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1. 인간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구약 성서를 통해 하느님은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고 인간이 고통 중에

있는 것을 보아 넘기지 않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또 인간의 간청을 결코 저버리는

분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위하여 역사 안에 개입하시는 분인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신다. 지금 이 순간

에도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어느 한 곳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뜻을 펼치고

계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구원자이신 것이다.

예수의 탄생과 활동, 죽음과 부활 등은 하느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역사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무조건 아무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은 아니었다. 의로운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해방시키고 구원하실 뿐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건

설하기 위해 의로운 자를 뽑으시고 세상의 마지막 날에 악한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구세주는 현세에서는 해방자이면서 세상 끝날에는 심판자가 되실 분인 것이

다.

이러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바로 하느님의

구원을 찾고자 하는 태도이다. 구원을 얻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

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고 기도의 삶을 사는 것이 구원의 하느님을 만나는 길

이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기도가 구원의 절대적이고

충분한 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도를 했으면 당연히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는 단지 그 선물을 받기 위해서 합당한 존재

가 되려 노력을 하는 것이다. 부족하지만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하는 것이

다. 이런 노력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이렇

게 인정받은 사람은 현세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맛볼 뿐 아니라 세상의 종말이 왔을

때에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10장 9절 이하에서 이 구원에 대해 간단 명료한 설명을 해

주고 있다.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

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

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성서에도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

님께서 만민의 축복을 내리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

으리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2. 인간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또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피조물이면서 창조주를 거스

릴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거스리고 사랑을 저버린 죄는 하느님의 모습을

잃게 만들었다. 그래서 인간은 이런 잃어버린 하느님의 모습을 되찾아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즉 그 말은 인간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게 하느님의 모상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어쩌면 간

단하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절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이었

다. 이 예수가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다. 예

수를 아는 문제에 있어 가장 먼저 생각해야하는 것은 예수님은 사람이셨다는 사실이

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셨는지는 완전하게 알 수 없지만

성서를 읽다 보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가 있다.

예수님은 지금부터 약 2000년 전에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때에 이스

라엘의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의 어는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예수는 로마의 식민

지 통치 아래서 태어난 유다인이었다. 그리고 마구간이라는 탄생 장소는 앞으로 예수

의 활동 모습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가난한 모습으로 비천한 이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선택된 장소였다. 우리는 성탄절에 화려한 마구간을 꾸미고 있지만 실제의 마구간은

그렇게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곳이었다.

그 다음으로 예수는 목수인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나자렛이라는

곳에서 30년 동안을 성장하셨다. 아버지의 일을 배우며 묵묵히 인간의 삶에 적응하시

기 위한 기간을 30년이나 보내셨다.

30 살이 되었을 때에 예수는 나자렛을 떠나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하느

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 생활을 예수님의 공생활이라고 한다. 이 공

적인 생활은 제자들을 모으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이 중심을 이룬다. 제자들에게 여

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가르친 것이었다. 그리고 제자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 기쁜 소식을 가르치고 설명해 주셨다.

예수님은 가르치실 때에 어려운 말씀을 쓰시지를 않았다. 그 당시 사람들이면 누

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셨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것과 \’하

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가르침을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엄숙하고 점잖은 모습으로만 상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보통 느끼는 감

정들, 예를 들면 기쁨, 분노, 사랑, 즐거움, 감사, 동정심 등을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가지고 계셨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람이면 누구나 죽듯이 그 분도 죽음 앞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오

히려 그 분은 유다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형을 받고 죽었다. 당시 로마의 지배

에 도전할 위험한 인물이라는 죄와 유다인들에겐 오직 한 분뿐이신 하느님을 사칭했

다는 죄 때문에 정치범으로 처형을 당하셨다. 그러한 죽음을 앞에 놓고 예수님도 무서

워서 떨며 번민을 하고 괴로워 하셨다. 그러나 결국은 33세라는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셨다.

이상이 성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인간 역사이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사람으로

서의 일생을 보면서 무엇 때문에 하느님이 이런 예수님의 생애를 마련하셨는지를 헤

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인 이러한 인간적인 모습은 없이 신적인 모습만을 간직

하고 우리 가운데에 계셨다면 우리는 그 분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모습을 지니고 우리와 같은 과정을 사셨던 예수님이기에 우

리는 그분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가 있는 것이다. 나와 같은 인간이셨던 예수님이 보

여준 삶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그 길을 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고 계신 것이다.

