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이 세상에 어떻게 존재하시는가?
강의대상
: 성인 예비자교리반
강의방향
: 하느님이 이 세상 안에 어떻게 존재하시는가를 예비자들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몇 가지 사전 작업부터 필요하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사전 지식을 언급하고 본 강의의 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① 믿는다는 것, 즉 신앙이란 무엇인가?
② 하느님은 어떤 존재인가?
③ 세상 안에 하느님은 어떻게 존재하시는가?
④ 세상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1. 도입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크게 그릇됨이 없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神이라는 존재를 생각했고, 그를 두려움의 대상, 또는 복을 내려주는 대상으로 여기고 예배해 왔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떠한 절대자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여러분, 그리고 저도 앞서 언급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어떠한 절대자를 찾고자 이 자리에 앉아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찾고자 하는 神은 어떤 존재입니까? 분명한 것은 여러분이 찾고 있는 신은 샤마니즘이나 토테미즘적인 나무신도, 바위신도, 동물신도, 귀신도 아닌 인간과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물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진정으로 살아계신 유일한 신이신 하느님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이 이 세상 안에 어떻게 존재 하시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본 수업의 핵심 방향입니다.
2. 믿는다는 것, 信仰이란 무엇인가?
이 수업을 전개하기 위해서 먼저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찰해야할 것입니다. 믿는 다는 것, 곧 신앙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거북함과 불안을 느끼게 하고, 나아가서는 노골적인 반문을 제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정해야할 것은 신앙은 신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선물을 주시는 분을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신앙한다는 것, 그것은 하느님을 실제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實在的으로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작용하시는 분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정은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여러분 자신들의 자유로운 의지로써 결단하는 것입니다. 저의 역할은 다만 여러분이 하느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겠끔, 하느님께서 이 세상 안에 살아 계시고 役事하신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함으로써 여러분을 신앙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존재문제는 말 같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의 신존재의 논리전개에 한계성도 있겠지만 그 보다 먼저 여러분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그러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는 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요사이 처럼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부족하나마 하느님의 존재를 여러분에게 알리려는 것, 그리고 여러분이 저를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로 사도가 고린토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으로 성서의 고린토 전서 13장 13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답하는 개인의 응답은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이 반드시 시간상으로 구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알아보고, 그 하느님이 신의있는 분이고, 그분의 말씀이 진실하고 선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의 첫째 의무는 믿음입니다. 우리를 신앙으로 초대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알게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믿고, 복종할(로마서 16,26)’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은 인간 구원의 시작입니다. 신앙이 없이 인간은 일생 동안 도덕적으로 실패하지 않고, 독단적이고 이기적이고 냉담해지지 않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생각을 들어올려 하느님의 안목으로 인생사를 보게 만드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응답, 희망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응답을 뜻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참으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자유로운 몸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선물로 신앙을 받고서도 희망과 사랑을 갖고 호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신앙은 실제로 있지만 잠자는 상태에 있는 결실없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도 신앙을 갖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인이 중죄를 범하더라도 신앙 자체를 부인하거나 배척하는 죄가 아닌 한 신앙의 선물을 잃지는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인격적이고 은총입은 신앙행위는 도덕생활의 토대가 됩니다. 신앙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설계도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하느님을 알아뵙고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무엇보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과 함께 분명하게 따라오는 것은 믿는 사람에게 늘 의문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선물은 진리를 찾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부분적인 해답일 따름입니다.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내용만은 확실하게 믿을 만한 것이지만, 그 내용이 전적으로 인간들이 가진 궁금증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3. 하느님은 어떤 존재인가?
지금까지 제가 여러분에게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하느님’이라는 어떠한 존재를 호칭했는데, 그러면 하느님은 과연 어떠한 존재인가를 알아보기로 합시다.
