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79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축일을 맞이하여 여러분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을 감싸주시고, 그 부활의 광명이 우리 모두를 환히 밝혀주시며, 그 부활의 기쁨이 마음 깊이에서 용솟음 치기를 빕니다.
Ⅰ. 부활의 의미.
그리스도의 부활은 진정 인류역사에 있어서 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피조물을 위해서 새로운 차원 의 기원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부활하심으로써 인간을 비롯하여, 우주만상이 죽음과 멸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결정적으로 구원된다는 기쁜소식을 아울러 전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란 무엇을 뜻합니까? 인간의 지혜로써 다 규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한없이 깊은 신비입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있듯이, 부활의 어리석음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어리석다고 보고 비웃는 사람은, 부활을 역시 어리석은 소리라고 비웃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바로 이 같은 비웃음을 받은 사람이요 (사도17,6), 또한 다른 사도들과 같이 그 역시 이 부활의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재판을 받았습니다(사도 23,6 ) .
이렇게 우리의 믿음과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모든 내용은 부활에 달려 있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믿음도 헛되고, 복음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1고 15,14). 그리스도의 부활이 뜻하는 것은 단지 그의 이름, 그의 말씀, 또는 사상이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의 기억이나 추모의 덕이지 그 자신의 생명으로 말미암아서가 아닙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뜻하는 것은 라자로의 부활과 같이 (요한 11,38-44), 죽었다가 자연 생명에로 다시 돌아온 것도 아닙니다. 이런 부활은 결국 죽음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죽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죽음을 처이기고 승리하여 불멸의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서, 죽음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로마 6,9). 부활은 이렇게 자연생명의 소생(蘇生)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야말로 참된 생명입니다. 우리의 자연생명은 죽음의 운명을 면치 못하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은 죽음의 그림자도 있을 수 없고, 영원히 살고, 또 살리는 것이 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은 죽음입니다. 어떤 강한 자도, 어떤 권력이나, 지식이나, 과학의 힘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해지고 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삼키고 마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이 죽음을 – 성경 말씀대로 마지막으로 물리칠 원수인 이 죽음을(시편 8,6; 1고린 15,26) – 처이긴 것입니다. 그리하여「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이사야 26,8; 1고 15,54-55)
Ⅱ,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근원
예수께서 이렇게 부활하심으로써 그분은 진정 우리 모두가 역시 죄와 죽음에서 구원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바로 세상을 구하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주(主) 예수」 라는 말은, 곧 예수께서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하는 죽음까지 굴복시킴으로써, 참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고 부활의 은총으로 구원하시는 주님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 속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모두의 생명의 근원 –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 불멸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셨다는 것(요한 5,2) 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 말씀대로「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샀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9).
예수님은 바로 이 같은 구원, 곧 부활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오셨고, 또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나는 부활이 또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요한 11,25). 또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하신 말씀 등은 바로 이런 뜻에서입니다.
정녕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 우리의 부활이 내포되어 있다는 기쁜소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부활의 확고한 희망과 부활의 빛을 받아, 쓰여진 책이 성경이 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때문에 성경은 참으로 구원과 생명의 책입니다. 특히 사도 바오로는 거듭거듭 이 믿음과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로마 6,4-5 ; 6,9 ; 7,4 ;8,34 ; 1고린 4,14; 5,15 ; 에페
2,4-7 ; 필립 3,10-11 ,골로 2,12 ; 3,1등등). 한 마디로, 우리도 주 예수를 믿으며 살 때,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을 닮은 모습으로, 그분과 함께 영생에로 부활할 것입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1고린 15,442-44).
예수님의 부활은, 이 같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우리 모두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Ⅲ. 부활은 하느님의 사랑의 계시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한없이 넓고 깊은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강생과 십자가의 죽음에 있어서와 같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당신 자신을 남김없이 주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며, 아울러 이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다 주시는 하느님의 한량없는 사랑에 접하게 됩니다.(로마 8,32) 실로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에페 2,4-5).
우리는 이렇듯 부활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2베드 1,4). 인간이 고귀하고 존엄한 이유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 인생과 세상이 던지는 모든 의문과 탐구, 회의와 불안, 번민과 고뇌. 소망과 이상에 대해서 주신 결정적인 해답입니다. 하느님께서 인생과 역사의 어두움을 구원의 빛으로 밝히시면서, 우리에게 생명에 가득 찬 「산 희망을 안겨주는」(2베드 1,3) 해답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실로 우리를 죄와 숙음의 예속에서 풀어주시고, 신부재(神不在)의 물질적 비인간화(非人間化)에서 구하시어, 참된 인간으로 우리를 재생시키는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정녕 우리의 자유와 해방의 주(主)이시요. 정의와 진리, 생명과 구원의 빛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의 절벽을 무너뜨릴 뿐 아니라, 인간세계를 갈라놓는 모든 분열의 담을 헐고, 불의와 부정, 폭력과 억압. 불평등과 차별의 뿌리를 뽑으심으로써, 당신의 사랑과 평화가 지배하는「하느님의 나라」, 이 사랑과 평화로 일치된 「메시아적 백성」 ( 교회헌장 9항) 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는, 유대인이나 그리이스인의 차별이 없고,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의 차별 없이」(갈라 3,28), 모두가 당신안에 형제적인 유대로 하나되게 하셨습니다(同上).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참으로 인생과 역사의 주(主), 그 의미 자체 이 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 주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다시금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그 「산 희망」이 가득하기를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2. 1981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수난하심을 기리던 사순절은 끝나고, 이제 우리는 환희에 찬 부활절을 다시 맞이하였습니다. 오늘부터는「하느님의 백성」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세계 방방곡곡에서 「알렐루야」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고, 하늘에까지 메아리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가 기다하는 근본 이유는, 이 부활이 우리 모두의 부활과 영생의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그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의 그 무한한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와 같이 이 부활에서 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처지의 모든 삶이 여기서 의미를 찾고, 이승에서도 이미 믿음 속에 재생의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는 참으로 만사는 끝난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실로 비극 중에도 비극이요, 암흑과 절망이었습니다. 특히 그를 믿고 따르던 제자들은, 이제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고 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과 세계를 구할 메시아가, 모든 이의 희망이 무참히 못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의인(義人)이라는 것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까지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빌라도는 그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유태민족의 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 미움과 간계가, 이 의인의 죽음을 강요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의 공정을 자랑삼던 로마제국의 이 고관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불의와 타협하여 무고한 사람을 죽이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여기선도 인간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순과 비극은 되풀이 되었습니다.
정의와 진리. 선과 사랑이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오히려 불의와 거짓 악과 증오가 다시금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예수는 정녕 죄없이 죽었고, 그와 함께 진실과 정의도 매장되었습니다.
과연 육중할 바위로 굳게 닫혀진 그 무덤, 로마제국의 힘을 상징하듯 총독이 봉인까지 한 그 무덤에서, 그 암흑과 죽음의 심연에서, 어언 빛이나 생명이 소생하리라고는 기대도,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악과 부조리가 지배하는 곳이요, 죽음이 일체를 삼키는 최후의 승리자로 남
올 것 같이만 보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예수의 두 제자들이 토로한 그 실망에서 (루가 24,21), 우리는 이같은 허탈과 좌절감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물론 예수가 사람들의 손에 잡혀 죽었다가 3일만에 부활하리라고 한 수차에 걸친 예언을 아주 잊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믿기에는 그들의 신앙은 너무나 약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의 부활을 얼마나 믿기 힘들어했는지는, 그 후의 성서의 이야기들이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은 토마였습니다.(요한 20,24-29).
실증(實證)이 없이는 믿지 않겠다는 태도는, 합리주의적 현대 지성만의 특성이 아닙니다. 이미 토마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그 상처를 만져보지 않고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순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지혜란 무엇입니까? 왜 사람이 살고, 왜 사람이 죽는지도 모르는 인간의 지혜가 무엇입니까? 땅에 떨어져 썩은 한 알의 밀씨가, 어떻게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지도 모르는 인간의 지혜가 무엇입니까 ?
삶을 다스림과 같이 죽음을 다스리는 이는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의 판단으로서는 예수는 죽었고. 또한 영영 죽었습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하느님.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이 살아 계심을 인간은 몰랐습니다. 적어도 잊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하느님이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느님”(루가 20.38)이심을 몰랐고. 모든 것을 살리시는, 이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몰랐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같이 인간의 온갖 지혜와 능력조차도 달하지 못하는 그곳에서, 만사를 허무로 돌리는 그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전능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어주신 그 무한한 사랑이, 세상을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 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셨습니다. 어두움을 물리치고 생명의 빛으로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죽음을 소멸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얻어주셨습니다”(부활절 감사경).
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현실생활에 대해 지닌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인생과 역사의 참된 긍정입니다. 현세 인간사회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와 같이, 너무나 자주 선(善)보다는 악이. 정의보다는 불의가, 진리보다는 거짓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가불신사회로 불려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인생을 부조리로 밖에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항구적인 것, 불멸의 가치를 지닌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삶 전체가 덧없고, 허무하다는 결론밖에 나지 않습니다. 부정(否定)의 철학. 이것이 현대인의 인생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그리스도는 부활하였습니다. 바로 그같이 선과 진리와 정의와 사랑이 유린된 곳에서, 오직 허무와 절망만이 지배하는 암흑에서, 죄와 죽음을 처이기고 빛과 생명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인간사회에서 득세하는 것은, 오늘은 불의와 부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에 있어서 결국의 승리자는, 이 모든 것을 소멸하는 진리요 사랑임을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은 한번 죽을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그를 영영 지배하지 못하고 불멸의 생명, 하느님의 생명이 그를 영광되이 다시 살리신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보장하고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 생명은 이미 그 영혼 속 깊이 배태(胚胎)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실로 인생과 역사의 의미 자체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인생관에는 고통과 비애가 있을 수 있으나 부정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난과 굶주림이 그의 삶 전부일지라도, 그에게 있어서 인생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죄와 죽음이 그를 불안과 공포에 떨게한다 해도, 그리스도인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죄의 용서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한신 그리스도 안에는,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히 내려졌다”(로마 5.20)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역력히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이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환난도, 곤궁도, 박해나 총칼도, 어떤 세력이나 죽음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지는 못합니다(로마 8,31-39).
