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 성인들의 신앙을 기리며, 피로써 물려받은 우리의 신앙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그분들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둘째,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그날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우리는 오늘 순교자 대축일을 맞이하여 온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향하기 위해 오늘 이 말씀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먼저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그 답은 오늘 1독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에 있어서,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을 것이다. 미련한 자들의 눈에는 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재앙으로 생각될 것이며, 벌을 받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불명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자기 목숨을 살리는 사람은 하느님을 위하여 제 목숨을 내어 놓는 사람입니다.




순교자 이 경언 바오로의 편지 중


“눈을 뜨니 다리가 온통 헤어지고 사방에서 피가 흐르거나 혹은 상처 위에 피가 엉겨 붙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아! 나보다 신체가 더 튼튼하지도 못하셨을 예수께서는 올리브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매를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높은 산꼭대기까지 천 걸음이나 더 되는 곳을 걸어 가셨습니다. 아무도 그를 동정의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이 없었고, 그를 도와주는 교우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 같은 대죄인에게는 이렇게 동정과 구원의 손길을 뻗쳐 주고 정신을 들게 하느라고 애들을 쓰는군요. 얼마나 감사를 드려야 옳단 말입니까?”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 놓는 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 신앙 때문에 내 목숨을 위협하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매  순간 순간 결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유혹의 기회가 너무도 많습니다. 주일에 단체에서 모임을 잡아서 빠져야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자매님께서 친정에 가서 잠을 자고 오지 않고 밤늦게라도 오곤 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토요일에 친정에 가서 자고 오면 다음날 미사에 참례하기가 힘든데, 한번 그렇게 빠지게 되면 남편은 다른 기회에도 또 빠져도 된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예요. 남편은 아직 초심자거든요.”






순교자 원 베드로에 관한 기록 중


“관장은 그를 결박하여 물을 퍼부어 추운 밤중에 밖에 내 놓아 얼려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원 베드로는 굵은 밧줄로 묶였고 온 몸에 물을 뒤집어 썼다. 이미 그의 온 몸에  얼음이 뒤덮였다. 이 형벌 가운데에서 그는 오직 주의 수난만을 생각하였다.  ‘나를 위하여 온 몸에 매를 맞으시고 내 구원을 위하여 가시관을 쓰신 예수여!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내 몸이 얼음에 덮여 있는 것을 보십시요..’ 그런 다음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목숨을 하느님께 바쳤다. 닭이 두 회째 울 때에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헤치는 사람. 그 사람이 비록 세상에서는 멋있게, 풍요롭고 부요하게 산다고 생각될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서는 부러운 것이 없을 정도로 기쁘게 산다고 보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하느님 앞에서는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리석게 보이지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 어리석게 보이지만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남에게 양보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 하느님 보시기에 더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처절하게 죽어가는 모습만이 보이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아름답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당신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즐기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중에도 당신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기를 원하시기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그날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 남을 억누르고 자신이 그 위로 올라가려고 하겠습니까? 하느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이익 때문에 다른 짓을 하겠습니까?




순교자 조 용삼 베드로에 관한 기록 중


“아버지와 함께 포졸들에게 잡혀서 길을 가는 동안 조 베드로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였다. 이번에 나는 천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으니, 나는 틀림없이 순교자가 될 것이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물으니, 조용삼 베드로는 아무도 자기 결심과 자기 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약하고불쌍한 제가 어떻게 감히 순교하기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관장앞에 끌려갔는데, 첫번 신문에서부터 아버지는 그의 어리석은 자만과 자신의 힘을 너무 믿은 데 대하여 벌을 받아 슬프게도 굴복하였다. 관장은 베드로에게 너도 배교하라고 말하니 조 베드로는 저는 배교할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아니 네 아비가 목숨을 보전하려고 하는데 너는 죽기를 원한단 말이냐?  조 용삼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늘에는 두 임금이 없고 사람은 두 마음이 없습니다. 이제 제가 원하는 것은 다만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뿐입니다. 제게 더 이상 물어 보시는 것은 무익한 일이며, 저는 다른 말씀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그는 어떻게나 잔인하게 매질을 당하였던지 하루나 이틀 후 2월 14일 옥중에서 성세를 받은 후 숨을 거두었다. 그때까지 그는 예비신자에 불과하였었다.





하느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자기 욕심만을 차리기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나만을 의식하다 보니 하느님이 보이지 않게 되고


다른 이들의 눈을 의식하다보니 나의 신앙 활동이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볼까봐 기도하지 않고, 내가 귀찮으니까 기도하지 않는 것.


좀더 나은 이익 때문에 남을 억누르고, 좀더 나은 이익 때문에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




사실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고 우리를 못살게 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그렇게 투신하지 못하는가?


오늘 사도바오로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를 하느님 사랑에서 떼어 놓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순교자 다블뤼 주교의 기록 중


“벌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주림이요, 그보다도 심한 것은 목마른 것이었다. 다른 형벌을 받으면서는 용맹히 신앙을 증거한 이들도 주림과 목마름에는 넘어가는 이들이 많았었다. 하루에 두 번식 주먹만한 조밥 한 공기밖에는 얻어먹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자기들이 누워 자는 더러운 볏짚 자리를 뜯어먹고 심지어는 옥 안에 기어 다니는 이를 잡아먹기까지 하였다.”




순교자 최 해성 요한에 관한 기록 중


“관장은 화가 치밀어 매질을 한층 더 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다리뼈가 부서져 두 세치나 되는 뼈 조각 두개가 땅에 떨어졌다. 그의 등과 배가 빠끔히 구멍이 나서 창자가 밖으로 삐져나왔다.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받는 중에도 요한의 얼굴은 여전히 안온하였으니,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세주만을 생각하고, 사랑은 사랑으로 목숨은 목숨으로 갚고자 하는 것이었다.




순교자 대축일을 맞이하여, 순교자들처럼 그렇게 신앙생활은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분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신앙생활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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