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의 날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소서.
먼저 위령의 날을 맞이하여 미사에 참례하신 형제 자매님들께 주님의 큰 축복이 있길 빕니다.
이렇게 먼저 가신 신앙인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먼저 가신 신앙인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봤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먼저 가신 신앙인들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 하실까?
이곳에 누워 계신 분들 중에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분도 계실 것이고,
연옥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나의 기도를 바라는 분도 계실 것이고,
끝없는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내가 지금 죽으면 어떻게 될까? 나는 과연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나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한 형제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 섰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자네는 할 말이 있는가?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하느님 제가 이렇게 일찍 당신 앞에 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제가 언젠가는 당신 앞에 나아올 줄 알고 있었지만 그 때가 먼 훗날의 일로만 생각을 했습니다.
묘지를 찾고, 죽은 이들을 위해서 연도를 바쳤지만 / 저의 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내 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미래에 대한 계획이 세워지니 욕심이 앞섰고
불편한 사람들과 화해를 하고 싶었지만 교만이 앞섰습니다.
당신 나라에 올 때 가지고 올 수 없는 것들에 너무도 집착을 했고
제 건강을 챙기는 데만 연연했습니다.
헌금이나 교무금, 성전건립기금을 내는 것을 아까워했고,
성당에서는 누가 대우해 주는 것만을 바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내가 너에게 1년이라는 시간을 더 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나누면서 살겠습니다. 봉사하면서 살겠습니다. 내동 성당 짓는데 제 재산의 절반을 봉헌하겠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해 주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이 사람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그는 아침 일찍 대학 병원에 건강검진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비싼 보약들을 사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 나서 죽었다는 그런 애틋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나 라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 누워 계신 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이 그것일 수 있습니다.
자네 그렇게 살아서 하느님 나라에 가겠나?
오늘 1독서의 지혜서의 말씀에 비추어서
의로운 영혼은 어떤 사람이고 어리석은 영혼은 어떤 사람입니까?
1. 의로운 영혼은 살아가면서 주어지는 시련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들이요
어리석은 영혼들은 그런 의로운 사람들을 비웃는 사람들입니다. 성당 다니면 복을 받아야지 왜 시련을 받느냐면서 조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도가니 속에서 금을 시험하듯이 의로운 영혼들을 시험하시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2. 의로운 영혼은 주님을 의지하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분별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믿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영혼은 세상의 재물을 믿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그렇게 교만하게 살다가 준비도 없이 죽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가 세상에 살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자신에게 편한 것만이 옳다고 여기고, 자신의 기분이 나쁘면 옳지 않은 것으로 단정한 사람들입니다.
3. 의로운 영혼은 오늘 시편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세상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변하지 않는 하느님께 마음을 두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위로에 마음을 두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약이 되는 쓴 소리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이 누구더라도 등을 돌리고야 마는 사람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렇게 사랑을 주시는데 내가 거부해서야 되겠습니까?
은총과 자비가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그저 예하고 응답하고 그분께 마음을 돌리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9-30)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께로 향합시다.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지 말고 영원한 것을 추구합시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함께 노력합시다.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줍시다.
그리하여 나 또한 의인들의 영혼처럼 하늘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영광에 참여합시다.
사랑이신 주님!
오늘 당신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당신께 의지하기 보다는 저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였고
그것이 안됐을 경우에는 당신을 원망하였습니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듯이
제 삶 또한 당신께 맡겨 드려야 하는데
당신을 안다고 교만을 떨었고, 당신께서 저에게 무관심하다고 불평하였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아직은 어리석은 영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께서는 저와 함께 계셨고, 저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저를 불러 주심은 당신께서 저에게 사랑을 주시기 위함이고
부족한 저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함임을 압니다.
보잘 것 없는 저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주님!
의인의 영혼이 당신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것처럼
저 또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 욕심을 버리고, 제 아집을 버리고 당신께 의지하겠나이다.
당신께 봉헌하는 것을 아까워하고, 이웃과 나누는 것을 계산하고,
제 편의대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어제의 나를 버리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멍에요, 당신께서 저에게 짊어 주신 짐이라는 것을 굳게 믿겠습니다.
주님! 저에게 은총 주시어, 제가 늘 당신 앞에서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시고
영원한 것에 마음을 쓰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당신 앞에서 거닐게 하소서. 생명의 지역에서 거닐게 하소서. 아멘.

위령성월
1. 성민호 신부 / 2 2. 김영진 신부 / 4
3. 방윤석 신부 / 6 4. 김정우 신부 / 9
5. 함세웅 신부 / 10 6. 한상갑 신부 / 11
7. 김상옥 수녀 / 13 8. 위령성월 / 14
1. 위령의 날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성민호 신부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보니 벌써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성큼 다가오는가 봅니다. 화창한 시절에 푸르름과 젊음을 과시하던 무성한 잎들이 어느새 땅에 떨어져 힘없이 바람에 굴러다니며 이리 밟히고 저리 방히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아서 세상에 태어난 후 온갖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덧없는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낙엽처럼 비참하게 떨어져, 남에게 밟히는 무덤의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그러기에 예언자 이사야는 일찍이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남의 죽음을 자주 직면하면서도 자기는 죽음과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여 마치 이 세상에서 몇 천년 살 것처럼 행동합니다. 또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생인데도, 마치 세상의 부귀영화를 영원히 간직할 듯이 살아갑니다. 하지만 불로초를 구하려던 진시황도 죽었고 세상에서 날고 뛰던 영웅호걸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고, 공평하였습니다. 따라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은 우리에게 삶과 죽음, 이 세상과 저 세상, 이승과 저승의 문제는 가장 심각한 당면과제이며 이에 대한 속시원한 해답을 얻는 것은 가장 절실한 요망사항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사색의 계절과 때를 같이하여 11월 한 달을 위령성월로 설정하고 이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을 기억하며 그들이 하루빨리 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할 뿐 아니라, 그들처럼 우리도 죽을 인생임을 명심하여 보람있는 삶을 통한 복된 죽음을 준비하도록 배려하였습니다. 특별히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하고, 애타게 살아있는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연옥영혼들이 어서 빨리 하느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온 세계가 일심으로 기도와 희생을 바치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이날만은 모든 교회에서 연거푸 세 대의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마카베오서에도, 죽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우리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의무이며, 신앙의 표현일 뿐 아니라 큰 공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 지체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을 굳게 바라는 신자들이고 연옥에서 단련을 받는 영혼들에게도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죽은 다음 천국에 갈 자신이 없다면 훗날 우리의 신세를 생각해서라도 더 더욱 연령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도움을 받은 영혼들이 후에 천국에서 우리를 위하여 변호해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지금 연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 중에는 우리 부모 형제 친척 친지 등, 살아생전에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고 떠난 분들이 많습니다. 명절만 되면 죽은 조상들을 추모하고 제사를 올리는 미풍양속을 가진 우리로서는 마땅히 먼저 떠난 그들에게 못다한 효도와 사랑을 바치는 뜻에서라도 지금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명복을 빌어드려야 합니다.
비록 그들과는 유명을 달리하고 있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간절히 바라는 그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죽었어도 사실은 하느님 앞에서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석방되기 위해서는 밖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듯이, 연옥에 있는 영혼들도 우리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현세에 사는 우리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의 하해와 같은 은총으로 살아있는 기쁨을 체험하고 있지만 죽음이 확실한 이상 언젠가는 우리도 역시 인생의 종말을 맞이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남의 무덤을 예사롭게 찾아주고, 남을 위해 기도하지만, 다음 차례에는 남들이 우러를 위해 기도할 날이 올 것입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을 무덤 속의 주인공도 옛날엔 우리처럼 죽음을 남의 일로만 생각하다가 별안간 찾아온 마지막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생자필멸의 대원칙을 훤히 알면서도 설마 그렇게 빨리 죽을 줄이야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무서운 현실을 눈앞에 두고도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산다면 어리석은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무엇인지, 또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들에 관해서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1데살 4,13).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로마 6.8)고 말한 바오로 사도처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멸망의 죽음이 아니고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인생을 나그네길로 생각하고 죽음을 통하여 인간의 본 고향인 하늘나라로 돌아갈 것을 굳게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항상 꿈이 있고 희망이 있으며 보람과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의미를 알고 죽음을 해결한 사람은 온 세상을 정복한 사람보다 더욱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야훼가 우리의 목자이시니 도무지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현세만이 인생의 전부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보지도 않은 내세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하면서 지상생활에만 급급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목적의식이 없기 때문에 꿈이나 희망이 있을 수 없고 오직 길을 잃고 방황하는 껍데기 인생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허무하다는 것을 느낄 때, 그들은 더욱 비참해집니다. 마치 목적지 없는 여행이나 나침반 없는 항로처럼 그들의 인생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죽은 사람 앞에서 머리를 숙여 명복을 빌어준다고 하지만, 참된 명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서글픈 사람들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먹고 살기도 바쁜데 죽은 후의 일까지 알려고 하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하면서, 아예 인생문제를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꿈은 오로지 현세에만 있기 때문에 주어진 인생을 그럭저럭 안일무사하게 살아갑니다. 언뜻 보기에는 그들의 인생이 가장 현명한 것 같지만 나중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어리석음을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위령의 날을 맞아 미사 중에 봉독하는 복음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주님은 여덟 가지 행복을 가르쳐주신 산상수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고 말씀하셨고,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셨으며,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기껏해야 100년입니다. 긴 세월같이 보이지만 지내놓고 보면 잠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꿈 같은 세상에서 허망한 욕심을 부리지 말고, 시한부 인생처럼 이웃과 화목하면서 평온하게 지내야 합니다. “세상낙이 도대체 그 무엇이며, 세상고가 도대체 그 무엇이뇨. 지내노면 홑어진 연기 같은 걸! 수덕입공 왜 그리주저하시오.” 라는 사말의 노래를 묵상하면서, 우리 모두 무상한 인생을 보람있게 살아갑시다.