이같이 부활은 우리의 완전한 희망입니다. 누구도 우리로부터 빼앗아갈 수 없고, 누구도 지울 수 없는 불멸의 희망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같이 큰 희망을 우리만 가질 것이 아닙니다. 날이 갈수록 희망을 잃고, 채념과 실의에 젖은 우리 이웃과 동포. 세상 모든 이에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부활의 기쁜 소식은 혼자의 것만이 아니라 모든 이의 것이며, 받기만 할 것이 아니라 땅 끝까지 줄기차게 전해야 하는 복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도 나도, 우리 모두가 부활의 기쁜 소식의 전달자가 되어야하겠습니다.
올해 「이웃 전교의 해」에, 「교구 창설 150주년을」 기리는 이 뜻깊은 해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기쁜 소식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을 힘입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파스카 촛불처럼, 하느님의 사랑에 불타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인생을 밝히고, 겨레를 밝히는 등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날은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알렐루야!”
3. 1983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이 날은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 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
1. 밤의 어두움을 뚫고 새 날이 밝아오듯, 우리를 위해 수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
의 암흑에서 생명의 빛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는 삼일만에 부활하였다.」 이것은 사도들이 목숨을 내걸고 선포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실로 이 믿음 위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자연 생명에로의 복귀가 아닙니다. 죽음을 이긴 참 생명으로 다
시 사신 것입니다. 자연 생명 속에는 언제나 죽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인간 생명을 비롯하여 모든 자연 생명은 언젠가는 죽음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죽음을 쳐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생명은 참된 의미의 생명이랄 수 없고,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참 생명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모든 이를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당신의 그 부활 생명으로 우리 모두를 구하시고 영원히 살리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은 믿는 이들에게 말할 수 없이 큰 희망을 안겨줍니다. 부활은 실로 죄와 죽음으
로 끝나고 마는 현세 세상, 그 어두움 위에 떠오른 구원의 태양입니다. 부활의 은혜는 인간
분 아니라 우주만물이 입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세상과 우주만상의 종말이 죽음이나
파멸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의 생명과 영광임을 말해 줍니다(묵시 21,1-4).
새 하늘과 새 땅 !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세계! 우리는 이것을 상상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느님께서 천지창조 이전부터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구원의 은혜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오로는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
조차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라고 이사
야 예언서의 말씀(64,3. 52,15)을 인용하여 경탄해 마지않습니다( 1고린 2,9),
부활은 실로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입니다. 그 신비는 너무나 크고 깊기 때문에, 우리는 파악하기도 힘들고, 믿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란, 바로 여기에 집중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구원과 생명은, 곧 이 부활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그리스도교 믿음의 바탕이요, 중심이며 또한 목표입니다. 이 부활을 빼면 우리의 믿음은 헛되고, 성경의 모든 말씀은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그것은 하나의 부질없는 이야기책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부활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진정 생명의 말씀이 되게 하고, 또한 우리의 믿음도 결
코 헛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인생과 세상 모든 것에 존재와 삶의 의미를 줍니다.
2. 부활을 믿으면서 우리가 다시금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한량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은, 가없이 크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
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7). 이 영원한 생명은 곧 부활 생명이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 생명을 주시고자 당신 외아들까지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이 외아들, 곧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죄를 지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분은 특히 죄인인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라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 스스로 우리와 똑같이 약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평생을 통해서 가난하게 사셨고, 언제나 억눌리고 버림받는 자와, 고통받는 이들의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상처를 낫게 하셨습니다. 또한 약한 이들과 어린이들을 감싸시고 겸손한 마음으로 봉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가장 비천하고 버림받은 자, 죄인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 아니 바로 죄가 되시어(2고린 5,21)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랑에 서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이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시고, 모든 이의 구원과 생명의 원천이 되게 하셨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정녕 「집짓는 자들이 내버렸던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시편 118,22).
하느님의 성자께서 이렇게 세상의 죄를 지고 죽기까지 하셨다는 것과 또한 그 때문에 하느님은 그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시어 모든 이의 부활 생명의 원천이 되게 하셨다는 것은, 진정
우리 모두에게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죄에 우는 사람, 병고에 신음하는 사람, 죽
음을 눈앞에 둔 사람, 버림받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재기(再起)와 부활의 빛을 줍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
부활 속에 자신의 부활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과의 연대 속에, 특히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과의 일치 속에 죽으시고 부활 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로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22)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두 살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넘어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시고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무죄선언을 받게 되었습니다」(2고린 5,21).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다 지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당신과 원수가 된 우리를 당신 편에서 외아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의 손길을 펴시었습니다. 다시는 그 손길을 거두시지 않으십니다.
3. 이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때마침 올해는 구원의 성년(聖年)입니다. 또한 우리 한국교회는 선교 200주년을 기리기 위한 교구 공동체의 해입니다. 다 같이 회개와 화해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까지 주신 그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을 찾아, 다시 발길을 돌린 탕자와 같이 우리도 발길을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집으로 돌려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미신 그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 품에 안겨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무죄선언을 내리신 그 하느님을 어떻게 우리는 등질 수 있습니까?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고린 5,21). 사도 바울로의 이 말씀은 바로 오늘날 우리를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세계는 핵전쟁의 위험 앞에 실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일상 생활 속
에서도 불안, 체념, 의욕상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인간다움을 포기한 채 자신
을 그냥 세파에 내맡기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고린 5,21). 하느님과의 이 화해만이 오늘에 사는 우리 자신을 다시금 인간으로 각성시켜 주고, 우리의 잃은 인간성을 회복 시켜 줄 것입니다.
이와 아울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든 이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무엇이기에 단 한 사람이라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이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요, 우리 생명의 길입니다. 또한 여기에 크리스천의 삶의 본질이 있습니다. 이 사랑 속에 우리는 진정 새 인간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새 인간으로, 그리하여 우리는 드디어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되고, 오늘의 세상을 구원해 가는 「메시아적 백성」 (교회헌장 9항)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 가득하시길 빕니다.
4. 1984년 부활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하느님 안에서 새 세상을 믿고 희망하십시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또 다시 여러분 모두에게 참된 평화를 내려 주시도록 기원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믿는 이들에게만 가능합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 평화가 아무런 효력을 발하지 못합니다. 부활을 느끼고 체험하기 위해서는, 아주 강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상 죽음을 목격하고 이를 확인했지만, 그 중 아주 소수의 사람들, 즉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처형 사실을 알고 기억했지만, 그분이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셨고, 영원히 사신다는 것을 알고 체험한 사람은, 믿음을 가졌던 예수님의 몇몇 제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록 아주 소수의 제자들만이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증거하였지만, 그 증거는 소수의 증거로 시간과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갈수록 보다 많은 사람에게 확산되어 풍부하고 확고부동한 사실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그것은 소수의 증거를 받아들인 많은 이들이, 스스로 믿음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실제로 만나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소수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 또 이 소수의 증거를 받아들인 많은 이들이 가졌던 믿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무엇을 믿었기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앞에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 주셨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의 시대는 절망과 좌절의 시대였습니다. 그들을 통치하던 로마제국의 압제는 갈수록 강화되었고, 이스라엘 동족의 지도자들은 이 압제자의 충복으로 백성을 찬탈하는 일을 도을 뿐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이 승승장구하는 시대였습니다. 불의를 멀리하고 하느님의 뜻을 설파해야 할 이스라엘 종교의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세속적 권익을 추구하며 불의한 체제를 옹호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불의와 전적으로 타협하는 이들이 갈수록 득세하는 시대였습니다.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여 생명을 내걸고 조국을 위해, 이스라엘의 민족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싸우는 소수의 저항 세력이 있었으나, 그들의 안간힘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 채 항상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폭력과 무력에 민족의 모든 미래를 거는 이들의 격한 움직임에, 백성은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백성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목자 잃은 양과 같이 목적지를 상실한 채 이리 받히고 저리 채이며, 헤매고 있었습니다. 사회의 어느 한구석도 밝은 미래가 엿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께서 오시고 새 세상이 임박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불의한 권세가 물러가고 힘없는 사람도 땅을 차지할 수 있는 세상, 슬픔과 눈물로 찌든 얼굴이 환하게 피어날 세상, 음모와 모략이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착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올바른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세상, 박해하는 자의 폭력이 패배하고, 의인이 승리하는 세상이 바로 문밖에 다가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이 새 세상은 당시의 사회를 아무리 샅샅이 뒤져보아도 전혀 그 실현 가능성을 발견할 수 없는 꿈과 같은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이 새 세상이 반드시 찾아오리라고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이 새 세상을 믿었던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허황되고 못 이룰 꿈이라고 일축하는 예수님의 새 세상을, 제자들은 가능하다고 믿고 기대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아무리 불의와 죄악에 가득찬 세상이지만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 외아들까지 보내시어 이 세상을 새 세상으로 바꾸어 놓으시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자기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믿고 기대하던 새 세상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당신 부활로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순교선열들을 보십시오.
