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9주일

 

연중 제9주일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제1독서: 신명 11,18.26-28

제2독서: 로마 3,21-25.28

복음: 마태 7,21-27



오늘 영성체 후 기도는 우리의 신앙이 필히 ‘행동’으로 ‘옮겨져야’한다는 사실을 중심 주제로 하고 있는, 오는ㄹ 독서의 본질적의미를 아주 잘 종합 요약해주고 있는 것 같다 :“주여, 비오니, 성자의 살과 피로 기러주시는 우리를 당신의 성령으로 다스리시어, 우리로 하여금 말과 혀로써 보다 진실한 생활과 행동으로 당신을 찬미하며 하늘나라에 들어가세 하소서.”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위대한 ‘말’을 하다 하더라도 (마태 7,21.22 참조)그 말의 의미를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즉 그렇게 되면 우리가 거듭하는 신앙고백은 ‘거짓말’의 연속에 지나지 않게 되며,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행하는 전례 자체도 흔히는 현실적인 행위와는 유리된 훌륭한 지향만의 표명에 지나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성체성사는 사랑을 불러일으켜 널리 퍼져 나가게 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우리를 이기주의라는 울타리에 계속 갇혀 있게 내버려두게 되며, 우리가 미사중에 서로 주고받는 ‘평화’의 인사도 현실적으로, 모든 인간들 사이에는 고사하고 그리스도 신자들간에도 전혀 화해의 분위기를 불러일으키지 못하게 된다.

 믿는 것과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사는 것을 분리시키는 이같은 비극적 현실은 결국 인간이란 끊임없이 힘겹게 재정립되어 나가야 할 ‘균형잡히지 못한’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데 그치고 말 것이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이말을 너희의 마음에 간직하고 골수에 새겨두어라“



출처가 서로다른 여러 가지 시민법과 종교법들을 한데 모아놓고 있는 소위 ‘신명기 법전’(12-26장)의 대서론의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오늘의 제1독서에,이미 주님께 대한 충실성을 ‘행동’으로보임으로써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지라는 강력한 권고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지고 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이 말을 너희의 마음에 간직하고 골수에 새겨두어라. 너희의 손에 내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보아라. 오늘 내가 너희 앞에 촉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느님 야훼의 명령에 복종하여 복을 받겠느냐? 아니면 너희 하느님 야훼의 명령에 불복하여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에서 벗어나 알지도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저주를 받겠느냐?”(신명 11,18.26-28).

 보다시피, ‘축복’이냐 ‘저주’냐를 결정 짓는 절대적 요인은 단순히 율법가운데 가장 중요한 구절들을 적어 넣은 성구갑들을 ‘손에 매거나’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느냐’ ‘복종하지 않느냐’ 그리고 그분이 가르쳐주시는 ‘길 ’을 따라가느냐 따라가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말씀’이 요구하는 바는 실행하지 않고 그 말씀의 오적 의식에만 형식적으로 매달리는 것을 비난하신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그들으 sakfkas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이릉 ㄴ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마나 팔에 성구 넣는갑을 크게 만들어 매달고 다니며 옷단에는 길다란 술을 달고 다닌다”(마태 23,3.5).

 만일 하느님의 ‘말씀’이 단지 지혜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의 희망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저주’와 단죄의 도구가 될 것이다.



 “그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제 1독서의 이러한 내용은 복음에서보다 더 생생하게 감동적으로 그리고 또한 예언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마치 든든한 반석위에사 아니라 모래위에 집을 짓는 사람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님,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릐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마태 7,21-23).

 우리는 지금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의 가르침을 선포하시며 당신 제자들의 어리석은 눈앞에 ‘진복팔단’의 무한한 영신적 차원을 열어 보여주셨던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을 대하고 있다. 과연 이보다 더 크나큰 영신적 감흥과 긴장감을 자아내는 내용이 또 있을까? 그러나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그저 감격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고 그감격을 매일매일 우리의 힘겨운 삶의 여정을 통해 차근차근히 실현 시켜 나가는 노력을 하지 않을 때 말이다.