정통 그리스도교인 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를 우리나라 말로 표현함에 있어서 天主敎라고 하기도 합니다. ‘天主’란 곧 하늘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으므로 땅까지 자연히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天地, 즉 우주의 주인이란 뜻입니다. 이러한 천주님을 순수 우리말로 ‘하느님’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종종 야훼(개신교에서는 ‘여호아’라고 칭하는데 이는 히브리어의 잘못된 해석입니다.)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나는 있는 자 그다”, 즉 “나는 곧 나다”라는 뜻입니다. “나는 곧 나다”란 본래 있는 자, 존재를 본질로 하는 자, 존재가 그의 본질인 자란 뜻입니다. 이는 또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는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는 자(自存者)’란 뜻이요, 없을 수 없이 있는 ‘필연유(必然有)’란 뜻이요, 다른 것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있는 ‘자유(自有)’란 뜻입니다. 마치 불의 본질은 뜨거움이므로 불이 뜨겁지 않을 수 없듯이, 하느님은 존재가 본질인 영원 自存者이십니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이며 누리가 나기도 훨씬 전에 영원에서 영원까지 하느님은 계시나이다(시편 90,2)”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을 증거하고, 모든 피조물들은 오로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사실 하느님은 신비 속에 거처하십니다(디모테오 전서 6,16).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충만한 참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인간인 우리는 죄악의 짐과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생명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온갖 지혜와 총명을 넘치도록 주셔서 당신의 심오한 뜻을 알게 해주셨다(에페소서 1,9)”고 성서는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하신 것은 모두 – 우리 자신,피조물,계명,여러 가지 성사-우리의 생명이신 하느님께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理性에 의해서 하느님을 발견한다는 것은 지성생활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신앙에 의해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신앙은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는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입니다. 신앙으로 인해서 인격적인 친교가 시작되고 또 이 친교는 하느님을 뵈옵는 행복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물론 하느님은 현세 사물에 대한 철학적 숙고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참된 신앙에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의 속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 하느님은 인격적이시다 : 구원의 하느님께서는 강력한 의지와 위대한 자비로 이스라엘 민족을 에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그들에게 생활의 계명을 주셨으며, 그들의 원수를 쳐이기시고, 그들을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첫째 원리(第一原理)이심을 계시하셨습니다. 그와 더불어 이 세계는 맹목적이고 무관심한 힘이나 폭력의 소산이 아님을 하느님께서는 보여주셨습니다.
㉯ 영원하시고 변함이 없으시다: 불안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불변성을 계시하십니다. “나는 야훼라, 나는 변하지 않는다(말라기 3,6)“라고 말씀하십니다. 변화하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요소들은 변화하고 또 서로 의지하고 있지만, 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은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으시고 독자적이시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영원성은 완전히 충만한 생명과 사랑에서 오는 영원성입니다.
㉰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당신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분을 아는 것입니다.
㉱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다(全知): 하느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슬픔을 알고 계시고 또 그들을 구원하는 방법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출애굽기 3,19-22).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미래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비밀도 알고 계십니다(마태오 24,36).
㉲ 全能하신 분: 하느님의 능력과 위엄은 무한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실 능력을 언제나 갖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뜻이 그분을 반대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좌절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 거룩하시다(全善하시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인간의 마음을 끌어당깁니다.하느님은 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善의 근원이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강렬한 善性은 죄인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경외하도록 만듭니다. 거룩하신 하느님, 聖性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은 만물의 주님이시요 재판관이십니다.
㉴ 無量하시다: ‘무량’이란 아니 계신 데 없이 곳곳에 다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靈이시기에 장소에 제한을 받거나 물질과 떨어질 수 없는 유형체가 아닙니다.
㉵ 초월적이시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또 당신이 만드신 세계 안에 언제나 현존하시지만, 하느님은 이 세상과는 아주 다른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만물을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만물은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 한 분이신 하느님: 신명기에 의하면 “그러니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그리고 마음에 새겨 두어라. 야훼 바로 그분이 위로 하늘에 계시고 아래로 땅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분 밖에는 다른 하느님은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위와 같이 自存者이시며 全知·全能·全善하시며 無量하신 만물의 創造主이신 하느님은 어떻게 세상 안에 계시는 가를 알아보기로 합시다.
4. 세상 안에 하느님은 어떻게 존재하시는가?
