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13주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13주일






        1. 최기산 신부(가)/ 2                 2. 김대영 신부(가)/ 4


        3. 최형락 신부(가)/ 6                 4. 김현준 신부(가)/ 8


        5. 강길웅 신부(가)/ 10                6. 자격문제(가)/12


        7.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가)/14 


       


1              연중 제13주일   교황주일  마태 10,37-42 (가)


    설마가 통하는 사회 ꡒ설마 공화국ꡓ     


                                                                    최기산 신부






설마가 사람잡는다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설마병이 너무 만연되어 있다. 방송매체들은 연일 비리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이 검찰에 잡혀가는 내용을 보도한다. 하지만 비리는 근절되지 않는다. 사회는 점점 병들어 가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 직속상관이 잡혀갔는데도 버젓이 뇌물을 챙기다가 들통이 나서 쇠고랑을 찼다.




주말이면 으레 음주측정을 한다. 요즘은 음주운전자가 늘어나서 밤낮 가릴 것 없이 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 또한 설마 공화국의 병폐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ꡒ설마 내가 걸리려고?ꡓ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좀처럼 음주운전자 수는 줄어들지 않는다. 세간에는 음주측정이 초법적이라느니 인권이 침해당한다느니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조금은 강제적이라도 음주운전을 뿌리뽑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음주운전자가 날뛰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 있다. 더구나 귀여운 아이들을 덮쳐서 인명을 살상하기라도 하면 안될 일이다. 음주단속을 부정하는 사람은 음주운전자의 횡포를 경험하지 못해서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얼마 전에 체르노빌(CIH) 바이러스가 온다고 온 세계가 떠들썩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연일 매스컴에서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결과는 설마병이 만연되어 있음으로 끝났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제1의 피해국이었다는 것이다. ꡒ설마 내 컴퓨터야 괜찮겠지?ꡓ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 병이었다. 설마가 국가와 국민의 재산을 많이 축내게 됐다는 것을 우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설마 내가 걸리겠느냐는 생각은 결국 무슨 일이건 적당히 하려는 적당주의를 낳는다. 적당주의는 대강대강 함으로써 대형참사를 부른다.




설마가 통하지 않는 분




예수님께는 설마가 통하지 않는다. ꡒ아무리 우리가 잘못한들 설마 예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기야 하겠는가?ꡓ 이렇게 생각하면 오산이다. 예수님은 철두철미하시다. ꡒ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ꡓ(마태 5, 18―19)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상상해 보면 그분이 얼마나 명확한 분인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분명해야 한다. 설마가 통할 수 없다. 그래서 다음의 것들을 분명하게 지켜야 한다. 첫째, 부모나 자식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 중 최고로 주님을 앞세워야 한다. 두번째는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




자기자신의 가치보다도 더 주님을 가치롭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인간도 동물처럼 자신을 너무 사랑한다. 자신이 위급하면 자식도 내팽개치고 달아나는 것이 동물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나서 포탄이 여기저기서 터지면 업고 가던 아이도 내려놓고 간다지 않는가?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자식을 두고 집을 나가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자신의 편함,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세태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ꡒ그대들이 나를 따르고자 하는가? 자신을 버려라.ꡓ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다. 목숨 하나 끊어지면 모든 노력과 계획은 다 무슨 소용인가? 집안에 있는 금송아지는 다 무슨 소용인가? 자신은 중요하다. 그러나 주님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다. 우리의 선각자들이신 성인들은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버렸다.




주님은 우리더러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다. 누구나 십자가는 다 있다. 나의 것이 제일 큰 것처럼 보이나 다 내게 맞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십자가도 주시나 칠 수 있는 힘도 주신다는 것을 말이다. 만일 우리에게 십자가가 없다면 오만 방자해져서 하느님을 우습게 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약인 셈이다.




