소외된 나환자들과 전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큰 보람을 느낀다. 그래서 나환자들도 그들이 나환자라는 것을 잊고 나와 어울릴 수 있는 것이다.


몇 해 전 중림동 성당의 남녀 회장들이 나와 함께 나환자촌에 가서 같이 1박 2일 동안 기도회를 가진 적이 있다. 우리들은 나환자들과 같이 식사하고, 같이 손잡고 기도하고, 그들의 집에서 잤으며, 여 회장들은 나환자들의 아기를 돌보아 주었다.




기도회 후 어느 나환자는, 그들이 우리에게서 수억 원의 돈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즐거울 수가 있겠느냐고 감격해 하면서, 인간 대접을 받은 것이 너무나 기쁘다고 털어놓았다. 그 기도회 때 어느 나환자가 “문둥이 예수님!”하고 기도하였는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 절실한 뜻과 심정을 알아들을 만했을 것이다.


5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증거하자 


                                       허영업 신부






  나환자들의 성자인 다미안 신부가 나환자 수용소 물로카이섬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곳은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매일같이 욕설과 싸움이 그칠 즐 몰랐고, 비관에 빠져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다. 다미안 신부가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말도 붙일 수가 없었다.


  나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려는 다미안 신부에게「하느넘 사랑 좋아하시네! 하느님이 있다면 우리가 나병에 걸리게 내버려두고, 썩은 채로 죽어가게 하겠어? 만약 하느님이 있다해도 그런 하느님은 못믿겠어. 하느님이 사랑이다! 뭐다 하는 것은 건강한 당신같은 사람이나 하는 잠꼬대 같은 소리야‥‥」하며 빈정거렸다.




  그럴 때마다 다미안 신부는「오 주여! 나로 하여금 문등병 환자가 되게 하소서! 그래서 이들이 마음을 열고, 하느님 사랑을 깨우치게 하소서!」하며 간절히 기도드렸다. 결국 다미안 신부는 자신의 기도대로 나병에 걸려 손바닥이 썩어들어갔다.


  그 때 그는「나도 너희와 같은 나병환자다. 비록 육체는 썩어가지만 마음에는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가 있다. 나를 따라 하느님을 믿어라」고 외쳤다. 다미안 신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했다. 드디어 지옥같은 물로카이 수용소는 믿음과 평화의 공동체가 되어갔다.




희생과 사랑, 그리고 봉사




  다미안 신부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흘륭한 삶을 살다 나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온 세계는 다미안 신부의 희생과 사랑, 그리고 봉사정신을 오늘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여 파견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나누어주신다. 제자들의 파견은 예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뽑으신 제자들의 명단을 보면, 결코 인간적인 능력이나 재능이 많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적인 약점도 많고 무능하고 둔한 사람도 있었다. 세속적인 기준, 즉 좋은 학벌, 명석한 두뇌, 훌륭한 가문 등으로 제자를 뽑으신 것이 아니었다.




12사도의 선별 기준




예수님이 제자들을 뽑으신 기준은, 예수님께 대한 헌신적인 사랑이었다고 생각된다,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수하게 그 말씀을 받아들이냐가중요한 기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축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었다. 마치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제지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것은 자칫 자신을 내세우는 꼴이 되기 쉽다. 자신이 철저히 도구됨을 인정할 때, 가장 흘륭한 제자가 될 수 있다.


  부활 후 제자들의 복음선포는 예수님의 선포와 같은 것이다.「하늘 나라가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예수님의 선포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한 제자들도 내용상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이 선포는 심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선포를 받아들이냐의 여부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 선포는 종말론적이나 또한 뉘우침과 회개의 기회이기도 하다. 특별히 제자들의 기적 행위는 복음선포의 징표와 중거로 사용되었다.




  세례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




세례를 받은 우리도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분명하다.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일을 해야하고 주님을 증거해야 한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나누어주셨던 당신의 능력을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신다. 우리가 겸손되이 청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6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부름 받은 우리가 먼저


교구 주보




선택받은 민족의 사명(출애 19,2-6ㄱ)


하느님께서는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그에 맞갖은 사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다. 그 사명이란 이스라엘이 인류 속에서 사제의 직책을 맡는 일이요 거룩한 백성이 되는 일이다. 사제의 직책을 맡은 이스라엘은 야훼만을 섬기며 뭇 민족에게 야훼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증언하는 데에 전적으로 종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여러 민족들 가운데서 한복판의 징표로 빛을 발할 때(이사 2,1-4 참조) 여느 민족들은 이 하느님의 백성으로부터 배우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택받은 이스라엘의 역할이고 본연의 임무임을 출애굽기는 상기시켜주고 있다.




하느님과 화해한 인간(로마 5,6-11)


모든 인간이 죄에 물들어 살았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많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로마 5,8)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약한 인간 속에 자리잡은 악과 죄를 정복할 수 있는 참사랑을 인간에게 보여주셨다. 당신 아들을 통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 덕분에 우리들은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과 화해했다면 물론 사람들끼리도 화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벗어난 기쁨으로 살아갈 것과 사랑하면서 살도록 불림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한다.




부름받은 우리가 먼저(마태 9,36-10,8)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후 파견하시면서 “이방인의 길로 가거나 사마리아인 고을로 들어가지 말고 이스라엘 백성 중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10,5ㄴ-6)고 명하신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 길 잃은 양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로 몰려오리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마태 8,11; 루가 13,29).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을 받들어 각지로 다니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주는 일을 해야 한다(10,2. 7-8). 예수님의 궁극적 사명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이며 예수님의 모든 활동 지향은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에 초대하는 일이었다. 이 초대에는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았다. 죄인도 병자도 소외자도 결코 배제된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서는 사람들의 온갖 아픔이 말끔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교회를 하느님 백성이 모인 공동체라고 말한다. 이 공동체에서는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일수록 오히려 더 요긴하고, 천하다고 생각되는 지체일수록 더 품위있게 여겨야”(1고린 12,22-23 참조) 할 것이다. “지치고 고통받는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동정하신”(마태 9,36 참조) 예수님의 모습을 교회 내에서 먼저 살아야 여느 사람들도 이 구원의 징표를 보고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7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베드로의 뉘우침과 유다의 후회