우리의 순교선열 또한 하느님이 마련해 주시는 새 세상을 굳게 믿고 기다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지위와 권력, 부와 명예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게 그들을 짓누르고 유혹하여도 그러한 세력은 몰락할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의로운 자들의 새 세상이 반드시 도래할 것임을 믿고 기다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이 믿음은 참으로 진실하고 굳세었기에 그들은 자신의 입신출세는 물론이고, 사랑하는 가족과 자신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하면서도, 그 믿음을 함께 지켜나가고 새 세상을 함께 맞이하려 했던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00주년을 맞아 이 땅에 빛을 비추고자 하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새 세상에 대한 이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분단된 이 나라의 정치적 운명을 걱정하고 정의가 결핀된 상황을 우려하는 이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이루어 질 수 없을 것 같은 새 세상이지만, 하느님 안에 믿고 희망하십시오.
이 나라의 위태로운 경제를 걱정하고 의롭지 못한 비정상적 경제 활동과 구조를 우려하는 이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새 세상이지만 하느님 안에 믿고 희망하십시오. 폭력과 방탕이 춤추는 이 사회를 한탄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새 세상이지만 하느님 안에 믿고 희망하십시오. 외적으로 갈수록 풍요로와 지고 비대해지는 반면 내적으로 빈약해지고 메말라 가는 우리나라의 교회를 슬퍼하고 지탄하는 이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새 세상이지만, 하느님 안에 믿고 희망하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당신 부활로 우리의 이 믿음과 희망에 대한 보장을 해 주셨습니다. 또 새 세상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진지하고 성실한 것이라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 앞에 당신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시고 당신의 평화를 나누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새 세상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진지하고 성실해야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수동적인 자세로 일이 이루어지기를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종류의 불의와 폭력과 죄악에 대하여 강력한 불신과 배격의 의지를 구체적으로 키워나가며, 새 세상의 도래를 위해 자신의 능력과 활동을 제공하는 능동적 삶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단숨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결정적인 활동은 이미 부활하시고 승리를 거두신 그리스도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는 이 그리스도의 활동을 굳게 믿고 의지하면서, 우리 자신의 노력도 최대한으로 봉헌하여 그분의 구원사업을 도와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본받아 진리를 위해 몸바치고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는 무자비한 전쟁이 수많은 고귀한 생명을 앗아가고 있고 상승일로에 있는 동서 양대진영의 군비경쟁은 인류의 생존을 근원적으로 위협하여, 평화란 도저히 불가능한 꿈인 것처럼보입니다. 그러나 평화는 실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희망하고 봉헌하면 하느님은 도와 주실 것이고 새 세상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이제 곧 우리나라를 방문하시는 교황성하께서도 이 복음을 외치시기 위해, 자신의 전존재를 봉헌하시며 노령에도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으시고 땅끝에서 땅끝까지 달리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믿음의 맏 형님이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일치하여, 새 세상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봉헌을 완성해 갑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축복과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기원하며
1984년 부활절에
서울대교구장 김 수환 추기경
5. 1985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형제 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가 오늘 여러분을 가득 채우시기를 빕니다. 그리스도
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바로 여러분 곁에 현존하시고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 우리 곁에 계심을 믿고, 그분이 지금 이 순간 우리를 염려해주시고 지극한 사랑의 눈으로 지켜보고 계심을 믿는 사람은 복됩니다. 그러한 믿음은 여러분을 온갖 불안과 두려움, 온갖 욕심과 속박에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신자
라는 신분에 있는 것만으로 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도들과 제자들 중에, 어떤 이들은 예수 부활 후에도 예수님의 현존을 믿기까지 오랜 기간이 필요했던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즉시 믿음을 얻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뉘여있던 무덤 문 앞의 돌이 사라지고, 시신이 없어지고, 수의가 흩어져 있어도, 어떤 이는 처음에 단순히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간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러한 광경을 보고 즉시 믿음을 가졌습니다. 요한이 실제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만한 구체적인 근거는 가직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눈에 안 보이고 수의만 남아 있다는 것 외에.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확증은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나자렛의 예수님은 아직 그들 곁에 동행하시지 않았고, 그분이 어디엔가 살아 계신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요한은 예수님이 살아나셨음을 믿었습니다. 어찌하여 요한은 빈 무덤과 남아 있는 수의만 보고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평소부터 예수님을 각별히 사랑하고 존경하여 사도들 중에서 예수님과 가장 깊
은 친분 속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깊이 느끼고 예수님의 마음이 그의 영혼에 깊이 아로새겨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십자가상에 돌아가셨지만 그 죽으심으로 사도 요한은 오히려 그분과 함께, 살았을 때보다 더 완전한 예수님의 사랑을 보게 되었고 그 사랑 때문에 요한의 영혼에 박힌 예수님의 모습은 지워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장소와 시간을 초월하여 깊은 일치를 이룹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완전
한 사랑에 매료된 사람은 그분과 이별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고백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사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사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이런 깊은 사랑으로 예수님과 일치했던 요한에게 있어서 빈 무덤, 흩어진 수의, 잘 개켜진 머리수건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믿도록 깨달음을 주기에 충분한 표징이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까지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가정에, 그리고 우리 겨레와 교회에 내려주신 은총을 헤아려 보고, 그 엄청난 사랑을 돌이켜 보십시오.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죽으심으로 보여주신 사랑을 음미하십시오.
예수께서 끊임없는 여러분의 죄에도 불구하고 성사를 통해 용서하시고, 다시 받아 주시는 그
사랑을 되새겨 보십시오
예수께서 여러분이 쉴 사이 없이 청하는 수많은 은총을 성부께서 내려 주시도록 전구해주시는 그 사랑을 발견하십시오.
예수께서 오늘도 내일도 빵의 모습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당신 몸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계시는 그 사랑을 맛보십시오,
예수께서 여러분의 이웃을 통해 여러분을 보살피시고, 여러분의 아픔을 위로해주시는 그 사랑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평소에 예수님의 이런 사랑을 보고 느낄 때, 예수님과 우리의 일치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빈 무덤과 수의만을 보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에 매료될 때, 우리 주변의 대수롭지 않은 조그마한 표징들을 통해 바로 오늘 우리 곁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심한 역경과 실망, 환난과 좌절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하여도, 평소에 예수님과 맺은 일치가 깊고, 그 분의 사랑에 강하게 끌려 왔었다면, 우리는 새롭게 우리 주변의 하찮은 것, 조그마한 것 안에서도, 빈 무덤과 개켜진 수의 같은 부활하신 예수님 현존의 표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를 모든 고통과 절망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되풀이해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얻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부활하신 그분께 대한 믿음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분이 오늘 여러분 곁에 계심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분은 여러분을 기쁨과 평화로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6. 1987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1.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축일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위에 가득하기
를 빕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 속에서 계시더라도,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이 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쾰른 땅에 군사용으로 건설된 지하동굴 속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누가 이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를 쓰신 분이 얼마나 깊은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었는가를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의 막바지에 어둡고 습기찬 동굴 속에서도 이 분의 눈은 빛나는 태양을 볼 수 있었고, 이 분의 마음은 따뜻한 사랑에 차 있었으며, 마치 하느님이 안계신 듯 침묵만 지키시는 절망과 공포 속에서도, 이 분의 믿음은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께 희망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쟁은 오래 전에 끝났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되는 또 다른 전쟁들이 있습니다.
민족과 형제를 갈라놓는 사상의 차가운 대립, 인간답게 살기 위한 기본권의 뜨거운 투쟁, 먹고살기 위한 생존의 처절한 경쟁‥‥이러한 격랑 속에서 우리는 쉽게 좌절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2. 부활 대축일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무죄하면서도 참혹히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묻히신 후, 마리아 막달레나가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전혀 뜻밖에 휑뎅그렁 비어 있는 무덤을 보았을 때, 그녀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잘 모시고, 그분께 대한 마지막 정성으로 향유를 바르고싶어했던 막달레나는 망연자실하여 사도들에게 뛰어가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죽은 모습이나마 다시 볼 줄 알았던 마지막 희망, 한가닥 위안마저 앗아간 듯한 빈무덤에서, 우리는 또한 어둡고 암담한 우리 사회현실의 반영을 보게 됩니다.
국민은 있어도 주권은 없고, 신문 방송은 있어도 언론은 없으며, 국회나 정당은 이름뿐이오, 힘만 있을 뿐 정치는 없는 공허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국민의 여망인 민주화가 정략의 도구로 쓰여지고, 보다 밝은 정치의 새 시대를 열 것으로 기대되었던 헌법개정의 꿈은 기만과 당리의 술수 아래 무참히 깨어졌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는 통치권자의 마음을 비운 결단을 기대하였지만, 막상 내려진 이른바 ‘고뇌에 찬 결단’은 한마디로 말해서 국민에게 슬픔을 안겨주었고, 생각하는 이들의 마음은 더 큰 고뇌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이 땅 위에는 다시금 최루탄이 그칠 줄 모르고 터지며, 국민의 눈과 마음속 깊은 곳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게 되었습니다.
병든 사회 속에서 범죄는 날로 흉포해지고, 병든 법치 속에서 인권유린이 다반사가 되어, 드디어 성고문의 충격은 고문살인의 경악으로 이어졌지만, 사회에서나 옥중에서나 인권보호와 처우개선의 약속은 허공에 뜬 구호메 그칠 뿐입니다.
