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부활 대축일 강론 모음

 

28.                    부활 대축일 마르코 16,1-8 (나)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드리려고 향료를








오늘은 온 세상에 위대한 기쁨을 가져다 준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온 세계의 사람들이 부활을 축하하며 새 옷을 갈아입습니다.


2000년 전 성 바오로 시대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중으로부터 부활하심을 축하하여 새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웃음을 머금고 새 음식과 술로 잔치하였습니다.




성 바오로는 “좋다. 너희 구원의 날을 마음껏 축하하며 잔치하라. 그러나 올바르게, 그리스도교적인 방식으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죄로부터의 해방을 축하하려면 죄와 악의와 악행을 버려야 하며, 이 축하를 재미로만 여기며 명백한 죄악 상태에 있는 사람은 참가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성 바오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해 성실하고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실로 축하하기 위해서는 묵은 죄의 빵껍질 즉, 죄를 던져 버리고, 그리스도의 새로운 빵 즉, 성실함과 진실함의 빵을 먹기 시작해야 한다고 바오로는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기원 1세기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진실과 성실에 관해 천주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1970년의 부활절에도 천주께서는 그와 같은 것을 요구하고 계실까요?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새 옷과 좋은 음식으로 부활을 축하하면서도 그 핵심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성도들과 교유(交遊)하기는 쉽지만 아직도 자신의 죄에 공공연한 혹은 감추어진 죄의 생활에 젖어 있으면서 부활의 의의를 진실로 축하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 인사를 하고 입맞춤을 하고 나서 행동으로 배반하는 것이 그리스도 시대의 위선이었습니다. 한편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감사하면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내에서의 부정(不正)과 불의(不義) 등 죄악을 못 본 체하는 것이 바오로 시대의 위선이었습니다.


그리고 1970년의 부활절인 오늘 그리스도께서 알렐루야를 노래부르면서도 악의와 악행에 머물러 있는 것도 위선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부활날 여러분의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 볼 때 거기서 여러분의 그리스도교적 생활에 어떤 불성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아마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하리라고 믿습니다. 사제인 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께 대해 충분한 성실성과 진실성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천주께서 오늘 성 바오로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잔치하되, 묵은 누룩과 악의와 악행의 누룩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성실함과 진실함의 누룩없는 빵으로 할지니라”고. 오늘 미사 중에 천주께서 여러분에게 진실성과 싱실성을 고취시키실 때 천주께 대답할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신경에서 신앙을 고백할 때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음을 믿나이다”라는 대목을 각별한 정성을 가지고 외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여러분에게도 참 부활이 되도록 하십시오. 부활은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없이하고 여러분에게 진리와 그리스도교적 생명의 의미를 보여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중으로부터 부활하셨음을 믿는다고 여러분은 수천 번 신경을 외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많이 왼 신경에 대해 성실하고자 한다면 오늘 미사 때에는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신경을 외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에 성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여러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사제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 바오로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만일 그리스도 부활하시지 않으셨으면 너희 신앙은 헛된 것이니라”고.




여러분은 성실한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오늘 이 미사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죄와 나의 죄와 세상의 죄를 위해 지금 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이 미사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인 새로운 빵을 먹음으로써, 묵은 빵껍질인 죄를 던져 버림으로써 여러분의 성실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던져 버려야 할 죄의 껍질은 “오류와 허위”에 대한 묵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짓된 양심이나 게으른 양심에 속으면서 부활을 잘못 축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내가 옳다고,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한 그것은 옳고 진실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인의 양심이 정당하고 진실하고 성실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최고의 권위로부터 배우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면서, 신앙과 윤리 문제에 있어서 항상 진리를 추구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저 유행과 소문과 의견에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른이 된 사람으로서,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오늘 부활절을 맞아 영세 서원을 새롭게 합니다. “성실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잔치하라”는 성 바오로의 유명한 말씀 속에는 이러한 서원 재신(再新)과 부활의 기쁨이 반반씩 들어 있습니다.








29.               부활 대축일 마르코 16,1-8 (나)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드리려고 향료를