“헛되고 헛되도다‥‥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를 섬기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헛되다.”(전도 1.1)는 성서말씀을 생각하며 매사에 사랑을 실천합시다. 그리고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우리 형제들과 주님의 자비에 맡겨진 다른 죽은 모든 이들이, 하루빨리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뵙도록 기도합시다.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2. 위령의 날 <마태 25,1-13>(나) ‘나는 바쁘다고’고 말하는 이들에게
김영진 신부
성당 정원에 들어선 세 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가을과 단풍과 낙엽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듯하여, 종이 한 장을 들고 은행나무 밑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유난히 가을을 타는 나로서는 가을과 단풍과 낙엽에 젖어보려고, 자가용이나 관광버스로 시골을 찾는 이들을, 인생을 아는 사람이라고 감히 추켜세워 보지만, 단풍 구경한답시고 먹고, 흔들고, 소리질러대는 사람들에게는 단풍구경이란 ‘샛노란 은행나무 아래 앉아서, 손에 든 백지에 자신의 인생을 그려보는 겁니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가을과 단풍, 그리고 낙엽과 나를 그려볼 때마다, 겁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인생이란 ‘갈 준비’를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젊어도, 가는 데는 순서가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갈 준비’를 잘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미련하기 때문일까? 욕심 때문일까. 엊그제는 이제 32살밖에 안된 외사촌 남동생이 회복불능의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쁜 이도, 젊은이도 일손을 잠시 놓고 ‘갈 준비’가 어느 정도 되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가을과 단풍과 낙엽의 계절에 배워야 할 교훈이다.
옛날 왕궁에는, 일에 지친 왕의 피곤을 웃음으로 덜어주기 위한 광대가 하나씩 있었는데, 하루는 이 광대가 얼마나 바보짓을 해대며 웃기는지, 임금께서 지팡이하나를 선사하며 “이놈아, 네가 세상 살다가 행여 너보다 더 멍청한 짓을 하는 바보를 보거들랑, 이 지팡이를 그에게 주어라”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 병이 든 왕이 죽게 되어, 신하와 가족들이 그 앞에서 슬픈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왕은 마지막 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고 하며, 고별의 말을 하고 있었다.
이때 광대가 불쑥 튀어나와 “임금님, 어디로 가시기에 긴 여행을 하신다는 겁니까?”하고 묻자, 왕은 “아주 먼 곳이란다”라고 답하였다.
가장 어리석고 멍청한 이들
다시 광대가 “임금께서 다른 나라를 행차하실 때에는 신하와 말들을 많이 준비하셨는데, 이번 여행에는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하고 묻자, 왕은 “다른 여행 때는 많은 것을 준비하였으나, 이번에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네”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광대는 수년 전에 왕에게서 받은 지팡이 하나를 왕에게 내놓으며, “그러면 임금님이 이 지팡이를 받으셔야 되겠습니다. 그 먼 여행을 떠나시면서, 아무것도 준비를 못하셨다니,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합니까?”라고 했다 한다. 모든 일에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하겠지만, 특히 영원한 길을 준비하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교회는 낙엽과 단풍의 계절이요, 1년이 저물어가는 달 11월을 위령의 달로 정하고, 세상을 먼저 떠난 영혼들을 기억하며, 동시에 곧 뒤따르게 될 자신들의 삶을 점검케 한다.
다른 나라 여행을 할 때는 만반의 준비를 하지만, 천국으로의 여행을 할 때엔 아무 준비도 못하는 어리석은 왕처럼, 세상 일에는 철저히 준비를 하면서도, 자신의 삶과 영혼의 길을 위하여서는 아무 준비도 못하는 어리석은 뭇 사람을 일깨우고자 함이다.
바쁘다는 핑계와 젊다는 이유가, 마땅히 가야 할 먼길에 대한 ‘갈 준비’를 면제시키지는 못한다. 유치원 아이들을 빼놓고 거의 모든 이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바쁘다’라는 단어가 아닐까 한다. 바빠서 교회활동을 못하고, 바빠서 성당에 못 나가고, 바빠서 효도 못하고, 바빠서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등등, 바빠서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고 영혼의 길을 준비할 수 없는 이들은, 잠시 가던 길을 멈추어서 보라. 그러면 무엇이 더 중요한지 마음에 들어온다.
바쁘게 돌고 뛰던 길목에서 잠시 멈추어, 거실에 걸려있는 먼지 묻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말없이 아내의 손길을 쓰다듬어보며, 잠들어 있는 자녀들 옆에서 두손을 모으고, 축복의 기도를 빌어보라. 그리하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준비하며 살았어야 할 보물들이 새록새록 발견 될 것이다.
「갈 준비」는 제대로 하고 있나
예술로 유명한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성당입구 문 오른쪽에는, 장미조각 속에 이런 글이 있다고 한다. ‘우리를 즐겁게 하는 모든 것은 순간적일 뿐이다’라고, 그리고 문 왼쪽에는 가시나무 조각들이 있는데 그곳에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모든 것도 순간적일 뿐이다’라는 글귀가 있으며, 문 위편에는 ‘영원한 것보다 더 중요한 걸은 없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즐거운 휴가도 금방 끝날 것이요, 아름다운 옷도 곧 헤어질테지만, 저승에서의 하느님과의 삶은 영원하리라는 밀라노 한 성당 문짝이 주는 교훈은, 세상일에 바쁘게만 살아왔던 우리들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가르쳐주는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성당정원에 있는 은행나무 잎이 유독 샛노랗게 보여지는 것은, 언제 하느님이 부르시더라도 기꺼이 “예”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하며 살라는, 예수님의 음성인 듯하다.
3. 위령의 날 <마태 11,25~30> 잘 만나야 영원히 출세한다
방윤석 신부
굶주린 늑대 한 마리가 냇가에서 어린양을 만났다. 그대로 잡아먹어 치우자니 어쩐지 양심에 찔리는 것 같았다. 늑대는 어린양을 잡아먹는데 어떤 적당한 구실을 택했다. 늑대는 어린것이 맑은 시냇물을 흙탕물로 만들고 있다고 나무랐다. 이렇게 더러운 물을 자기가 어떻게 먹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양은 당당하게 대답했다.「그렇지 않아요. 저는 지금 시냇물의 하류 쪽에 있어요. 오히려 늑대 아저씨가 있는 쪽에서 제 쪽으로 물이 흐르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저씨 쪽 물이 깨끗하지 않습니까.」
멀쑥해진 늑대는 딴 얘기를 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넌 너무 무례해. 작년에 우리 아버지가 사냥꾼의 총에 맞아서 돌아가셨을 때, 넌 우리 아버지를 비웃었지」걸음아 날 살려라 하
고 얼른 도망쳤어도 시원치 않을 터인데, 어린양은 물러설 줄 모르고 논쟁을 계속했다. 『아저씨는 계산도 못하시나봐요. 그때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구요』. 마치 화가났다는 듯이 어린양은 항변했다.
그래도 늑대는 또 어린양에게 말했다. 「넌 다른 양들과 함께 공동으로 풀밭을 망치고 있어. 그러니 우리가 가장 존중하는 사유재산권 제도를 전복하려는 공산주의자란말이야」늑대가 소리쳤다. 어린양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우리 부모님 두 분 다 반공연맹 회원이예요. 저도 크면 반공연맹에 가입할 거예요」어린양은 더욱 늑대의 심기를 건드리며, 지랑스럽게 주절거렸다. 「난 자기만 잘난 체하는 위선자는 절대 용서 못해. 너 같이 잘난척하는 녀석들만 없다면 세상이 훨씬 살기 좋아졌으리라 생각해.」 늑대는 말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어린양을 덥쳐 잡아먹었다. 양은 재수 더럽게 없게시리 늑대를 잘못 만나 잡아먹혀 버렸다. 잘못 만나 쫄딱 망한 경우다.