전례모임에서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기는 (21절) 쉬운 일이며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행동하거나 생가가하거나 바라는 바 모든 생활을 통해 그분을 ‘주님’으로 알아 모시기는 쉽지 않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통치권’과 마치 섬세한 거미집처럼 우리 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무한한 우리의 탐욕, 즉 우리의 이익과 야심, 명예와 돈 등에 대한 고뇌에 찬 추구심을 융화시키기는 쉽지않다. 우리는 거의 매일 낭랑한 목소리로 “예수 그리스도 홀로 주님이시고 홀로 높으시도다!”라고 노래하면서도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또 다른 무수한 ‘주인들’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생활은 온통 거짓투성이다. 특히 전례를 거행하는 가장 고상한 행위들에 있어서 더더욱 그렇다. 이것은 다만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겨냥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이미 이러한 안이한 ‘절충식’ 삶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우리의 양심을 가볍게 해주지 못하는 값싼 위로를 줄뿐이다. 무엇보다도 특히 마지막 ‘심판’(‘그날에는’)의 장면-예수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해도 당신은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여기서 상기시키고 있는-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그러나 그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22-23절). 여기서 말하는 ‘악한 일’이란 산상설교에서 언급되고 있고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에서 요약되고 있는 하느님의 법에 대한 불순명을 말한다 :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느 ㄴ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그러므로 언젠가는 우리의 생활에 대한 심판이 있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이나 또 신앙의 ‘정통성’ 여부가 아니라 그신앙을 옮겨 표현하는 행동만이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다거나 마귀를 쫓아낸 일조차도 중요하게 계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한 것’은 중요하게 계산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심판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다른곳(25,31-46)에서도 말해주고 있듯이- 사랑의 행위를 중심으로내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루가 복음사가는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에 어느정도 상응하는 ‘심판’에 관한 문맥에서, 구원의 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 자신들을 단죄에서 구원해줄 보증으로 ‘기적’ 대신에 그리스도를 잘알고 있다는 사실과 그분과의‘우정’을 들고 있다 : “‘저희가 먹고 마실 때에 주인님도 같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해도 주인으 ㄴ‘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하고 대답할 것이다”(루가 13,26-27). 아마도 여기서 루가는 그리스도가 자기들의 동료였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구원되리라고 생각 하고 있던 유다인들의 자신만만한 속셈을 나무라고자 하는 것 같다. 한편 마태오 복음사가는 주님의 말씀들을 재절리하여 다른 문맥에 적용하면서 그 의미를 역설적으로 강조하였다 : 만약에 ‘믿는 이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줄”(21절)모른다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들’조차도 그들을 구원해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행하는 것’이 실제로 그분을 ‘믿는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비록, 주님께서 야단치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행하지는 않고 말로만 크게 떠벌이는 것이 이따금 편리하고 지혜로운 듯 생각 될지는 몰라도-특히 어려운일일 때-‘믿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바로 거기에 지혜로움이 있는 것이다. ‘신앙’과 하느님의 가르침의 ‘정통성’이 생활을 거짓 꾸미는 구실이나 위장의 도구로 사용될 수는 없다. 더구나 우리모두에게는 우리가 얼마나 언행이 일치하는 생활을 했는가가 밝혀지게 될 최후의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대해 주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짤막한 대립적 내용을 담고 있는 비유로써 말씀해주신다 :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집은 반석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그러나 지금 내가 한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24-27절).

 ‘집’에 들이닥치는 그 거센 자연의 힘은 물론 그리스도 신자가 복잡한 역사의 여정에서 그 자신과 자신의 믿음에 대한 충실성으로써 대적해야 할 크나큰 어려움들을 가리키지만, 더 나아가 마지막날에 우리의 ‘믿음’이 진실한 것이었는지 어떤지를 입증해줄 것은 바로 우리의 생활이다.

신앙을 입으로 고백하면서도 그 신앙의 요구에 따라 살지 않는 것은 결국 신앙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에는 모든 것이 다 거짓이다. 생활뿐만 아니라, 적어도 말로만으로라도 세상에 선포하고자 했던 신앙조차도 거짓이 되어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사람은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전체의 본질적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오늘의 제2독서는 믿음을 주제로 다루며,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거소가는 관계없이”(로마 3,28)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믿음’의 절대화는 지금까지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바와 대립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바울로의 생각과 복음의 내용이 서로 반대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그런데 특히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진짜’복음의 내용은 오직 바울로의 사상을 통해 -특히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드러나고 있다고 끈질기게 주장하고 잇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로의 메시지를 잘 알아듣고 또 그가 ‘믿음’이라는 말을 무슨 의미로 쓰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형제 여러분,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가 바로 이사실을 증명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느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윻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오라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1-25a.28).

