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하느님은 우리가 믿는 신앙의 대상이다. 어떤 이들은 천주교를 마리아교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성당에 가보면 어느 곳이나 입구의 잘 보이는 곳에 성모 마리아의 상이 모셔져 있고 가정에도 열심한 사람은 반드시 성모상을 모시고 있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다. 이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설명을 하다보면 자연히 해소될 것이다.
천주교에서 신앙의 대상은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하느님이다. 단지 마리아는 하
느님께 대한 믿음에 있어서 인간으로서는 가장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기에 그
분을 본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공경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물
론 안다는 것은 언제나 한계를 갖는 것이고 안다고 해서 반드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믿는 것이라기 보다는 내가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지 믿음
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믿음은 불확실하지만 확신을 갖는 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 중에서 우리가 첫 째로 생각해야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불확실한 사실이다. 과학으로 검증된 사실은 아
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가지를 생각할 때 하느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천주교의 모든 신자들은 매 주일마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할 때 그 첫 자리에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고백한다. 성서에 나오
는 창조의 이야기는 물론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들은 당시의 여
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이러한 창조 신학을 이루어 낸 것이다. 삼라 만상을 바라보
며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느님의 은총이었고 지금 우
리에게도 은총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은총을 입지 못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도 하느님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이 우주와 인간의 신비를 벗기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부분이 더 많다는 생각이다. 바로
이러한 신비의 세계에 대해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창조주 하느님을 믿게되
는 첫 걸음이라고 할 것이다. 무수한 신비와 경이로움을 바라보면서 그런 것들이 단순
히 저절로 있는 것이라고 말해버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대답인지 모를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이런 신비와 경이를 바라보면서 그 곳에서 하느님을 발
견한 것이다. 물론 그들의 표현을 보면 신화적인 부분이 많고 지금의 우주관과는 다르
다. 즉 그들은 당시 누구나 생각하던 상식을 토대로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설
명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의 이야기는 결코 저자가 물리학적이
나 과학적인 관심을 가지고 서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 고대의 신화나 사건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저자의 의도는 현재의 이야기를 과거에 비추어 보면서 현재
자신들의 처지와 상황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귀양 생활을 하면서 인간을 창
조하시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을 배반한 자신들의 삶을 뉘우치며 희망을
갖고자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창세기를 읽는 것이 조금은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신학자들의 의도를 깊이 이해한다면 그들은 하느님의 업적의 위대하심을 높이
찬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 깊은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께서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을 깊이 묵상하는 사람은 그곳에
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1. 구원자인 하느님
이스라엘 민족의 생각 속에서 하느님께서 언제나 그들을 돌보시고 끊임없이 이
끌어 주셨다는 생각은 꾸준히 계속되어 왔다. 구약성서의 거의 전부는 하느님의 구원
업적에 관한 기록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출애굽기는 그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파라오의 치하에서
억압을 당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은 모세를 인도자로 부르시고 그 백성을 이집트의 파라오로부터 구원하
시어 광야로 이끌어 내신다. 그리고 광야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여러 가지 방법으
로 그들을 돌보아 주시면서 마침내 약 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어 내신다. 바로 이 사
건이 출애굽 사건이라 불리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국가를 이루기 전, 즉 부족국가의 형태로
있을 때에도 위기가 닥치면 위대한 인물들을 보내시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곤 하였는
데 그런 인물들이 바로 판관들이었다. 그 후에도 왕을 통해서 그들을 구하시고 돌보아
주셨으며 왕이 잘못하거나 백성들이 잘못하거나 할 때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가르치고
돌보려고 하였다. 이처럼 구약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고 끊임없이 돌보
시는 하느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어린아이와 같은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하느님은 그들에게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
을 강요하지도 않으셨고 또 당신 마음대로 하시지도 않았다. 이스라엘 자신에게 스스
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고 잘못되어 후회하면 언제나 찾아와서 그들을 돌보아
주셨던 것이다.
신약에 와서는 구약에서처럼 하느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모습은 찾
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구
원 업적을 계속 이어가심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의 기적을 통해서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보여주셨다. 병자들의 치유, 죄인에 대한 용서 등을 통해 구원을 체험시
켜 주셨다. 이처럼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자로서 활동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러한 개인적인 치유나 용서가 인류의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예수님의 기적들은 단순히 각 개인의 차원에
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예
수님은 인류의 구원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있다. 예수님은 그렇게 뛰어난 능력을
지니신 분이셨지만 인류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셨던 것이
다. 그것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님의 희생 제사라고 한다. 그리고 이 희생은 전 인
류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죽음은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고 돌보시
는 완성으로서 보여주신 사건이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이 십자가의 예수님
은 하느님의 최대 사랑의 표현이고 구원의 방법이었다.
2. 하느님의 특성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인간들은 변하지 않는 것을 찾곤 한다. 이런 현상은 바로
신앙을 찾는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에게 변하지 않는 존재라고 믿는 하느님이 계신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시작과 마침이 없고 영원하신 하느님이 계심을 알아야 한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을 야훼라고 부른다. 그 뜻은 \”나는 있는 자 그로다.\”라는 뜻이
다. 이 말은 곧 \”나는 나다.\”라는 뜻이다. 이 말의 유래는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하느님
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 하느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에 하느님께서 가르쳐 준 이름이었
다. 이 이름이 뜻하는 것은 하느님은 원래부터 있는 분이라는 뜻이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를 통해서 존재하고 또 허무로 돌려보내면 허무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본래부터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본래부터 있는 존재인 것이다. 또 하느님은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이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뜻이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있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무한한 완전성을 갖춘 분이다. 옛날 교리에 보면 만선만덕(萬善
萬德)의 근원이시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바로 무한한 완전성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말일 것이다. 완전할 수 있는 최대의 완전성을 갖추고 계셔 아무런 제한도 없다는 뜻
이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창조된 목적에 따라 제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 하느님은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기에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물질적인 존
재들은 모두가 파괴될 수 있고 변화될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하느님은 물질이 섞이
지 않았으며 오히려 물질을 넘어서 있는 순수한 분이신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은 영원한 존재로서 시작과 마침이 없는 분이시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므로 어디든지 계시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은밀한 내용까지도 모두 알고 계시다고 믿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윤리적으로 어떤 잘못을 했을 때에 아무도 본 사람이 없음에도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경우를 체험한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윤리적인 질서 안에서 하
느님께서 계시다는 증거로 삼는다. 어디에든 계시고 삶의 은밀한 곳까지 보고 계시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어디에든 계시지만 그 분은 신이시므로 우리의 감각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 즉 오관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공의하신 분이시다. 여기서 공의라는 말은 모든 덕행의 총괄이
되는 것으로 각자에게 줄 것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에는 교환 정의와 분배
정의가 있다. 교환 정의는 받은 것과 같은 것을 주는 것으로 세상의 정의들이 바로 이
러한 정의에 따라 움직여진다. 이러한 교환 정의는 하느님께는 맞지가 않는다. 왜냐하
면 피조물이 하느님께 드릴 적당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는 인간에게 직분과 책임을 나누어주고 그에 따른 결과에 대
한 상벌을 내리는 분배의 정의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정의를 공의라고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