헬렌 켈러는 태어난지 18개월 만에 시력과 청각을 잃었다. 그래서 그녀는 귀머거리, 벙어리, 그리고 맹인이 되었다. 이러한 여성이 어떻게 그렇게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여섯살이 되자나는 내 자신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욕구가 나날이 더해갔다. 그러나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침묵의 벽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점점 화가 났다. 부모님은 나로 인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수소문한 끝에 나를 도와 줄 분을 찾아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은 바로 설리반 선생님이 오신 날이다. 1887년 3월 3일, 내가 일곱번째 생일을 맞기 3개월 전이었다. 설리반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신 바로 다음 날 아침, 그는 나를 당신 방으로 데려가 작은 인형 하나를 주셨다. 인형을 가지고 노는 나를 잠시 지켜보던 선생님은, 내 손바닥에 인형이란 글자를 천천히 써주셨다. 나는 너무도 기뻐서 엄마에게 뛰어내려가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고 방금 배운 알파벳 글자를 손바닥에 써 보였다.
그 당시 나는 그것이 문자인지 몰랐으며, 도대체 말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몰랐었다. 그저 선생님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며칠 후 나는 선생님과 「물」이라는 단어와 「잔」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승강이를 벌였다. 선생님은 잔이란 물을 담는 그릇임을 내게 이해시키려 했으나, 나는 계속 혼돈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내게 모자를 가져다 주었는데, 그것은 일광욕하러 산보나간다는 뜻이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 폴짝폴짝 뛰었다. 우리는 라일락 향기를 맡으며 우물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누군가 우물물을 긷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 손을 잡아 시원한 물을 한 손바닥에 쏟아주며, 다른 손바닥에 「물」이라고 천천히 써 주셨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선생님을 따라 손가락으로 물이라고 썼다.
우물가를 나오면서 나는 배우고 싶은 욕구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그 날 나는 더 많은 단어들을 배웠다. 그 중에는 엄마, 아빠, 동생이라는 단어, 즉 내 인생에 생명을 불어 넣어준 단어들이었다. 이처럼 헬렌 켈러는 설리반이라는 헌신적인 선생을 만나는 바람에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사람의 일생은 만남으로 시작하여 만남으로 끝난다. 태어나면서 엄마 아빠, 형제 자매를 만난다. 커가면서 친구를 만나고, 스승을 만나고,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만남 자체보다는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남」은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어린이는 초등학교에서 새 친구들을 사귀면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젊은이는 배우자를 만나면서 결혼이라는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 시작된다. 또한 직장에서 직장 동료를 만나면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누구를 만나느냐, 그리고 얼마나 깊게 사귀느냐에 따라서 출세를 할 수도 있고, 신세를 망칠 수도 있다. 하느님을 만나는 것 역시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일생 동안 만나야 할 분, 나를 출세시켜 주신 분에겐 더욱 더 잘 대우 해드려야 한다. 지나쳐 간 사람들은 별로 중요치 않다. 이승에서 뿐 아니라 내 죽음 저편까지도 계속해서 만나야 할 분이 계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더구나 그분이 내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라면? 두 말할 것 없이 계속 잘 대우해드려야 할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고분고분 잘 들어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큰 코 다치리라.
그래야 「영원한 출세」와 「불행 끝, 행복 시작」이 보장될 것이다.
그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11월은 위령성월이라 해서 죽음을 묵상하는 달이다. 아울러 오늘 위령의 날을 맞이하여 연옥 영혼들을 위해 그들이 하루 빨리 천국에 들 수 있도록 기도와 선행으로 도와드리자. 그들온 돕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4. 위령성월 <죽음과 삶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깨달아야>
김정우 신부
「인간의 탄생이 의미가 있다면 죽음 또한 충분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죽음의 의미를 깊이 있게 연구할 때 죽음은 공포의 대상, 무의미한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현세적 삶의 완성이며, 인간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1월 위령성월을 맞으면서 죽음의 문제를 신학적 입장으로 풀이한 책 「죽음의 이해」 (대구효대. 발행)를 펴낸 김신부는 「사람들에게 죽음의 문제가 그리스도교 안에서 부활을 향한 하나의 지나가는 과정으로만 인식되고 있다」고 제기하고 『이 책의 저술은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고 교회적으로는 성사적 상황으로서의 죽음이라는 것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발간 배경을 말했다.
현재 국내에 나와있는 죽음관련 서적들은 신학적 경향이 강하고, 종말론 중심이어서, 일반 신자들이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면이 많은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죽음의 이해는,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죽음의 문제를 비교 설명하면서, 신자들이 쉽게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또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태도나, 기피 이유를 분석 종합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돼 있는데, 이 책의 1부에서는 죽음에 대한 일반적 이해문제를 다루고 있고, 2부에서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해 유아사망 급사․비명 횡사․사고사 등을 신학적으로 해명하고, 죽음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이어서 3부는 참 삶으로서의 죽음이 무엇인지 풀이했다.
「죽음은 삶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며, 삶에 대한 진지성을 부여해 주는 사건입니다. 삶의 완성이자 결실이며, 영원한 삶에로의 관문이라 할 수 있다.」책을 통해 알리고자 하는 내용을 이렇게 압축해 설명한 김신부는 「인간의 죽음 문제는 신학생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주제였고, 지난 해 아버지의 선종을 경험하면서 죽음에 대한 의미들을 정리할 필요성이 느껴졌다」고 저술 동기를 말했다.
김신부는 「죽음에 대한 올바른 자세는 곧 올바른 삶의 자세」라고 강조하면서,「그러나 그리스도요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한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죽음의 비참과 좌절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음하는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의 희망적 죽음을 이해시키고,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며, 임종자와 그 가족의 일을 공동체의 관심 속에서 위로 격려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김신부는 오늘날 가정에서 보다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은 현실에서, 의료인들은 사무적인 치료보다 인간애를 바탕으로 환자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지적, 임종에 다다른
환자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조언하면서, 「이것은, 곧 보내는 이와 떠나는 이의 연결로서 ,죽음이 삶의 일부임을 인식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죽음이 단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삶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책 발간에 따른 기대를 표명한 김신부는, 「위령성월만이 아니라,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생활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삶을 더욱 진지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위령성월을 맞는 신자들의 자세를 당부했다.
5. 위령 성월 삶은 죽음에의 준비
함세웅 신부
중국 고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자(莊子)가 곧 죽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그를 성대하게 장사지내려 했습니다. 장자는 말하기를 “나는 하늘과 땅으로써 널을 삼고, 만물로써 재물을 삼는다. 나를 장사지낼 기구로 어느 것이 모자라는가? 여기에 무엇을 더 보탤 것인가” 제자들은 “저희들은 까마귀나 소리개가 선생님을 먹을까 두려워합니다”라는 대답에, 장자는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소리개의 밥이 되고, 땅 밑에 있으면 땅 벌레나 개미의 밥이 될 것이다. 저것을 빼앗아 이것에게 준다니, 어찌 그리 편벽되느냐?”고 말하였더랍니다.
사실 죽음이 어떠한 장소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는 잘 모르나, 근래에 우리 주변에서 떠나가신 분들을 기억할 때에 나의 죽음은 어떻게 닥쳐올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기야 장자처럼 하늘과 땅을 널로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죽음을 기다릴 특별한 장소가 있을 리 없겠지만, 날씨가 차가워지고, 무성했던 나무들이 조금씩 앙상해질 때면, 마치 머지않아 죽어야 할 날을 알고 있기라도 하는 듯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음이 끊임없이 다가오고 있다는 의식으로 조용히 그리고 즐겁게 지내면서, 오늘 우리가 당하고 있는 하나 하나의 일에 있어서 언제든지 진실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살아야겠습니다.
임종을 맞이하는 어느 젊은 여인이, 옆에서 부르다 못다 한 성가를 끝까지 부르고, ‘이젠 좀 쉬어야겠다’면서 영원한 안식처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님 나라의 영원한 안식이 어떤 것이길래, 태연하게 육체의 아픔도 잊어버리고 이 세상의 사랑하는 사람들 곁을 훌훌 떠날 수 있었을까요?
11월은 위령 성월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묵상하며 기쁘게 삶을 넘길 수 있는 준비도 서둘러야겠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가신 부모, 친척, 형제, 은인들과 모든 사랑하는 영혼들을 기억하며 특별히 드리는 위령의 달 미사에,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이 내리도록 정성껏 기도를 바
쳐 야겠습니다.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6. 추사이망, 追思以亡인가, 追死以忘인가?
한상갑(바오로)
김병엽 신부님, 신부님께서 우리 곁을 훌쩍 떠나신 지 벌써 21개월이 다 되어갑니다. 이십여 일전에 성심여중 학생들과 치명자산을 다녀오는 길에 김영태 신부님의 안내로 신부님의 무덤을 찾아 잠깐 기도했습니다. 성직자 묘지 맨 가 줄에 말없이 누워 계신 신부님을 뵈오니 만감이 교차하여 몇 자 적습니다.