 이대목은 의미가 너무 깊어서 여기서 그내용을 다 자세히 주석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다만 오늘 전례 전체의 분위기와 일치되는 가장 중요한 내용 몇가지만을 순서에 따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바울로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즉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조건에서 제외시키고 있는 행위들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하고 있는 것들이다 :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포함해서 우리모두가 처해 있는 죄의 상태(25절)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는 것은 우리가 거행하는 전례 의식이나 우리가 지키는 운리적 계율 그자체가 아니다.오직 하느님만이 인간을 구해주실 수 있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분은 당신 사랑의 계약을 충실히 지키시는 분이시다. 둘째로, 바울로가 여기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말하고 있는 그 ‘믿음’은 아주 어렵고도 힘들게 얻어지는 은총의 선물이다 : 그것은 결코 손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시말해, 그가 말하는 믿음은 사랑과 봉헌의 초고 행위인 성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하느님의 자유롭고도 무상적인 주권에  아무것도 남김엇이 온전히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능력을 뜻한다. 하느님께서는 진정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25절). 이대목은 분명히 속죄판 (속죄의도구) 즉 야훼와 이스라엘과의 화해를 뜻하기 위해 속죄의날에 희생제물들의 피를 뿌렸던, 지성소 안에 들어 있는 계약의 궤의 덮개판을 상기시키고 있다(탈출기25,17-22 ; 레위 16,15 ; 히브 9,5 참조).

 그리스도릐 피로써 무상으로 ‘구원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로 드러난 그분의 사랑의 표지 아래에 항구히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피는 뜨겁게 타오르기 때문에 타협과 불성실로 이어지는 무미건조한 생활과는 융화될 수가 없다.

 이같은 사실로부터 우리는 바울로가 말하는 ‘믿음’은 실천적인 생활로 옮겨지는 그러한 믿음이며, 더 나아가 바로 사랑의 행위 그자체임을 알수 있다. 그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할례를 받았다든지 받지 않았다든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갈라 5,6)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로의 사상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결코 대립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는’(義化)근거요 뿌리인 ‘믿음’은 반드시 ‘사랑의 행위’로 장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글은 카테고리: logos, 가해 연중8-13주일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연중 제 9주일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연중 제9주일



             1. 조순창 신부(가)/ 2                    2. 이계중 신부(가)/ 3

             3. 주책바가지(가)/ 5                     4. 최용진 신부(가)/ 9

             5. 강길웅 신부(가)/ 11 


    1                   연중 제9주일   마태 7,21-27 (가)

    내 말을 듣고 행하면 반석 위에 집짓는 슬기로운 사람

                                                                    조순창 신부


    오늘은 연중 9주일로서, 부활 주일 직전의 연중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수요일이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입니다. 단식재와 금육재도 지키시고, 재의 예식에 많이 참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금요일마다 금육재를 지키시고, 저녁 미사 후의 ‘십자가의 실’ 기도에도 많이 참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한 시기를 마치고, 3월과 함께 여러 모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두 길을 제시하시고는 ‘한 길을 택하는’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구원과 멸망의 길, 삶과 죽음의 길을 제시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사고가 나고, 병, 출산, 실패, 싸움을 겪을 때마다 ‘죽었구나!’하거나, ‘죽겠다’고 말할 법합니다. 또, 회생하여 기쁘거나, 건강하거나, 새 출발하는 경우라면, ‘살았구나’ 하든지, ‘살았다’고 하기도 합니다.


    오늘 제 1 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가 오늘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느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복을 받겠느냐, 아니면, 너희 하느님 야훼의 명령에 불복하여,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에서 벗어나, 알지도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저주를 받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제 2 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어 구원을 받는데, “율법은 아무 관계가 없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이요,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이다.”고 가르치십니다.