복음의 메시지




우리는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생을 얻을 자격도 얻었다. 그러나 이런 자격은 보편적인 자격이다. 이제 내 것으로 삼아야 한다. 주님의 사람으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결단이 필요하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길 수 있는 결단, 즉 혈육의 가치나 물질의 가치보다 우선하는 가치로 주님을 내 가슴에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결단도 요구된다. 자기자신이란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가치들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명예, 취미, 재물 등,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을 위해서라면 다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낚시, 등산, 바둑, 골프에 미쳐서 주일이면 성당에 가는 것은 뒷전에 미루고 비 오는 날이나 한두 번 성당에 나가면서 주님을 위해 자신을 비웠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님을 따르려면 목숨을 걸고 사생결단으로 나서야 한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ꡒ설마 종말이 올까?ꡓ라며 주님을 따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부지런히 이웃사랑도 실천하면서 주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2    연중 제13주일  마태오 10,37-42 (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김대영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주시는 핵심적인 말씀은 자기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린 후에 각자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가 상징하는 것은 지금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십자가가 곧 구원의 상징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시대의 십자가는 고통과 허무, 절망과 실패의 상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던 많은 유다인들이 로마군에 붙잡혀 처참하게 처형당하던 것이 바로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십자가를 통해 자신들의 독립의지가 무참히 짓밟히고 자신들의 끈질긴 노력들이 수포와 좌절로 끝나버리는 것을 수 없이 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십자가는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들 각자의 자기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시대가 변하였기 때문에 십자가의 처형방법이 달라진 오늘날의 교수형대나 전기의자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현대의 삶 속에서 난무하는 억압과 폭력, 그리고 모든 형태의 절망적인 미래를 감수해야한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 주변을 한 번 살펴봅시다. 우리들 중의 누구는 자신의 잘못이 하나도 없이 불구자로 태어났거나 아니면 질병과 사고들로 인해 북구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우리들 중의 대부분은 자신의 노력 하나도 없이 건강한 몸으로 태어났으며, 또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그 다지 애를 쓰지 않고도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누구는 자신의 탓이 하나도 없이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잘살아 보기 위해 죽어라고 애를 쓰지만 별로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암담한 미래를 보고 살아갑니다. 그와 반면에 누구는 자신의 공로 하나도 없이 부족할 것이 없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의 의미를 알기 위해 중요한 것은 우리들은 그런 상황과 환경들에 쉽사리 낙심하여 버리거나 안일한 생활습관에 젖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여 하느님께 그 책임을 돌이며 원망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유복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은 자기 중심적인 삶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침내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곳은 허무와 절망감이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라는 말씀을 통하여 경종을 울리시고 계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시는 말씀은 곧 우리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안일하거나 자기 중심적인 생활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가족이라는 표현의 혈연관계가 의미하는 자기 중심적인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 예수님 중신이라는 삶의 태도에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중심의 삶의 태도는 곧 이웃에 대한 봉사의 삶입니다. 또 달리 말하면 이웃을 위하여 나의 아집과 그릇된 소유욕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벗어 버린다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 뒤따릅니다. 자기 소유물을,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아낌없이 베푼다는 것도 그다지 쉽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을 위해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을 한다는 것은 더욱 힘이 듭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우리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고 가야할 자기 십자가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십자가는 각자의 무게도 다를 뿐 아니라 때로는 엄청난 고통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벗어 팽개쳐 버리고 쉽게쉽게 사는 방법을 택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만나게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다 봅시다. 예수님이 삶에 늘 주목하고 또 그분의 삶을 따르기로 약속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무한한 격려와 용기를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먼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심으로서 우리들에게도 그 가능성과 힘을 주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우리들 각자에게 맡겨진 자기 십자가..자기 중심적인 생활에서 탈피하여 이웃에 대한 봉사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때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평화와 사랑으로 보답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나에게 있어서 자기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반성하며 이 한 주간 동아 내가 만나는 모든 이웃들에게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아멘.










3          연중 제 13주일  마태오 10,37-42 (가) 십자가와 행복


                                                        최형락 신부





고통은 바로 행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다.