하느님은 가장 현실적인 분이시고 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분이십니다(신명기 4,8). 신앙의 선물이 없다 할지라도 인간은 그의 본성에 의해서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 중에도 진리와 충만한 생명을 소유하기를 동경하고, 또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완전한 삶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그분의 존재를 모르지만 그분의 實在를 찾고 있습니다. 인간의 인생은 하느님의 풍요로 채워져야 하게끔 만들어 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에게 가까이 오신다고 하지만 아직도 이 세상에는 불신자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무신론에 대해서 민감하고 또 인간이 하느님을 멀리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거절합니다. 그들은 인간보다 훨씬 더 높은 어떤 분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굴욕적인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을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세상 죄악에 대한 격심한 반발을 표명하기 위하여 착하신 하느님의 실재를 부정합니다. 또 과학이 입증하는 사물만을 인간은 알 수 있다는 철학적 선입견 때문에 또는 절대 진리의 모든 가능성을 단순히 부정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무신론과 비인간화 정책을 시행하는 정부의 압력에 의해서, 혹은 탐욕과 쾌락 속에서 하느님을 외면하는 문화의 조형자들에 의해서 불신으로 떠밀려 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만물의 시작이요 마침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피조물이 확실히 당신을 알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을 견지하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당신의 보이지 않는 특성을 당신의 창조물을 통해서 나타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이 장엄한 가르침은 인간이 창조주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자연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자들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어리석어서,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보고도 존재하시는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업적을 보고도 그것을 이룩하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그들을 만드신 분을 알 수 있다(지혜서 13,1.5)”
우주의 윤리질서에 대한 숙고도 하느님께 대한 자연적 지식에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정의롭고 정직하며 절제해야 한다는 인간의 의무를 깨닫는 사람들은 선에로의 끊임없는 부르심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양심의 소리를 듣고 또 양심의 소리는 인간에게 선을 요구하는 분이 계심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인간은 양심을 통하여 주님이시고 심판자이신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 세기를 지나오면서 여러 국가와 문화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물리질서와 윤리질서를 고찰함으로써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실제로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만물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알게 되는 길이 여러 가지라고 여러 철학자들과 현자들은 지적했습니다. 덧없는 이 세게를 시간과 지나가버리는 모든 사물의 창조자가 만들었음에도 틀림없다는 것을 인간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교부들은 모든 지혜의 근원이신 말씀, 곧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지성을 주시고 또 그 지성을 고요히 인도하심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지식을 인간에게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인간은 존재하는 사물을 고찰함으로써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당하는 느낌이나 즐거움, 문제, 활동들은 한정된 사물을 통해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모호하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주어진 현실적 생활환경 속에서 신중하고도 이성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을 알게 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대한 오류가 섞이지 않은 지식을 얻기는 매우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많은 철학자들과 문화의 학자들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잘 알지 못했고, 또 성실한 사랑으로 하느님을 섬기려는 노력을 위축시키는 사상을 가졌었다고 역사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시의 선물에 의해서만 인간 이성은 종교적 진리를 그대로 쉽게 알아들을 수 있고, 현재의 인간조건 아래에서도 모든 이가 쉽게 그리고 확실하게 아무런 오류도 없이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이성에 바탕을 둔 철학과 인간 주위의 세계는 하느님의 현존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중요한 증명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신 것입니다.
5. 세상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하느님은 당신의 업적이 말해주는 것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직접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인간들에게 당신에게 대한 구원의 지식을 주시기 위하여 그들을 개별적으로 찾아오십니다.