    축복과 저주를 내놓고, 믿음과 율법을 내놓고, 반석 위에 집짓기와 모래 위에 집짓기를 내놓고서, 자유로운 선택을 하게 하십니다. 복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느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느냐, 불복하느냐? 가 우리에게 달려 있고, 그 결과도 스스로 마련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불신하며, 이기심에 사로잡혀 살 때에, 육정이 빚어내는 일은 명백합니다. 음행, 추행,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원수 맺기, 싸움질,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경고합니다.


    “이런 짓들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며,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삶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살아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연중 제9주일   마태 7,21-27 (가) 돈벌기와 돈 쓰기

                                                                  이계중 신부


    부 즉, 재산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잠깐 묵상하겠습니다.

    사람들에게 “지금 제일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돈”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습니다. 그 이유로서는 ‘무엇이던지 원하는 것을 살수가 있고 또 원하는 것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라던가 ‘생활의 안정을 얻기 때문이다.’라는 등등의 말을 할 것입니다.


    과연 금전은 제 6 감각 같은 것으로 이것이 없으면 다른 다섯의 감각을 완전히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돈’을 하느님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설령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제 2의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돈은 어디까지나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최종의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원만한 생활을 위해 재산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재산을 주시는 것도 하느님의 은혜로 재산을 만드는 데 노력하지 않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행동 같은 것은 결코 우리 주위에서는 없어야 하겠습니다. 재산을 만드는 길은 부지런히 일하는 근면과 재산을 절약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또한 구약 에제키엘 서에 나오는 바와 같이 ‘지혜와 총명에 의해서’ 재산을 저축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신용이 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돈은 착한 하인이 될 수도 있고 악한 주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재산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은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농부가 퇴비를 많이 만들어서 이것을 산포하지 않으면 곡식을 만드는 데 아무 유익이 없듯이 돈을 많이 벌어서 이것을 쓰지 않을 때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먼저 물건을 살 때, 탐나는 것을 사지말고 필요한 것을 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사소한 지불이라고 해서 마구 사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조그마한 구멍이 큰배를 침몰시킨다고 합니다. 우리는 돈은 머리로서 벌고, 사용은 심정으로서 즉, 마음으로서 해야 하겠습니다. 5백 원을 빌려주고 절반을 돌려 받는 것보다는 백원을 거져 주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재산을 탐내어 모아도 재산에 만족을 못 가지는 구두쇠가 되지 말고 하느님께 부끄러움이 없는 사용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재산의 과잉은 탐욕의 원인이 됩니다. 재산을 정당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쌍합니다. 성경에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기가 더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는 ‘화사하고 값비싼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베풀던 부자 한 사람이 죽어서 땅에 묻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았으며, 너무 고통스러워 아브라함에게 구원의 호소를 하였지만 모두 허사였다’는 것이 실려 있습니다. 더욱이 부정으로 축재한다면 참으로 불쌍합니다. 옛말에 ‘타인의 돈으로 부푼 돈 주머지는 텅빈 돈주머니에 불과하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정하게 축재하거나 또는 정당하게 번 재산이라 할지라도 잘 사용하지 못한다면 중국 격언에 나오는 ‘잊어버릴 물건을 하나도 갖지 못하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부한 인간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이 아무 재산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베토랄카는 ‘황금을 바르게 사용하는 사람은 그의 주인이고, 이것을 축재하는 사람은 그의 수위이고, 이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바보이고, 이것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은 우상숭배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일을 하여 재산을 만들고 또 가정의 안정과 자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저축도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용에 있어서는 절약을 하여야 하겠고 또 필요한 사용은 아까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같이 되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이제 짧은 이야기로 끝을 맺겠습니다. 옛날, 어떤 수도자가 있었는데 그는 불쌍한 불우 아동들을 모아 그들을 양육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먹을 것이 다 떨어져 어찌할 바를 몰라 구걸을 떠났습니다.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도움을 받아오다 저녁때가 되어 어떤 집에 들어가려고 그 집 모퉁이를 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창문을 통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는 깜짝 놀라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였습니다. 안에서 들려온 말은 그 집 어린이가 등잔에 불을 켰는데 어머니가 “아직 어둡지도 않은데, 왜 불을 켜느냐”고 그 아들을 호되게 꾸짖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수도사는 이 여주인이 대단히 인색한 사람이 아닌가 하고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왕 문간 앞까지 왔으니 허탕치더라도 한번 들어가 봐야겠다 하고 굳게 마음을 먹고 집에 들어가 자기의 어려운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불킨 것을 그렇게 야단치던 그 어머니가 너무나 많은 도움을 그 수사에게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절약과 부의 올바른 사용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좋은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3               연중 제9주일   마태 7,21-27 (가) 주책바가지


