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선이해 – 구원 희망의 근거로서의 예수 부활



어떤 묘비에 쓰인 글 속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생일을 기록한 다음 ‘죽기 위해 태어나다’, 그리고 숨진 날을 기록한 다음 ‘살기 위해 죽다’ 라고! 말하자면 모든 인간은 다 죽는다는 것이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이자 핵심은 예수 부활에 대한 신앙이다. 그리스도 신안의 존폐 문제가 바로 이 예수 부활의 사실에 좌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 부활의 사실성을 부인하고, 단순한 상징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많은 혼란과 불확실성이 제기될 수 밖에 없는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예수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고 하는 그의 제자들의 증언에로 소급된다. 예수의 죽음은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에게는 엄청낭 실망과 비극이었다. 메시아요 왕으로 왔던 그는 너무나도 무능하게 십자가의 죽음에 처해지고 매장되었다. 이렇게 되자 제자들의 희망도 역시 매장되고 말았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체념섞인 이야기(Lu 24,21)속에서 당시 그들의 심경과 처지를 읽을 수 있다. 예수의 죽음과 함께 제자들의 희망도 종말에 이른 것이다.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최후는 그의 개인적인 실패와 좌초였을 뿐 아니라 그의 소신, 그가 이루려던 일이 이제 완전히 파국에 이르렀으며 그의 권리주장이 종교적으로도 근거 없음이 공개적으로 확인된 사건이었다. 그런데 죽었던 예수가 살아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이다. 그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활한 예수에게 불신과 회의, 더 나아가 비웃음 마저 보여주었다(Mr 16,14 ; Mt 28,17 ; Lu 24,11). 그러나 마침내는 하느님이 죽은 예수를 부활시키셨다는 것, 즉 십자가에 처형된 분이 살아 있음을 친히 보여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을 온 세상에 보내어 이 소식을 전하게 했다는 것을 믿게 되었고, 그 소식을 선포하게 되었다. 그들은 부활 메세지를 위해 생명까지 바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이렇게 예수의 부활 선포와 함께 생겨난 것이다. “내가 전하든지 다른 사도들이 전하든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선포하고 있으며, 그래서 여러분이 믿게 된 것입니다”(1 고린 15,11).

예수가 그렇게 비참하게 처형되는 순간에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었던 이러한 사태의 진전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제자들의 체념과 공포가 희망찬 신뢰로 돌변했으며, 어떻게 그들의 비탄이 환호로, 그들의 의기 소침이 대담한 용기로 돌변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고백하듯이 부활한 예수가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바로 이 주님과의 만남이 회의에 잠겨있던 제자들을 부활에 대한 확고한 신앙에로 이끈 것이다.

물론 성서는 예수의 부활 장면을 그의 제자들이 직접 목격하였다고 전하지는 않는다. 예수의 부활 발현 이야기는 죽었던 라자로의 소생 장면과 같은 부활의 경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다만 여기서는 이미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 증인들의 놀라움이 강조되고, 이어서 계속되는 예수와의 반가운 상봉만이 묘사되고 있다. 어쨌든 부활 증언의 핵심은 죽었던 예수가 살아계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예수는 라자로처럼 죽기전의 생활상태로 소생했다가 얼마뒤에 다시 죽어야 하는 유한한 삶에로가 아니라, 현세의 인간조건을 벗어나 영원히 살아계시는 무한한 삶에로 부활하신 것이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의 처지를 정확하게 기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부활증언은 역사적 요소로 작용했고 이 사실로 인해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적 출현이 가능케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히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증언의 내용 자체인 부활한 예수는 더이상 현세의 역사에 속하지 않는다. 그분은 역사의 차원을 넘어 우리가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로 머문다.



1. 복음서의 부활증언에 관한 문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복음서들의 보도는 서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즉 4복음서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기록된 바울로의 서간에서 증언되는 부활발현의 내용과 복음서에서 증언되는 부활사화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부활한 예수의 발현장소와 발현인물 등에 관해서도 성서증언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성서증언의 불일치는 표면적이며, 여러가지 소식이 떠돌고 있던 부활날 아침의 혼란과 감동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불일치는 복음서의 가신성과 진실성의 강력한 감동을 반영하는 것이며, 사건의 차이를 일치시키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증명이다.