묵은ꡐ숲정이ꡑ묶음을 뒤적이니 신부님께서 쓰신 글이 눈에 띕니다.ꡐ追思以亡-追死以忘, 신부는 죽은 지 5년만 지나면 제삿날도 없어!ꡑ(80.11.23)라는 제목이었습니다.
내용인즉 사경을 헤매던 노사제의 딱한 심경, 어느 새사제의 첫 미사에서 들은 강론말씀, 그리고 신부님의 다짐을 적으신 듯 합니다. 내용이 조금은 무거워서 처음엔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마무리 글이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ꡒ그러나 실망은 마십시오. 우리의 스승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사제가 갈 길은 스승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일입니다. 죽으면서 즐겁게 웃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죽으면서 웃어야 하기 때문에 가끔 독방에서 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ꡓ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마 신부님께서는 교통사고로 말미암은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한 순간 힘들어 하셨겠지만, 평소 삶의 모습으로 보아 틀림없이, 아버지를 뵙는 기쁨에 웃으셨을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유명을 달리하셨을 적에 주교님께서 신부님 유언 내용 때문에 고민하는 것을 뵌 적이 있습니다. ꡒ교회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면 화장하여 그 재는 산림 성장의 비료로 하면 좋겠다.ꡓ라는 유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부님 뜻대로라면 신부님 흔적은 아무 데도 없게 되고, 그리되면 신부님을 그리는 사람들이 찾을 곳도 없게 되겠기에, 그것이 주교님 마음에 크게 걸리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교님께서는 신부님의 무덤을 만드셨습니다. 아마 무덤 마저 없었더라면 저도 문득 문득 생각이나 하다가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무덤이 있어 치명자산을 찾았다가 내려오는 길에 신부님을 뵐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이건 제 마음만이 아닐 것입니다.
신부님, 요즈음 우리나라는 장묘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 계신 여러분들이 화장에 대한 찬성의 뜻을 밝히셨습니다. 바람직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주교님께서도 그리하셨다는 보도가 있어 또한 기쁩니다. 어서 빨리 우리 교구에도 납골당이 마련되어 좁은 국토를 걱정하는 마음과 돌아가신 분들께 애정을 표하고자 하는 마음이 하나로 꽃피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신부님의 유언 역시 이런 마음씀이 아니었을까 생각하였습니다.
모든 걸 다 주어버리고 훌훌 털고 가신 신부님을 생각하니, 조금 일찍 가신 것이 서운하기는 해도, 우리에게 좋은 길잡이이셨다는 생각이 들어 주님의 섭리하심을 조금은 느끼게 됩니다.
아버지 곁에서 저희들을 위해서 기도하실 신부님을 기억하며 감사 드립니다.
7. ꡒ죽음은 참 삶의 시작ꡓ 김상옥 수녀
신명13장 참고
오늘 본문 첫머리에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지나치게 하지 말 것을 기술하고있다. 반세기전만 하여도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죽으면 베옷을 입고 머리를 풀고 며칠씩 곡을 하면서 죽음을 매우 슬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직도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어렸을 적에 우리 이웃에 할아버지 한 분이 돌아가셨다. 멀리 시집간 딸이 긴 머리를 다 풀고 동구 밖에서부터 슬피 울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구약시대 이방인들도 부모나 집안 식구가 죽으면 머리를 풀고 베옷을 입고 식음전폐까지 하며 곡을 할뿐 아니라 심지어는 산사람의 몸을 상하게 칼로 상처를 내며 죽음을 애도하여야 효자라고 불렀다한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슬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자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다. 죽음이야말로 오히려 참 삶의 시작이다. “교우 여러분, 죽은 사람들에 관해서 여러분이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 처럼 슬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 가실 것을 믿습니다” (1 데살로니카 4, 13~14). 이 얼마나 명확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몸에 상처를 내거나 앞머리를 밀지 말라” (14, 1~2).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몸은 ‘성령께서 거처하시는 하느님의 궁전’ 이요,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감실’ 이기 때문이다.
일년농사의 십일조 규정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는데 (14, 22~23)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상인들은 매일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봉급생활하는 직업인은 매월 봉급의 십일조를 드리고 농사를 짓는 자, 수산업을 하는 자도 매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데 특히 농사를 마지막 끝내는 추수 때에는 일년의 십일조를 종합적으로 하느님의 성전에 바치는 것이다. 그리고 온 가족이 하느님께 나아가 성전에서 햇곡식으로 음식을 만들고 살찐 소와 양을 잡고 제사장과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 들과 함께 성전에서 즐거운 감사절기를 지키며 음식을 먹는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도 초대하여 함께 먹는 것이다. 이것이 유다인의 추수감사절때 지키는 일년농사의 십일조를 바치는 절기인 것이다. 멀리 있는 지방 사람들은 소와 양, 쌀, 포도주를 가지고 가는 것이 어려우므로 예루살렘에 가서 대신 다른 것을 사서 드리려고 자기가 농사 지은 것을 팔아 돈으로 가지고 가서 예루살렘에서 다시 사서 하느님께 드렸다 (24~26절). 그리고 매 삼년 마다 맞이하는 감사절에는 대대적인 축제행사를 모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떠돌이, 고아, 과부들, 농사나 일정한 수입이 없는 사람들을 모두 초대하여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굶주 렸던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큰 행사를 행하는 것이다. 신명기 15장에서는 레위기 25장에서 이미 열거한 안식년에 관한 것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는데 오늘 본문 에서는 안식년을 특히 ‘면제년’ 으로 강조하고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는 이웃에게 빚진 것을 탕감 받게 되므로 이해를 ‘면제년’ 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년에는 땅만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빚을 진 채무자의 빚을 탕감해 주어서 빚을 지고 허덕이는 가난한 사람들도 쉬게 하자는 것이다.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여 약소국가들이 안고있는 빚을 경제대국들이 탕감해주길 바라는 서명운동이 우리 교회 안에서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아무런 반응을 듣지 못하고 있다. 우리 지구는 하나인데 이 안에 들어 있는 수많은 국가와 인종들이 하루를 살면서 너무나 다르게 살고있다. 어떤 곳은 흥청망청 먹을 것이 넘쳐 나는가 하면, 어떤 곳은 굶어 죽어가고 있다. 면제년이 일곱번 지난 그 다음해는 희년이라 하여 빚만 탕감 받는 것이 아니라 빚에 넘어갔거나 가난하여 팔아버린 모든 재산을 도로 돌려주는 제도까지 있었다. 하느님께서 면제년이나 희년을 제정해주신 것은 인간 사회에서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모든 것을 공평하게 쓸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언제 우리 사회가 공평하게 나누어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오게될까? 이 신명기의 가르침이 어느 다른 때 보다 시급히 실천 되어져야 할 것은 여기 바로 오늘이다. 실천에 앞서 먼저 신명기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모르는 것이 죄가 되니까!
8. 위령성월 < 위령 성월의 의의와 유래>
위령기도는 인류 공동체의 연대성을 표현
2세기부터 신자들간 보급
▲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언제부터 = 죽은 이를 위한 기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구약성서의 마카베오 후서다.
기원전 163년 유대 민족의 지도자인 마카베오는 전쟁터에서 죽은 유대인들을 위해 장사지내면서, 그들이 지은 피가 용서될 수 있도록 애원하고, 기도와 헌금을 바쳤다.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일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을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2마카 12, 45)
기원후 2세기부터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신자들 사이에 보급되었으며, 특히 이 관습은 로마의 카타콤바(지하묘지) 안에 새겨진 많은 기도문, 즉 죽은 이들이 죄의 사함을 받아 천상 행복에 들게 해달라는 내용에 뚜렷이 들어있다.
교회는 이같은 기도의 관행을 ‘연옥’이라는 교리를 통해, 본격적으로 발전시켰다. 지상에서 자신의 죄를 완전히 보속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죄를 깨끗이 씻는 상태, 혹은 장소라는 뜻을 지닌 연옥은 13세기 리용 공의회, 15세기 피렌체 공의회,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신경을 거쳐 1545년에 개최된 트릴엔트 공의회에서, 교회의 공식 가르침으로 선포되었다.
또 609년 교황 성 보니파시오 4세는 매년 11월1일을 ‘모든 성인 대축일’로 정해 교회력에 축일이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까지 기념했다. 그 후 998년에 프랑스 클뤼니 수도원의 오딜로 원장이 모든 성일 대축일 다음날인 11월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해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도록 했고, 이런 관습이 보편화되어 11월을 위령성월로 지내게 됐다.