  어쩌다 초대 교회사에서 십자가에 처형된 순교자들의 사화를 읽을 때는 정신이 아찔해지고 가슴이 조여 옵니다. 십자가형이 그렇게도 가혹하고 비참했던가를 지금도 피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로마 제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이 십자가 형벌은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형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야말로 최후 한 방울의 피까지 모두 흘리면서 며칠이고 십자가에 매달려 시달리다가 마침내 신음 소리와 함께 죽어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인은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까지 ‘십자가’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떨며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십자가’란 곧 피와 땀과 고통을 대신하는 말마디로 알아듣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확실히 이제 십자가는 우리의 온갖 고통과 우리 인생 행로의 가시밭길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는 곧 고통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는 바로 고통이기에 고통을 원하지 않는 우리로서는 십자가는 달갑지 않으며,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싶고, 그 중에도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외면한 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고통의 십자가야말로 피하거나 등질 것은 못되며 오히려 자신이 짊어지고 당신의 뒤를 따라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하십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역설적으로 강조하시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즉 우리가 영원히 행복할 수 있도록 하시려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고통 없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불란서의 유명한 문학가 뽈끄로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십자가의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면 행복도 원하지 말라’ 참으로 고통 즉 십자가만이 하느님의 참 사랑을 깨달을 수 있고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어,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게 되며, 겸손되이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께 매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으며 영원한 행복에로 향한 희망 속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의 십자가는 결코 하느님의 저주가 아니라 당신에게로 부르고 계시는 신비의 손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우리를 고통 중에 버려 두시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시려는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수 없이 많은 어려움과 고통과 시련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질병과 고통, 빈곤, 불안과 절망의 상태, 그 중에도 명예와 권력과 쾌락의 유혹이 노도같이 덮쳐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쉽게 십자가를 내던지거나 외면한 체 고통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희망과 행복의 포기이며 예수님을 외면한 것이어서 결국에는 자멸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실망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느님은 고통을 주시되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느님은 고통을 주시되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을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갈 충분한 힘과 용기가 주어 졌습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십자가를 포기할까봐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의 좁은 가시밭길을 오르심으로써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과감히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피와 땀으로 뒤범벅이 되신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편태로 시퍼렇게 멍든 등에 십자가를 지시고 비틀거리며 골고타의 자갈길을 오르신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셨으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이렇게 까지 하셨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지극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십자가를 외면하고 원망하며 저주하면서까지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방덕한 사람이며 자기의 죄를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파렴치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행복을 주시려는 주님의 따뜻한 손길을 뿌리치는 행위이며, 자기가 지금 어떠한 죄를 저지르고 어떤 추악한 짓을 거듭하고 있는지에 대한 아무런 뉘우침도 없이 무관심 속에서 가련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종말에 행복하기보다는 틀림없이 멸망할 비운을 겪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 중에도 십자가를 외면한 체 고통을 피하고 오히려 쾌락만을 찾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즉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꿇어 잘못을 용서 청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매일의 고통이 원망스럽고, 하나의 숙명적인 멍에로 생각되어 질질 끌려가는 상태라면, 스스로 우리는 영원한 행복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고통에 굴복하고 자포자기 상태로 십자가를 등진 체, 멋대로 온갖 유혹에 끌려 죄악의 상태로 살고 있다면, 즉시 용기를 내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러러보고 자비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매일 매일의 우리에게 닥쳐오는 어려움들을 예수님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극복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쾌한 나날의 유혹과 괴로움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용기와 희망을 갖고 끝까지 달려가는 곧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고통을 피하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심한 것이며, 십자가는 억지로 지고 갈수록 더욱 무거워 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와 같이 만남의 고통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질 때 참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야 하며 때려 칠 때마다 매를 자원하여 기쁘게 맞아야 한다”고 외친 어느 성인의 말을 생각하면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합시다. 아멘.












4       연중 제13주일  마태 10,37-42 (가) 하느님은 첫째, 나는 셋째


                                                         김현준 신부



한 대학생이 있었다. 공부도 잘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도 충실히 하고, 성적이 뒤진 친구들도 도와주기에 친구들과 교수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어느 날 그는 몇몇 친구들을 하숙집으로 초대하였다.


