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과: 구원의 보편성

 

제 5과: 사울의 회심

(읽어야 할 말씀: 사도9,1 – 9,31)

1. 말씀읽기: 사도9,1-9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5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으므로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말씀연구

 사울은 여전히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살기를 내뿜으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1)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생각이 다르다고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요? 그는 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고 있을까요? 그렇게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다마스쿠스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그는 변화됩니다.



2.1. 예수님을 만나는 사울

 살기를 내뿜으며 다마스쿠스로 가던 사울은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는 사건을 겪게 됩니다. 그가 땅에 엎어졌을 때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9,4)하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사울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하고 물었고, 예수님께서는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2)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고,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습니다.3)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참조:사도9,8-9). 그런데 성경은 눈이 먼다는 것을 “죄, 방황하고 있는 인간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소경이 된다는 것은 분명히 벌이었습니다.



죄인이 예수님 앞에 서게 되다.

 빛이신 예수님을 육신을 지닌 사람이 뵙게 될 때 사람은 두려움과 자신의 깊은 어둠을 체험하게 됩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어둠뿐인 자신임을 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 자신의 어둠을 깨닫게 되고, 그 어둠을 깨달음으로 소경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교만에 가득 차 있다가 자신이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고 허세를 부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얼굴을 들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울은 이제 눈이 멀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뵙고, 그 빛으로 눈이 멀었습니다. 이제 자기가 보고 싶었던 것을 보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② 눈이 먼 유다인을 대표하는 사울

 눈을 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진 것도 그들이 스테파노가 누구인지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눈먼 사람들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히 없애려고 작당을 하였습니다. 그 책임을 맡아서 다마스쿠스로 사울이 가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누구보다도 잘 보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리스도인들을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내가 못 보는 것은 안 보인다고 해야 하고, 보는 사람에게 인도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자기 고집을 피워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③ 사울의 죄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사도26,12-13). 그랬기에 위험한 사람일 수 있고, 정렬적인 사람일 수 있습니다.



 사울은 바리사이의 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유대인 사회에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고, 성령강림절의 사건들을 전해 들었으며, 많은 유다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열성에 사무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대사제에게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은 것으로 보아 분명 대사제를 만났고, 한나스와 카야파는 사울을 충동질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을 때 돌을 던지는 이들의 겉옷을 들고 있으면서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는 스테파노를 바라보고 아무런 죄책감이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울은 들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59-60)

  하지만 사울은 스테파노의 모습을 보고서도 자비심이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백정들의 행동을 정당하게 바라보고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믿음을 끝까지 지켜가는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4) 가말리엘은 출중한 율법학자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현자이며, 산헤드린에서도 권위 있는 의원이었습니다. 백성들의 평판도 좋았고,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참조:사도5,34). 최고의회에서 사도들을 박해할 때 사도들과 의원들을 중재했던 사람입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에게 하느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했던 사람입니다(참조:사도5,35-40). 가말리엘은 참으로 훌륭한 현자였습니다. 그런 스승에게서 배운 사울은 오히려 그리스도 신자들을 체포하여 모조리 죽여 없앨 권한을 자청합니다. 과연 스승에게 무엇을 배웠을까요? 사울의 모습을 통해서 죄는 헛된 열정과 충동 안에서 싹트고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헛된 열정과 충동은 스승의 가르침을 외면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사도9,1)라는 말을 통해 바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옳은 일을 그렇게 하면 칭찬을 받겠지만 옳지 않은 일을 그렇게 하면 죄를 쌓게 됩니다. 하늘 높이, 그리고 땅 가득히…,

 사울의 죄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를 맹신하고 있었기에(사도9,1-2), 그들을 따르며 잘못된 신념을 실천하면서 생겨났습니다. 그런 신념을 지닌 사울에게 그리스도교는 반 유대 종교적 종교였고, 유대 종교를 위해서는 그가 보기에 이단적인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없애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대사제로부터 권한을 받아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고 박해하는데 앞장을 선 것입니다.



④ 뉘우침

 다마스쿠스에서 며칠을 보내며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던 사울에게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 얼굴은 스테파노의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눈을 뜨고 있었을 때는 그것이 죄인지를 몰랐지만 눈이 먼 지금, 그의 뇌리에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은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스테파노의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무지와 인간백정과 같은 폭력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뉘우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나를 박해하느냐?”하고 물으셨을 때,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현실의 진리를 크게 착각하고 있었던 불쌍한 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치 없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고 무죄한 사람들(그리스도인)의 사형집행인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즉 세상일에 휩쓸리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하고 싶은 것들을 행할 때는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조용히 자신 안으로 들어가 눈을 감고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때 비로소 참된 나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성찰입니다. 이 성찰을 통해 자신을 살피고, 통회할 때 고백성사의 은총을 받아 누릴 수 있고, 그 은총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2.2.의로운 하나니아스

 다마스쿠스에는 하나니아스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야!”하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그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사도9,10-12)  예수님께서는 하나니아스를 통하여 사울의 눈을 치유해 주시려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니아스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를 들었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하여 끌고 갈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다마스쿠스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니아스는 예수님의 계획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니아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니아스는 예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도9,15-16) 하나니아스는 주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사울에게 가기 싫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라 하시니 예수님의 제자는 길을 나섭니다. 하나니아스의 순명하는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내 뜻이 아니더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내가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니아스는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사도9,17)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사울은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보게 되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고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사울은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습니다.