▲ 연옥과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 = 죽음 이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내세를 천국과 연옥 그리고 지옥으로 구분하고 있다. 천국은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충만한 기쁨의 상태(至福直觀)를 말하며, 연옥은 죄를 지은 영혼이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워 어찌할 줄 모르며 정화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반면에 지옥이란 하느님을 철저히 거부한 영혼이 절망의 나락 속에서 헤매는 상태를 뜻한다.
현세의 교회는 연옥에서 단련을 받고 있는 영혼들의 교회와 천국에서 지복을 누리는 성인들의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룬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사람이 스스로 사면을 받을 수 없어 형벌을 마치고 출옥의 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육체를 벗어난 연옥 영혼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못하고, 연옥에서 빨리 벗어날 희망만을 지니고 있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희생은, 바로 이런 영혼들이 하루 빨리 연옥의 고통에서 벗어나 ‘천국에 들 수 있도록’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간구하는 것이다.
또 우리와 마찬가지로 천국의 성인들도, 이들 연옥영혼들을 위해 기도한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인간이 사랑으로 서로 돕는 것을 기꺼워하시기 때문에 서로 공을 통할 수 있도록 섭리하시고(성인들의 통공), 우리와 성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따라서 모든 이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기도는 또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이들에 대한 우리 살아있는 이들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나아가 죽은 이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는 어떤 의미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죄인이며, 타인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고 장담할 수 없다. 우리도 연옥에 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셈이다.
우리가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들이 천국에 갔을 때 우리의 기도와 희생을 잊지 않고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빌어줄 것이다.
죽음 묵상하는 기회로 삼아야
▲ 신앙인의 자세 = 교회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며 죽음과 영생을 묵상하는 11월에 교회가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드리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거기에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죽은 이들을 포함하여 모두가 함께 들어가고자 하는 교회공동체의 염원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에는, 그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이들, 다시 말해 죽은 이들을 위한 사랑이 자리잡고 있다. 이 기도는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일깨우고 있다. 따라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산 이와 죽은 이를 포함한 인류공동체의 연대성을 드러내는 한 모습이며, 사랑의 표현이다.
위령성월에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지신의 성화에 큰 도움이 된다.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자연히 하느님 나라에 대해 묵상하게 되고, 따라서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여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미사참례도 가장 효과적인 기도의 하나다.
위령성월을 맞아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위한 기도에 깊은 사랑으로 참여해야겠다.
위령성월
1. 성민호 신부 / 2 2. 김영진 신부 / 4
3. 방윤석 신부 / 6 4. 김정우 신부 / 9
5. 함세웅 신부 / 10 6. 한상갑 신부 / 11
7. 김상옥 수녀 / 13 8. 위령성월 / 14
1. 위령의 날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성민호 신부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보니 벌써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성큼 다가오는가 봅니다. 화창한 시절에 푸르름과 젊음을 과시하던 무성한 잎들이 어느새 땅에 떨어져 힘없이 바람에 굴러다니며 이리 밟히고 저리 방히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아서 세상에 태어난 후 온갖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덧없는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낙엽처럼 비참하게 떨어져, 남에게 밟히는 무덤의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그러기에 예언자 이사야는 일찍이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남의 죽음을 자주 직면하면서도 자기는 죽음과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여 마치 이 세상에서 몇 천년 살 것처럼 행동합니다. 또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생인데도, 마치 세상의 부귀영화를 영원히 간직할 듯이 살아갑니다. 하지만 불로초를 구하려던 진시황도 죽었고 세상에서 날고 뛰던 영웅호걸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고, 공평하였습니다. 따라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은 우리에게 삶과 죽음, 이 세상과 저 세상, 이승과 저승의 문제는 가장 심각한 당면과제이며 이에 대한 속시원한 해답을 얻는 것은 가장 절실한 요망사항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사색의 계절과 때를 같이하여 11월 한 달을 위령성월로 설정하고 이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을 기억하며 그들이 하루빨리 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할 뿐 아니라, 그들처럼 우리도 죽을 인생임을 명심하여 보람있는 삶을 통한 복된 죽음을 준비하도록 배려하였습니다. 특별히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하고, 애타게 살아있는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연옥영혼들이 어서 빨리 하느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온 세계가 일심으로 기도와 희생을 바치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이날만은 모든 교회에서 연거푸 세 대의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마카베오서에도, 죽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우리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의무이며, 신앙의 표현일 뿐 아니라 큰 공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 지체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을 굳게 바라는 신자들이고 연옥에서 단련을 받는 영혼들에게도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죽은 다음 천국에 갈 자신이 없다면 훗날 우리의 신세를 생각해서라도 더 더욱 연령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도움을 받은 영혼들이 후에 천국에서 우리를 위하여 변호해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지금 연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 중에는 우리 부모 형제 친척 친지 등, 살아생전에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고 떠난 분들이 많습니다. 명절만 되면 죽은 조상들을 추모하고 제사를 올리는 미풍양속을 가진 우리로서는 마땅히 먼저 떠난 그들에게 못다한 효도와 사랑을 바치는 뜻에서라도 지금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명복을 빌어드려야 합니다.
비록 그들과는 유명을 달리하고 있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간절히 바라는 그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죽었어도 사실은 하느님 앞에서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석방되기 위해서는 밖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듯이, 연옥에 있는 영혼들도 우리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현세에 사는 우리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의 하해와 같은 은총으로 살아있는 기쁨을 체험하고 있지만 죽음이 확실한 이상 언젠가는 우리도 역시 인생의 종말을 맞이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남의 무덤을 예사롭게 찾아주고, 남을 위해 기도하지만, 다음 차례에는 남들이 우러를 위해 기도할 날이 올 것입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을 무덤 속의 주인공도 옛날엔 우리처럼 죽음을 남의 일로만 생각하다가 별안간 찾아온 마지막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생자필멸의 대원칙을 훤히 알면서도 설마 그렇게 빨리 죽을 줄이야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무서운 현실을 눈앞에 두고도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산다면 어리석은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무엇인지, 또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들에 관해서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1데살 4,13).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로마 6.8)고 말한 바오로 사도처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멸망의 죽음이 아니고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인생을 나그네길로 생각하고 죽음을 통하여 인간의 본 고향인 하늘나라로 돌아갈 것을 굳게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항상 꿈이 있고 희망이 있으며 보람과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의미를 알고 죽음을 해결한 사람은 온 세상을 정복한 사람보다 더욱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야훼가 우리의 목자이시니 도무지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현세만이 인생의 전부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보지도 않은 내세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하면서 지상생활에만 급급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목적의식이 없기 때문에 꿈이나 희망이 있을 수 없고 오직 길을 잃고 방황하는 껍데기 인생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허무하다는 것을 느낄 때, 그들은 더욱 비참해집니다. 마치 목적지 없는 여행이나 나침반 없는 항로처럼 그들의 인생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죽은 사람 앞에서 머리를 숙여 명복을 빌어준다고 하지만, 참된 명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서글픈 사람들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먹고 살기도 바쁜데 죽은 후의 일까지 알려고 하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하면서, 아예 인생문제를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꿈은 오로지 현세에만 있기 때문에 주어진 인생을 그럭저럭 안일무사하게 살아갑니다. 언뜻 보기에는 그들의 인생이 가장 현명한 것 같지만 나중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어리석음을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위령의 날을 맞아 미사 중에 봉독하는 복음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주님은 여덟 가지 행복을 가르쳐주신 산상수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고 말씀하셨고,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셨으며,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기껏해야 100년입니다. 긴 세월같이 보이지만 지내놓고 보면 잠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꿈 같은 세상에서 허망한 욕심을 부리지 말고, 시한부 인생처럼 이웃과 화목하면서 평온하게 지내야 합니다. “세상낙이 도대체 그 무엇이며, 세상고가 도대체 그 무엇이뇨. 지내노면 홑어진 연기 같은 걸! 수덕입공 왜 그리주저하시오.” 라는 사말의 노래를 묵상하면서, 우리 모두 무상한 인생을 보람있게 살아갑시다.
“헛되고 헛되도다‥‥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를 섬기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헛되다.”(전도 1.1)는 성서말씀을 생각하며 매사에 사랑을 실천합시다. 그리고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우리 형제들과 주님의 자비에 맡겨진 다른 죽은 모든 이들이, 하루빨리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뵙도록 기도합시다.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2. 위령의 날 <마태 25,1-13>(나) ‘나는 바쁘다고’고 말하는 이들에게
김영진 신부
성당 정원에 들어선 세 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가을과 단풍과 낙엽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듯하여, 종이 한 장을 들고 은행나무 밑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유난히 가을을 타는 나로서는 가을과 단풍과 낙엽에 젖어보려고, 자가용이나 관광버스로 시골을 찾는 이들을, 인생을 아는 사람이라고 감히 추켜세워 보지만, 단풍 구경한답시고 먹고, 흔들고, 소리질러대는 사람들에게는 단풍구경이란 ‘샛노란 은행나무 아래 앉아서, 손에 든 백지에 자신의 인생을 그려보는 겁니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가을과 단풍, 그리고 낙엽과 나를 그려볼 때마다, 겁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인생이란 ‘갈 준비’를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젊어도, 가는 데는 순서가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갈 준비’를 잘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미련하기 때문일까? 욕심 때문일까. 엊그제는 이제 32살밖에 안된 외사촌 남동생이 회복불능의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쁜 이도, 젊은이도 일손을 잠시 놓고 ‘갈 준비’가 어느 정도 되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가을과 단풍과 낙엽의 계절에 배워야 할 교훈이다.
