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 3주일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제 1독서 :출애 20,1-7
이 모든 말씀은 그날에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에집트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는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없다고 하지 않는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랫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살인하지 못한다. 간음하지 못한다. 도둑질하지 못한다.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것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재니 못한다.“
제 2독서 :1 고린 1,22-25
형제 여러분,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것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복 음 : 요한 2, 13-25
유다인들의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다. 그리고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며 그 상을 둘러엎으셨다. 그리고 비둘기 장수들에게 “이것들을 거두어 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하고 꾸짖으셨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의 머리에는 ‘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 하신 성서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나서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주겠소?”하고 예수께 대들었다.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들이 예수께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 육 년이나 걸렸는데 ,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오?” 하고 또 대들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뒤에야 이 말씀을 생각하고 비로소 성서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머무르시는 동안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 그것은 사람들을 너무나 잘 아실 뿐만 아니라 누구에 대해서도 사람의 말은 들어보실 필요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보시는 분이었다.
해설
사순 제 3주일인 오늘 독서들을 서로 연결시키기는 쉽지가 않다. 오히려 서로 다른 종교적 메시지를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제 1독서는 모세의 율법, 즉 ‘십계명’ 또는 아직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낱말의 ‘열 조문’(출애 34,28; 신명 4,13;10,4 참조)의 선포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제 2독서는 짧지만 아주 효과적으로 십자가의 ‘어리석음’에 대한 성바울로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다 :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1 고린1,22-24). 끝으로 복음은 요한복음으로서 성전으로부터 상인들을 쫓아내는 장면(2,13-25)을 기술하고 있다.
보는 바와 같이 서로간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 같고 우리가 지금 보내고 있는 전례시기와도 관계가 없는 듯한 성서구절들이 서로 겹쳐 있다. 그렇지만 좀더 주의깊게 살펴보면, 그 성서구절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조화나 사순절의 의미를 깊이 다루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서로 연결되는 점 몇가지를 열거하고, 요한 복음 중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되는 구절들을 주의깊게 다루고자 한다.
나는 너희를 에집트땅에서 이끌어낸 너희 하느님 야훼다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된 땅을 찾아 가는 중에 광야에서 오랫동안의 유랑생활을 할 때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시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중에 기본적인 것이 십계명이다. 그 다음, 십게명이 선포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장엄한 선언이 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에집트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출애 20,2).
그러므로 십게명은 ‘자유’의 표현이며 또한 이스라엘이 에집트땅에서 오랜 동안의 비참한 노예상태로 매어 있었던 ‘종살이의 상태’를 벗어남에 대한 보증이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들에게 항상 새롭게 제시하시는 ‘윤리적’ 요구는 정신적 ‘해방’과 ‘정화’를 끊임없이 요청한다. 즉 더욱더 하느님께 달아들고(처음 세 계명),사랑과 존경으로써 형제들을 더욱 가까이하며 (나머지 일곱 계명), 보다 편안한 생활을 추구함으로써 매순간순간 떨어지게 되는 거짓된 모든 우상들로부터 자신을 햅방시키기를 요청한다.
계명이 진정한 해방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졌던 그런 문화적 풍습 ㅡ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그러한 행위들을 완강히 반대하신다 ㅡ 이나 습관, 율법주의, 또는 순전히 외적인 어떤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두 번째 연결점은 사순절이 지향하는 ‘빠스카 신비’에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바울로도(“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23절) 요한도 다 같이 언급하고 있다. 한편,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충성의 표시로서의 계명 준수 그 자체와 빠스카 신비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에 관해 예수께서는 죽음을 향해 떠나시면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요한 14,15 ;15,14).
유다인들의 과월절이 가까워졌다
이제 오늘 복음의 핵심이 되는 구절들을 자칫하면 전체 내용을 흐리게 할 수 있는 세세한 주석들을 피해 가며 고찰해 보고자 한다.