가을 추수를 끝낸 그의 부모가 과일을 보내주었기에 나누어 먹기 위해서였다. 초대 받아온 친구들은 그의 책상 앞에 걸린 이상한 사진틀을 보았다. 그 사진틀에는 사진 대신 ‘나는 셋째’라는 글귀가 담겨있었다. 친구들은 그 글귀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의 어머니께서 대학 입학 기념으로 저 사진틀을 주시면서 말씀하셨다네, ‘얘야, 이 어미의 말을 깊이 새겨들어라. 언제나 첫째는 하느님이시다. 둘째는 네 이웃이다, 세 번째 차례가 바로 너다!’ 그 이후부터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이 글귀는 나를 이끌어주는 길잡이가 되었다네.”  ‘나는 셋째’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집 떠나는 그 대학생의 길잡이가 되었듯이, 복음전파를 위해 파견 받는 제자들에게 길잡이가 되는 가르침은 무엇일까?


 


오늘 연중 제13주일, 오늘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분부하신 말씀 중에서 마지막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느님 ․이웃 다음에 나




예수님의 길잡이 말씀은 ‘하느님 첫째’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들의 삶의 자리 어디에나 있고, 또 언제나 찾아오는 십자가, 즉 고통과 슬픔, 패배와 절망, 사고와 질병 등의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이 십자가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보통 세가지 자세를 취한다,


 


분노하는 사람이 있다. “왜 이런 일이 하필이면 내게 일어나야 하나?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인가?”하고 분노한다. 분노는 할수록 고통과 슬픔을 무겁게 만든다. 분노는 이웃에 조소적인 태도를 갖게 하며, 더 심해지면 타인을 증오하는 비참한 상태에 떨어지게 된다. 위로의 말도 더 비참한 사람이 있다는 일깨움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꾸어달라는 사람이 있다. 어느 날 밤 한 사람이 꿈을 꾸면서 간청했다. “주님 제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너무 무겁습니다. 제게 맞는 십자가로 바꾸어 주십시오.” 예수님은 그를, 묻힌 사람 수만큼의 십자가가 있는 공동묘지로 안내하고, “그래, 네게 맞는 십자가를 찾아보렴”했다. 십자가를 열심히 고르기 시작했지만 어떤 것은 너무 가볍고, 어떤 것은 더 무겁고‥‥ 동이 터올 즈음, 그는 맞는 십자가를 찾았다. “주님, 이것입니다. 제게 꼭 맞습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살겠습니다.” “그래라”하고 예수님께서 허락해주신 그 십자가가 간밤에 자기가 벗어놓은 바로 그 십자가임을 깨달았을 때는 해가 떠오른 새벽이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1983년 10월 9일 버마 아웅산 사고로 순국한 서상철 동자부장관의 장례식날 19세의 딸은 이런 기도를 했다. “저는 지금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19년 동안 그토록 좋은 아버지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 질병, 어려움의 십자가 상황에서 ‘그렇습니다’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딸을 교통사고로 잃어버리고 불쌍한 어린이를 돌보는 데 전 생애를 바치는 아버지, 민주화를 외치다 죽어간 아들을 대신하는 어머니, 그 모습들은 십자가를 지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십자가는 짊어지는 것




1. 불란서의 작가 「뽈 끌로텔」은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행복도 원하지 마라”고 말했다, 독일의 히틀러 시대에 자유와 정의를 위해 일하다 감옥에서 죽어간 신학자 「본회퍼」는 감옥 안에서 말했다. “하느님이 나에게 사로잡아 주신 나의 삶이라는 바로 이 자리를 떠나,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가 십자가의 실재를 떠나 어디로 도피해 가든지, 하느님은 우리가 도피처로 알고 찾아간 그곳에 추격해오셔서 ,다시금 우리의 삶을 사로잡는다.”


 


그렇다. 하느님은 십자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그 십자가는 하늘을 쳐다보며 찾는 것도 아니고, 바라만 보는 것도 아니다. 십자가는 짊어지는 것이다.  나의 삶 안에 받아들여 주님처럼 등에 짊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삶 안에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 첫째, 나 셋째’의 구조가 잡혀있는 사람이 아닐까. 교회의 큰 행사에서 습관처럼 하늘을 쳐다보며 십자가를 찾는 사람은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5          연중 제13주일  마태오 10,37-42 (가) 이웃과 하느님           


강길웅 신부




제1독서 Ⅱ열왕 4,8~11.14~16a (이분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니 그 방에 모시도록 합시다)