최인호 작가




예수께서 산으로 올라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시고, 직접 뽑아 사도로 삼은 제자는 모두 열두 명입니다(루가 6,12-13). 예수께서는 이 열두 제자에게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와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시어 병자를 고쳐주게 하셨습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베드로부터 시작되어 유다로 끝납니다. 제자 이름의 나열을 통해 으뜸제자는 누가 뭐래도 주님께서 “이 바위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베드로임을 알게 되고 꼴찌제자는 주님께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마르 14,21)고 말씀하신 “예수를 팔아 넘긴 가리옷 사람 유다”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으뜸제자인 베드로나 꼴찌제자인 유다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정열적이고 힘센 어부출신인데 유다는 세리였던 마태오를 제치고 회계를 맡아보던 머리 좋고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두 사람의 공통점은 주님을 배신했던 점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배신자이고 유다는 주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 넘긴 배반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두 사람의 운명을 극과 극으로 갈라놓았을까요? 그것은 주님을 배반한 직후에 보인 행동에서 비롯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한 후 주님과 눈을 마주친 다음 “밖으로 나가 슬피 울며”(루가 22,62)




자신의 행동을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내가 죄없는 사람을 배반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마태 27,4)라며 죄의식을 느끼고 후회는 하였지만 결코 회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죄를 뉘우침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었지만 유다는 자신의 죄를 후회는 하였으나 회개하지 못했으므로 끝내 용서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죄를 뉘우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님을 등지지 않고 항상 주님 곁에 머물며 주님을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주님을 배반함과 동시에 주님을 등지고 떠나 멀어져갔던 것입니다. 이를 요한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유다는 곧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요한 13,30).


베드로와 유다는 똑같이 밖으로 나갔으나 한사람은 슬피 울었고, 한 사람은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유다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처럼 주님을 ‘마주봄’과 주님을 ‘등지고 떠남’에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향해 몸을 돌려 그를 마주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인 우리들이 유다처럼 주님을 등지고 캄캄한 밤 어둠 속에 머물러있을 때 우리 죄는 죄책감인 ‘피의 밭’ 속에 그대로 묻혀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뉘우침은 우리가 선 그 자리에서 주님께로 ‘뒤로 돌앗!’ 하고 마주보는 자세를 취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며, 회개야말로 배신자 베드로를 으뜸제자로 만든 원동력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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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 11주일 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연중 제11주일

    제 1 독서 : 출애 19, 2-6a

    제 2 독서 : 로마 5, 6-11

    복     음 : 마태 9, 36-10, 8


    제 1 독서 :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네들을 탄생시킨 출애굽 사건을 계속해서 묵상하고 숙고했다. 제1독서는 양식 비판적으로 볼 때 도입절을 가진 독립된 단위이다. 여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특별한 소명에 대한 성숙한 신학적 반성이 잘 나타난다. 사제라는 단어는 출애굽을 통한 이스라엘 백성의 특별한 사명을 강조한다. 즉 이 백성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증인이 되도록 뽑힘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계약으로 갱신된 삶을 만민 앞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제 2 독서 :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5장, 6장에서 악의 세력을 의인화시켰다. 죄와 죽음의 관계 속에서 악의 세력이 잘 드러난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무상의 사랑을 발견했다. 거저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은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읻. 그리스도 덕분에 죄 많은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고, 인간의 구원이 성취되었고,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화해, 구원 그리고 기쁨은 그리스도 신자의 근본적인 체험을 말해 준다.


    복     음 :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신 이유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분부하시는 말씀에 잘 나타난다. 그것은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뒤따라 병자의 치유나 구마도 제자들의 사명으로 제시되지만 그것은 복음선포를 도와주기 위한 수단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의 사명은 다른 인간적인 사업과 차이가 난다.

    이 첫 파견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제한된다. 왜 세상 만민에게 파견하지 않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보내지 않고 다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예수께서 아직 수난을 겪고 부활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아직 복음의 알맹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나라가 완성되었다고 하지 않고 다만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는 사명으로 파견된다.

    마태오 복음 9장 38절은 사제성소를 말할 때 곧잘 인용되는 구절이다. 추수할 것에 비해 일꾼이 적다는 호소이다. 교회 내의 어떤 신문에서 읽은 글귀가 생각난다. “사제성소는 고속도로와 같다. 모든 사람이 고속도로가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자기 집 앞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성서의 말씀은 부르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신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당신 법을 알려 주시고 당신께서 어떻게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이스라엘을 건져주셨는가를 회상하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당신 자신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당신의 백성이 될 것이라 하시면서 사제의 직책을 맡은 하느님의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거룩함으로의 부르심은 ‘독수리’라는 표상을 사용하여 강인함과 온유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흔들어 놓고 파닥거리며 떨어지는 새끼를 향해 날아 내려와 날개를 펼쳐 받아 올리고 그 죽지로 업어 나르듯 야훼 홀로 그를 인도해 주실 때 어느 다른 신이 그와 함께 하였더냐?”(신명 32, 11-12)라는 모세의 마지막 노래, 찬미가는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시는 이 부르심은 신약에 와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당신의 열두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당신 나라의 추수의 일꾼들로 초대하시는 데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고 앓는 사람을 고쳐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신약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는 또 죽은 사람은 살려내고 나병 환자는 깨끗이 낫게 하고 악마를 추방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복음 선포의 명령을 내리시면서 아무런 보수없이 거저 받은 모든 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다른 복음(루가 10, 1-12 참조)에 보면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오직 주님의 평화만을 빌어주고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으며 그 집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십니다. 복음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요,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기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하느님 나라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아무 조건없이 거저 베풀어주며 가난하고 빈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곧 가난 그 자체가 복음의 선결 조건이 되며 그런 상태에서만 진정 복음이 사람들 마음에 와 닿을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오늘날과 같이 교회가 대형화하고 중산층화한 상태에서 어찌 보면 맞지 않는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해야 하는 마음 자세와 정신적 태도는 시대를 초월한 영원 불변의 진리로 세속화되고 물질 만능주의로 점철된 오늘날의 사회와 교회의 속물화한 모습에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복음의 가르침과 관련, 벤 구리온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묵상 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곡창 제대인 네게브 언덕에 자리잡은 두 개의 무덤에는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였던 벤 구리온과 그의 아내가 잠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대부분은 황무지였습니다. 특히 네게브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매우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1948년 독립한 이스라엘이 초대 총리에 오른 벤 구리온은 바로 이 네게브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네게브 황무지가 필요한 것은 물과 사람의 땀’이라고 외치며 개간 사업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그는 13년 간 총리직에 있으면서 황무지 개간에 온갖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송수관을 만들어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을 끌어왔고 지하수를 개발하였으며 바닷물을 담수화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씨를 뿌려 첫 수확을 거둬들였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적이라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 후 그는 명예롭게 총리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총리 공관에서 나온 그는 운전사에게 네게브로 갈 것을 부탁했습니다. 네게브에서는 농부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벤 구리온은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을 돕고 싶으니 그들의 공동생활 형태인 키부츠(kibutz)의 일원으로 받아달라고 말했습니다. 주민들의 따뜻한 박수 속에 벤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이미 77세였습니다. 다음날부터 벤은 다른 농부들과 똑같이 손에 흙을 묻히며 일을 했습니다. 때때로 너른 바위에 앉아 땀을 식히며 일꾼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벤은 영락없는 농부였습니다.