“거룩하다 부활이여 기쁘도다 알렐루야 예수 부활 아니시면 구속사업 헛되도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세계만방에 울려퍼지는 부활의 찬가를 들으며 마음으로부터 부활의 영광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영광과 기쁨은 어느 특정 인물이나 개인의 기쁨만이 아니요, 전 인류의 기쁨이요 만백성의 기쁨이며 인류역사가 시작한 이후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모든 인생들이 마땅히 누리고 만끽해야 할 영광이요, 기쁨이기에 더 더욱 그 신비의 비중이 큰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복과 영생에 관한 것이요 우리 인간의 최대 욕망인 영원 무궁한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기에 그 신비를 잠시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 인간이면 누구나 한 번은 꼭 맞이해야 하는 죽음, 그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온 세상과 인간의 역사를 깜짝 놀라게 한 기이한 사실이기도 하지만, 우리 인간이 믿지 않으면 안될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기도 합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활과 규범과 인생의 최종 목적과 갈 길을 찾아 얻으며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와도 같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그 함수를 속시원히 풀 수 있는 성서! 이를 일컬어 인류의 서적이라고도 하며 또한 그 역사성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멀지도 않은 2000여년전의 사실! 그 성서의 구구절절이 이어지는 부활의 역사성은 또한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16장 1절부터 12절 사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이런 증언이 있습니다. “겁내지 마시오. 당신들은 십자가에 달리셨던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보시오, 여기가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입니다…” 성서의 역사성을 인정한다면 이 내용 역시 인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 : 그리스도의 부활은 멸망과 구원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구원에로의 참된 길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원과 멸망의 이정표인 것입니다.




인류의 죄악으로 죽음을 당해야 하는 인간! 죽어 땅에 묻힘으로 썩어야 하는 인간의 육체, 그래서 인간은 멸망의 심연 속에서 울고 통곡해야 했으며, 슬픔과 괴로움의 역사를 엮어와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동정녀 몸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세상에 오신 제2의 아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아닌 사랑 때문에, 인류에 대한 당신 사랑 때문에 돌아가셨다가 당신 예언대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멸망과 구원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방향을 똑똑히 지시해 주셨고, 실망과 괴로움에 허덕이는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을 안겨다 주셨습니다. 빵의 기적(마태오 14.13 ; 마르코 6.30) ; 나병환자의 치유(마태오 8.1 ; 마르코 1.40) ; 소경의 완치(마르코 8.23 ; 루가 18.35) ; 반신불수의 완치(마태오 9.1)등 무수한 기적과 영적으로써 인간의 굳은 마음을 풀어주시고 차가와진 마음을 뜨겁게 해주시려 무진 애를 쓰셨지만 사리사욕과 세속에 굳어져 무거워진 인간의 마음은 실감 있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신과 의혹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랑에 굴복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불쌍하고 가련한 인간들을 그대로 보실 수만 없으셨기에 사랑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의 기적으로 우리 마음에 불을 놓으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렇게 기재했습니다. “당신들은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시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받을 것입니다”(16.15).




셋째 : 고도로 발달된 현대 인간의 문화 문명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구원에로의 참된 길을 가르쳐 주는 믿는 마음, 즉 신앙심을 앗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노예, 금전의 노예가 된 현대 인간의 오만 속에 신앙의 씨는 시들어가고 불신의 씨앗이 싹트고 있습니다.


이런 현대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요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부활의 신비야말로 신비답게 전개되어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은 우리의 지식과 지력을 정복하여 믿음을 뒷받침해 주고 부활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전능을 드러내 주고 있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은 눈물의 골짜기, 멸망의 깊은 구렁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영광에로의 희망과 기쁨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던들 구속사업도 헛되었을 것이며 우리의 희망도 갈기갈기 찢기고 말았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의 이 즐거움과 기쁨을 세계 만방에 떨쳐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최종 목적을 여기에서 찾았고, 우리의 행복과 영생을 부활에서 얻었으며 전인류의 구원을 이제는 발견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무한한 영광과 찬미를 드리며, 알렐루야 소리높여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32.                   예수 부활 대축일 (나해)    부활신앙으로 무장하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10,34a.37~43 (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제2독서 골로 3,1~4 (그리스도께서 천상에 계시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 하십시오) 


복 음 요한 20,1~9 (예수께서는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역사를 두 쪽으로 가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 오시기 이전의 시대를 B.C.(BEFORE CHRIST)라 하고 이후의 시대를 A.D.(ANNO DOMINE : 주님의 해)라 합니다. 그것은 역사뿐만이 아닙니다. 인류의 삶 전체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위대한 힘이 바로 당신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새로운 탄생입니다.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인해 세상은 진정 다시 태어났으며 모순과 악의 세계에서 진리와 은총의 세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실로 새로운 시대에 들어선 것이며 어둠과 모순 속에 묻혔던 세상의 수수께끼들은 다 풀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세상은 사실 모순에 빠져 있었습니다. 왜 착한 이들이 자주 고통 을 받으며 왜 악한 이들이 자주 떵떵거리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더구나 인생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으며 ‘죽음’ 이라는 무서운 세력 앞에서 인류는 참으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무너졌으며 세상의 어떤 생명도 이 두려운 존재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죽음은 실로 세상의 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이와 같은 세상의 모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친히 죽음 속으로 들어가시어 그 세력을 꺾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죽음은 이제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은총의 문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당신의 부활로써 세상을 건지셨습니다. 죽음에서 건지셨고 죄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일행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을 때 예수의 시체는 없고 천사가 거기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는 질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 천사가 말합니다. “겁내지 말라.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나 여자들은 무서워 벌벌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쳤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도대체 사흘 동안 완전히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온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고 인류를 깜짝 놀라게 했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사도 베드로가 백성들에게 예수의 부활과 그의 놀라운 행적에 대한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본래 그는 무식하고 믿음이 약했던 자였습니다. 그는 사회 교육을 제대로 받은 자도 아니었고 예수님 밑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쌓은 자도 아니었습니다.