요한이 성전으로부터 상인들을 쫓아내는 이야기를 예수의 공생활 초기에다 놓는 반면에, 공관복음사가들은 그것을 예수의 공생활 말기, 즉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메시아로 성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직후에 놓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의 행위가 사람들 사이에 스캔들이 되고 또한 그를 체포하는 직접적인 동기로서 더 잘 이해가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마르코가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보자 :“이 말씀을 듣고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없애버리자고 모의하였다. 그들은 모든 군중이 예수의 가르치심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예수를 두려워하였던 것이다”(11,18).
그렇다면 요한복음사가는 어째서 이 이야기를 미리 했는가?확실히 그의 복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이야기의 줄거리에 흐르고 있는 신학적인 동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의 동기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로는, 빠스카의 주제에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빠스카의 주제가 요한복음의 전례적 구조 안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잘 알고 있다(6,4 ;13,1 등 참조).여기서는 빠스카에 대해 꼭 두 번 언급되고 있다 :“유다인들의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2,13); “예수께서는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머무르시는 동안 …”(2,23) 예수를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제시해주는 (1,29.36) 요한은 그를 모세의 율법에 따라 (출애 12,46) 뼈마디 하나도 부러져서는 안되는 (19,36) 흠없는 빠스카의 어린양처럼 십자가상에 드러내 보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그 고난의 여정이 시작됨을 본다.
두 번째 동기는, 이 이야기에 앞서 있었던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과의 밀접한 연관성에 의해 드러난다. 두 이야기가 다 특별한 통찰력이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현실성과는 거리가 먼 암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때문에 실제로 사도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뒤에야”(2,22) 비로소 그 내용을 이해했다. 또 두 이야기가 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2,4 참조).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2,19). 또한 두 이야기가 다 예수께서 공생활 초기부터 가지고 계시는 그 ‘새로운 것’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연희가 끝날때까지 보존된 그 ‘좋은 포도주’의 풍부함, 낡은 ‘성전’을 그리스도의 몸인 ‘ 새 성전’으로 대치함(2,21 참조) 등에서 볼 수 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이 구절은 우리에게 오늘 복음의 근본적인 의미를 제시해준다.
성전은 제물 봉헌에 필요한 것 ㅡ소, 양, 환전상등 ㅡ 들을 바로 가까운 곳에서 찾아야 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만남의 장소가 되는 한 오용될 수 있고 또 실제로 장사하는 곳으로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므로 예언자 즈가리야는 메시아적 구원의 때가 오면 “다시는 만군의 야훼의 전에 wkdtkRNs이 있지 못하리라”(14,21)고 예언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노여움에 찬 행동으로 모든 것을 내팽개치신 후 격렬한 어조로 “이것들을 거두어 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요한 2,16) 고 하시는 이 구절과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
예수께서 ‘예언적’언행을 보이시는 반응은 성전예식 그 자체를 공격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전 안에서 최고의 의미를 찾았던 구약성서상의 예식이 조장한 그 남용을 공격하는 것인지?
예수께서 공격의 화살을 퍼붓는 것은 그 성전예식 자체에 대해서라고 생각한다. 즉 하느님의 현존과 또 그분과의 결정적인 만남의 장소이니 성전이 그리스도께 향해졌어야 할 그 성전예식의 기능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 결과 예식 자체가 이미 천박해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옛에식과 당신 자신을 교체해 놓으신다.
새로운 성전으로서의 예수
예수께서는 성전 ㅡ 헤로대 대왕이 대략 46년 전에, 즉 기원전 19년경에 건축하기 시작한 성전이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기원 후 28년경의 빠스카 때 일어난 일이다ㅡ앞에서 하신 당신의 격렬한 행동을 정당화할 만한 징표를 요구하는(18절) 유다인들에게 당신 자신이 새로운 성전이심을 암시하신다 :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들이 예수께 ‘이 성전을 짓는데 사십 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다단 말이오?’ 하고 또 대들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19-21절).