    벤이 총리로서 받은 특혜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벤을 찾아오는 세계적인 지도자가 너무 많아 그들이 쉬어 가게 만든 4평짜리 방이 유일한 특별 대우였습니다. 1973년 벤은 87세의 나이로 네게브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한 푼의 동전도 단 한 개의 저금 통장도 한 평의 땅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남긴 것이라곤 척박한 네게브 땅을 황금 밀밭으로 바꿔 놓은 정신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막에 금자탑을 세운 벤 구리온의 그 정신, 그 마음으로 우리도 사심없이 주님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 로마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죄 많은 우리 인간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우리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과 원수되었던 우리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생명을 바쳐 사랑을 확인해 주신 주님의 사랑, 그 사랑은 우리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시고 있고 이 거룩함이 온 세상에 널리 퍼져서 모든 이가 구원의 은총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의 은총이 주님을 모르는 모든 이들에게 널리 널리 퍼져 나가 하느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룩될 수 있도록 헌신의 정열을 바쳐 복음선포의 길에 앞장서도록 해야겠습니다.

  2. user#0 님의 말:

     

    연중 제11주일

    제 1 독서 : 출애 19, 2-6a

    제 2 독서 : 로마 5, 6-11

    복     음 : 마태 9, 36-10, 8


    제 1 독서 :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네들을 탄생시킨 출애굽 사건을 계속해서 묵상하고 숙고했다. 제1독서는 양식 비판적으로 볼 때 도입절을 가진 독립된 단위이다. 여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특별한 소명에 대한 성숙한 신학적 반성이 잘 나타난다. 사제라는 단어는 출애굽을 통한 이스라엘 백성의 특별한 사명을 강조한다. 즉 이 백성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증인이 되도록 뽑힘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계약으로 갱신된 삶을 만민 앞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제 2 독서 :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5장, 6장에서 악의 세력을 의인화시켰다. 죄와 죽음의 관계 속에서 악의 세력이 잘 드러난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무상의 사랑을 발견했다. 거저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은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읻. 그리스도 덕분에 죄 많은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고, 인간의 구원이 성취되었고,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화해, 구원 그리고 기쁨은 그리스도 신자의 근본적인 체험을 말해 준다.


    복     음 :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신 이유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분부하시는 말씀에 잘 나타난다. 그것은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뒤따라 병자의 치유나 구마도 제자들의 사명으로 제시되지만 그것은 복음선포를 도와주기 위한 수단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의 사명은 다른 인간적인 사업과 차이가 난다.

    이 첫 파견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제한된다. 왜 세상 만민에게 파견하지 않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보내지 않고 다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예수께서 아직 수난을 겪고 부활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아직 복음의 알맹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나라가 완성되었다고 하지 않고 다만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는 사명으로 파견된다.

    마태오 복음 9장 38절은 사제성소를 말할 때 곧잘 인용되는 구절이다. 추수할 것에 비해 일꾼이 적다는 호소이다. 교회 내의 어떤 신문에서 읽은 글귀가 생각난다. “사제성소는 고속도로와 같다. 모든 사람이 고속도로가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자기 집 앞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성서의 말씀은 부르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신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당신 법을 알려 주시고 당신께서 어떻게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이스라엘을 건져주셨는가를 회상하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당신 자신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당신의 백성이 될 것이라 하시면서 사제의 직책을 맡은 하느님의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거룩함으로의 부르심은 ‘독수리’라는 표상을 사용하여 강인함과 온유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흔들어 놓고 파닥거리며 떨어지는 새끼를 향해 날아 내려와 날개를 펼쳐 받아 올리고 그 죽지로 업어 나르듯 야훼 홀로 그를 인도해 주실 때 어느 다른 신이 그와 함께 하였더냐?”(신명 32, 11-12)라는 모세의 마지막 노래, 찬미가는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시는 이 부르심은 신약에 와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당신의 열두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당신 나라의 추수의 일꾼들로 초대하시는 데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고 앓는 사람을 고쳐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신약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는 또 죽은 사람은 살려내고 나병 환자는 깨끗이 낫게 하고 악마를 추방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복음 선포의 명령을 내리시면서 아무런 보수없이 거저 받은 모든 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다른 복음(루가 10, 1-12 참조)에 보면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오직 주님의 평화만을 빌어주고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으며 그 집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십니다. 복음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요,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기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하느님 나라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아무 조건없이 거저 베풀어주며 가난하고 빈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곧 가난 그 자체가 복음의 선결 조건이 되며 그런 상태에서만 진정 복음이 사람들 마음에 와 닿을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오늘날과 같이 교회가 대형화하고 중산층화한 상태에서 어찌 보면 맞지 않는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해야 하는 마음 자세와 정신적 태도는 시대를 초월한 영원 불변의 진리로 세속화되고 물질 만능주의로 점철된 오늘날의 사회와 교회의 속물화한 모습에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복음의 가르침과 관련, 벤 구리온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묵상 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곡창 제대인 네게브 언덕에 자리잡은 두 개의 무덤에는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였던 벤 구리온과 그의 아내가 잠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대부분은 황무지였습니다. 특히 네게브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매우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1948년 독립한 이스라엘이 초대 총리에 오른 벤 구리온은 바로 이 네게브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네게브 황무지가 필요한 것은 물과 사람의 땀’이라고 외치며 개간 사업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그는 13년 간 총리직에 있으면서 황무지 개간에 온갖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송수관을 만들어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을 끌어왔고 지하수를 개발하였으며 바닷물을 담수화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씨를 뿌려 첫 수확을 거둬들였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적이라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 후 그는 명예롭게 총리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총리 공관에서 나온 그는 운전사에게 네게브로 갈 것을 부탁했습니다. 네게브에서는 농부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벤 구리온은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을 돕고 싶으니 그들의 공동생활 형태인 키부츠(kibutz)의 일원으로 받아달라고 말했습니다. 주민들의 따뜻한 박수 속에 벤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이미 77세였습니다. 다음날부터 벤은 다른 농부들과 똑같이 손에 흙을 묻히며 일을 했습니다. 때때로 너른 바위에 앉아 땀을 식히며 일꾼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벤은 영락없는 농부였습니다.