그들의 관심을 끈것은, 각 발현의 사실이 아니라, 부활 그 자체였다. 그들에게 예수의 부활은 새로운 실재, 새로운 현재로서 다가왔다. 그들은 그것에 의하여 살고, 그것에 충만되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부활의 사실을 증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역사의 기록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선교의 목적으로 역사를 썼던 것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설교에서 볼 수 있듯이(2, 24 ; 3, 15), 그들은 그들 삶의 원천이 되었던 부활의 사실을, 몇번이고 되풀이하여 가르치려고 애쓰고 있다.

그들이 본 사실은 그리스도의 뜻에 의하여 시간과 역사를 넘어 영구히 가치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발적인 사실의 증인이 아니다. 미래의 사람들을 위하여 신이 일부러, 기적과 불가사의 로써 인정되고, 신의 부르심과 그리스도의 선택을 받은 공정한 증인(사도 10, 41)이 아니면 안되었다.

역사가는 보통 속세적인 역사만을 취급할 뿐이므로, 부활과 같은 신의 사실에 대해서도 속사역사의 원리를 통용하는 위험이 있다. 그들의 눈은 신의 영감을 받은자의 마음이 얼마나 깨끗하고 섬세하게 되는가를 충분히 보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그들의 사명에는 목격자로서의 확신만 있는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신에게서 받은 사명을 완수해야 겠다는 책임감이 있다. 그것은 성인이나 순교자의 양심과 같다. 만일 그들의 양심에 넘쳐있던 사실, 즉 부활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착각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마음에 맥박치고 있는 종교심 까지도 착각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2. 사건의 역사적 가치



제자들이 인간으로서는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무의식적으로 어떤 착각에 빠지거나 주관적인 환영을 본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 이후 인간의 마음에서 싹트고, 지금에 이르기 까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꾸만 커가며, 또 미래에도 커갈것이 확실한 그렇게 깨끗하고 진지한 의지, 강한 도덕, 부정할 수 없는 신에의 사랑이 얼빠진 착각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우리의 인생관이 아무리 유치하더라도, 우주의 실재의 의미가 무이며, 넌센스 이며, 악마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동시에 의지이며 활동이기도 하다. 이 견지에서 신앙은 하나의 생명적인 요구를 가지고 있다. 이 지상에는, 그것이 존재하는 어떤 의미나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요구, 이 세상의 최초에 <신과 더불어 계신 말씀><그 자체로서 신이신 말씀>이 있어야 한다는 요구이다.

그리스도 시대의 당시 유대아교는, 영혼과 육체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일원론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들에게 <생활한 영>은 항상<생활한 육체>이며, 하나의 영은 하나의 몸으로써만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데아인에게는 육체를 떠나, 단독으로 살아있는 영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고성소(sheol)에 있는 사자의 영은 활동할 수 없는 막연한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의 육체를 직접 그 눈으로 보고 그 육체의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뚜렷한 인상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의 영이 육체와 함께 나타나지 않았다면 유데아인인 사도들은 최초의 그리스도의 출현때와 마찬가지로 유령이라고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제자들이 확인한 것은 어느것이든, 외부에서 조사하고,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빈 무덤>이다