또한 유엔이 제정한 ‘살 곳 없는 이들의 해’를 맞이하였는데도, 철거민은 재개발의 뒤안길에서 울고, 3저(3低)의 호황 속에서도, 어제보다도 나은 것 없는 서민의 하루엔, 노동의 피로만 겹쳐가고, 생계의 막장이라는 탄광촌의 하늘마저 불황의 검은 구름이 가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진실도 없고, 정의도 없고, 사랑도 없으며, 가난한 자 약한 자에 대한 배려도, 인정도 없는 황량한 풍토 위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마치 빈무덤 앞에 선 막달레나처럼 당황과 혼란과 슬픔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을 원망하게 됩니다. 주님은 과연 어디 계십니까? 주님을 어디에 모셨습니까?
3.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러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막달레나의 다급한 보고에 접한 두 제자는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차례로 용기 있게 빈무덤 안으로 들어가 ‘믿게’ 됩니다. 그들이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은 빈무덤 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침묵과 공허만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서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은 예수는 부활하여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 복음을 좀더 읽어 내려가면,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실망과 좌절에 젖어서도 빈무덤을 지키며 울고 있는 막달레나에게 “왜 울고 있소? 누구를 찾고 있소?”하고 물으시며 막달레나의 이름을 친히 불러주시는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팔을 울리고 환영 인파가 환호성을 올리는 가운데 화려하게 등장하는 분이 아닙니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무덤가에서 당신을 찾는 이에게 조용히 몸을 드러내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도 삶에 지치고, 세상에 실망할 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억울하고 슬플 때, 괴롭고 아쉬울 때, 자신의 한계와 무기력을 뼈저리게 느낄 때,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따로 불러 위안을 주시며, 당신께로 모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인간의 눈에는 빈무덤처럼 보이는 이 세상 위에 현존하시며, 인간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방법으로 인류의 역사를 살피시고 이끌어 나가시는 분이십니다.
4.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화됩니다. 한 때 비겁하던 제자들이 누구보다도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까지 바쳐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주님을 믿고, 그분 안에 사는이들에게는 이제 인종이나 민족의 차별, 자유인이나 노예의 차별도 없고, 남녀의 차별도 없으며, 모두가 형제 자매요, 그리스도 안에 하나입니다(갈라 3,28참조).
참으로 인간이 변하고, 사회가 변합니다. 이기주의와 죄악의 세상이, 사랑과 진리와 정의로 가득찬 하느님 나라로 변화됩니다. 믿는 이들은 모두 한 마음 한 뜻이 되었고, 모두가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가난한 사람이 없었던 초대교회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된 하느님 나라 그것이었습니다(사도 2.43-47 ;4.32-37 참조).
누구인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이 형제로 보이면, 그것으로 새 날이 밝아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이는 누구든지 이같이 모든 이를 형제로 보고 사랑하는 새 사람들이 될 것이고, 그들과 함께 인류역사에 새 날이 밝아올 것입니다.
5. 이제 우리도 그처럼 변화되어야 합니다. 특히 ‘성체와 교회의 해’인 올해, 우리는 모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뿐 아니라, 성체성사를 통하여 당신을 생명의 양식으로 남김없이 주시는 그 주님을 모심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되고, 동시에 그 사랑을 본받아서 우리 역시 서로 사랑하고 나눔으로써, 참으로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형제적 공동체인 교회를 이룩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빈무덤과 같은 오늘의 현실 속에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가운데 살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의 정치가 아무리 허무하다하여도 그것이 우리에게 인간다운 삶을 포기할 이유가 퇴지 못하며, 정의와 진실을 단념하는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또한 아무리 모두가 이기주의에 흐르고 세파가 몰인정하여도, 우리들마저 사랑을 실천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주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같은 세상 속에서 당신의 생명을 바쳐 사랑과 진리를 증거하시고,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그분의 제자일진대, 오늘의 현실이 허무해 보이면 보일수록 더욱 이 사회, 이 땅, 우리나라와 민족의 인간화와, 참되고 값진 삶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헌신해야 합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정의를 구현하며 무엇보다도 사랑을 몸소 사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이 빈무덤처럼 허망해 보이는 이 땅에 현존하심을 깨닫게 되고, 또한 이 땅의 모든 이에게 부활을 힘차게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6. 형제 자매 여러분,
부활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의 축일입니다. 또한 부활절은 그 약속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축일입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는다 해도 태양을 볼 수 있고, 사랑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해도 사랑의 힘을 믿을 수 있고, 하느님께서 침묵을 지키시는 것같은 때에도 하느님을 믿고 희망할 수 있는 신앙의 축일입니다. 이 신앙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사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 빛이신 주님과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정치가 아무리 허망하고, 사회의 모든 현상이 아무리 어두워 보여도, 우리가 실망하지 않고 진리와 정의 및 사랑의 불을 지피며 살면, 주님은 억압된 민중의 짓밟힌 인간성을 반드시 살려주실 것입니다. 마치 얼어붙었던 산과 바위틈에서 이 봄에 진달래꽃이 환히 피어나듯이, 그렇게 이 땅에도 인간다운 삶의 꽃이 피어나도록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 생명의 물을 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7. 1990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의 부활 대 축일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그 생명의 빛이, 인간성 상실과 기치관의 부재의 어둠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바를 모르는 우리를밝혀주시기를 빕니다.
1. 부활의 진리는 이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좌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말씀하신대로 3일 만에 부활하시어, 우리 모두를 영윈히 살리는 주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고 말 인생의 절망과 어둠에, 희망의 빛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우리의 부활생명이심을 믿는 신앙을 지닐 때, 우리는 그 믿음에서 죽음의 절망 대신, 생명의 희망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인생이 무엇이며, 왜 사는지? 왜 죽는지 등, 거듭 거듭 의문을 제기하는 인간에게 근원적인 답을 주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복음 성경을 보면, 누구보다도 사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기를 힘들어 하였습니다. 사도들은 후에, 부활의 기쁜 소식을 목숨을 다하여 선포하고, 피를 흘리며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 가르침을 받기 전에는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거나 믿기 힘들어 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부활이 믿기 힘든 것은, 당연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은총의 힘 없이는, 이 부활의 신비를 깨달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알아들을 수 없다 하여 이를 부정하면, 무슨 결론이 남습니까?
그것은 결국, 인생의 종말은 죽음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 참으로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헛되고(1고린 15:17), 인생의 의미도 없으며. 인간의 모든 활
동이 무의미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큰 업적을 해낸다 하여도 결국 죽고, 썩고 말 때.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진리 탐구. 정의구현. 사랑의 실천.– 이 모든 것의 의미가 없게되는 것입니다.
어떤이가 말했듯이, 불멸의 생명이 없다면, 자유를 위한 투쟁도 무의미합니다.
인생의 의미가 있고, 진리와 정의, 사랑과 자유에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영생은 있어야 하며, 영생이 있기 위하여는 부활은 필연코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요청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고, 오직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베푸시는 자비로운 은혜인 것입니다.
3. 사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목적하신 것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지와 고통 속에 살다가, 어느 날 죽고, 썩고 마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죄와 죽음에서 구원되어, 당신과 함께 영원한 생명 속에서 영복을 누리며 사는 것. 이것이 하느님이 지니신 뜻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가 죄를 지었을 때,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를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성자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셨고,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부활 생명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결국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느님의 사랑. 죽음보다 더 강한 그 사랑의 승리를 말합니다(아가 8,6).
우리 각자의 죄가 아무리 크고, 우리를 멸망으로 이끄는 죽음의 힘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종말에 승리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굴복시키고 마는 하느님의 사랑임을. 그리스도의 부활이 잘 증명하는 것입니다.
4. 이러한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할 때, 우리는 자연히 이 사랑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르 12,29에서 잘 가르치고 있드시:—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같이 사랑하는 것” 입니다.
그분은 진정 우리의 아버지로 모든 것 위에, 모든 것에 앞서 섬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요한 1서 4,20에서 사도 요한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 라고 하시며, 자기 형제를 사랑할 때,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가능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15,17)고, 거듭 당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성당에 아무리 열심히 다니고. 기도를 많이 하고. 재를 지켜도.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우리 이웃을 사랑합니까? 가난한 이웃에 우리 마음을 열고 있습니까? 내가 가진 것을, 그와 나누고 있습니까? 우리는 반대로 재산을 늘리기 위해 부동산 투기를 하거나, 전세값을 올림으로써 가나한 이웃을 울리며, 그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는, 이른바 과소비로 자기 만족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부동산 투기. 전세값 인상 등으로, 가난한 이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정부는 참으로 민생문제 해결을 우선하는, 희망의 정치를 펴야 합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복지정책을 세우고 실현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네루의 말대로, 정치는 가난한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집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데 있어서, 절대로 필요한 기본 요건이므로, 영세 세입자나, 철거민의 주거안정을 위한 합리적 조치를 조속히 취해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가진 이들도, 이 사회의 평화를 위해서나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서, 자기 이익 추구 때문에 영세민을 울리는 악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 곧 우리 자신은 극심한 물질주의와 이기주의로, 도덕적 붕괴와 정신적 파탄을 면치 못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품지 못하고 계속 못살게 밀어내는 사회는, 축복을 받을 수 없고, 서민들로부터 삶의 의욕을 빼앗아 가는 사회는 번영할 수 없습니다. 사회는 비인간적, 반 생명적 사죄로 몰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마태 25,31-46에서 말씀하고 계시듯이, 우리는 이웃 형제, 특히 가난한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구원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요한 3,14).