    벤이 총리로서 받은 특혜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벤을 찾아오는 세계적인 지도자가 너무 많아 그들이 쉬어 가게 만든 4평짜리 방이 유일한 특별 대우였습니다. 1973년 벤은 87세의 나이로 네게브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한 푼의 동전도 단 한 개의 저금 통장도 한 평의 땅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남긴 것이라곤 척박한 네게브 땅을 황금 밀밭으로 바꿔 놓은 정신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막에 금자탑을 세운 벤 구리온의 그 정신, 그 마음으로 우리도 사심없이 주님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 로마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죄 많은 우리 인간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우리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과 원수되었던 우리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생명을 바쳐 사랑을 확인해 주신 주님의 사랑, 그 사랑은 우리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시고 있고 이 거룩함이 온 세상에 널리 퍼져서 모든 이가 구원의 은총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의 은총이 주님을 모르는 모든 이들에게 널리 널리 퍼져 나가 하느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룩될 수 있도록 헌신의 정열을 바쳐 복음선포의 길에 앞장서도록 해야겠습니다.

  3. user#0 님의 말: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예수님

    – 6월 12일(주일) –

    1. 말씀읽기:마태9,36-10,8

    36  또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37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38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 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비롯하여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와 세리였던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가나안 사람 시몬, 그리고 예수를 팔아 넘긴 가리옷 사람 유다이다.예수께서 이 열 두 사람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 가지 말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은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 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 주고 마귀는 쫓아 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사랑밖에 모르시는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드십니다. 그래서 참된 목자로서 군중을 돌보십니다. 내 마음 또한 그런 마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36  또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실 리가 없습니다. 모두 고쳐 주셨다는 말씀이 와 닿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백성들의 목자였지만 그들은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을 통하여 자신들을 돌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과연 사제들이 백성들을 위한 사목을 하고 있는가? 자기 자신을 위한 사목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무리 다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느님 백성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음을 말씀하시는 것은 목자들이 양을 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꿔서 생각을 해보면 목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양들도 현대의 교회에는 너무 많습니다.

    사제들은 맡겨진 양들을 잘 돌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며, 양들은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37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38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추수는 모든 일들의 마무리를 묘사하는 고대적인 표현입니다. 예언자들이 이러한 표현을 만들어 냈으며,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일꾼이 적습니다. 추수할 사람이 부족한 것입니다. 결단을 요구할 사람들이 부족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당신 앞에 펼쳐져 있는 엄청난 추수 일을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메시아의 중대한 활동을 돕게 하시려고 당신의 활동에 친히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로부터 파견을 받으셨듯이, 궁극적으로 제자들을 당신 메시지의 봉사자로 부르시고 파견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목자로 세워놓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하느님의 열매들을 거두어 들이는 것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목자는 필요 없는 목자입니다.

    밭의 일꾼을 고르는 것은 밭주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성실치 않은 일꾼을 물리치시고 성실한 사람으로 당신 밭의 일꾼을 채우실 것입니다.


    열두 사도.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적어도 12사도가 누구인가를 자세하게 알아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 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악마와 모든 병고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할 의무도 아울러 주십니다(마태10,7).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으로 자기들의 일을 입증할 것입니다.

    사도들의 권한과 의무를 생각해 보면서 나는 의무보다는 권한에 더 많은 매력을 느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니 의무에는 관심 없고 오직 권한만을 찾으려고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권한은 어떤 것인지 알아차리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2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비롯하여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와 세리였던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가나안 사람 시몬, 그리고 예수를 팔아 넘긴 가리옷 사람 유다이다.

    사도들의 이름을 볼 때 사도단의 형성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구성을 보면 단순한 어부들이 급진적인 열성당원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야고보와 요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러 모으신 제자단은 유순하고 다루기 쉬운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학식이 출중하거나 사회적 지지도가 높은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완전히 회심을 하고 성령께서 그들에게 불을 놓으셨을 대, 제자들은 죽음을 불사하는 증거자가 되었으며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그렇다 치고, 유다의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을까요? 배반자 유다. 유다가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어느 때를 막론하고 가장 가공스러운 신비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숭고한 사명을 부여해 준 제자들 중의 하나인 유다에 의해서 죽음에 부쳐지는 위험을 스스로 감수하셨습니다.

    우리는 유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나라와 사탄의 영역간의 경계가 서로 밀접하게 붙어 있다는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마음을 조금만 잘못 먹으면 곧바로 악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많은 경우 체험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마음을 조금만 잘못 먹으면…,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막지 않으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하느님께서 그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신 것처럼, 하지만 가슴아파하시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보내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의지를 꺾지 않으십니다.


    ➢1. 베드로 : 축일 6월 29일

    아버지 요나와 어머니 요안나에서 태어난 시몬은 예수께서 ‘반석’이란 의미로 베드로란 이름을 새로 바꾸어주심. 요르단 강가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를 베드로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응ㄴ(마르코3,16;루가6,14) 결정적인 부르심 또는 가이사리아의 선언 후이다(마태16,18). 그때까지는 그를 시몬이라고 부르고 있었다(마르코1,16.29.36;루가5,3.4.5.10).

    당시 히브리인, 특히 평민들 사이에서는 별명이 곧잘 사용되고 있었다. 때로는 별명만 쓰다가 본 이름을 잃는 경우까지도 있었다(마카상2,2-5).


    12사도의 대표임. 베드로가 다른 사도보다 탁월했던 점은 다음과 같다.

    – 예수님의 몸에 대해 염려가 많았다.

    – 배반하고서 즉시 통회를 함(다윗 왕과 비슷)

    – 예수 부활 후에 예수께서는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 번 물으시고 그 응답을 보시고 교회의 모든 권한을 맡김(요한복음)

    – 성령강림후 3천명에게 영세를 줌

    –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구출됨(사도 12, 6-19)

    – 첫 번째 공의회를 예루살렘에서 소집을 함

    – 로마에 전교 중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다 예수께서 ‘네가 양들을 버리고 가니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러 간다’는 말을 듣고 로마에 다시 들어가 순교를 하심. 사도의 무덤위에 세워진 성전이 베드로 대 성전임.



