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쁜 소식입니다.
그 소식은 들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서 듣습니까?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들음은 우리 안에,
우리 각자의 내면 깊은 곳에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선포는 모든 것의 근거가 됩니다.
그 소식에 대한 요구는
오래 전부터 인간의 마음 속에서
준비되고 형상화되어 왔습니다.
인간은 그가 창조될 때부터
그 소식을 기다렸으며
놀라움에 찬 어린아이처럼
그것을 알아 들으려고 애써 왔습니다.
만일 하느님의 요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다면
그 요구가 어떻게 인간의 내면에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만일 신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랑이 신부에게 뭔가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이 없다면 아버지가
아들을 부를 수 있겠습니까?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에게 통합니다.
한 쪽의 긍정적 태도는
다른 쪽의 긍정적 태도를 야기시킵니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대화든 만남이든
포옹이든 무엇이든 필요합니다.
지혜는 혼자서는 몸을
녹일 길이 없다고 말합니다.
(전도4,11 참조).
하느님의 신비는 고독의 신비가 아닙니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는 성부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즉 하느님게서는 그 나라를 선포하시고
사람은 그 나라를 받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시어
문을 두드리시고 사람은
그 분을 알아보고 문을 열어 줍니다.
사실, 우리는 나중에 연회가 있다는 것과
거기서 같은 식탁에서 마주
앉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기획을 하십니다.
그리고 나는 그 기획이 이미 내 안에
그려져 있던 윤곽을 되짚고 있음을 느낍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루가 17,24)
까를르 까레또의 매일 묵상 중에서
♬ Regnum tuum veniat 당신 나라 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