6.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 죽음을 벗어나야 합니다. 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새 생명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어두움에 갇혀있는 이 사회에, 빛을 밝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모두 자신의 무덤, 폐쇄된 자아의 벽을 헐어야 합니다.
진정 이웃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웃을 해치거나 미워하지 말아야 함은 물론, 이웃과 가진 것을 구체적으로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자기 이익을 위하여 남을 울리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참으로 부활하고 구원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같은 사랑의 길을 절대적으로 가야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진정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성찬의 삶을 사는 해에, 이같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8. 1992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진심으로 축하하며, 부활하신 주님의 은
총, 그분의 빛과 생명과 여러분 모두와 우리 사회와 온 세계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친히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에 이르는 고난을 당하시고 묻히셨으나, 3일 만에 죽음을 쳐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음과 허무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인생과 세상에 모든 것을 다시 살리고 영원히 살게 하는 참 생명을 가져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그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요한 11, 25참조).
이 얼마나 크나큰 기쁨의 소식입니까?
죄와 죽음, 허무와 멸망 밖에 없고, 따라서 인생의 의미나 역사의 의미도 없으며, 만사가 모순과 부조리에 빠져 있던 그 절망과 암흑 속에, 그 모든 것을 밝히고, 그 모든 것을 살리고, 의미로 가득 채우는 구원과 생명의 빛이 터 올랐습니다. 이제 인생과 세상의 종말은 죽음과 멸망이 아니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빛이요 평화입니다.
“이 날은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 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시편 118,24). 그렇습니다. 진실히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 날은 주께서 마련하신 날입니다. 알렐루야, 알헬루야 하며 환희와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하늘 높이 울리도록 아니 부를 수 없습니다.
2. 오늘날 우리에게는 참으로 모든 면에 걸쳐 새로운 것이 절실히 요망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정치, 새로운 경제, 새로운 사회를 국민이 얼마나 바라는 지는, 지난 총선에서 잘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새롭게 되기 위하여는 인간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새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인은 참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과소비, 사치, 향락과 인명 경시 풍조에서 잘 드러나듯이 물질주의, 황금만능주의에다 가치관 부재, 인간성 상실로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 전체가 윤리 도덕적으로 너무나 타락해 있습니다. 이 병든 한국인은 마침내 많은 사람들의 근면과 성실에도 불구하고 돈만 아는 한국인, 함께 어울려 살 수 없는 이기적 한국인으로 오인되어, 지금 세계 여러 곳에서 불신과 경계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경멸과 배척을 받는 경우도 없지 않게 되었습니다. 해외 여행자나 이민사회에서 야기되는 여러 문제들이 이를 잘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로 우리 민족의 운명이 이제 어떤 전환점에 도달해 있다는 감을 아니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분명히 번영과 몰락,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앞두고 어느 한쪽을 헉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신명 30, 19)고 주님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참으로 저주가 아닌 축복을 택하고 생명을 택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 모두 새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새 인간이 되어야합니다. 어떻게 이런 새 인간이 될 수 있습니까? 새 국회가 우리에게 그것을 줄 수 있습니까? 새 정권이 줄 수 있습니까? 돈이나 기술이 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주신 자유 의사로 마음을 바꾸지 않을 때, 하느님도 우리를 어떻게 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회개하여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인간, 윤리 도덕을 아는 참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돈이나 권세보다는 하느님과 인간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 2, 5). 누구보다도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는 참으로 사도 바울로의 이 훈계를 마음 깊이 새겨듣고 이를 생활 지표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실히, 오늘날 절실히 요망되는 그 새로운 인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3. 그리스도는 참으로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남은 것은 사라지고 새 것이 나타났습니다”(2고린 5,17)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정녕 죽은 것도 다시 살리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우리는 틀림없이 그분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묵은 인간을 벗고 새 인간을 입게 됩니다(골로 3,9-10 참조). 삶이 메말라가고 생명이 죽어 가는 우리 땅, 가치관 상실로 윤리도 도덕도 없이 사막처럼 황폐되고 있는 이 땅에, 다시금 생명이 소생하고 인간성이 부활하여 모든 것이 깨끗하고 싱싱한 푸르름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에제키엘서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물이 흘러 그 물이 강을 이루면 양쪽 뚝에 나무가 무성하여질 것이라고 하고, 그 물이 사해에 흘러 들어가면 사해의 물마저 단물이 되며 “이 강이 흘러 들어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온갖 생물들이 번창하며 살 수 있고‥‥ 어디에서나 생명이 넘친다”(에제 47, 1-10 참조)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살리는 물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실로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빵이시면서, 생명의 물이십니다. 때문에 예수님 친히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알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요한 4, 14)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분이 주시는 물 곧 성령을 마실 때, 우리는 다시 나고 그분의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우리 안에는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내릴 것입니다(요한 7, 38 참조). 주님은 우리 모두가 이 진리를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분은 애원하시다시피 우리를 이 진리 자체이시요, 생명이신 당신께로 이끄시고자 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18)하고 초대하십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생명의 물로 아낌없이 주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갈증, 진리와 정의와 사랑과 생명에 대한 모든 갈증을 풀어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십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4.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요한 4, 10).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이라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이 말씀은, 오늘 이 시간 우리들 하나하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까?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은 누구신지 우리는 참으로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진실로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르기를 소망합니까? 2000년대 사목 목표인 복음화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복음화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의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사람이 되고 우리 본당과 우리 교구, 신학교와 모든 수도회 모든 사도직 단체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되는 것이 곧 복음화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로써 새롭게 되고, 복음화 될 때에 우리 사회도 새롭게 되고 복음화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과 평화와 생명이 여러분과 우리 사회를 가득히 채우기를 다시금 빕니다.
9. 부활 메시지 (1993년)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 기쁨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예수님은 당신 친히 말씀하신 대로 수난하셨으나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죽음도 멸함도 없는 참 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도들의 증언으로써 잘 증거됩니다. 사도들은 본래 배운 것도 없었거니와, 비겁하리만큼 겁 많은 약한 인간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수난 때에는 모두가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한 것과는 달리 배반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렇게 약하던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영을 받은 후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목숨 바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였고, 그분만이 하늘 아래서 유일한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힘차게 증언하였습니다(사도 4,12).
사실 사도들을 비롯한 초대교회 신자들을 보면 돈도 없고, 힘도 없으며, 수적으로도 보잘것없는 작은 무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시작부터 유태인들과 대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의 삶은 매일매일 주의 수난과 부활의 빠스카 신비를 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박해를 이겨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때문에 겪는 고통을 기뻐하였습니다(사도 5,41). 현세적 시각으로 볼 때 아무것도 아닌 이 힘없는 집단이, 어떻게 당대에 천하를 호령하던 대로마 제국을 그 모진 박해 아래서 이겨낼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그 박해의 시련과 고통 속에서 기뻐하고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와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참으로 부활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힘입니다. 모든 신앙의 핵심이요 바탕입니다. 때문에 가장 큰 박해자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개한 사도 바울로는, 이 신앙이 없으면 복음선교도 믿음도 헛되다고 하였습니다(1고린 15,14).
박해자에서 증거자로 변한 바울로의 회개는 주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더욱 힘차게 증거합니다. 동시에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원수까지도 용서하시는 주님의 자비, 죄인을 성인으로 바꾸시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은 사실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요,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이며, 죄에 대한 은총의 승리입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묵은 인간을 벗고 새 인간을 입습니다(골로 3,9-10).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서로는 형제가 됩니다. 그들 사이에는 유태인, 이방인의 차별이 없고, 자유인과 노예의 차별, 남녀의 차별도 없습니다(갈라 3, 28).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사랑할 줄 알고, 가진 것을 나누며,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초대교회가 이를 잘 말합니다(사도 2,44-47). 이같이 부활의 믿음이 있는 곳에는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거기에는 사랑이 있고 용서와 화해가 있으며, 평화와 기쁨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시련과 박해를 이겨내고 죽음까지도 이겨내는 힘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언제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믿음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닮은 새 인간을(에페 4,24 참조) 낳고, 사귐과 섬김과 나눔의 새 공동체를 낳고, 인종과 피부색, 계급과 성별의 차이 등 일체의 차별을 넘어 서로 사랑할 줄 아는 새 인류를 낳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 믿음을 확고히 지녀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사목목표로 삼고 있는 ‘복음화’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서 우리 자신이 참으로 주님을 닮은 새 인간으로 다시 나는 것입니다. 지금 나라에서는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공개와 더불어 부정부패, 과소비, 사치풍조 등 이른바 한국병을 퇴치하고, 신한국 건설을 호소하면서 이를 힘있게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나라가 우리 교회보다도 앞서서 사회의 정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이 요구는, 이번 경우 그 의미에 있어서 단지 정치적 경제적 차원에 그치는 것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도덕적, 정신적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 시대의 요청입니다. 이렇게 강력히 추진되는 도덕성 회복은 하늘이 주신 기회입니다. 우리 자신과 나라를 위해 이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됩니다. 사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사치와 낭비 및 안락 추구로 후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 하고 정직하고 성실하며, 부지런히 일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고통을 나누고 함께 잘사는 새 나라, 인간다운 사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이들, 그리스도교인들이 이 신한국 건설에 참으로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은 과연 깨끗한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울에 비추어 청렴결백, 이웃사랑, 겸손과 봉사, 진실과 정의 등 모든 면에 투명한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처럼 오늘의 교회인 우리는 이 땅에 가난한 이가 없어지도록 가진 것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하며 계층간, 지역간의 차별에서 오는 우리 사회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일치의 성사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이 땅에서 모든 이를 하나로 화합시키는 ‘일치와 희망과 구원의 가장 강력한 싹’인 ‘메시아적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교회헌장 9항 참조).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이를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고, 마침내 남북분단의 벽을 허물어 조국의 평화통일을 이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래 빛과 소금의 구실, 사회를 변혁하는 누룩의 구실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본분 상 사랑과 정의를 바탕으로 한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요, 건설자이어야 합니다.