    ➢2. 안드레아 : 축일 11월 30일

    – 안드레아란 ‘남자다운, 용감하다’란 뜻이다.

    – 베드로의 동생으로 요한 세자의 제자였음.

    – 세자 요한의 말을 듣고 요한과 예수님을 찾아가 하루를 묵고 예수의 제자가 됨.

    – 첫 번에 예수님을 만나 그의 형제인 시몬을 데리고 온 이가 안드레아였음.

    – 빵 5개로 예수께서 기적을 하실 때 소년을 데리고 왔었으며,

    – 예수님 부활 후에는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러시아 발칸반도를 거쳐 그리스에 가서 전교를 하심

    – 안드레아는 X형의 십자가에서 ‘오 영광의 십자가여’라고 기도하며 순교를 당하심.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3. 야고보 : 축일 7월 25일

    – 사도 요한의 형으로 장(長) 야고보라 부름

    – 아버지는 제베데오이고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의 친척 살로메

    – 별명은 폭풍의 아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냉대할 때 하늘에서 유황불을 내려 동네를 전멸시키자고 함

    – 예수님을 지상 통치자로 생각

    – 예수님의 가장 측근에서 따른 사람

    – 헤로데의 박해 때 예루살렘에 남음. 44년 파스카 축일전날(성금요일) 참수로 순교

    – 12사도중 제일 보수파(유대법에 철저)라 할 수 있음.

    – 유해는 예루살렘에서 스페인의 꼼포스텔라로 옮김(이곳을 순례하며 교육시킨 것이 오늘날의 꾸르실료로 발전)


    ➢4. 요한 : 축일 12월 27일

    – 요한은 야훼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

    – 복음사가임(요한 복음, 요한 서간, 요한 묵시록)

    – 제베데오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동생

    – 별명은 형과 함께 천둥의 아들

    – 성격은 괄괄하고 활달함

    –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특히 사랑함)

    –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끝까지 남았음

    – 43년 박해 때 에페소로 피난 – 스미르나 – 뻴가모 – 빠아디파 – 필라델피아 – 라오디케아(교회의 지도자가 됨)

    – 95년 제2의 네로라고 하는 도미시아노 황제 박해 때 파트모스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요한의 묵시록을 저술

    – 사랑의 사도라 불리우며, 애덕은 그리스도교의 기초이고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치 않는다고 함


    ➢5. 필립보 : 축일 5월 11일

    – 필립보는 ‘말의 친구’,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뜻

    – 벳사이다 출신(요한 14, 7)

    – 스케디아 지방에서 전교

    – 78년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 유해는 로마의 열두 사도 성당에 안치


    ➢6. 바르톨로메오 : 축일 8월 24일

    – 바르톨로메오는 ‘톨마이(탈미)의 아들’이란 뜻으로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의 아들’ 또는 ‘물을 높은 곳에 바치는 분의 아들’이란 뜻임.

    – 바르톨로메오는 성(姓)이고 이름은 아마 ‘나타니엘’(요한 1, 21)일 것임.

    – 에우세비오에 의하면 성령강림후 인도까지 전교, 또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전교하며 왕과 왕비를 개종시킴

    –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의하면 소아시아 지방인 아르메니아에서 전교

    – 알바누시아에서 산채로 가죽을 벗겨 십자가에 달려 목을 베어 죽임

    – 유해는 알바누시아에 있다가 메소포타미아에 옮겼었고 839년에 로마로 옮겨 티베리아 강 가운데 있는 섬의 성당에 안치됨

    – 거의 모든 해석학자들이 바르톨로메오와 나타나엘이 같은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있다(요한1,45)


    ➢7. 마태오 : 축일 9월 21일

    – 사도이며 동시에 복음사가임

    – 마태오란 히브리말로 ‘하느님의 선물’이란 뜻이다. 또한 ‘위대한’이란 뜻을 가진 라틴어의 Magnus와 ‘하느님’이란 그리스어의 Theos의 합성어로 본다면 ‘하느님을 위한 위대한 자’가 될 것이며, 또는 ‘손’이란 라틴어의 manus와 그리스어의 Theos의 합성어로 본다면 ‘하느님의 손’이란 뜻이 됨

    – 이름은 레위일 것이다.

    – 출생은 갈릴레아 지방

    –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그는 세리였다. 주의할 일은 마르코와 루가가 단순히 마태오라고 하여 토마 앞에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마태오 자신은 세리라는 직책을 밝히고 토마의 다음에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9년간 유다와 에디오피아에서 전교활동을 함

    – 에집트의 에깃부스왕의 왕자를 기적으로 치유함. 이로써 왕가 전체가 신자가 되고 왕의 딸 에피케네이아도 동정녀로 지내기로 서약함. 그러나 헤르따고라는 왕이 왕위에 올랐고 에피케네이아와 결혼을 하려고 하였지만 거절당하자 공주도 죽이고 마태오도 죽임(90년).

    – 유해는 이탈리아의 살레르노에 모셔짐


    ➢8. 토마 : 축일 7월 3일

    별명은 ‘의심 많은 사람’, ‘증거를 볼 때까지 믿지 않는 고집이 센 사람’

    – 토마는 쌍둥이라는 뜻. 그래서 요한은 그를 쌍둥이라고 부르고 있다

    – 갈릴레아 출신의 어부

    –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

    – 최후의 만찬 때 토마의 질문에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대답했고, 부활 때에도 믿지 않다가 예수를 보고 나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함

    – 인도에서 전교활동 함

    – 우상숭배 교도들에 의해 창에 맞아 순교함


    ➢9. 야고보 : 축일 5월 1일

    – 예수님의 친척이라도고 하였고 요셉, 시몬, 유다의 형제(마태13,55).이며 소 야고보(마르코15,40-41)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 알패오와 마리아(마태27,56)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초대 주교가 되었다(사도15,13;갈라1,19). 빌레크벡크의 연구에 따르면, 그의 부친 알패오는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남편 글레오파(요한19,25)와 같은 인물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라 하였는데, 야고보,요셉, 시몬, 유다 등은 모두 예수님의 친척임을 알 수 있다.

    – 필립보와 같이 지냄

    – 엄격한 생활을 함(금육, 금주, 수염과 머리를 안 깎음)

    –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떠밀려 땅에 떨어뜨린 다음 돌로 쳐죽임을 당함

    – 유해는 예루살렘에 안치되었다가 후에 이탈리아의 앙코나의 성 칠리아고 성당에 안치됨


    ➢10. 시몬 : 축일 10월 28일

    시몬은 ‘하느님께서 들어주셨다’ 라는 뜻을 가진 시므온(시메온)의 약어임

    – 별명은 카나나이오스 또는 젤로테스(혁명당원)임

    – 시몬 베드로와 구별하기 위하여 혁명당원 시몬이라고 부름.