옛날 왕궁에는, 일에 지친 왕의 피곤을 웃음으로 덜어주기 위한 광대가 하나씩 있었는데, 하루는 이 광대가 얼마나 바보짓을 해대며 웃기는지, 임금께서 지팡이하나를 선사하며 “이놈아, 네가 세상 살다가 행여 너보다 더 멍청한 짓을 하는 바보를 보거들랑, 이 지팡이를 그에게 주어라”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 병이 든 왕이 죽게 되어, 신하와 가족들이 그 앞에서 슬픈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왕은 마지막 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고 하며, 고별의 말을 하고 있었다.
이때 광대가 불쑥 튀어나와 “임금님, 어디로 가시기에 긴 여행을 하신다는 겁니까?”하고 묻자, 왕은 “아주 먼 곳이란다”라고 답하였다.
가장 어리석고 멍청한 이들
다시 광대가 “임금께서 다른 나라를 행차하실 때에는 신하와 말들을 많이 준비하셨는데, 이번 여행에는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하고 묻자, 왕은 “다른 여행 때는 많은 것을 준비하였으나, 이번에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네”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광대는 수년 전에 왕에게서 받은 지팡이 하나를 왕에게 내놓으며, “그러면 임금님이 이 지팡이를 받으셔야 되겠습니다. 그 먼 여행을 떠나시면서, 아무것도 준비를 못하셨다니,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합니까?”라고 했다 한다. 모든 일에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하겠지만, 특히 영원한 길을 준비하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교회는 낙엽과 단풍의 계절이요, 1년이 저물어가는 달 11월을 위령의 달로 정하고, 세상을 먼저 떠난 영혼들을 기억하며, 동시에 곧 뒤따르게 될 자신들의 삶을 점검케 한다.
다른 나라 여행을 할 때는 만반의 준비를 하지만, 천국으로의 여행을 할 때엔 아무 준비도 못하는 어리석은 왕처럼, 세상 일에는 철저히 준비를 하면서도, 자신의 삶과 영혼의 길을 위하여서는 아무 준비도 못하는 어리석은 뭇 사람을 일깨우고자 함이다.
바쁘다는 핑계와 젊다는 이유가, 마땅히 가야 할 먼길에 대한 ‘갈 준비’를 면제시키지는 못한다. 유치원 아이들을 빼놓고 거의 모든 이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바쁘다’라는 단어가 아닐까 한다. 바빠서 교회활동을 못하고, 바빠서 성당에 못 나가고, 바빠서 효도 못하고, 바빠서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등등, 바빠서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고 영혼의 길을 준비할 수 없는 이들은, 잠시 가던 길을 멈추어서 보라. 그러면 무엇이 더 중요한지 마음에 들어온다.
바쁘게 돌고 뛰던 길목에서 잠시 멈추어, 거실에 걸려있는 먼지 묻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말없이 아내의 손길을 쓰다듬어보며, 잠들어 있는 자녀들 옆에서 두손을 모으고, 축복의 기도를 빌어보라. 그리하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준비하며 살았어야 할 보물들이 새록새록 발견 될 것이다.
「갈 준비」는 제대로 하고 있나
예술로 유명한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성당입구 문 오른쪽에는, 장미조각 속에 이런 글이 있다고 한다. ‘우리를 즐겁게 하는 모든 것은 순간적일 뿐이다’라고, 그리고 문 왼쪽에는 가시나무 조각들이 있는데 그곳에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모든 것도 순간적일 뿐이다’라는 글귀가 있으며, 문 위편에는 ‘영원한 것보다 더 중요한 걸은 없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즐거운 휴가도 금방 끝날 것이요, 아름다운 옷도 곧 헤어질테지만, 저승에서의 하느님과의 삶은 영원하리라는 밀라노 한 성당 문짝이 주는 교훈은, 세상일에 바쁘게만 살아왔던 우리들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가르쳐주는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성당정원에 있는 은행나무 잎이 유독 샛노랗게 보여지는 것은, 언제 하느님이 부르시더라도 기꺼이 “예”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하며 살라는, 예수님의 음성인 듯하다.
3. 위령의 날 <마태 11,25~30> 잘 만나야 영원히 출세한다
방윤석 신부
굶주린 늑대 한 마리가 냇가에서 어린양을 만났다. 그대로 잡아먹어 치우자니 어쩐지 양심에 찔리는 것 같았다. 늑대는 어린양을 잡아먹는데 어떤 적당한 구실을 택했다. 늑대는 어린것이 맑은 시냇물을 흙탕물로 만들고 있다고 나무랐다. 이렇게 더러운 물을 자기가 어떻게 먹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양은 당당하게 대답했다.「그렇지 않아요. 저는 지금 시냇물의 하류 쪽에 있어요. 오히려 늑대 아저씨가 있는 쪽에서 제 쪽으로 물이 흐르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저씨 쪽 물이 깨끗하지 않습니까.」
멀쑥해진 늑대는 딴 얘기를 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넌 너무 무례해. 작년에 우리 아버지가 사냥꾼의 총에 맞아서 돌아가셨을 때, 넌 우리 아버지를 비웃었지」걸음아 날 살려라 하
고 얼른 도망쳤어도 시원치 않을 터인데, 어린양은 물러설 줄 모르고 논쟁을 계속했다. 『아저씨는 계산도 못하시나봐요. 그때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구요』. 마치 화가났다는 듯이 어린양은 항변했다.
그래도 늑대는 또 어린양에게 말했다. 「넌 다른 양들과 함께 공동으로 풀밭을 망치고 있어. 그러니 우리가 가장 존중하는 사유재산권 제도를 전복하려는 공산주의자란말이야」늑대가 소리쳤다. 어린양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우리 부모님 두 분 다 반공연맹 회원이예요. 저도 크면 반공연맹에 가입할 거예요」어린양은 더욱 늑대의 심기를 건드리며, 지랑스럽게 주절거렸다. 「난 자기만 잘난 체하는 위선자는 절대 용서 못해. 너 같이 잘난척하는 녀석들만 없다면 세상이 훨씬 살기 좋아졌으리라 생각해.」 늑대는 말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어린양을 덥쳐 잡아먹었다. 양은 재수 더럽게 없게시리 늑대를 잘못 만나 잡아먹혀 버렸다. 잘못 만나 쫄딱 망한 경우다.
헬렌 켈러는 태어난지 18개월 만에 시력과 청각을 잃었다. 그래서 그녀는 귀머거리, 벙어리, 그리고 맹인이 되었다. 이러한 여성이 어떻게 그렇게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여섯살이 되자나는 내 자신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욕구가 나날이 더해갔다. 그러나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침묵의 벽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점점 화가 났다. 부모님은 나로 인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수소문한 끝에 나를 도와 줄 분을 찾아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은 바로 설리반 선생님이 오신 날이다. 1887년 3월 3일, 내가 일곱번째 생일을 맞기 3개월 전이었다. 설리반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신 바로 다음 날 아침, 그는 나를 당신 방으로 데려가 작은 인형 하나를 주셨다. 인형을 가지고 노는 나를 잠시 지켜보던 선생님은, 내 손바닥에 인형이란 글자를 천천히 써주셨다. 나는 너무도 기뻐서 엄마에게 뛰어내려가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고 방금 배운 알파벳 글자를 손바닥에 써 보였다.
그 당시 나는 그것이 문자인지 몰랐으며, 도대체 말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몰랐었다. 그저 선생님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며칠 후 나는 선생님과 「물」이라는 단어와 「잔」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승강이를 벌였다. 선생님은 잔이란 물을 담는 그릇임을 내게 이해시키려 했으나, 나는 계속 혼돈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내게 모자를 가져다 주었는데, 그것은 일광욕하러 산보나간다는 뜻이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 폴짝폴짝 뛰었다. 우리는 라일락 향기를 맡으며 우물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누군가 우물물을 긷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 손을 잡아 시원한 물을 한 손바닥에 쏟아주며, 다른 손바닥에 「물」이라고 천천히 써 주셨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선생님을 따라 손가락으로 물이라고 썼다.