2000년 전 교회 초창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새 인간, 새 인류가 태어났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이 땅에도 이같은 부활신앙을 바탕으로 진실로 새 인간이 태어나고 정치와 경제의 차원을 넘어서, 참으로 인간다움이 새봄과 함께 소생하고 기쁨과 희망이 샘솟는 새 나라가 건설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풍성하기를 거듭 빕니다.
1993년 예수 부활 대축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김수환
10. 1994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형제 자매 여러분,
회개와 보속의 사순절이 지나고 만상이 다시 살아나는 새봄과 함게 부활 대축일을 맞이
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시고 죽으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었을지라도 살 것이요”(요한 11,26) 하신 말씀 그대로,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부활 생명이 되셨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사도 신경에서와 같이 “죄의 사함과 육신의 부활과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라고 신앙 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실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요, 복음의 본질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쳐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죄로 말미암아 죽을 운명에 놓여 있던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부활이 없었으면 인생의 말로는 죽음 뿐 입니다. 세상과 역사도 종국에는 멸망밖에 기대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인생과 세상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참으로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부활은 인간의 모든 부조리와 모순, 무의미에 종지부를 찍고, 인생의 모든 것이 의미와 가치로 가득 차며 빛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과 일치되어 영원히 살 인간의 소명, 그 존엄성이 부활로써 확실히 밝혀졌습니다(사목헌장 19 참조).
“의인들은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마태 13,43)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미래는 영원하고 태양같이 빛날 것입니다. 이로써 인생은 찬란하고 역사는 의미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그 태양이요 그 역사의 의미이십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쁜 소식입니까?
그러기에 부활절에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 기쁨의 알렐루야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의 빛은 이렇게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밝혀줍니다. 현세의 어떤 시련도, 고통도, 죽음까지도 우리를 밝혀주는 부활의 빛을 어둡게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시련과 고통은 우리 마음을 주님께로 더욱 돌리게 하고 죽음마저도 주님과 함께 죽음으로써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통로가 됩니다. 그 때문에 위령미사의 감사송은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오, 새로운 삶으로 옳아감이오니” 라고 하고, 사도 바울로는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이(1고린15, 54 참조) 라고 찬미합니다
이렇듯이 성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어 오심으로써, 모든 인간과 일치하였고(사목헌장 22 참조),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모욕과 고통, 수난을 겪으심으로써 죄많은 우리와 하나되시고, 모든 시련과 고통 중에 있는 이와 보다 깊이 결합하셨으며, 죽으심으로써 죽은 모든 이들과 일치하셨습니다. 뿐더러 그분은 고성소(古聖所)에 내려가시어, 빛도 희망도 없이 죽음의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모든 죽은 이들과 일체가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마침내 그 죽음의 구렁, 그 절망과 그 어둠에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이를 살리는 부활 생명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처럼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밝혀주고 시련도, 고통도 의미와 가치로 변화시켜주며, 죽음까지도 생명에로의 문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어떤 시련도 고통도 죽음마저도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때문에 주님은 부활하신 그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 20) 하고 인사하셨습니다. 진실로 이제는 부활의 빛 속에서 볼 때 모든 것은 평화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사회는 오늘날 도덕성 부재와 가치관 상실로 모든 면에 활기를 잃고 있습니다. 모두 잘 살기를 바라면서도 일하기는 싫어합니다. 우리가 직면한 이른바 국제화 및 세계화의 도전과 악화 일로에 놓여 있는 남북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가 오늘처럼 방향을 잃고 무기력한 상태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민 모두가 난국을 극복하는 강한 의지로 일치 단결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농촌을 살리고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하여는 정부와 기업, 농민과 노동자, 국민 모두가 한 몸이 되어 전력투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그런 의지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민정부의 개혁의 결실이 피부에 와닿지 않고, 특히 경제 전망이 불투명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통령과 정부, 여야 정치인, 사회 지도층 모두가 각자 사리사욕이나 당리당략을 떠나 나라와 민족을 일으키기 위해 자기 희생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 옛날 주님의 수난으로 완전히 희망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써 다시 생기를 찾을 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주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사랑으로 바치겠다는 결의를 새롭게 다짐할 수 있었던 그런 마음의 전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에게 이 전기를 마련해줄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 민족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그 힘, 그 빛, 그 평화, 그 생명을 줄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 주님의 제자인 우리 자신입니다.
종교적 차원과 세속의 차원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삶을 긍정적으로 보고 주님을 본받아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는 것은 단지 종교인으로서 잘 사는 것일 뿐 아니라, 사회와 나라를 밝히는 빛이 되고, 사회와 나라를 침체에서 벗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시며, 바로 그 사랑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인간, 온 세상을 위하여 당신의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의 심장, 그의 가슴은 참으로 이 사랑 때문에 창에 찔리고 열렸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예수님을 따르고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처럼 우리의 가슴도 열려야 합니다. 그분이 모든 인간을 형제로 껴안으셨듯이, 우리도 그분과 같이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은 물론이요, 외국인 근로자까지 모든 이를 인종과 국적, 피부색 일체를 초월하여 형제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한국인이 모두 이런 열린 마음으로 이웃 사랑에 산다면, 우리는 분명히 세계화, 국제화에서 이길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이같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부활하셔야 합니다. 그때에는 이 땅에 희망의 등불이 밝혀지고, 우리 국민 모두가 실의와 좌절에서 일어설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과 평화의 노래, 부활을 찬미하는 알렐루야가 우리 안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땅,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질 것입니다.
11. 1995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와 기쁨이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온 세상의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특별히 기념하는 날입니다. 또한 올해는 민족이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을 맞은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 있어 해방 50년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채 살아온 분단 50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인류를 해방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선 오늘의 우리에게 민족의 해방과 해방된 민족의 미래를 함께 생각해 보기를 요청하십니다.
민족의 해방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통해 자유를 찾아 가나안 복지에 이르는 과정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파라오의 폭정에서 탈출한 이후 40년이 지나도록,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광야에서 헤맸습니다.
그들이 광야를 방황한 까닭은 참된 해방자이신 하느님을 배신하고,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의 생활은 그들에게 참된 해방을 위한 교육의 기회가 되었고, 이 시련의 기간을 거쳐 그들은 마침내 해방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걸었던 구원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걸어갈 참다운 구원의 방향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은 지 5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우리 민족은 동족 상잔의 쓰라림과, 분단의 고통 속에서 참된 해방을 누리지 못했고, 이 시련의 기간을 진정한 해방을 위한 준비의 기회로 삼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현대의 우상인 물질지상주의와 특정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분열되고 상처 입은 민족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음미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빠스카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죄로 물든 인류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사건으로 믿은 이들은 연약함에서, 능력을, 수치와 모함에서 영광과 영예를, 죽음에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해방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인류의 죄를 사해주시고, 화해의 모범이 되셨으며, 진정한 평화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오늘날 민족 구성원 가운데 상당수는 새로운 우상을 섬기면서 하느님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적 소명을 부여받은 그리스도인마저도 민족 공동체의 진정한 화해와 구원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분단에 안주하여 형제를 단죄했으며, 민족 공동체와 인류의 구원보다는 우리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는 데에 머물렀습니다. 우리의 귀와 눈은 이기심과 우월감, 적대 의식과 의구심에 가리워져 진리의 원천에서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반성을 기초로 하여 우리는 진정한 화해와 일치를 위해 새로운 역사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존재 이유를 확인하며,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존중할 때, 우리 사이에는 진정한 대화가 비로소 가능합니다. 이 존재 이유의 긍정을 통해서 서로는 흡수통일 또는 적화통일이라는 유혹으로부터 참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동질성을 간직해 왔습니다. 우리가 서로 공유하고 있는 동질성은, 우리 민족이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원동력이 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남북한의 민족 구성원 모두는 비록 서로의 차이점을 발견하더라도, 이를 강조하여 이질성을 심화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드러내기보다는 그의 장점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장점을 인정할 때, 그것은 민족 구성원 모두의 장점이 되어 민족사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족적 자존심을 공유하면서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을 굳건한 의지를 함께 키워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발전을 위한 부단한 노력을 우리 민족의 공동 자산으로 삼을 때, 근면하고 활기찬 삶의 방법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이었던 빠스카의 의미를 새롭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신비는 우리 민족의 참된 해방의 길과 미래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해방의 희생양이셨습니다. 빠스카의 어린양처럼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주신 그리스도는, 우리 인류를 하느님과 일치시켜주시고,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진정 우리의 해방자이시고 평화이십니다(에페 2, 10-14참조).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평화를 기원하시면서, 서로 죄를 용서해주라고 명하셨습니다(요한20, 19-23 참조). 그 가르침대로 제자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 찬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사도 2장 참조). 이제 우리도 주님의 부활을 그저 하루 기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먼저 보여주셨던 무조건적 용서와 사랑을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광복 50년은 분명 희년(禧年)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류의 희년, 참된 구원과 해방을 위해 그리스도의 희생이 요구되었듯이 참다운 희년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희생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보다 깊이 묵상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생각과 삶의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심을 키워가야 합니다. 사치를 버리고 검소한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불신을 신뢰로 바꾸고 미움을 사랑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누고 이웃의 고통까지도 함께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 역시 그리스도처럼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밀씨가 되어야 하며(요한 12,24 참조),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그 가장 큰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요한 15, 13 참조). 바로 그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을 밝히고, 우리 사회를 밝히고 온 세계를 밝히는 광명, 구원과 생명의 빛으로 우리 안에 떠오를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본받은 그 사랑과 희생이, 우리 사회의 지역간, 계층간 또는 세대간의 격차의 담을 헐고, 마침내 50년 남북분단의 벽을 허물어 통일을 가져오는 해방의 힘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 같은 은혜를 풍성히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12. 1996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만물이 다시 살아나고 꽃피는 새 봄과 함께 주님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 그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이 땅과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결코 윤리, 도덕만을 가르치는 도덕 종교도 아니요, 기복 종교도 아니며, 조상 숭배처럼 성현이시지만 결국에는 죽은 예수를 섬기는 종교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나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시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예수님, 우러를 참으로 구원하시고 살리시는 구세주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우리 신앙의 바탕이요 핵심이며, 참된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는 당신의 몸인 교회와 함께 계시고,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고 있으며, 그 지체인 우리도 같은 생명으로 살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를 위시하여 모든 사도들이 그 혹독한 박해를 무릅쓰고 목숨을 바치며 믿고 선포한 복음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고”, 그분은 우리를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령강림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성령을 가득히 받고, 자신들 앞에 달려 온 군중에게 힘차게 선포한 첫 복음의 내용도(사도 2,22-35 참조), 성전 문 곁에서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행하신 후 그 일을 보고 놀란 유다인들에게 증언하셨을 때에도(사도 3, 14-15 참조), 또 대사제 안나스를 비롯하여 유다 지도자들 앞에서 심문에 답변하셨을 때에도(사도 4, 10참조), 그 내용은 그들이 이교도들에게 넘겨 죽인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사도 2, 32 참조) 부활이 그 중심이었습니다.