제2독서 로마 6,3~4.8~11 (우리는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복 음 마태 10,37~42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이웃으로 오셨고 우리 또한 그분의 이웃이 되어 드려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에서는 이웃을 따뜻하게 대접한 것이 하느님을 대접한 것이 되어 큰 축복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어느 날 지나가는 나그네 세 사람을 대접한 것이 축복이 되어 백 살이라는 다 늙은 나이에 아들을 약속 받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창세 18,1~15참조).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이들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호의를 베푼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피곤하고 허기진 나그네로 보인 그들을 귀빈처럼 정중하게 모신 것이 그만 하느님을 모시는 영광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1독서도 비슷한 얘깁니다. ‘수넴’이라는 곳에 사는 한 부인이 떠돌이 예언자를 때마다 극진하게 모시자 평생 소망이던 아들을 약속 받게 됩니다. 여인이 아들을 낳고 싶어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평소대로 나그네에게 친절을 베푼 것이 큰상을 약속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나그네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나그네에게 중요한 것은 이웃입니다. 이웃이 좋으면 가는 길이 재미있고 신이 납니다. 그러나 이웃이 나쁘면 굉장히 피곤하며 고통스럽습니다.




어떤 동네에 아주 시끄러운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본래 말이 많은 사람이라 누구하고나 잘 싸웠습니다. 그러자니 동네에서 아주 큰 골치였습니다. 그 여자하고 안 싸운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를 다 싫어합니다. 그 자매가 모두를 싫어하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 여자를 다 싫어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에 한 가정이 이사왔는데 그들이 온 다음부터는 아주 굉장히 달라졌습니다.




새로 이사온 부인은 아주 착한 부인이었습니다. 모두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그 여자를 진정으로 이해하려 했으며 또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레지오 단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썽꾸러기 여자가 변하게 되었습니다. 싸움이 줄어들고 욕도 안 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큰 사 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레지오 단장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저 마귀가 새 사람이 되었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때 단장이 말했습니다. 저 자매도 알고 보면 참 좋은 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인생 안에 예수님이 들어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예수님으로 만듭니다. 반면에 그 안에 마귀가 들어 있는 사람은 모두를 마귀로 만들어 버립니다. 사람은 자기가 베푼 대로 받습니다. 내가 이웃을 무시하면 이웃도 나를 무시하며, 내가 이웃을 존경하면 이웃도 나를 존경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이웃을 무시하면 하느님을 무시하게 되며, 내가 이웃을 존경하게 되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존경하신다는 것입니다. 어폐있는 말 같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누가 이웃이냐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피정지도 하면서 ‘누가 여러분의 가까운 이웃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대답들을 못했습니다. 어떤 형제가 ‘내 마누라가 제일 가까운 이웃입니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맞습니다. 내가 모시고 있는 시어머니가 가까운 이웃이요, 병든 내 자녀가 가까운 이웃입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모든 대상들이 가까운 이웃이요 특히 내 도움이 필요한 자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부모나 자식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당신에게 해 드린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입니까. 누가 과연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바로 내가 지금 무시하고 외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세상 어떤 사람보다 그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이 하느님을 대접해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또 교황주일입니다.




오늘의 시대에 우리는 아주 위대한 교황을 모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마태 16,18참조). 이것이 천주교와 개신교의 근본적인 차입니다. 그리고 그 베드로의 후계자가 바로 교황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오늘의 교황에게 당신의 교회를 맡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존경과 애정으로 그분께 순명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하루의 이웃은 바로 우리 교황입니다. 기도와 특별헌금으로 그분의 전도사업에 동참하도록 합시다.










6             연중 제13주일   마태오 10,37-42 (가) 자격문제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격문제’를 들고 나오십니다. 복음의 전반부를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자격은 첫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과 딸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할 것. 둘째,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을 것. 셋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올 것.


 


하지만 우리는 이 세가지 예수님의 요구를 너무 가혹한 말씀으로 받아드려 거절하기가 일수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부모님이나 형제 자매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가?”


  “더더구나 하나 뿐인 이 목숨을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바칠 수 있는가?”