    – 젤로테스는 기원 후 70년의 예루살렘멸망 때까지 가장 과격한 이스라엘 독립 운동당이었다.

    – 전설에 의하면 페르시아에서 체포되어 톱으로 육신이 두 동강이 나는 형벌을 당하고 순교했다고 함. 또는 동방 전승에 의하면 에뎃사에서 평화로이 운명했다고도 함


    ➢11. 유다(JUDAS,THADDAEUS : 축일 10월 28일)-타대오

    – 유다는 ‘하느님은 찬양 받으소서’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의 ‘여후다’를 그리스식으로 발음한 것임. 유다의 다른 이름은 타대오서 이는 ‘왕을 붙드는 사람’ 이라는 뜻임

    – 세 가지 이름으로 불리웠음- 타대오(마태10,3;마르3,19)와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루가6,16)는 동일 인물이다. 그리고 어느 고사본에는 타대오 대신에 렛베오라고 기독되어 있다.

    – 예수님의 사촌

    – 메소포타미아와 유프라테스강 가까운 에뎃사에서 선교하고 또 아르메니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건설하고, 그로테스탄으로 옮겨 그곳에서 화살에 맞아 순교함


    ➢12. 유다 이스가리옷

    – 배반자

    – 사도단에서 경리를 맡음

    – 자객이라고도 함

    – 다른 사도들과 같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배반의 죄를 범한 이후 그의 이름은 언제까지나 “예수님을 팔아 넘긴 가리옷 사람 유다”라 불릴 것이다.

    5  예수께서 이 열 두 사람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 가지 말라.  6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가라.

    선교의 대상은 엄밀하게 말해서 이스라엘 나라뿐으로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은 제외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방인들이 구워에서 제외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언자들이 말해 온 것같이 이스라엘의 권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방침을 따르십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 민족을 포함한 온 세상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세우신 계획에 따라 유다인으로부터 시작되어 이방인들에게 퍼져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원칙을 지키려고 하십니다.“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해서 왔다”(마태15,24).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한을 따르는 것이 어려웠을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순명은 하느님의 아들이 자기를 비우는 작업인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나중에 파견될 때는 이러한 규율이 더 이상 그들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모든 이들에게로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가르쳐라”(마태28,19)


    ◀사마리아▶

    앗시리아 왕들이 이곳으로 이동시킨 이방인의 자손인 사마리아인은(기원전 722-21년) 유다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민족으로서도 또 종교상으로도 서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과는 언제나 사이가 나빴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그러했습니다. 복음서에 아름다운 예외가 기록되어 있다고는 하지만(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가10,25, 사마리아 여인-요한4장), 서로 증오한 일반적은 감정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 적대감정은 1세기 말까지 계속되었고, 2세기 로마에 대한 혁명이 끝날 무렵부터 이 반목은 완화되고, 이윽고 같은 종교,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 왔다고 선포하여라.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과 똑같이 선포해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다가 왔다고…”나는 지금  무엇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있습니까?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12사도의 이름을 한번 외워봅시다.



    2. 제자들이 받은 사명을 기억하면서 내가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3. 만일 당신이 예수님이었다면 그래서 이제 당신의 제자들을 뽑는다면 어떤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시고 싶으십니까? 그리고 유다를 당신의 제자단에 넣겠습니까?



    4. 선과 악은 언제나 이웃해 있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악에서 선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기가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선에서 악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향하는 것도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순간 잘못 선택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을 언제나 선으로, 빛으로 향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5. 예수님께서는 가서 하늘 나라가 다고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선포하고 계십니까? 무엇을 전하고 계십니까? 누구를 찾아가고 계십니까?




    4.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

    1.

    2.


    5. 말씀으로 기도하기

  4. user#0 님의 말: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예수님

    – 6월 12일(주일) –

    1. 말씀읽기:마태9,36-10,8

    36  또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37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38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 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비롯하여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와 세리였던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가나안 사람 시몬, 그리고 예수를 팔아 넘긴 가리옷 사람 유다이다.예수께서 이 열 두 사람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 가지 말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은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 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 주고 마귀는 쫓아 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사랑밖에 모르시는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드십니다. 그래서 참된 목자로서 군중을 돌보십니다. 내 마음 또한 그런 마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36  또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실 리가 없습니다. 모두 고쳐 주셨다는 말씀이 와 닿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백성들의 목자였지만 그들은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을 통하여 자신들을 돌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과연 사제들이 백성들을 위한 사목을 하고 있는가? 자기 자신을 위한 사목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무리 다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느님 백성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음을 말씀하시는 것은 목자들이 양을 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꿔서 생각을 해보면 목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양들도 현대의 교회에는 너무 많습니다.

    사제들은 맡겨진 양들을 잘 돌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며, 양들은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37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38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추수는 모든 일들의 마무리를 묘사하는 고대적인 표현입니다. 예언자들이 이러한 표현을 만들어 냈으며,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일꾼이 적습니다. 추수할 사람이 부족한 것입니다. 결단을 요구할 사람들이 부족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당신 앞에 펼쳐져 있는 엄청난 추수 일을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메시아의 중대한 활동을 돕게 하시려고 당신의 활동에 친히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로부터 파견을 받으셨듯이, 궁극적으로 제자들을 당신 메시지의 봉사자로 부르시고 파견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목자로 세워놓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하느님의 열매들을 거두어 들이는 것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목자는 필요 없는 목자입니다.

    밭의 일꾼을 고르는 것은 밭주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성실치 않은 일꾼을 물리치시고 성실한 사람으로 당신 밭의 일꾼을 채우실 것입니다.


    열두 사도.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적어도 12사도가 누구인가를 자세하게 알아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 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악마와 모든 병고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할 의무도 아울러 주십니다(마태10,7).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으로 자기들의 일을 입증할 것입니다.

    사도들의 권한과 의무를 생각해 보면서 나는 의무보다는 권한에 더 많은 매력을 느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니 의무에는 관심 없고 오직 권한만을 찾으려고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권한은 어떤 것인지 알아차리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2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비롯하여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와 세리였던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가나안 사람 시몬, 그리고 예수를 팔아 넘긴 가리옷 사람 유다이다.