더더구나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도 아니었으며 자기 사상을 논리적으로 전개시킬 수 있는 수준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무식한 베드로가 놀라운 감화력을 가지고 백성에게 전도하며 그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제자들의 증언을 믿고 우리도 그 놀라운 사건을 바로 내 것으로 받아들여 삶에 실천함으로써 세상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부활의 삶이요 또한 의무요 책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이미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믿어도 어정쩡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성당에 다녀도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갈등과 착각 속에서 고민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자들은 오로지 현실만을 중요시합니다. 지금 당장 잘먹고 잘사는 것에 축복의 기준을 맞춥니다. 그러니까 믿음 속에서 회의만을 갖게 됩니다. 신앙이 그렇게 된다면 비극입니다.




어떤 형제가 세례받은지 5년이 되었으나 거의 냉담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주일 미사 참례는 물론 기도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신앙을 성가시게만 생각했습니다. 이 친구가 한번은 자기 동료가 암으로 죽는 것을 보고는 크게 느낀 바가 있어서 아주 열심하게 되었는데 연도회에 들어가서 봉사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삶에 은혜가 충만하게 되어 새 인생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신앙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부활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나날이 체험해야 할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개선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활을 미리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은혜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신앙을 세상에 증거 하도록 합시다. 어떤 처지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신앙의 기쁨을 가지고 삽시다. 예수님이 바로 여러분 안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36.        부활 대축일 마르코 16,1-8 (나)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드리려고 향료를


                                                  -김정신신부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참으로 기쁘고도 환희에 가득 찬 승리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전인간의 구원이란 대사업을 이룩하시기 위하여 골고타 산상에서 무참하게도 십자가상에 돌아가신지 3일만에 정녕 부활하신 날입니다. 동이 트고 날이 밝아 오는 여명기에 예수님은 암흑과 죄악과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또한 악마에 대한 승리의 깃발을 드시고 무덤을 박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같은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은 당시의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베드로, 요한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로 인하여 증명되었고 그 후 많은 학자들도 이를 신앙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신자 여러분! 오늘 아침에는 세계 도처에서 부활의 종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지는 가운데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경건히 머리 숙여 우리 주님의 부활을 마음껏 구가하며 경축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현의는 우리 신앙의 기본이며 핵심이며 따라서 부활 없이는 우리의 신앙이나 구원을 생각할 수 없고 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본질적인 의미는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 가는 승리이며 죄악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결정적인 승리인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님은 죽음의 암흑에서 생명의 광명으로 옮아 갔고 죄악과 악마의 지배 하에서 자유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구원을 가져오는 파스카의 신비이며 따라서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악에서 사랑으로 현세에서 천국으로 향하게 되는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이라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인간처럼 불행한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현세에만 국한 된다면 우리는 무슨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저 현세에서 갖은 쾌락과 모략 중상으로 실컷 먹고 마시자 하며 그야말로 세상은 난장판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리하여 인생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지 못할 것이니 얼마나 암담하고 방황하는 방랑객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정녕 부활하셨습니다. 당신이 미리 말씀하신 대로 죽은지 제3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는데 먼저 베드로에게, 그 후에 열 두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Ⅰ고린토 15,5)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확언하는 것도 제자들에게는 생명을 건 일이지만 더구나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증언은 더한층 제자들의 죽음을 재촉하는 중대사였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었을 적에는 제자들은 산산히 모두 도망쳐 버렸습니다. 어떤 제자는 옷자락을 잡히고 나서 발가벗고 도망할 만큼 제자들은 모두 비굴하고 겁쟁이였으나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나서 백팔십도로 전환되어 아주 강한 사람이 외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매를 맞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순교를 하면서까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으로 사실이란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이처럼 증언하고 부활을 신앙의 중심 교리로 설파하며 모든 이에게 목숨을 바쳐 가며 가르친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신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활의 신비를 깨닫고 구원의 길로 용약 매진하라는데 그 뜻이 있겠습니다. 죽음에서 부활로 옮겨가는 과정이 부활의 신비라면 우리는 모름지기 죄악과 유혹을 극복하여 이에서 온전히 떠나 즉 죄악에 죽음으로써 광명과 평화와 사랑의 부활을 맞이해야 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됩니다.”(Ⅰ고린 15,17)라고 하신 성 바오로 사도는 말하였다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도 우리 자신이 영신상의 부활 즉 생활의 재생이나 혁신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방에서 기쁨의 부활의 종소리가 울려오며 알렐루야의 승리의 고동소리가 들려와도 우리 마음의 기쁨과 승리의 노래를 읊으지 못한다면 하등 우리에게 뜻 있고 반가운 부활절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충실하지 못하다가 회개를 하여 하느님과 화해하고 새 생활을 영위하게 된 이는 정녕 기쁨과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도 자기 결점과 허물을 없애며 더욱 예수님을 닮고 따르며 티 없는 길을 걷게 될 때에  기쁨과 승리의 승전가를 부를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영신으로 부활하여 신앙생활에 일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우리 다같이 노력합시다. 그리하여 마음으로부터 알렐루야의 환호의 노래를 소리도 드높이 우렁차게 부르도록 합시다. 아멘