“주 야훼가 말한다. 보아라. 나의 양떼는 내가 찾아보고 내가 돌보리라.···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 오리라. 상처입은 것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힘 나도록 잘 먹여 주고 ···이렇게 나는 목자의 구실을 다 하리라(에제키엘서 34,11.16)”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은 바로 인간을 보호하시고 돌보시며 따라다니시는 창조주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 대표적인 증거는 바로 우리 인간의 양심입니다. 스콜라 철학이나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은 이 양심을 이성작용의 특수한 경우로 나타나는 윤리적인 기능으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양심은 주관적 법칙을 알려주는 전령이며,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 그것을 적용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따라서 양심은 ‘실천적 이성의 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신학자들은 양심이 하나의 기능만이 아니고 인간의 지성·의지·전인격의 상호작용으로 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양심을 하느님과 인간이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장소이며, 하느님의 목소리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보나벤뚜라는 양심의 바탕이 ‘영혼의 섬광’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현대신학자들은 양심을 이성과 의지와 구별되는 더 깊은 실재 혹은 인간의 중심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양심은 단순한 의지·이성·느낌 이상의 것이며, 인간존재의 심저이고, 하느님을 향해 나가는 인간의 내밀한 중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소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이러한 양심의 가책은 선하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질타하시는 것이며, 따라서 하느님의 현존이라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우리 주위의 자연을 보고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현대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였다고 하더라도 길 가에 피고있는 들국화 한 송이라도 만들 수 있습니까? 자연의 심오한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 裏面에 있는 어떤 존재의 작품인 그 자연에서 하느님의 숨결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추운 겨울을 지내고 움터오는 연약한 새싹에서, 갑작스럽게 퍼붓는 여름철의 소나기와 천둥· 번개에서, 가을철 도로변에 만발한 수수하면서도 아름다운 코스모스의 무리에서, 온 세상의 더러움을 하얗게 덮어주는 겨울의 눈에서 하느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느낌은 자신의 체험이 없으면 인간이 한계성있는 언어로는 설명하기 불가능한 것입니다. 1969년도 인간이 처음 달에 착륙했을때 당시 아폴로 우주선의 선장이었던 암스트롱은 달 표면을 탐색하고 나서 신의 현존을 더욱 가슴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강의 서두에서도 제시하였듯이 인간은 종교적 동물입니다. 그래서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는 모르지만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주위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 어떤 존재, 인간을 돕고 바르게 살라고 질타하시는 어떤 존재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이 세상 안에 함께 살아가시는 하느님인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 안에 존재하심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실 뿐만아니라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혼탁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상대방을 억누르려고 하고,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하여 피를 흘리는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양심과 이성에 의해서 惡이라고 생각하는 이러한 행동들이 자행되고 있는 이 세상의 한쪽 구석에서는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자신이 모든 것을 내어 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살아있는 聖女라고 하는 데레사 수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활동 그 자체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하고 실감하게 하는 작은 몸부림입니다.
과거 구 소련의 대한항공 격추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떤 비신자분이 저에게 질문을 해왔는데, 그분의 주장은 ‘그렇게도 善하시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느님이 실재한다면 왜 공산주의는 존재하며, 왜 대한항공 격추와 같은 아픔을 우리가 맛보아야 하는가’였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러한 악은 선을 드러내시려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하느님의 섭리라는 것이지요. 결국 지금은 소련의 공산주의는 무너졌고, 새로운 연방국가가 들어섰습니다. 지금도 혹자는 全善하신 하느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신다면 왜 이 세상의 환난과 병고를 막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하느님의 이러한 이해 못할 부분에 이 세상 사람들에게 죄를 보속하며 공을 세울 기회를 주시려는 하느님의 깊은 뜻이 숨겨 있음을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악은 분명히 그 원인이 하느님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러한 악을 우리와 함께 공존하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으로 인하여 우리 인간은 성화될 수 있고 더욱 하느님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6. 종합, 정리
지금까지 저는 하느님이 이 세상 안에 존재하신다는 것을 양심의 존재와 우리 주위에 있는 자연의 경이로움, 그리고 사랑과 악의 존재를 통하여 설명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설명으로 여러분은 하느님의 현존을 지성과 이성으로써 확실하게 인식하셨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하느님의 현존을 알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 나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어서 하느님의 오심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여러분의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러분은 바로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함께 이 강의를 들으셨던 하느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여러분에게 완벽하게, 여러분들이 속시원하게 알 수 있도록 해드릴 수 없는 저의 한계성을 인정하면서 하느님과의 더 긴밀한 친교, 이 세상 안에 우리와 함께 살아가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여러분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기도하면서 본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