우리들이 친근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주신 예수님의 인간적인 생애와 모습을 살펴보

며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으로는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을 되찾아 주실 분이 아니라 실

패한 인생을 사신 분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모습의 예수님이 과연 어떻게

인간을 하느님께로 이끌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3.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생애를 보면 33세의 젊은 나이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숨을

거두셨다. 그리고 제자들마저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언

제 있었느냐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

었던 것이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고 땅에 묻은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소문이었다.

이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직접 목격한 제자들은 이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믿음은 실망하고 있었고 겁에 질려 있었던 제자들을 완전

히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숨어서 지내지 않고 사람

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서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묻히셨던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

고 선포를 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제 제자들은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자신들과 함께 사시며 가르

쳐 주신 말씀들에 대해 새로운 믿음을 고백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에야 하느님이 되신 것이 아니라 그 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이셨으며 더 나아가

그분은 세상의 처음부터 계시던 하느님이셨다고 고백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그분의

일생은 항상 하느님과 성령께서 함께 하신 일생이었다고 고백을 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생전에 죄인들을 용서해 주거나 병을 고쳐준 기적들과 귀신을 내쫓

은 행동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능력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선포를 하기 시작했다.

제자들의 이러한 신앙고백은 우리가 예수님께 드려야할 대답이다. 아무리 옆에

계시며 기적을 베풀었어도 발견할 수 없었던 예수의 신성을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 앞

에서는 쉽게 발견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

활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며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참으로 인간이시며 참으로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 사람과

참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인간의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교

회에서는 이 신비를 육화의 신비 혹은 강생의 신비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육화의 신비에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우

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지금의 우리와 같이 불완전한 인간의 처지가 되셨다는 것이

다. 그래서 마구간의 구유를 택하시고 나자렛의 성가정 안에서 보통 사람들이 겪는 성

장과정을 다 거치셨다. 그리고 공생활 기간 중 복음을 전파하면서도 잘사는 사람이나

권세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런 사람들의 힘을 빌리면

좀 더 쉽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는 언제나 죄인으로 손

가락질을 받던 세리, 창녀, 지체 부자유자들 등 사회적으로 언제나 소외를 당하던 가

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이고 또 그들과 함께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을 뿐아니라 인간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하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육화의 신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에

서였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죽으실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분께서는 하느님이신 동시

에 인간이었다. 그래서 인간이 겪는 죽음의 고통은 물론 고문과 십자가형이라는 극도

의 고통까지도 실제로 다 겪으신 것이다. 한 마디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아버

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당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인간을 구원하러 가장 비천한 처

지에까지 내려오셨다는 것이 바로 육화의 신비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기 위해서는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습을 보여주시지를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직접 세우신 세례성사와 성체성사 등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발견할

수가 있다. 물론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예수의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곁에서 예수님이 함께 걷고 있었어도 발

견하지 못했듯이 우리도 그런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초대하

고 그분을 모시려는 마음을 가졌을 때 눈이 열려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듯이 우리도

그분을 모시려는 마음이 필요하며 그런 마음에 눈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

하신 주님을 발견한 사람은 이제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갖게되고 복음을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4.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

예수께서 당신 생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하느님 나라\’에

있으며 이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에 대해 여러 가지 비유와 기적들을 보여주심으로 깨

닫게 해 주셨다. 당시 유다인들이 기대하는 핵심은 바로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다스림\’이었다. 이 \’하느님의 나라\’는 의지할 데 없고 무력하며 가난한 사람들이 보호

받고 도움을 받으며 불의와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나라라고 생

각을 하며 기대하였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자유를 억압당하고,

정의가 짓밟힌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은 제 스스로 벗어날 길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주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리

고 이 새로운 시작은 생명과 평화의 주인이신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하느님 나라\’는 바로 새로움, 지금까지 있어 본 적이 없는 것, 상상을 초월하는 것,

조작될 수 없는 것, 그러기에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바로 \’하느님 자

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 역사 체험을 통해 형성된 것이었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희

망은 장차 일어날 사건 보도가 아니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종말론적인 희망은 오히

려 어떤 괴로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의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었다. 하느님께서 결국

이 세상의 지배자로 오셔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며,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으