2.3.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복음을 전하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울의 변화는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 모두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저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자들을 짓밟은 자가 아닌가? 또 바로 그런 자들을 결박하여 수석 사제들에게 끌어가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닌가?”(사도9,21)하고 말하였고, 그럴수록 사울은 더욱 힘차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명하여 다마스쿠스에 사는 유다인들을 당혹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사울의 회심을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그가 한 일들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① 아라비아 선교

 회심한 바오로는 다마스쿠스에만 머물지 않고 곧 설교하러 다니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아라비아에 간 것도 이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랍 사람들이 바오로와 함께 있는 것을 반길 리가 없었으므로 도시의 근교에 떨어져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도층은 바오로의 존재가 몹시 불편스러웠으므로 분쟁을 일으켜 바오로는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입니다.5)



  사울은 유다인들에게도 쫓기고 아레타스 왕에게도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밤낮으로 성문들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사울의 제자들6)은 사울을 데려다가 바구니에 실어 성벽에 난 구멍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2.4. 사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지만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가 제자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르나바는 사울을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어떻게 그가 길에서 주님을 뵙게 되었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는지, 또 어떻게 그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는지 사도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의롭고 성령이 충만한 바르나바”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에 대해서 잘 보여 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습니다. 사울은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이야기도 하고 토론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스테파노를 죽이는데 앞장선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눈이 멀었다가 눈을 뜨니(사울), 눈멀었을 때의 친구들은 자신의 적이 되어 버리고, 눈  멀었을 때의 적들은 친구가 되어 있었습니다.



2.5. 고향 타르수스로 돌아가는 사울

  그런데 이런 처지에 있을 때 교회 공동체는 바오로에게 힘이 되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분명히 공동체는 바오로의 열정에 대해서는 감탄했겠지만 신앙공동체에 방해되는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울의 설교가 점점 더 격렬해졌으므로 불안해진 그의 형제들은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사도들이 자신을 왜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지를 사울도 알았을 것입니다. 이제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바오로는 깊은 고독과 번민의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7)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체험 한 바오로 사도에게 어둠과 고통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을 체험한 후부터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서 복음을 전하기 전까지 10년간은 사울의 생애 있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시간이 됩니다. 이 10년은 바오로 사도가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옷만 바꿔 입은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바뀌게 된 시간이며,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시간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오로가 서간을 쓰기 시작한 것이 다마스쿠스의 체험 이후 13-14년이 지나간 후라는 점입니다. 체험한 그리스도의 신비를 충분히 여과시킨 성숙의 경지에 이른 때였습니다.



 나의 회심은 언제였고, 하느님의 신비를 새롭게 깨닫게 해주는 변화의 순간들이 언제였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나의 회심이 나를 변화시켰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일회적인 회심은 그저 “변한 척”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회심을 통해서 내가 변화될 때, 나는 예전의 그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고, “변한 척”하지 않고,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의로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2.6. 예수님의 의도

 사람은 변화를 체험하는 순간 모든 것이 순수한 빛 속에서 새롭게 빛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서 있던 장소나 신조를 바꾸는 식의 회심(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 옷만 바꿔 입는 식의 회심,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옷만 바꿔 입는 식의 개종)을 통해서는 온전히 변화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완전한 회심을 체험하고 변화되었다 해도 자신의 일상사로 다시 돌아가게 될 때 그 전의 자기 모습대로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열렬한 박해자 바오로가 이제는 온 정열을 다 쏟아 그리스도를 전한다면, 자신의 열정을 이제는 장소와 목적만을 바꾼 사명에 다 쏟는다면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해내는 듯 한 착각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에게 예수님께서는 필요한 엄한 정화의 시련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회심이란 것이 지금까지 해오던 활동의 내용과 목적만을 바꾸어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심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새롭게 창조해주시고, 모든 것을 주님을 통해서 보도록 해주셨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을 자신 안에 깊이 받아들이고 통합하기 위해 먼저 서서히 섭취하는 기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깨우쳐 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바오로는 주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깨달았으나 활동은 자신의 본성대로 했던 것입니다.



 내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내 본성과 일상적인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애착과 소유욕도 강하게 남아 변화된 새로운 나를 다시 원래의 나로 변화시켜 놓고 맙니다.8) 아무리 나의 회심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할지라도 회심 후 끊임없이 정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회심을 통해서 삶의 방향을 바꾸고자 한다면, 그래서 세상적인 것에 마음을 쓰던 내가 영적이고, 신앙적인 것에 마음을 쓰게 되는 나로 바뀌었다면(생각) 이제 행동이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생각은 생각일 뿐입니다.



 회심은 그저 감동의 순간에 나타나는 일회적인 뜨거운 감정으로 남아 있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작심삼일”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 추억(일회적인 뜨거운 감정)만을 되새기며 본인은 비록 성당에는 안 나오고, 활동은 안하고 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뜨겁게 주님께로 향하고 있다고 거짓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거짓을 말하면서도 진실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런 사람이 많은 공동체일수록 그 공동체의 영적 성장과 일치는 더디게 마련입니다. 그 장애물이 바로 나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깊이 묵상해 봅시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되어 봅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사울의 죄를 바라보면서 내가 사울처럼 그렇게 죄를 짓고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내가 틀렸음에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않고, 고집을 피울 때는 언제입니까?



② 의로운 하나니아스는 사울의 눈을 뜨게 해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예”하고 응답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지만 나는 하기 싫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③ 회심하고 복음을 전하려 하였지만 결국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사울이 고향 타르수스에서 느꼈던 감정들은 어떤 것들이었을까요?



④ 참된 회심은 나를 어떻게 바꿀까요?



4. 실천사항

① 의로운 사람들을 인정해 주기(칭찬, 격려, 본받으려고 노력).

② 내가 신앙 안에서 소경임을 인정하고, 신앙의 눈을 뜨기 위해 노력하기

③ 복음을 전하는 나의 모습을 그려보고,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기

④ 세례를 받기 전의 모습과 세례를 받은 후의 내 모습 돌아보기





5. 나의 결심







6. 말씀으로 기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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