52.          주님 부활 대축일 (나)         여   명






봄이 부활절과 함께 온다는 것이 언제나 감격적이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별 느낌이 없이 봄이 오고 부활도 오고는 했다. 그것은 아마도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선 자의 슬픈 깨달음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사실 봄이 예전의 봄과 같지가 않은 것은 어쩔수가 없는 것이 새소리도 훨씬 드물어졌고 꽃도 빨리 이울 뿐아니라 날씨도 일정하게 변하지를 않는다. 사람도 변했다.


무지막지하게 나가는 사람도 많아졌고 예의를 요구하려는 낌새가 보이면 선수를 치며 화를 내는 이도 많아졌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은 더 많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든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상대방을 이용해 먹으려드는 태도들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의 윗층 아파트 사람들은 아래층에 대한 신경은 전혀 안쓰고 사는 참으로 편하게 살아가는 가족이다.




그들은 발에 쇠징을 박았는지 어찌나 쿵쿵거리며 밤낮으로 걸어다니고 난리가 난 것처럼 사는지 아래층은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래도 천주교 신자가족이고 주일미사는 안 빼고 다니니 모범된 교우측에 든다고 할 말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공청소기로 주로 한밤중에 온 집안을 청소하는데 대개 밤 11시 이후가 보통이고 그집 주부는 해산하는 여인의 목소리 같은 고함소리로 세 자녀들(중고교생 둘과 대학생 하나)을 온갖 욕을 섞어가며 혼내는 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다는 것인데, 거기에 더 혼절할 일은 그 주부가 피정도 꽤 자주 다니는 대단히 영성적 관심이 높은 신자라는 점이다. 이쯤 되면 혼란을 느끼게 된다. 계절의 혼란보다 더한 마음의 사태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길이 없어진다.




인생은 본래 단순하지도 간단하지도 않은 것인 줄은 알고 있다. 인간의 역사가 어둡고 잔인한 일들의 연속이었다는 생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따르는 이들의 이름이니,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름값은 해야 도리일 것이다.




그 윗층 가족의 사연을 놓고 내게는 그런 면이 없는지 거울에 비춘 듯 비춰 생각해 보면서 양심이 아파졌다. 세상에 맞춰 산답시고 쉽게 적당하게 살아오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이 무거웠다. 사실 이번 사순시기 동안은 예전보다 극기도 적었고 희생도 덜 했다. 건강을 고려해서 먹는 것도 여느때와 다를 것 없이 먹으며 지나갔던 것이 사실이다.


그랬으니 자선을 더하게 될 수는 당연히 없게 되었다. 극기희생한 만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애초에 사순시기에만 좀 더 열심히 해보려고 마음먹은 것이 잘못이었으리라.


이제는 부활을 맞이했으니(마음이 그러니 제 힘으로 알껍질을 깨고 나오지 못하고 밖에서 남이 깨줘서 겨우 부화된 병아리마냥 불편하지만) 부활 신앙을 또 누리기로 다짐을 해본다.






첫째, 남에게 어둠 불쾌감 같은 것은 좀더 덜 쏘여주는 하루가 되겠다.


둘째, 남에게 도움을 주려고 애를 쓰되 설치지는 않겠다.


셋째, 말보다는 귀로 듣는 쪽이 더 행복이라는 걸 한 번 느껴보겠다.(죽음에서 살아 부활을 나눠주시는 예수님은 불쌍한 마음안에 빛을 비춰주시니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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