    사람은 자기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하기 위한 사람인가를 부단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자존심을 기른다거나 자기 비호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칫 교만하기 쉽고, 자칫 과신에 빠지기 쉬운 자아를 붙들어 온당한 자기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자기 확인이 없을 때 인간은 부득이 자기 모순에서 헤매는 과정을 거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각 개인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한인간을 완성시켜 나가시기 위해서 인간의 앞길에 자기 과신으로 말미암아 빠지는 함정을 마련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번의 함정에서 자기부족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보다 더 큰 고난을,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는 이에겐 더 극난한 시련을 당하게 하심으로라도 자기부족을 느끼게 하고 겸손의 울타리 안에 거주하도록 만드시는게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도 베드로는 원래 어부 출신이었다. 는 사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터입니다. 이분이 예수님과 3년 동안 같이 지내면서 자기 과신에 따른 교훈적 실 예 몇 가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에게 바다 위를 걸어서 다가가신 일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놀라움 중에 그 기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간청하기를 자기도 예수님처럼 물위를 걷게 하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처음 몇 발자국 물위를 걷는 듯했습니다. 그때 사도 베드로는 자기가 무엇을 위해서 물위를 걸어야 하는 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같고, 다만 자신도 그리스도와 같은 신기한 기적을 체험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치부에 있는 본능에서 솟아난 허영은 곧 그를 물에 빠져 허덕이게 하였습니다. 그가 만일 자신이 비천한 어부이며,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의 은혜임을 매사에 잊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의 권능을 흉내내기 위해서 선택 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희생을, 고난을 돕기 위해서 선택된 제자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고 있었더라면, 그가 그러한 불필요한 과욕을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날 저녁 예수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자못 익사할 뻔한 일종의 망신스러운 체험을 연출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마태 14,27-31 참조)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그 사건으로서는 자기 자리를 찾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기 전날 밤이었습니다. 마지막 겟세마니 동산에 기도하시러 가시는 도중,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과 제자들의 실망과 도피 등에 관해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다른 제자들은 전혀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놀라움과 염려를 침묵으로써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만만했습니다. 모두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기만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곧 그의 맹세에 회의를 표시하셨습니다. [네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 할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듭 자신의 결심을 맹서하고 확약하였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폭도들에게 잡히시어 갖은 고초를 겪으실 때 사도 베드로가 취한 태도는 그의 자신만만했던 약속과는 반대로 너무 연약하고 비열한 모습이었던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읽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가리켜 자기와는 상관없는, 전혀 모르는 분이라고 부인했으며, 나중에는 저주까지 하며 그 난경에서 자기만 빠져나가려는 추태를 노출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쳤고 비로소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고 여전히 연약하고 비루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절감케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바다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진 것 보다 몇 갑절 더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번민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 견딜 수 없는 치욕감 속에 허덕이며, 통곡해야 했습니다. 만약에 그가 좀더 일찍 자지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일찍 알았더라면 예수님의 수난 당시에 그런 수치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존재의 확인, 곧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 – 곧 타인과 비교해서 다소 나은 장점을 구비했다손 치더라도 하느님께[서 보시는 완전한 인간의 표준 앞에서 자기는 아직도 여전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항상 겸손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라는 교훈을 우리는 느끼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 즉 사랑과 희생, 구제와 치료, 위로와 깨우침을 스스로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곧 자기 안에 계시는 성부의 뜻대로 하심이라고 술회한 말씀이 복음서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자기부인이 그로 하여금 인류 죄악의 대가를 치르고 구원하는 희생을 이룩하시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겸손과 용기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참된 용기는 참된 겸손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참된 겸손은 곧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데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참된 자기 확인을 계속하는 사람은 결코 오만한 자리에 나서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든 인간 관계의 질서를 존중합니다. 환자는 의사가 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가르치는 일은 선생님들이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어머니는 가정을 지킬 때 가장 아름답고, 학생은 배우려는 자세에서 그 장래가 가장 빛납니다.