우물가를 나오면서 나는 배우고 싶은 욕구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그 날 나는 더 많은 단어들을 배웠다. 그 중에는 엄마, 아빠, 동생이라는 단어, 즉 내 인생에 생명을 불어 넣어준 단어들이었다. 이처럼 헬렌 켈러는 설리반이라는 헌신적인 선생을 만나는 바람에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사람의 일생은 만남으로 시작하여 만남으로 끝난다. 태어나면서 엄마 아빠, 형제 자매를 만난다. 커가면서 친구를 만나고, 스승을 만나고,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만남 자체보다는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남」은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어린이는 초등학교에서 새 친구들을 사귀면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젊은이는 배우자를 만나면서 결혼이라는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 시작된다. 또한 직장에서 직장 동료를 만나면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누구를 만나느냐, 그리고 얼마나 깊게 사귀느냐에 따라서 출세를 할 수도 있고, 신세를 망칠 수도 있다. 하느님을 만나는 것 역시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일생 동안 만나야 할 분, 나를 출세시켜 주신 분에겐 더욱 더 잘 대우 해드려야 한다. 지나쳐 간 사람들은 별로 중요치 않다. 이승에서 뿐 아니라 내 죽음 저편까지도 계속해서 만나야 할 분이 계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더구나 그분이 내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라면? 두 말할 것 없이 계속 잘 대우해드려야 할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고분고분 잘 들어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큰 코 다치리라.
그래야 「영원한 출세」와 「불행 끝, 행복 시작」이 보장될 것이다.
그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11월은 위령성월이라 해서 죽음을 묵상하는 달이다. 아울러 오늘 위령의 날을 맞이하여 연옥 영혼들을 위해 그들이 하루 빨리 천국에 들 수 있도록 기도와 선행으로 도와드리자. 그들온 돕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4. 위령성월 <죽음과 삶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깨달아야>
김정우 신부
「인간의 탄생이 의미가 있다면 죽음 또한 충분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죽음의 의미를 깊이 있게 연구할 때 죽음은 공포의 대상, 무의미한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현세적 삶의 완성이며, 인간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1월 위령성월을 맞으면서 죽음의 문제를 신학적 입장으로 풀이한 책 「죽음의 이해」 (대구효대. 발행)를 펴낸 김신부는 「사람들에게 죽음의 문제가 그리스도교 안에서 부활을 향한 하나의 지나가는 과정으로만 인식되고 있다」고 제기하고 『이 책의 저술은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고 교회적으로는 성사적 상황으로서의 죽음이라는 것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발간 배경을 말했다.
현재 국내에 나와있는 죽음관련 서적들은 신학적 경향이 강하고, 종말론 중심이어서, 일반 신자들이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면이 많은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죽음의 이해는,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죽음의 문제를 비교 설명하면서, 신자들이 쉽게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또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태도나, 기피 이유를 분석 종합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돼 있는데, 이 책의 1부에서는 죽음에 대한 일반적 이해문제를 다루고 있고, 2부에서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해 유아사망 급사․비명 횡사․사고사 등을 신학적으로 해명하고, 죽음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이어서 3부는 참 삶으로서의 죽음이 무엇인지 풀이했다.
「죽음은 삶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며, 삶에 대한 진지성을 부여해 주는 사건입니다. 삶의 완성이자 결실이며, 영원한 삶에로의 관문이라 할 수 있다.」책을 통해 알리고자 하는 내용을 이렇게 압축해 설명한 김신부는 「인간의 죽음 문제는 신학생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주제였고, 지난 해 아버지의 선종을 경험하면서 죽음에 대한 의미들을 정리할 필요성이 느껴졌다」고 저술 동기를 말했다.
김신부는 「죽음에 대한 올바른 자세는 곧 올바른 삶의 자세」라고 강조하면서,「그러나 그리스도요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한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죽음의 비참과 좌절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음하는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의 희망적 죽음을 이해시키고,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며, 임종자와 그 가족의 일을 공동체의 관심 속에서 위로 격려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김신부는 오늘날 가정에서 보다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은 현실에서, 의료인들은 사무적인 치료보다 인간애를 바탕으로 환자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지적, 임종에 다다른
환자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조언하면서, 「이것은, 곧 보내는 이와 떠나는 이의 연결로서 ,죽음이 삶의 일부임을 인식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죽음이 단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삶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책 발간에 따른 기대를 표명한 김신부는, 「위령성월만이 아니라,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생활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삶을 더욱 진지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위령성월을 맞는 신자들의 자세를 당부했다.
5. 위령 성월 삶은 죽음에의 준비
함세웅 신부
중국 고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자(莊子)가 곧 죽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그를 성대하게 장사지내려 했습니다. 장자는 말하기를 “나는 하늘과 땅으로써 널을 삼고, 만물로써 재물을 삼는다. 나를 장사지낼 기구로 어느 것이 모자라는가? 여기에 무엇을 더 보탤 것인가” 제자들은 “저희들은 까마귀나 소리개가 선생님을 먹을까 두려워합니다”라는 대답에, 장자는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소리개의 밥이 되고, 땅 밑에 있으면 땅 벌레나 개미의 밥이 될 것이다. 저것을 빼앗아 이것에게 준다니, 어찌 그리 편벽되느냐?”고 말하였더랍니다.
사실 죽음이 어떠한 장소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는 잘 모르나, 근래에 우리 주변에서 떠나가신 분들을 기억할 때에 나의 죽음은 어떻게 닥쳐올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기야 장자처럼 하늘과 땅을 널로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죽음을 기다릴 특별한 장소가 있을 리 없겠지만, 날씨가 차가워지고, 무성했던 나무들이 조금씩 앙상해질 때면, 마치 머지않아 죽어야 할 날을 알고 있기라도 하는 듯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음이 끊임없이 다가오고 있다는 의식으로 조용히 그리고 즐겁게 지내면서, 오늘 우리가 당하고 있는 하나 하나의 일에 있어서 언제든지 진실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살아야겠습니다.
임종을 맞이하는 어느 젊은 여인이, 옆에서 부르다 못다 한 성가를 끝까지 부르고, ‘이젠 좀 쉬어야겠다’면서 영원한 안식처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님 나라의 영원한 안식이 어떤 것이길래, 태연하게 육체의 아픔도 잊어버리고 이 세상의 사랑하는 사람들 곁을 훌훌 떠날 수 있었을까요?
11월은 위령 성월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묵상하며 기쁘게 삶을 넘길 수 있는 준비도 서둘러야겠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가신 부모, 친척, 형제, 은인들과 모든 사랑하는 영혼들을 기억하며 특별히 드리는 위령의 달 미사에,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이 내리도록 정성껏 기도를 바
쳐 야겠습니다.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6. 추사이망, 追思以亡인가, 追死以忘인가?
한상갑(바오로)
김병엽 신부님, 신부님께서 우리 곁을 훌쩍 떠나신 지 벌써 21개월이 다 되어갑니다. 이십여 일전에 성심여중 학생들과 치명자산을 다녀오는 길에 김영태 신부님의 안내로 신부님의 무덤을 찾아 잠깐 기도했습니다. 성직자 묘지 맨 가 줄에 말없이 누워 계신 신부님을 뵈오니 만감이 교차하여 몇 자 적습니다.
묵은ꡐ숲정이ꡑ묶음을 뒤적이니 신부님께서 쓰신 글이 눈에 띕니다.ꡐ追思以亡-追死以忘, 신부는 죽은 지 5년만 지나면 제삿날도 없어!ꡑ(80.11.23)라는 제목이었습니다.
내용인즉 사경을 헤매던 노사제의 딱한 심경, 어느 새사제의 첫 미사에서 들은 강론말씀, 그리고 신부님의 다짐을 적으신 듯 합니다. 내용이 조금은 무거워서 처음엔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마무리 글이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ꡒ그러나 실망은 마십시오. 우리의 스승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사제가 갈 길은 스승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일입니다. 죽으면서 즐겁게 웃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죽으면서 웃어야 하기 때문에 가끔 독방에서 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ꡓ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마 신부님께서는 교통사고로 말미암은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한 순간 힘들어 하셨겠지만, 평소 삶의 모습으로 보아 틀림없이, 아버지를 뵙는 기쁨에 웃으셨을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유명을 달리하셨을 적에 주교님께서 신부님 유언 내용 때문에 고민하는 것을 뵌 적이 있습니다. ꡒ교회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면 화장하여 그 재는 산림 성장의 비료로 하면 좋겠다.ꡓ라는 유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부님 뜻대로라면 신부님 흔적은 아무 데도 없게 되고, 그리되면 신부님을 그리는 사람들이 찾을 곳도 없게 되겠기에, 그것이 주교님 마음에 크게 걸리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교님께서는 신부님의 무덤을 만드셨습니다. 아마 무덤 마저 없었더라면 저도 문득 문득 생각이나 하다가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무덤이 있어 치명자산을 찾았다가 내려오는 길에 신부님을 뵐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이건 제 마음만이 아닐 것입니다.