    사도들의 이름을 볼 때 사도단의 형성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구성을 보면 단순한 어부들이 급진적인 열성당원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야고보와 요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러 모으신 제자단은 유순하고 다루기 쉬운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학식이 출중하거나 사회적 지지도가 높은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완전히 회심을 하고 성령께서 그들에게 불을 놓으셨을 대, 제자들은 죽음을 불사하는 증거자가 되었으며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그렇다 치고, 유다의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을까요? 배반자 유다. 유다가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어느 때를 막론하고 가장 가공스러운 신비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숭고한 사명을 부여해 준 제자들 중의 하나인 유다에 의해서 죽음에 부쳐지는 위험을 스스로 감수하셨습니다.

    우리는 유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나라와 사탄의 영역간의 경계가 서로 밀접하게 붙어 있다는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마음을 조금만 잘못 먹으면 곧바로 악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많은 경우 체험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마음을 조금만 잘못 먹으면…,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막지 않으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하느님께서 그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신 것처럼, 하지만 가슴아파하시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보내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의지를 꺾지 않으십니다.


    ➢1. 베드로 : 축일 6월 29일

    아버지 요나와 어머니 요안나에서 태어난 시몬은 예수께서 ‘반석’이란 의미로 베드로란 이름을 새로 바꾸어주심. 요르단 강가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를 베드로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응ㄴ(마르코3,16;루가6,14) 결정적인 부르심 또는 가이사리아의 선언 후이다(마태16,18). 그때까지는 그를 시몬이라고 부르고 있었다(마르코1,16.29.36;루가5,3.4.5.10).

    당시 히브리인, 특히 평민들 사이에서는 별명이 곧잘 사용되고 있었다. 때로는 별명만 쓰다가 본 이름을 잃는 경우까지도 있었다(마카상2,2-5).


    12사도의 대표임. 베드로가 다른 사도보다 탁월했던 점은 다음과 같다.

    – 예수님의 몸에 대해 염려가 많았다.

    – 배반하고서 즉시 통회를 함(다윗 왕과 비슷)

    – 예수 부활 후에 예수께서는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 번 물으시고 그 응답을 보시고 교회의 모든 권한을 맡김(요한복음)

    – 성령강림후 3천명에게 영세를 줌

    –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구출됨(사도 12, 6-19)

    – 첫 번째 공의회를 예루살렘에서 소집을 함

    – 로마에 전교 중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다 예수께서 ‘네가 양들을 버리고 가니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러 간다’는 말을 듣고 로마에 다시 들어가 순교를 하심. 사도의 무덤위에 세워진 성전이 베드로 대 성전임.



    ➢2. 안드레아 : 축일 11월 30일

    – 안드레아란 ‘남자다운, 용감하다’란 뜻이다.

    – 베드로의 동생으로 요한 세자의 제자였음.

    – 세자 요한의 말을 듣고 요한과 예수님을 찾아가 하루를 묵고 예수의 제자가 됨.

    – 첫 번에 예수님을 만나 그의 형제인 시몬을 데리고 온 이가 안드레아였음.

    – 빵 5개로 예수께서 기적을 하실 때 소년을 데리고 왔었으며,

    – 예수님 부활 후에는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러시아 발칸반도를 거쳐 그리스에 가서 전교를 하심

    – 안드레아는 X형의 십자가에서 ‘오 영광의 십자가여’라고 기도하며 순교를 당하심.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3. 야고보 : 축일 7월 25일

    – 사도 요한의 형으로 장(長) 야고보라 부름

    – 아버지는 제베데오이고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의 친척 살로메

    – 별명은 폭풍의 아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냉대할 때 하늘에서 유황불을 내려 동네를 전멸시키자고 함

    – 예수님을 지상 통치자로 생각

    – 예수님의 가장 측근에서 따른 사람

    – 헤로데의 박해 때 예루살렘에 남음. 44년 파스카 축일전날(성금요일) 참수로 순교

    – 12사도중 제일 보수파(유대법에 철저)라 할 수 있음.

    – 유해는 예루살렘에서 스페인의 꼼포스텔라로 옮김(이곳을 순례하며 교육시킨 것이 오늘날의 꾸르실료로 발전)


    ➢4. 요한 : 축일 12월 27일

    – 요한은 야훼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

    – 복음사가임(요한 복음, 요한 서간, 요한 묵시록)

    – 제베데오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동생

    – 별명은 형과 함께 천둥의 아들

    – 성격은 괄괄하고 활달함

    –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특히 사랑함)

    –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끝까지 남았음

    – 43년 박해 때 에페소로 피난 – 스미르나 – 뻴가모 – 빠아디파 – 필라델피아 – 라오디케아(교회의 지도자가 됨)

    – 95년 제2의 네로라고 하는 도미시아노 황제 박해 때 파트모스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요한의 묵시록을 저술

    – 사랑의 사도라 불리우며, 애덕은 그리스도교의 기초이고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치 않는다고 함


    ➢5. 필립보 : 축일 5월 11일

    – 필립보는 ‘말의 친구’,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뜻

    – 벳사이다 출신(요한 14, 7)

    – 스케디아 지방에서 전교

    – 78년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 유해는 로마의 열두 사도 성당에 안치


    ➢6. 바르톨로메오 : 축일 8월 24일

    – 바르톨로메오는 ‘톨마이(탈미)의 아들’이란 뜻으로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의 아들’ 또는 ‘물을 높은 곳에 바치는 분의 아들’이란 뜻임.

    – 바르톨로메오는 성(姓)이고 이름은 아마 ‘나타니엘’(요한 1, 21)일 것임.

    – 에우세비오에 의하면 성령강림후 인도까지 전교, 또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전교하며 왕과 왕비를 개종시킴

    –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의하면 소아시아 지방인 아르메니아에서 전교

    – 알바누시아에서 산채로 가죽을 벗겨 십자가에 달려 목을 베어 죽임

    – 유해는 알바누시아에 있다가 메소포타미아에 옮겼었고 839년에 로마로 옮겨 티베리아 강 가운데 있는 섬의 성당에 안치됨

    – 거의 모든 해석학자들이 바르톨로메오와 나타나엘이 같은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있다(요한1,45)


    ➢7. 마태오 : 축일 9월 21일

    – 사도이며 동시에 복음사가임

    – 마태오란 히브리말로 ‘하느님의 선물’이란 뜻이다. 또한 ‘위대한’이란 뜻을 가진 라틴어의 Magnus와 ‘하느님’이란 그리스어의 Theos의 합성어로 본다면 ‘하느님을 위한 위대한 자’가 될 것이며, 또는 ‘손’이란 라틴어의 manus와 그리스어의 Theos의 합성어로 본다면 ‘하느님의 손’이란 뜻이 됨

    – 이름은 레위일 것이다.