2. 주님이 수난 하실 때 너무나 무서워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쳤던 그들이, 이렇게 힘차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당시의 유태인들에게 이것은 청천벽력 같은 말이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
러나 부활은 사도들이 굽힐 수도, 양보할 수도 없는 진실 그대로였습니다.
왜냐하면 4복음이 다 전하는 대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박해자였던 사도 바울로도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 회개한 후,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
음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고린 15,14)라고 부찰 신앙을 분명히 고백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로는 “나에게 그리스도는 생의 전부입니다”(필립 1, 21).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 20) 라고 힘차게 말하였습니다.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과거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겼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를”(필립 3, 9) 간절히 소망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도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하였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분들과 함께 사시고, 함께 일하셨기 때문에, 그분들의 복음 선포는 생명력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부활은 과연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중심이요, 우리 믿음의 바탕입니다. 바로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 그 자체입니다.
신약 성서는 물론이요, 구약 성서까지 성서 전체가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 계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났다면, 성서 말씀은 생명 없는, 죽은 말씀일 뿐 아니라, 모순이요 거짓입니다. 그러나 성서 말씀은 인간을 구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시어 그 말씀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3.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는 참으로 큽니다.
그것은 곧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요,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이며,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창조 이래, 끊임없는 인간의 죄와 반역에 대한, 하느님의 한없이 크고 깊은 자비와 용서의 승리입니다. 모든 인간이 마음속 깊이에서 갈구하는 소망의 달성입니다. 이로써 인생은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불사불멸의 생명을 얻는 데 있다는 깊은 의미가 밝혀집니다.
동시에 인류 역사도 불의와 부정 속에 흥망성쇠만 거듭하는 것이 아니고, 정의의 승리, 사랑의 승리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대단원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예견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진실로 인생과 역사의 의미 자체이십니다.
따라서 부활은 우리에게 다시없는 기쁨과 함께,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깊이 맛보게 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 20) 하고 인사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부활의 신앙을 굳게 지니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부활만이
우리의 참된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에 대한 희망으로 삽니다. 희망이 없으면 삶은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에 따하여 참된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까?
돈이나 권세와 같은 세상의 부귀영화입니까?
이런 것이 희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한정된 의미에 불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죽음과 함께 소멸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죽음마저도 지을 수 없는 것일 때 참된 희망일 것입니다.
그것은 곧 불사불멸의 생명에 대한 희망입니다.
바로 죽음을 쳐 이긴 부활에 대한 희망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그분이 함께 계시는 한 우리는 참으로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4. 올해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순교 150주년이 됩니다. 이분을 비롯하여 우리 순교 선열들이 혹독한 박해 아래 죽음을 무릅쓰고 증거한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로마 6, 8)는 확고한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우리 순교 선열들에게 있어서, 부활 신앙은 박해의 시련과 죽음의 절망까지도 이겨내는 힘과
희망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힘과 희망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의 시대는 가치관 부재의 시대입니다.
모두가 자기 중심적인데다가 우리나라는 지금 남북 분단에 더하여 지역 감정의 깊은 골로 심각히 분열되어 있습니다. 진리와 정의와 함께 용서와 사랑, 화해의 정신이 참으로 아쉬운
때입니다.
부활의 믿음과 함께 그 믿음에서, 정의와 사랑은 반드시 이긴다는 굳은 신념을 우리 믿는 이들이 지니고 살 때에, 우리는 단지 영적으로 구원될 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사회, 이 나라도 달라질 것입니다.
정의롭고 진실된 나라, 인간 존중의 사랑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또한 이런 정신으로 다가오는 15대 총선에 임할 때, 이번 선거는 공명정대하며, 이 땅에 정의가 승리하고, 국민이 승리하는 선거가 될 것이요, 그것은 우리 국민 모두에게 자신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안겨 줄 것입니다.
그 희망은 서로간에 신뢰와 사랑을 낳을 것이요, 계층간․지역간에 분열된 이 땅에 화해를 가져오게 할 것이며 마침내는 남북 분단의 벽을 헐고 평화 통일을 달성케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이처럼 우리 안에 가득하기를 거듭 빕니다.
13. 1997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대축일을 맞이하여 진심으로 주님의 은총과 사랑, 희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우리나라와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어 수난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신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3일만에 그 죽음을 쳐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1고린 15,3-5 참조). 주님이 부활하졌다는 이 사실은, 참으로 우리 모두에게 말할 수 없이 끈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로써 우리의 하느님은 죄 많은 우리를 한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며, 당신 아들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죄와 죽음까지도 물리치시고, 우리를 기어이 부활 생명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수난하실 때 그것은 그를 구세주로 믿고 따르던 제자들에게는 절망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이스라엘의 해방은 물론이요, 그들이 갈구한 하느님 나라, 진리와 정의, 사랑과 생명의 나라에 대한 희망은 완전히 허무로 끝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불의와 거짓, 미움과 폭력이요, 약육강식의 원리 속에 힘있는 자는 승하고 약한 자는 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두 실망과 좌절에 빠지고, 수난하시는 스승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절대로 배반하지 않으리라는 장담을 한 수제자 베드로마저 주님이 예언한 그대로, 세 번씩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때는 참으로 밤이었습니다(요한 13, 30 참조).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암흑이었습니다. 세상은 결국 그렇다는 체념과 허무감만이 모든 것을 지배하였습니다.
2. 그러나 부활하심으로써 십자가에 못박혀 참혹히 숙여졌던 예수님의 얼굴은, 영원히 들어올려졌고, 그 부활의 광명 속에 새 인간, 새 세상, 즉 하느님 나라가 나타났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결코 죽음 속에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로 하여금, 인간의 체념과 허무감, 불의와 거짓, 죄와 죽음을 쳐 이기고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진실로 죽음과 절망의 지평에, 죽은 인간도 다시 살리고, 모든 이를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의 빛이 아침 햇살보다 더 찬란히 떠올랐습니다.
그리스도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라고 말씀하신 대로, 죽음이 모든 것을 허무로 만드는 그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 모두를 살리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승리입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써, 그를 통하여 우리 모두도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 하시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로써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거듭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은 참으로 우리 아버지시며,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아버진이신 하느님께 대하여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새 한 마리, 들꽃 하나까지도 자상히 돌보시는 그 하느님(마태 6, 25-34참조)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큰 사랑으로 지켜보고 계시는지를 말씀하셨고, 또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 병고에 신음하고 어둠에 잠긴 사람, 고독하고 버림받은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는지를 예수님은 당신의 표양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천국에서 가장 큰 기쁨은 죄인의 회개요,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가장 큰 바람, 오직 하나의 소망은 아들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거지가 되었지만, 탕자의 귀가는 죽은 자식을 다시 찾은 것이기에, 큰 잔치를 베풀 수밖에 없는 기쁨입니다(루가 15장 참조).
예수께서 남기신 이 모든 기쁜 소식-복음 말씀-은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참으로 진실된 말씀이요, 바로 구원과 생명의 말씀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우리 인간이요, 가장 사랑하시는 것 역시 우리 인간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제자들은 아버지 하느님의 이 큰 사랑을 깊이 체험함과 동시에, 그리스도는 참으로 생명의 주이시요, 역사의 주이시며, 하느님의 힘이요 지혜이시고,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사도 4, 12 참조). 그 때문에 제자들은 이 그리스도를 목숨걸고 증거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의 길을 갈 때에, 그것이 비록 고통의 길, 십자가의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누구나 반드시 구원된다는 것을, 그것이 또한 세상 구원의 길임을 확신하였습니다. 과연 사도들은 모두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쳐서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선포하였습니다.