    그런데 흔히 자신만만한 사람, 자기가 최고라고 자부하는 오만불손한(주책바가지)들은 이런 질서를 무시해버립니다. 교사도 아닌 사람이 가르치겠다고 나서고, 의사도 아닌 사람이 자기는 환자를 깨끗이 낫게 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나서기도 합니다.


    스페인의 철학자 [미켈 데 우나무노]는 그의 저서 [생의 비극적 의미]에서 [나는 인간이라는 이 계속적인 확인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영속을 욕망케 한다………. 신을 인식하기 전에 신에 대한 열망을 갖기 위하여 신을 사랑하고 신을 갈망해야 한다]고 서술하였습니다.


    신앙은 포도나무처럼(요한 15,1-5) 자라나는 과정의 생명체입니다. 그리스도의 진액을 빨아들여 알몸을 키우고 바깥에서 딱딱하게 죽어가며 도전하는 껍질 세포를 헤치고 한사코 밖으로 그리고 위로 솟아나려는 생명력으로 성장해가며 풍요한 열매를 맺을 때까지 자라는 과정이 필요한 신앙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유한성, 제한성을 깨닫고, 그 부족을 채우기 위하여 하느님의 완전하심에 자기를 의존하고 순종할 줄 알 때, 비로소 한 인간의 진실한 성장이 기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이란 이렇게 하느님 안에서 갈급한 자세로 하느님의 도우심을 흡수해서 자라나는 상태입니다. 만일 그러한 자라남이 없는 신앙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며, 진정한 자기발견을 체험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무릇 행복을 갈망하는 인간은 태어나면서 어머님 모태에서 세상을 맞는 첫 순간에 외치는 울음소리로 시작해서 마지막 임종 때에 고통에 신음하는 비명소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번 태어나서 한번은 죽어야 할 서러운 인간이 생명의 임자이신 그리스도를 모른다면 이 얼마나 불쌍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이 또 있으니, 이는 신앙을 갖았으되 올바른 신앙을 살지 못하는 것이요 참다운 신앙을 갖았으되 참되게 살지 못하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행히 성세성사를 받고 그리스도를 알고 믿을 가졌다고 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과연 참되고 진실한 신앙인가 냉정한 비판을 해야할 일이며 또한 양심적으로 반성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선행이 없는 신앙은 무익한 것이요, 인간 사욕이 꿈틀거리는 신앙은 썩은 신앙입니다. 우리의 일거 일동에 실천이 없고 입으로만 떠드는 신앙은 엄위하신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마태 7,21) 이 말씀은 실로 우리들 가슴 속 깊이 간직하여야 할 무서운 말씀입니다.


    아침저녁 기도나 궐하지 아니하고 미사에나 열심히 참례함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니라 우리의 실생활이 기도의 내용처럼 사는 생활, 우리의 일상생활이 하느님께 바쳐지는 생활이라야 합니다. 이에서 더 값진 기도가 없고 이에서 더 큰 제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는 성당에서 남들 앞에서는 열심히 기도하는 것처럼 꾸미나 그 자리를 물러서기가 무섭게 지존하신 하느님의 뜻과 교회의 뜻을 거스리고 망증하는 거짓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신앙의 표본으로 우리가 존경하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은 아들 하나 가지고 싶어 평생 소원 끝에 노년에 아들 이사악을 갖게 되었으나 하느님께서는 그의 신앙을 시험하고자 그의 지극히 귀중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하셨을 때 이를 이행해야 하겠다는 순간에 어찌 아브라함은 어버이로서 눈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뜻대로 실천했다는 놀라운 신앙의 정신! 그리하여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렸고 또한 하느님의 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선행과 사랑과 수고와 희생 봉사의 정신을 의미합니다. 즉 남을 즐겁게 , 남을 기쁘게, 남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자기 희생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과 수고와 희생의 정신을 박차 버리고 얕은 지식에 사치를 떨며 그리스도의 계명을 무시하는 오늘의 불행한 일들이 어떤 것인가를 보십시오! 한술의 밥으로 살기조차 숨가쁜 이 현실 속에서 꿈도 기대도 잊어버린 채 생존경쟁을 체험해야 하고, 서로 물어뜯고 시기하며 자기만이 배불리고 살찌어야 한다는 못된 심사! 고로 이 현실은 어두워만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정신, 진실한 신앙의 정신을 멀리 차버린 이 근본적 악의 뿌리가 뽑혀지지 않는 한 인간이 받아야 하는 최소한의 자유는 여지없이 짓밟히고,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의 본 의도가 아닌 불행을 인간이 스스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세상을 물러가기 전에 더 많은 삶의 참된 보람을 갖게 하는 마음은 누구나 가져봄직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거친 이 현실의 환경 속에서 우리의 결심이 항상 출발할 때와 같이 아름답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모진 시련을 당할 때 나의 신앙과 나의 착한 뜻이 차차 식어지며 나의 의지 아니 것에 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라도 각오할 굳센 신앙으로써 천국을 얻을 수 있으니 모든 고난을 박차고 그리스도의 은총을 구하여 우리의 능력을 신앙으로 보충하여야 하겠습니다.