    – 출생은 갈릴레아 지방

    –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그는 세리였다. 주의할 일은 마르코와 루가가 단순히 마태오라고 하여 토마 앞에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마태오 자신은 세리라는 직책을 밝히고 토마의 다음에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9년간 유다와 에디오피아에서 전교활동을 함

    – 에집트의 에깃부스왕의 왕자를 기적으로 치유함. 이로써 왕가 전체가 신자가 되고 왕의 딸 에피케네이아도 동정녀로 지내기로 서약함. 그러나 헤르따고라는 왕이 왕위에 올랐고 에피케네이아와 결혼을 하려고 하였지만 거절당하자 공주도 죽이고 마태오도 죽임(90년).

    – 유해는 이탈리아의 살레르노에 모셔짐


    ➢8. 토마 : 축일 7월 3일

    별명은 ‘의심 많은 사람’, ‘증거를 볼 때까지 믿지 않는 고집이 센 사람’

    – 토마는 쌍둥이라는 뜻. 그래서 요한은 그를 쌍둥이라고 부르고 있다

    – 갈릴레아 출신의 어부

    –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

    – 최후의 만찬 때 토마의 질문에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대답했고, 부활 때에도 믿지 않다가 예수를 보고 나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함

    – 인도에서 전교활동 함

    – 우상숭배 교도들에 의해 창에 맞아 순교함


    ➢9. 야고보 : 축일 5월 1일

    – 예수님의 친척이라도고 하였고 요셉, 시몬, 유다의 형제(마태13,55).이며 소 야고보(마르코15,40-41)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 알패오와 마리아(마태27,56)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초대 주교가 되었다(사도15,13;갈라1,19). 빌레크벡크의 연구에 따르면, 그의 부친 알패오는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남편 글레오파(요한19,25)와 같은 인물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라 하였는데, 야고보,요셉, 시몬, 유다 등은 모두 예수님의 친척임을 알 수 있다.

    – 필립보와 같이 지냄

    – 엄격한 생활을 함(금육, 금주, 수염과 머리를 안 깎음)

    –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떠밀려 땅에 떨어뜨린 다음 돌로 쳐죽임을 당함

    – 유해는 예루살렘에 안치되었다가 후에 이탈리아의 앙코나의 성 칠리아고 성당에 안치됨


    ➢10. 시몬 : 축일 10월 28일

    시몬은 ‘하느님께서 들어주셨다’ 라는 뜻을 가진 시므온(시메온)의 약어임

    – 별명은 카나나이오스 또는 젤로테스(혁명당원)임

    – 시몬 베드로와 구별하기 위하여 혁명당원 시몬이라고 부름.

    – 젤로테스는 기원 후 70년의 예루살렘멸망 때까지 가장 과격한 이스라엘 독립 운동당이었다.

    – 전설에 의하면 페르시아에서 체포되어 톱으로 육신이 두 동강이 나는 형벌을 당하고 순교했다고 함. 또는 동방 전승에 의하면 에뎃사에서 평화로이 운명했다고도 함


    ➢11. 유다(JUDAS,THADDAEUS : 축일 10월 28일)-타대오

    – 유다는 ‘하느님은 찬양 받으소서’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의 ‘여후다’를 그리스식으로 발음한 것임. 유다의 다른 이름은 타대오서 이는 ‘왕을 붙드는 사람’ 이라는 뜻임

    – 세 가지 이름으로 불리웠음- 타대오(마태10,3;마르3,19)와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루가6,16)는 동일 인물이다. 그리고 어느 고사본에는 타대오 대신에 렛베오라고 기독되어 있다.

    – 예수님의 사촌

    – 메소포타미아와 유프라테스강 가까운 에뎃사에서 선교하고 또 아르메니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건설하고, 그로테스탄으로 옮겨 그곳에서 화살에 맞아 순교함


    ➢12. 유다 이스가리옷

    – 배반자

    – 사도단에서 경리를 맡음

    – 자객이라고도 함

    – 다른 사도들과 같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배반의 죄를 범한 이후 그의 이름은 언제까지나 “예수님을 팔아 넘긴 가리옷 사람 유다”라 불릴 것이다.

    5  예수께서 이 열 두 사람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 가지 말라.  6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가라.

    선교의 대상은 엄밀하게 말해서 이스라엘 나라뿐으로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은 제외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방인들이 구워에서 제외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언자들이 말해 온 것같이 이스라엘의 권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방침을 따르십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 민족을 포함한 온 세상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세우신 계획에 따라 유다인으로부터 시작되어 이방인들에게 퍼져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원칙을 지키려고 하십니다.“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해서 왔다”(마태15,24).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한을 따르는 것이 어려웠을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순명은 하느님의 아들이 자기를 비우는 작업인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나중에 파견될 때는 이러한 규율이 더 이상 그들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모든 이들에게로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가르쳐라”(마태28,19)


    ◀사마리아▶

    앗시리아 왕들이 이곳으로 이동시킨 이방인의 자손인 사마리아인은(기원전 722-21년) 유다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민족으로서도 또 종교상으로도 서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과는 언제나 사이가 나빴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그러했습니다. 복음서에 아름다운 예외가 기록되어 있다고는 하지만(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가10,25, 사마리아 여인-요한4장), 서로 증오한 일반적은 감정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 적대감정은 1세기 말까지 계속되었고, 2세기 로마에 대한 혁명이 끝날 무렵부터 이 반목은 완화되고, 이윽고 같은 종교,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 왔다고 선포하여라.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과 똑같이 선포해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다가 왔다고…”나는 지금  무엇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있습니까?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12사도의 이름을 한번 외워봅시다.



    2. 제자들이 받은 사명을 기억하면서 내가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3. 만일 당신이 예수님이었다면 그래서 이제 당신의 제자들을 뽑는다면 어떤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시고 싶으십니까? 그리고 유다를 당신의 제자단에 넣겠습니까?



    4. 선과 악은 언제나 이웃해 있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악에서 선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기가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선에서 악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향하는 것도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순간 잘못 선택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을 언제나 선으로, 빛으로 향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5. 예수님께서는 가서 하늘 나라가 다고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선포하고 계십니까? 무엇을 전하고 계십니까? 누구를 찾아가고 계십니까?




    4.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

    1.

    2.


    5. 말씀으로 기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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