3.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올해 1997년은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는 뜻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성자 그리스도께 봉헌된 해입니다(제3천년기 40항) .
“예수 그리스도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고 유일한 구세주”(히브 13,8참조) 이것이 그 대주제입니다.
이 뜻깊은 해에, 우리는 모두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주님, 그분만이 참으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고, 그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정치, 경제적으로 큰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나라의 운명 자체가 어둡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은 권력에 집착하여 이전투구만을 일삼고, 가진 이들의 과소비와 사치풍조에 상대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빈곤감과 위화감은 더욱 깊어갑니다. 슬픈 일입니다. 나라를 위해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지금은 정치인들은 물론이요. 온 국민이 대오각성하여 다시 태어나야 할 때합니다. 참으로 모두 이기주의를 버리고 애국애족하는 마음으로 힘을 모아 경제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진실히 우리 마음을 밝히는 빛이십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시면서 온 세상 모든 이를 위해 모든 이의 죄를 대신 지신 그리스도, 모든 인간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당신의 목숨까지 우리를 위해 내놓으신 그리스도, 그리하여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이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계시하심은 물론이요, 참으로 어떻게 살아야 우리 자신이 참 인간의 삶을 살 수 있는지를 잘 밝혀주십니다.
이 그리스도에서 교회 안에는 물론이요 우리 안에 현존하십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현존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존재 깊숙한 곳에 현존하시는 이 주님, 그리스도를 믿음 속에 만나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깊이 믿고 사랑함으로써 그분과 일치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침내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2). 여기에 오늘 우리 자신과 우리나라의 살 길이 밝혀져 있습니다.
14. 1998년 부활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만물이 소생하는 새봄과 함께 부활대축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진심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은
총파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빕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 대로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의 뜻에 순종하여 세상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어 오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을 성령으로 부활하시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를 죄에서 구하시고 죽음에서 살리는 생명의 주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말할 수 없이 큰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래 죄와 악으로 가득찬 이 세상, 그 결과 모두가 죽음의 운명과 그 질고를 면할 수 없는 이 세상, 절망과 암흑의 땅에 구원과 희망의 빛이 새벽 햇살처럼 환히 동터온 것입니다.
진실로 사도 바울로의 증언대로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로마5,20).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인간의 종말은 결코 죽음이 아니요 영원한 생명, 불멸의 생명입니다. 우리 모두도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신 같은 성령으로 죽음에서 영생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 8,11 참조). 이리하여 하느님과 같이 그 영광 속에 영원히 사는 것이 모든 인간의 소명입니다. 여기에 인간 존엄성의 가장 숭고한 이유가 있습니다(사목헌장 19 참조).
우리는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성령께 봉헌된 이 해에, 우리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살며, 성령께서 우리 안에 부활 신앙을 확고히 심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심을 깨닫게 하여 주시도록 간절히 빌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에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고린 15,14).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시고 죽음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그가 가르친 모든 말씀, 복음도 헛되고, 우리 인생은 구원의 희망이 없고, 부조리와 모순뿐이며, 사람이 진리와 정의를 따라 살 필요도 없고, 윤리 도덕 등 모든 가치관이 쓸모 없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그 종말은 멸망뿐일 것입니다. 세상과 역사는 그리스도를 못박아 죽인 그 미움과 폭력과 거짓 속에 끝없이 공전하는 허무일 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모순된 인생과 종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도리에 어긋납니다. 모든 인간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찾고 있는 진리와 정의, 사랑과 행복, 참생명에 대한 배반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이런 배반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쳐이기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 모두도 죄의 용서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큰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녕 세상에 이보다 더 기쁘고 복된 소식은 없습니다.
부활은 진정 죽음의 어둠에 잠긴 지평에 떠오른 생명의 태양입니다. 거짓을 쳐이긴 진리의 승리요, 미움을 쳐이긴 사랑의 승리입니다. 부활 생명의 빛이 어둠에 잠긴 인생과 역사를 환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인생도, 역사도 세상 모든 것이 의미를 얻고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알렐루야’의 기쁜 노래를 드높이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날은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 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하며 기쁨에 용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은 참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란 바로 부활을 믿는 사람입니다. 부활 신앙을 굳게 간직하고 살 때, 우리에게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절망이 있을수
없습니다.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반드시 부활한다는 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하지 않게 하는 희망 그 자체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어둡고 비참할지라도 – 하늘을 덮은 먹구름 뒤에는 태양이 건재함을 믿듯 – 우리의 구원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고통과 시련, 어둠과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참으로 평화입니다. 모든 근심 걱정이나 두려움을 없애고 오직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그 사랑만이 우리를 감싸는 평화입니다. 그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습니다(요한 20,19).
이제 우리는 이 주님의 부활을 확고히 믿고 이를 온 세상 모든 이에게 전하여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심을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알리는 가장 힘있는 증거는, 이 그리스도를 우리가 따르는 삶, 닮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주님이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종이 되시어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봉사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죄인을 비롯한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 실망과 좌절에 빠진 사람을 더욱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요구됩니다.
특히 이른바 IMF시대에 우리 주변에는 가난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실직과 경제적 파탄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동시에 북녁 땅에서는 이미 잘 아시는 바대로 식량난이 심각합니다. 많은 이가 – 특히 어린이, 노약자들이 –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남에서나 북에서나 이 고통에 놓인 이들은 바로 우리와 한 핏줄입니다. 동포요 형제입니다. 이들의 고통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신자인 우리들은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으로(필립 2,5) 그들과 고통을 나눌 줄 알아야 하고, 가진 것을 내놓음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은 사랑의 주이신 예수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우리 안에 사심을 가장 힘있게 증거하는 표시가 되고, 동시에 참으로 나라를 살리고, 분단의 벽을 헐고, 겨레의 통일
을 이룩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15. 부활 메시지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이미 비치고 있습니다>(1요한 2,8)
1999. 4. 4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만물이 다시 살아나는 새봄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온 누리에 가득차고, 그 생명의 빛이 이 땅의 어둡고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비치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지 사흘 만에 죽음을 쳐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로써 절망과 멸망, 허무와 암흑으로 끝날 수밖에 없던 삶과 세상을 다시 살려내고 영원히 살게 하는 참생명을 이 세상에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부활이요 생명”(요한 11,25)이며 희망의 빛이요 평화이시기에 가능했습니다.
“이 날은 야훼께서 내신 날, 다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자”(시편 118,24).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 날은 하느님께서 직접 마련해주신 특별한 날입니다. 실로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며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렇기에, 기쁨과 환호에 가득차서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불러야 하겠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구렁, 그 절망의 어둠에 빠졌던 우리가 이제는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사도신경)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부조리와 모순과 무의미로 가득찼던 인생의 모든 것이 새로운 의미와 가치와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금년 부활은 2000년 대희년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맞이하기에 그 의미가 어느 해보다도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새 천년기에 우리는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는”(루가 4,18) 참그리스도인으로 거듭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2000년 전 부활하시어 사도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만이 아니라 ‘오늘 이곳’의 우리들 앞에 펼쳐진 현실도 바라봐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남북으로 분단되고 서로에 대한 오해와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새로운 천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또한 국제통화기금(IMF) 체제가 된 지도 2년째이고 새 정부의 개혁이 시작된 지도 1년이 넘었지만 사회 곳곳의 표정은 여전히 힘에 겹고, 희망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긴급했던 상황들은 극복되었다고 하지만 과연 누구를, 무엇을 희생해서 이 극복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냉철히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힘들었던 그 상황들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대다수의 우리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맨 결과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실업자는 여전히 늘어나고 있음은 실로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모든 국민들이 서로 힘을 모으고 짐을 나누어지려고 하는 이때, 개혁의 노력이 몇몇 집단의 이기주의로 발목 잡히고 일부 정치인과 공직자들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언행으로 여전히 국민들에게서 외면당한다면, 우리는 오늘의 긴 어두움의 터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부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천년기가 교차하는 대전환의 시대에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삶을 몸소 사시다가 부활하여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참으로 마음 깊이 믿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믿음만 확고하다면 우리는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생명의 빛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 죄에 대한 은총의 승리입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낡은 인간에서 벗어나 새 인간으로 거듭납니다(골로 3,9-10).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서로 형제가 됩니다. 그들 사이에는 인종적, 민족적, 사회적 차별이 일체 없으며(갈라 3,28),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사랑하고 가진 것을 나누며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룹니다(사도 2,44-47).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보다는 ‘너’와 ‘우리’를 더 소중하게 여겼던 초대교회의 모습이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잘 가르쳐줍니다. 부활의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이처럼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중요한 것은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 나 혼자만이 아니라 남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 기쁨뿐 아니라 고통까지도 함께 나누는 구원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이미 비치고 있습니다”(1요한 2,8).
2000년 전,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생명의 빛을 통해 우리들도 새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오늘 이 시대, 이 땅에서도 우리는 부활신앙의 옷을 입은 새 인간으로서 사랑이 충만한 세상을 열어야 합니다. “잠에서 깨어나라. 죽음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리라”(에페 5,14).
오늘 부활 대축일을 맞아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 빛이 온 누리의 모든 이들과 우리 겨레에게, 특별히 희망을 잃고 어려움 속에 있는 우리의 형제들에게 고루 비치기를 거듭 기도합니다.
1999년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대주교 정진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