3. 빈 무덤의 사실



빈 무덤 이야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 보도인가? 적어도 핵심에 있어서는 역사성을 띠고 있는 보도인가 아니면 그것은 부활신앙을 설화의 형식을 빌어 표현하고 있는 전설(Legende)들인가? 요컨데 무덤 이야기는 하나의 조작인가? 무덤이 비어 있는것은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시체를 가져갔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할 법도 하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있었더라도, 무엇때문에 그렇게 하였을까? 혹 나중에 제자들이 시체를 숭배하게 되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하였는가? 그러나 시체나 유물에 대한 숭상은 유데아인의 멘탈리티에는 없었던 일이다. 만약 무덤으로부터 시체를 가져간 자가 유데아인 이었다면, 사도들이 전 유데아를 향하여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무덤은 비어있었다>라는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을 때, 숨겨 두었던 시체를 내놓고, 부활을 선포하는 그리스도교의 운동을 근저로부터 없애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것은 제자들의 책임이라는 것이 된다. 유데아인의 지도자들은 마치 그런 것처럼 떠벌렸다. 그러나 다른 인간을 속인 사람이, 나중에 자기의 거짓을 정말이라고 생각하고, 더군다나 그 거짓말 때문에 생명까지도 버릴 수 있었을까? 더구나 제자들은 그들이 말하는 사기한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그들은 복음선포를 시작하자 마자 즉시 매질과 궁핍과 죽음에 내던져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욱더 소리를 높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외쳤다. 역사상 이런 사기극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제 <빈 무덤>이 남는다. 이것도 착각 이었을까? 제자들이나 부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느낀것은 근심과 놀람 이었다. 이들의 머리에 먼저 떠오른 생각은 예수의 시체가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Jn 20, 2-13). 사도들은 천사들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었다(Lu 24, 11). 따라서 빈 무덤이 그 자체로서 사도들의 마음에 그리스도 부활을 믿게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활의 현실성은 현실을 전하는 증언에서 따로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곧, 부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과거에 한번 일어났다가 이제는 일단 마감된, 사학적으로 확인 가능한 사건일 뿐 아니라 그야말로 현제적인 현실, 증인들에게 바로 오늘 결정적 의미를 갖는 현실임을 의미한다. 특히 빈 무덤과 같은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실들은 신앙을 위한 하나의 지표요 징표로서의 구실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의 직접적인 증명은 아니다. 그러한 사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부활의 증인들이 자기네 신앙을 위하여 생활과 죽음을 통하여 제시한 실존적인 신빙성의 증명이다.





4. 제자들은 착각을 본것이 아니다



제자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신앙이 이었기 때문에 환영이나 착각이 생겼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의 사실을 주지해 볼 필요가 있다. 1) 예수는 생존중에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자주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중대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고 한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그것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2) 제자들은 예수가 죽은 후에도 그가 약속한 3일만에 부활한다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고, 또 그 증언이 실현된다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예수가 죽은후 그들은 모두 달아나 숨으려 했다(Jn 20, 19). 탄식하고 슬퍼할 뿐이었다(Mr 16, 10). 만일 부인들이 그들에게 빈 무덤과 천사의 말을 전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무덤을 조사하려고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3)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눈앞에 나타났을 그 때 마저도 의심을 품고 있었다(Lu 24, 37). 부활한 그리스도가 자기의 손과 발과 옆구리를 보이고, 함께 식사했을 그때서야 비로서 의심이 풀렸다(Lu 24, 41 ; Jn 21, 10). 만약 그리스도의 출현이 제자들의 신앙과 기대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나타나면 의심하거나 놀랄것 없이 큰 기쁨으로 맞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5. 부활 사실이 제자들을 변화시킴



예수부활 이전의 사도들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방황하였다. 그러나 부활의 그 아침이 왔다. 이상하게도 갑자기 그 묵은 이상이 사라졌다. 제자들의 마음에 한 사람의 새로운 사람이, 새로운 메시아가, 그리고 새로운 신앙이 들어왔다. 부활한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마음에 일으킨 최초의 것은 <주>라는 생각이었다(Lu 24, 32). 엠마오에서 돌아온 두 제자에게, 사도들은 외쳤다. 주님이십니다 하고. 주여! 라는 말은 부활의 소식에 대한 새로운 신앙의 최초의 응답이었다. 제자들은 부활의 그날까지 예수의 인간적인 면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때때로 기적이나 말씀에 의해, 인간의 베일을 벗을 때만, 그의 심비한 면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런데 부활한 그리스도를 본 지금은, 신비한 면이 그들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제자들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하느님이요 주로서 인상을 받았고, 그 인상은 그들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가 그들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그리스도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체험은 메시아에 관한 유데아의 전통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이스라엘 일국만의 구원자가 아니라 전 인류를 생명으로 부르는 구원자인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는 그 전에 예수가 여러번 말한 <인자> 전인류의 심판자, 자기의 사명, 그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이 모두 이해되었다.