    [강폭한 자 천국을 빼앗느니라]하신 과감한 이 말씀은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루가 21,33)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지 않고 세 번 배반한 베드로의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 외아들을 바치라는 야훼의 말씀에 이사악을 기꺼이 바친 아브라함의 교훈을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항상 염두에 두는 순종의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






    4               연중 제9주일   마태 7,21-27 (가) 믿음의 행동화

                                                             최용진 신부


    사랑을 실천하자.

    지난 8월 말경 인천 도화동 본당 레지오 단원 5명의 처녀들은 불우, 이웃돕기 운동을 벌렸습니다. 5명의 단원들은 신자들로부터 기증 받은 헌옷가지, 책, 생활도구 등을 밤새워가면서 손질을 하여 “등불의 집”이라는 자선 시장을 열었습니다. 이들은 특히 헌옷, 책, 생활용품들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싼값으로 팔고 그 수익금을 역시 불우한 이웃들 특히 돈이 없어 병원에 갈 수 없는 불우 환자들을 중심으로 힘자라는데 까지 돕겠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주님 주님 한다고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고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마디로 믿음만 있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실천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5명의 처녀 단원들은 크리스천의 사명을 깊이 깨달아 믿음에 대한 실천 중에 가장 큰 효과를 얻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8월 1일부터 8일까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 4회 국제 성체대회에서도 불우한 이웃을 돕는 것이 크리스천 사명이라고 재 천명하면서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강조한바 있습니다.


    도화동 본당 레지오 단원 5명의 처녀들이 “등불의 집”이라는 자선 시장을 벌린 운동은 이제서야 시작하는 우리의 현실이 대견스럽게 생각되면서도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히 해야할 일을 이제서야 시작하고 또 이제까지 해왔어야 할 일을 이제 와서 새삼스레 외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슬프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믿음을 신심 면에서만 강조하고 철저하게 믿음을 개인의 것으로만, 아니 개인 신앙주의로 오인해온 지난날들을 반성하면서 다시 한번 우리들은 복음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복음은 믿음의 생활화, 행동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5명의 처녀 단원들은 믿음을 실천에 옮긴 분들입니다. 물론 기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믿고 깨달은 것을 간직하고만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하여 이런 운동을 벌인 것입니다.

    품행이 방정하고 율법을 잘 지키는 부자 청년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겠느냐고 예수께 물어왔을 때 예수님은 “아직도 당신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시오. 그리고 나서 나를 따르시오. 그러면 하늘 나라에서 보화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루가 18,22)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을 보시고 힐난하신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침울한 표정을 지은 채 예수 옆을 떠나고 만 사실은 정말로 슬픈 일입니다. 또한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들 우리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합시다.”(요한 3,17-18)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보다 명백히 “내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아두시오”(야고버 2,14-25)라고 하셨습니다. 즉 인간의 의화 행실로 말미암아 실현되는 것이지 믿음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믿음의 행동화를 강조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행동이, 행동 없이는 믿음도 또한, 헛된 것이 될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는 안이한 마음으로 기도에만 열중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주일 미사에 잘 나오고 교무금 많이 내면 의무를 다 한다고 생각은 하지 않겠지요. 저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주님의 계명만 잘 지키거나 강조한 나머지 본 의미를 잃어버린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5명의 레지오 처녀 단원들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동으로 옮겨질 때에야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자가 될 것입니다. 오직 우리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감정으로서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을 이 세상에서 실천을 했을 때 바로 하늘 나라에 보화가 쌓아질 것이며 마지막 날에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습니다.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대에 돌보아 주었다고 그분 앞에서 의젓하게 대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조그마한 사랑부터 솔선 수범하여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멘.