유다인들이 예수의 기적을 두고 “마귀의 두목 배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내고 있는 것이다”(맡0 12,24)라고 말할 때처럼, 적개심에 찬 그들이 자기들의 편견에 의한 해석은 일단 접어두고 예수께 즉시 증명할 수 있는 징표를 요구할 때 그는 한편으로는 이미 현존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징표’를 제시하신다. 즉 사람들이 수난의 비극을 통해 짓밟은 당신을 하느님의 권능으로써 사흘 후에 부활시킬 당신의 몸을 징표로 제시하신다.
그러므로 그 징표는 그분의 위격에 연결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그분의 위격과 동일시되는 징표다. 여기에는 예수께 다른 어떤 것, 즉 권위있는 어떤 행동을 요구하면서도 바로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지 못하는 그 반대자들의 습관적인 오해의 소지가 담겨 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하느님과 당신의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관계를 표현하시기 위해 먼저 ‘내 아버지의 집’(16절)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의 반대자들이 성실한 마음과 자세가 준비되어 있었다면 예수의 말씀 자체에서 그분이 메시아적 권리를 주장하는 행동의 의미를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성전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들 가운데 이미 현존해 계셨다면 더 이상 하느님을 물질로 된 건물에서 찾을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신적 존재를 드러내 보여 주시는 분이시며 인간들이 이미 사랑과 믿음의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던 하느님의 아들 자신 안에서 찾아야 했다.
그러므로 예수와 함께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를 드릴 때가 이르른 것이다. 에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에서 이것을 말씀하신다 : “내 말을 믿어라. 사람들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에 ‘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 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요한 4,21.23).
사도들 자신이 예수의 말씀에 대해 어느 정도 직감은 하면서도 그 ‘선동적’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자기들의 ‘스승’이 제시한 그 이상한 ‘징표’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고 마음속에 깊이 간직했을 뿐이다(루가 2,18.51 참조) :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뒤에야 이 말씀을 생각하고 비로소 성서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22절).
요한에 있어서 ‘생각하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예수의 말씀이나 행동만을 연상하여 기억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나 행동의 영적이고 구원적인 의미를 부활의 빛에 비추어, 또한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들을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실”(요한 16,13) 성령의 빛에 비추어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성령의 빛에 비추어 우리는 오늘 예수께서 하신 행동의 깊은 의미와 또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요청하는 유다인들에게 하신 도전적인 말씀(“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9절)의 깊은 의미를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이 자기 복음의 서언 끝부분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게셨다”(1,14)라고 말하듯이 예수께서 ‘육화’의 신비를 통해 이미 ‘성전’이 되셨다. 이러한 사실은 분명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사셨던 (출애 25,8;민수 35,34 참조) ‘계약의 장막’을 연상시켜 주며, 또한 성전에 사셨던 하느님의 ‘영광’을 생각게 한다. 그런데 오늘 복음 내용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사람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하느님의 권능을 통해 부활하게 될 때 하느님의 성전이 되신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최고의 사랑과 봉헌을 표현하시어 하느님께서 그를 최고의 권능으로써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실 때 거룩한 예식과 구원의 능력을 부여받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요한에게 있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인 새로운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 자체를 실현시킨다. 성전의 찢어진 휘장 너머에 그리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시는 고난받는 예수의 몸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직접적으로 개입시킴이 없어 신적 영광으로 가득찬 실제적인 인간의 몸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신다.구약성서의 ‘꿈’인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바로 여기에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영원히 실현되었다”
우리가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신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은 우리도 그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느님의새롭고도 깊은 현존의 신비로 우리의 삶을 감싸기 위해서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보시는 분이었다
오늘 복음의 결론은 씁쓸하면서도 극적이다. 즉 예수께서 보여주신 기적들을 보고 감동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 그것은 사람들을 너무나 잘 아실 뿐만 아니라 누구에 대해서도 사람의 말을 들어보실 필요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보시는 분이었다”(24-25절).
만일 우리의 신앙이 ‘성전’앞에만 머물러 있고 고통과 영광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희생제물을 바쳐야 하는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신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