6. 부활에 대한 신학적 근거



부활발현의 경우 객관적으로 물증을 찾아 추적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이 발현을 대할 때 중립적인 관찰자나 참관인 처럼 거리를 가지고 대할 수는 었다. 발현을 체험했다는 것은 예수한테 꼼짝없이 당했다는 것이요 그분한테 엄습당하고 압류 당했다는 것이고 신앙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 발현을 통해서 제자들의 신앙을 일깨움으로써 자기의 전권주장을 궁극적으로 관철하게 되었으며 그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신약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언제나 하느님과의 만남, 신체험이라는 특징을 띠고 나타난다. 제자들이 체험하고 깨달은 것은 예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거쳐 궁극적으로 도래한 하느님 나라라는 현실이요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분의 얼굴에 하느님의 다스림이 비쳤다는 사실이다. 즉, 하느님은 이 발현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종말론적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이 종말론적 자기계시야 말로, 부활신앙은 물론 도대체 신앙이라는 것의 본격적인 근거이다. 신안이란 하느님을 생명의 근거요 목표로 모신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신앙의 근거는 결코 어떤 개별적 사실이나 증명일 수 없고, 인간에게 군림하시는 하느님의 신의-진리만이 신앙의 근거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의 증인인 나자렛의 예수가 발현을 통하여 신앙의 근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첫 제자들의 부활신앙 체험은 신앙의 기본 구조를 보여주며 이 신앙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를 어떻게 극히 일반적으로 구성해 주는가를 밝혀준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의 신앙은 첫 증인들의 체험과 그 전승에 의하여 매개되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그들의 신앙과 우리의 신앙은 질적으로 구별된다. 우리의 신앙은 사도적 증언이라는 기초위에 서 있다. 제자들이 발현 때에 그리스도 자신을 몸소 만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견지해야 한다. 결정적 질문은 그때에 객관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우리도 첫 제자들 처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압류당할 용의를 갖추고 있느냐의 여부에 있다.



7. 부활에 대한 신앙의 내용



예수의 부활은 하느님의 결정적인 종말론적 위업일 뿐 아니라 하니님의 종말론적 자기계시이다. 즉 이 부활에서 하느님이 누구이신가가 그 이상 능가될 수 없을 만큼 결정적으로 계시된다. 예수를 죽은자들로부터 부활시킴으로써 하느님은 당신 사랑의 신의를 실증하셨고 예수 및 그분이 내세운 본연의 일을 결정적으로 인정하셨고 당신 자신과 동일시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하느님의 하느님이심을 믿는 신앙에 근거한다.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상에서 죽은 그의 죽음의 완결이요 완성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예수의 생애와 수난이 끝난 다음에 비로서 일어난 어떤 다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의 죽음 가장 깊은 곳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다. 육체를 지닌 한 인간이 자의와 타의에 의해 자신을 하느님께 완전히 넘겨드린 사건이요 동시에 하느님께서 자비와 사랑으로 이 철저한 헌신을 기꺼이 받아들여 주신 사건이다. 부활은 말하자면 십자가가 가지는 신적 심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하느님은 결정적으로 인간 곁으로 다가 오셨으며 인간은 그 나름대로 결정적으로 하느님에게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은 어떤 보편적 전망안에 서 있다. 그것은 단순히 이미 지나가버린 유일회적이며 마감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사건이요 이 미래를 세상에 열어주는 사건이다. 그것은 인간의 전인적 완성, 새 인류와 새 세상이라는 종말론적 완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온 창조질서가 한숨지으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것, 곧 하느님 자녀들의 자유의 계시, 미래의 자유의 왕국에서 비쳐오는 서광이요 그 첫 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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