  “그리고 십자가를 지어야한다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


 


불론댕이라는 줄타기 명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줄 위에서 누구도 보여줄 수 없는 대담한 묘기로서 사람들을 감동 시켰습니다. 불론댕의 제일 뛰어난 묘기는 나이아가라 폭포위에 매놓은 줄 위를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묘기는 조금이라도 실수를 할 때, 틀림없이 죽고 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곡예였습니다. 블론댕은 그 곡예를 끝낸 뒤에, 열렬한 탄성을 올리고 있는 한 소년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아이야, 너는 내가 어깨 위에 사람 하나를 얹어 놓고 갈 수 있으리라 믿느냐?” 그 소년은 폭포의 폭음보다도 더 크게 울리는 음성으로 대답했습니다. “아저씨는 물론 해낼 수 있구말구요!” 그러자 블론댕이 그 소년에게 자기 어깨 위에 올라 설 것을 권했으나, 그 소년은 겁이 나서 뒤로 물러섰습니다. 소년에게 그 아저씨는 줄 타는데 있어서만은 능력과 권능의 하느님처럼 비추어졌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블론댕이라는 줄타기 명수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뒤로 물러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년처럼 우리는 예수님이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능력과 권능의 그리스도이심을 믿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 분이 우리와 함께 나누어지기를 원하시는 ‘십자가’앞에서 두리번 거리며 서성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분의 십자가를 감상하거나, 입술이나 혀끝으로 사랑을 외치지 말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가진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가진 것(재산, 재능, 시간)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비로소 우리는 성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이 곧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나누어주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나누어지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오늘 복음말씀입니다. 어제 미사때의 복음말씀, 마태오 복음 16장 15절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의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물음에 대한 합당한 응답을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나눔의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받아 모시는 성체가 ‘쪼개져야 하는 빵’, ‘나눔의 빵’이듯이 우리도 가진 것을 모두 나눌 수 있는 ‘나눔의 봉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제 저녁 미사 후 자축 파티 때 였습니다. 저는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어울리던 중, 어느 할머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님의 손에는 손주에게 나누어 줄 생각으로 떡을 싸시고 계셨습니다. 많은 교우분들이 나오셔서 온종일 음식준비, 성가준비, 책상준비, 청소 등 여러 가지 일을 함께 나누어서 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어제 온 종일 신바람이 났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족보다 당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촉구하는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가족, 내 식구만을 더 아끼고 사랑하기를 고집한다면,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또한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벗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는 사랑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하신 예수님, 그 분은 스스로 당신의 벗들인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위에 목숨을 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삶은 바로 ‘나눔의 극치’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내일도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산산조각을 내어 나누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몸을, 그 분의 거룩한 몸을 받아먹고만 있을 것인가?



‘나눔’이란 십자가 앞에서 머뭇거리고 서성대고만 있을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될 자격을 얻기 위해 내 가족, 내 가정을 초월하여 더 나아가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내자신)을 온전히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십자가의 길’을 택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지난 한 주 동안 신문지상을 통해 거물급 종교지도자와 정치 지도자의 일련의 사건을 대하면서, 제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어놓아야 합니다! 재산이 있는 사람은 재산을! 재능이 있는 사람은 재능을! 시간이 있는 사람은 시간을!




이 때 비로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을 갖춘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자! 받지만 말고 주자! 아멘.














7                    연중 제13주일   마태10,37-42 (가)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인간?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파스칼(1623-1662)은, 39세의 짧은 생애 를 살았지만 그가 인류에 남겨놓은 영적 유산은 매우 크다.




프랑스 태생인 파스칼은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이지만 그리스도교의 사상가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세상의 삶과 신앙의 모순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사색을 하던 중 1654년 11월 23일 밤 이상한 신비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 체험은 파스칼로 하여금 회심으로 이끌 며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강력한 것이었다.


그는 신비적 체험 후 매우 어렵게 지내면서도 가난한 이웃을 돌보아 주고 신앙에 대한 글을 계속 써 나갔다.




그가 죽은 후 출판된「팡세」에는 신앙적인 사색을 표현한 소중한 단편이 수록되어있다. 여기에는 주옥같은 소중한 글들이 담겨있다.