로부터 해방시키리라는 신앙의 확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예수는 이 희망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다스림은 감추어진 현실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현실 안에 바로 지금

이 자리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이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로 몰래 뚫고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구약성서 및 유다인들의 전통 안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은 곧 하느님 자신의 오심

을 뜻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가까이 와 계신다

는 말과 뜻이 같은 것이다. 하느님의 오심과 하느님의 가까우심은 하느님이 사랑으로

지배하러 오신다는 말고 같은 의미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직접 부르셨다. 예수께서 이러한 표현을 과감하게 사용하였다면 그 이유는 하느님의

가까우심을 독특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이 가까이 계신 하느님 안

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안심하고 있을 수 있다는 표현인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하느님이심을 계시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회개와 신앙이다. 신앙은 제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은 예수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힘을 의지하여 나의 존재 근거와 기반을 하느님 안에 세운다는 것이다. 신앙

은 이를테면 하느님의 다스림의 현존을 받아들이기 위한 빈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다스림의 현존은 구약의 예언자들에게는 위협적인 심판을 의미

했지만 예수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구원은 일차적으로 죄의

용서에 있으며, 자격과 공로가 없음에도 베푸시는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맛보는 기

쁨에 있는 것이다.

구원이란 이처럼 하느님을 계기로 하는 기쁨이며, 이웃에 대한 그리고 이웃과 더

불어 나누는 기쁨으로까지 번져 가는 기쁨인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기쁜 소식은 하느님 나라이며 그 하

느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은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 인간과 인간의 화해에 있다는 것

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이후 이 일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셔야 했다.

5.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의 이유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력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권력자들은 처음에는 예수와 그의 무리들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

기고 있었다. 그들은 별로 많은 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무리

가 점차 많아지면서 그들은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처음부터 유다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무지막지하게 괴롭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처음에는 예수에게 공개적인 질문을 통하여 꼬투리를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그들을 무색하게 만들곤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트집을 잡으려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트집을 잡기가 어려워졌고 마침내는 율법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명목으로 예수를 제거하기로 작정을 하였다.

이런 결정을 하고 있을 즈음에 예수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베타니아라는 곳에서 예수의 친구이며 죽었던 나자로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셨다. 이

기적의 소문은 곧 예루살렘으로 퍼졌다. 며칠 후 예수님은 과월절을 지내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하신다. 이때 많은 군중들이 나와서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겉옷

을 벗어서 깔고 빨마 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환영은 결국 예

수님을 죽일 음모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하신 예수님은 목요일에 제자들과 함께 과월절 만찬을 하

시면서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는 성체 성사를 제정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마지막 유언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산

으로 올라가셔서 밤을 새워 기도를 하셨다.

그리고 그 밤에 체포되어 밤새 심문을 받고 마침내 빌라도 총독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그의 실제적인 죄목은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

며 유대의 지도자들과 율법을 거스른 것이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로마에 반항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INRI(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죄목이 쓰

여졌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침묵하였고 마침내 예수를 무덤에

묻고 난 후에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은

무덤이 열려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는 제자들에게

달려 왔다. 그 후 예수님은 여러 곳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당신 부활을 체험시켰

다.

이러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사건은 구약의 과월절(빠스카)에서 그 예표

를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구약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던 시절 그들을

괴로움에서 건지기 위하여 하느님은 모세를 택하시고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에게 10

가지의 재앙을 내리셨다. 그 마지막인 10번째 재앙이 바로 이집트의 모든 인간과 짐승

가운데에 맏이를 죽이시는 일이었다. 이때 어린양의 피를 문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하느님의 천사가 거르고 지나가신 것이다. 그래서 이 밤을 빠스카의 밤이라고 한

것이다. 파스카라는 뜻은 \”거르고 지나가신다.\”라는 뜻이다.

구약의 백성들이 어린양의 피로써 구원을 받은 것처럼 신약의 백성들은 바로 예

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예수님 십자가의 의미인 것이다. 예수님이 죄 없는

어린양처럼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간들의 죄를 대신 속죄를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피로써 인간은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를 제자들이 그 순간에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제자들은 예수

님의 죽음 전에 이미 많은 설명을 들었지만 그 뜻을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예

수님이 죽으시고 부활을 목격하면서도 완전히 이해하지를 못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성령께서 오시어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이 십자

가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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