신부님, 요즈음 우리나라는 장묘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 계신 여러분들이 화장에 대한 찬성의 뜻을 밝히셨습니다. 바람직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주교님께서도 그리하셨다는 보도가 있어 또한 기쁩니다. 어서 빨리 우리 교구에도 납골당이 마련되어 좁은 국토를 걱정하는 마음과 돌아가신 분들께 애정을 표하고자 하는 마음이 하나로 꽃피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신부님의 유언 역시 이런 마음씀이 아니었을까 생각하였습니다.
모든 걸 다 주어버리고 훌훌 털고 가신 신부님을 생각하니, 조금 일찍 가신 것이 서운하기는 해도, 우리에게 좋은 길잡이이셨다는 생각이 들어 주님의 섭리하심을 조금은 느끼게 됩니다.
아버지 곁에서 저희들을 위해서 기도하실 신부님을 기억하며 감사 드립니다.
7. ꡒ죽음은 참 삶의 시작ꡓ 김상옥 수녀
신명13장 참고
오늘 본문 첫머리에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지나치게 하지 말 것을 기술하고있다. 반세기전만 하여도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죽으면 베옷을 입고 머리를 풀고 며칠씩 곡을 하면서 죽음을 매우 슬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직도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어렸을 적에 우리 이웃에 할아버지 한 분이 돌아가셨다. 멀리 시집간 딸이 긴 머리를 다 풀고 동구 밖에서부터 슬피 울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구약시대 이방인들도 부모나 집안 식구가 죽으면 머리를 풀고 베옷을 입고 식음전폐까지 하며 곡을 할뿐 아니라 심지어는 산사람의 몸을 상하게 칼로 상처를 내며 죽음을 애도하여야 효자라고 불렀다한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슬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자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다. 죽음이야말로 오히려 참 삶의 시작이다. “교우 여러분, 죽은 사람들에 관해서 여러분이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 처럼 슬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 가실 것을 믿습니다” (1 데살로니카 4, 13~14). 이 얼마나 명확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몸에 상처를 내거나 앞머리를 밀지 말라” (14, 1~2).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몸은 ‘성령께서 거처하시는 하느님의 궁전’ 이요,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감실’ 이기 때문이다.
일년농사의 십일조 규정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는데 (14, 22~23)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상인들은 매일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봉급생활하는 직업인은 매월 봉급의 십일조를 드리고 농사를 짓는 자, 수산업을 하는 자도 매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데 특히 농사를 마지막 끝내는 추수 때에는 일년의 십일조를 종합적으로 하느님의 성전에 바치는 것이다. 그리고 온 가족이 하느님께 나아가 성전에서 햇곡식으로 음식을 만들고 살찐 소와 양을 잡고 제사장과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 들과 함께 성전에서 즐거운 감사절기를 지키며 음식을 먹는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도 초대하여 함께 먹는 것이다. 이것이 유다인의 추수감사절때 지키는 일년농사의 십일조를 바치는 절기인 것이다. 멀리 있는 지방 사람들은 소와 양, 쌀, 포도주를 가지고 가는 것이 어려우므로 예루살렘에 가서 대신 다른 것을 사서 드리려고 자기가 농사 지은 것을 팔아 돈으로 가지고 가서 예루살렘에서 다시 사서 하느님께 드렸다 (24~26절). 그리고 매 삼년 마다 맞이하는 감사절에는 대대적인 축제행사를 모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떠돌이, 고아, 과부들, 농사나 일정한 수입이 없는 사람들을 모두 초대하여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굶주 렸던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큰 행사를 행하는 것이다. 신명기 15장에서는 레위기 25장에서 이미 열거한 안식년에 관한 것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는데 오늘 본문 에서는 안식년을 특히 ‘면제년’ 으로 강조하고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는 이웃에게 빚진 것을 탕감 받게 되므로 이해를 ‘면제년’ 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년에는 땅만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빚을 진 채무자의 빚을 탕감해 주어서 빚을 지고 허덕이는 가난한 사람들도 쉬게 하자는 것이다.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여 약소국가들이 안고있는 빚을 경제대국들이 탕감해주길 바라는 서명운동이 우리 교회 안에서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아무런 반응을 듣지 못하고 있다. 우리 지구는 하나인데 이 안에 들어 있는 수많은 국가와 인종들이 하루를 살면서 너무나 다르게 살고있다. 어떤 곳은 흥청망청 먹을 것이 넘쳐 나는가 하면, 어떤 곳은 굶어 죽어가고 있다. 면제년이 일곱번 지난 그 다음해는 희년이라 하여 빚만 탕감 받는 것이 아니라 빚에 넘어갔거나 가난하여 팔아버린 모든 재산을 도로 돌려주는 제도까지 있었다. 하느님께서 면제년이나 희년을 제정해주신 것은 인간 사회에서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모든 것을 공평하게 쓸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언제 우리 사회가 공평하게 나누어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오게될까? 이 신명기의 가르침이 어느 다른 때 보다 시급히 실천 되어져야 할 것은 여기 바로 오늘이다. 실천에 앞서 먼저 신명기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모르는 것이 죄가 되니까!
8. 위령성월 < 위령 성월의 의의와 유래>
위령기도는 인류 공동체의 연대성을 표현
2세기부터 신자들간 보급
▲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언제부터 = 죽은 이를 위한 기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구약성서의 마카베오 후서다.
기원전 163년 유대 민족의 지도자인 마카베오는 전쟁터에서 죽은 유대인들을 위해 장사지내면서, 그들이 지은 피가 용서될 수 있도록 애원하고, 기도와 헌금을 바쳤다.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일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을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2마카 12, 45)
기원후 2세기부터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신자들 사이에 보급되었으며, 특히 이 관습은 로마의 카타콤바(지하묘지) 안에 새겨진 많은 기도문, 즉 죽은 이들이 죄의 사함을 받아 천상 행복에 들게 해달라는 내용에 뚜렷이 들어있다.
교회는 이같은 기도의 관행을 ‘연옥’이라는 교리를 통해, 본격적으로 발전시켰다. 지상에서 자신의 죄를 완전히 보속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죄를 깨끗이 씻는 상태, 혹은 장소라는 뜻을 지닌 연옥은 13세기 리용 공의회, 15세기 피렌체 공의회,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신경을 거쳐 1545년에 개최된 트릴엔트 공의회에서, 교회의 공식 가르침으로 선포되었다.
또 609년 교황 성 보니파시오 4세는 매년 11월1일을 ‘모든 성인 대축일’로 정해 교회력에 축일이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까지 기념했다. 그 후 998년에 프랑스 클뤼니 수도원의 오딜로 원장이 모든 성일 대축일 다음날인 11월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해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도록 했고, 이런 관습이 보편화되어 11월을 위령성월로 지내게 됐다.
▲ 연옥과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 = 죽음 이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내세를 천국과 연옥 그리고 지옥으로 구분하고 있다. 천국은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충만한 기쁨의 상태(至福直觀)를 말하며, 연옥은 죄를 지은 영혼이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워 어찌할 줄 모르며 정화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반면에 지옥이란 하느님을 철저히 거부한 영혼이 절망의 나락 속에서 헤매는 상태를 뜻한다.
현세의 교회는 연옥에서 단련을 받고 있는 영혼들의 교회와 천국에서 지복을 누리는 성인들의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룬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사람이 스스로 사면을 받을 수 없어 형벌을 마치고 출옥의 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육체를 벗어난 연옥 영혼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못하고, 연옥에서 빨리 벗어날 희망만을 지니고 있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희생은, 바로 이런 영혼들이 하루 빨리 연옥의 고통에서 벗어나 ‘천국에 들 수 있도록’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간구하는 것이다.
또 우리와 마찬가지로 천국의 성인들도, 이들 연옥영혼들을 위해 기도한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인간이 사랑으로 서로 돕는 것을 기꺼워하시기 때문에 서로 공을 통할 수 있도록 섭리하시고(성인들의 통공), 우리와 성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따라서 모든 이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기도는 또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이들에 대한 우리 살아있는 이들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나아가 죽은 이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는 어떤 의미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죄인이며, 타인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고 장담할 수 없다. 우리도 연옥에 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셈이다.
우리가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들이 천국에 갔을 때 우리의 기도와 희생을 잊지 않고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빌어줄 것이다.
죽음 묵상하는 기회로 삼아야
▲ 신앙인의 자세 = 교회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며 죽음과 영생을 묵상하는 11월에 교회가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드리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거기에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죽은 이들을 포함하여 모두가 함께 들어가고자 하는 교회공동체의 염원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에는, 그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이들, 다시 말해 죽은 이들을 위한 사랑이 자리잡고 있다. 이 기도는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일깨우고 있다. 따라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산 이와 죽은 이를 포함한 인류공동체의 연대성을 드러내는 한 모습이며, 사랑의 표현이다.
위령성월에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지신의 성화에 큰 도움이 된다.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자연히 하느님 나라에 대해 묵상하게 되고, 따라서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여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미사참례도 가장 효과적인 기도의 하나다.
위령성월을 맞아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위한 기도에 깊은 사랑으로 참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