  「인간의 마음마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인간은 악과 비참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자신을 마다해야 한다」


그의 누이동생이「파스칼의 생애」라는 잭에서 서술했듯이, 신비체험 후 파스칼은 엣날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어 하느님만을 위해 살았던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




오늘 복음의 줄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자격과 신분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하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 때로는 자기 목숨까지도 바치겠다 는 전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얽매이고 있을 때는 도저히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여태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삶이기 때문이 다. 즉 여태까지 내가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올바른 제자 의 길을 갈 수 없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마지막 걸림돌은 다름 아닌 바로「나」자신이다. 예수님의 길과 마지막으 로 부딪히게 되는 것도 바로 나 자신이다. 재물이나, 영예도 버리기가 목숨처럼 아깝지만, 나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봉사활동을 열심히 한다 하더라도 나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만, 자기 만족이나 위선된 행동이 될 수도 있다. 나 자신의 욕심이나 집착 등은 가장 극복하기 힘든 삶의 문제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극단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위해서 그 어떤 것이라도 희생하고 버릴 각오가 돼 있고, 또 실제로 실행하는 사람 만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주님을 위해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주님의 뜻을 우선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낭비적이거나 무의미하지 않고 희망적이 고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이라는 것을 약속하신다. 자신을 내세우고 자기 이기심에 집착한다 면 절코 주님을 올바르게 따를 수 없다.




  생활 속에 주님을 따르는 길




우리 신앙인은 모두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 길을 성실하게 가야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 길은 수월하지 않고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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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 13주일 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은 예수님처럼


    예수님! 가끔은 당신 때문에 마음이 평화롭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메시아의 재림에 앞서서, 산고(産苦)에 비유되는 재난과 전쟁이 일어나겠지만, 평화 그 자체이신 메시아가 재림하신 그 때부터 모든 것은 질서와 평화를 다시 되찾는다는 것이 유다인의 전통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은 싸움이나 전쟁의 원인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그 기회이십니다. 곧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미움이 인간을 둘로 갈라놓고, 서로 다투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모두 예수님과 그 가르침을 환영한다면 큰 행복과 평화가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를 적대하는 사람이 있는 한, 이 어둠의 자식은 빛의 아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전쟁을 걸어 올 것입니다.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 빛도 어둠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빛에 속한 사람들은 어둠을 빛으로 비추려고 합니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충돌할 때에는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보다 인간을 더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또 기억해야 될 말씀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느님 때문에 부모를 버리고, 하느님 때문에 아들 딸을 버렸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가족이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고3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부모님들은 고3학생들을 성당에 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잠도 못자고 피곤하니 주일 하루만이라도 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적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시험기간에 학생들이 성당에 가지 않으면 혼내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요?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사랑이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하느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권면하고 함께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가족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님들 때문에 아이들이 성당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녀들 핑계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부모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떠한 뜻인지 당시의 유다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때부터 약 20년 쯤 전에 로마인들은 유다인의 눈 앞에서 갈릴래아의 유다와 그 도당들을 수백 명이나 십자가에 처형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통을 달게 받는다는 뜻으로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말을 사용하신 것은 예수님이 처음이십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마음으로 고통을 짊어지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벌써 저 골고타의 고통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39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라삐 나탄(기원 39년)은 “율법의 한 마디를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지키며, 율법의 한 마디를 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중점은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는다는 곳에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인간 생명의 목적으로 놓으시고, 하느님으로서의 당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생명을 잃는 사람, 곧 세상의 규범과 상반되는 복음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영원한 미래를 확립하기 때문에 자기를 구하는 것이 됩니다. 시간의 가치는 영원을 위하여 도움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 됩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마태16,26)


    40  “너희를 맞아 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 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 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 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 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 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선교사의 공덕이 그 선교사를 도와 준 사람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입니다. 유다인이 존중하고 있던 “손님을 환대한다”는 관념을 생각해 봅시다. 라삐 요카난(기원279년)은 손님을 환대한다는 것이 율법의 학교로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가는 것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라삐 유다(기원 299년)는 손님을 환대한다는 것이 하느님 자신께 인사하는 것보다도 중대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선교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아버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나는 어떤 대접을 받고 있습니까? 환대를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박해를 받고 있습니까?


    42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냉수 한 그릇”팔레스티나의 뜨뜻미지근하고 구역질나는 샘물이 아니라, 집 옆에 깊게 판 저 차디찬 우물 물 한잔을 타는 듯한 사막을 지나온 나그네에게 준다면 그에게는 얼마나 귀한 선물인가? 그것을 주는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물을 “내 제자라고 하여”,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준다면, 그것 자체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행위이며,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큰 상을 받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습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나 때문에 가족들이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나 때문에 신앙을 소홀히 하게 된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2.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구역모임, 레지오, 반모임, 직장 모임..기타 이런 모임에 나오라는 전화나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까? “알았어요. 갈께요.”라고 하면서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들에게 칭찬과 격려의 말을 전해주고 있습니까?…


  2. user#0 님의 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은 예수님처럼


    예수님! 가끔은 당신 때문에 마음이 평화롭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메시아의 재림에 앞서서, 산고(産苦)에 비유되는 재난과 전쟁이 일어나겠지만, 평화 그 자체이신 메시아가 재림하신 그 때부터 모든 것은 질서와 평화를 다시 되찾는다는 것이 유다인의 전통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은 싸움이나 전쟁의 원인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그 기회이십니다. 곧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미움이 인간을 둘로 갈라놓고, 서로 다투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모두 예수님과 그 가르침을 환영한다면 큰 행복과 평화가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를 적대하는 사람이 있는 한, 이 어둠의 자식은 빛의 아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전쟁을 걸어 올 것입니다.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 빛도 어둠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빛에 속한 사람들은 어둠을 빛으로 비추려고 합니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충돌할 때에는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보다 인간을 더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또 기억해야 될 말씀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느님 때문에 부모를 버리고, 하느님 때문에 아들 딸을 버렸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가족이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고3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부모님들은 고3학생들을 성당에 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잠도 못자고 피곤하니 주일 하루만이라도 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적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시험기간에 학생들이 성당에 가지 않으면 혼내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요?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사랑이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하느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권면하고 함께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가족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님들 때문에 아이들이 성당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녀들 핑계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부모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떠한 뜻인지 당시의 유다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때부터 약 20년 쯤 전에 로마인들은 유다인의 눈 앞에서 갈릴래아의 유다와 그 도당들을 수백 명이나 십자가에 처형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통을 달게 받는다는 뜻으로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말을 사용하신 것은 예수님이 처음이십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마음으로 고통을 짊어지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벌써 저 골고타의 고통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39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라삐 나탄(기원 39년)은 “율법의 한 마디를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지키며, 율법의 한 마디를 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중점은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는다는 곳에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인간 생명의 목적으로 놓으시고, 하느님으로서의 당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생명을 잃는 사람, 곧 세상의 규범과 상반되는 복음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영원한 미래를 확립하기 때문에 자기를 구하는 것이 됩니다. 시간의 가치는 영원을 위하여 도움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 됩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마태16,26)


    40  “너희를 맞아 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 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 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 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 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 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선교사의 공덕이 그 선교사를 도와 준 사람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입니다. 유다인이 존중하고 있던 “손님을 환대한다”는 관념을 생각해 봅시다. 라삐 요카난(기원279년)은 손님을 환대한다는 것이 율법의 학교로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가는 것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라삐 유다(기원 299년)는 손님을 환대한다는 것이 하느님 자신께 인사하는 것보다도 중대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선교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아버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나는 어떤 대접을 받고 있습니까? 환대를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박해를 받고 있습니까?


    42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냉수 한 그릇”팔레스티나의 뜨뜻미지근하고 구역질나는 샘물이 아니라, 집 옆에 깊게 판 저 차디찬 우물 물 한잔을 타는 듯한 사막을 지나온 나그네에게 준다면 그에게는 얼마나 귀한 선물인가? 그것을 주는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물을 “내 제자라고 하여”,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준다면, 그것 자체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행위이며,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큰 상을 받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습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나 때문에 가족들이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나 때문에 신앙을 소홀히 하게 된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2.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구역모임, 레지오, 반모임, 직장 모임..기타 이런 모임에 나오라는 전화나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까? “알았어요. 갈께요.”라고 하면서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들에게 칭찬과 격려의 말을 전해주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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