    5            연중 제9주일   마태 7,21-27 (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신명 11,18.26~28 (내 오늘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제안하노라)

    제2독서 로마 3,21~25a.28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으로 의화된다) 

    복 음 마태 7,21~27 (바위 위의 집과, 모래 위의 집)


    어떤 회사의 광고에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합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좋은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삶 에 있어서도 잘 선택해야 평생 순탄한 길을 걸어가듯이 우리 신앙의 삶에 있어서도 매 순간에 선택을 잘 해야 복된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런데 그 복된 길은 내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 뜻대로 걸어가는 지혜를 말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 모세는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으니 하느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복을 받겠느냐, 아니면 그 명령에 불복하여 저주를 받겠느냐.”하며 백성에게 물었습니다. 일종의 협박과도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는 늘 그렇게 절박한 것입니다. 일종의 생사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은, 사실 그분의 축복을 받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복은 그분이 가르쳐 주신 계명을 지키고 말씀에 잘 따름으로 해서 얻어지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믿음 때문에 우리는 지금 여기서부터 천국을 앞당겨 살고 그리고 죽은 뒤에도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과 그리고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주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게 어쩌면 인간의 길입니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길이 세속에서는 쉽게 느껴지며 또한 편한 반면에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히 하는 길은 반대로 힘들고 어렵게 됩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고집하는 길은 결과가 비참합니다. 이를테면 농부 가 씨를 뿌린 뒤에 여름 내내 아무 수고도 않고 추수를 기다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거둬들일 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평생 웃다가도 마지막에 가서 웃지 못한다면 그는 불행합니다. 그러나 평생 울다가도 마지막에 가서 웃을 수만 있다면 그는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고 아주 잘라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섭습니다. 굉장히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굉장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의 연속극에서 어떤 부인이 누군가의 흉을 보며 잔뜩 비난을 퍼붓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때 그 집 남편이 자기 아 내보고 “그 입이 그래 찬송가 부르는 입이여?”하고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부인이 깜짝 놀라면서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란 것은 텔레비전을 보던 저 자신이었습니다.


    제가 입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리고 제 손으로 성체와 성혈을 만지고 있는데 과연 제 입과 손이 거룩하고 깨끗하냐. 안 그렇습니다. 부끄럽게도 입도 더럽고 손도 더럽습니다. 담지 못할 말 도 많이 했으며 또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을 많이 만지기도 했습니다. 정말 주님의 자비와 용서가 아니라면 저는 비참합니다. 아마 모두가 그럴 것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그것이 바로 반 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반석 위에 머무는 것 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계명 안에 살아가는 것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저 자기 성질, 자기 고집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각 사람은 자기의 생애에서 오직 하나의 집을 짓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지은 집에서 이를테면 내세를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집 의 기초는 튼튼해야 합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비가 올 때 무너지게 되고 얼음 위에 집을 짓게 되면 해가 뜰 때 허물어지게 됩니다. 이를테면 돈이나 권세는 반석이 되지 못합니다. 세월이 지나면 쓰러지게 되고 또 그것들이 영생을 보장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항상 우리를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반석으로 삼아 그 위에 당신이 머무시기를 원하십니다. 진정입니다. 주님은 일찍이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위에도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믿고 또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백성이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사실 반석이면서도 여러 번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님을 붙잡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바로 그것이 베드로의 위대한 점입니다. 우리도 자주 무지몽매한 때가 있습니다.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그런 어리석은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때마다 다시 선택을 하도록 합시다.


    천당과 지옥이 진정 우리의 선택에 있습니다.


  2. user#0 님의 말: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모레위에 집을 짓는 사람

    1. 말씀읽기: 마태7,21-27  주님의 뜻을 실천하여라 (루카 13,25-27)

    2. 말씀연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한 마음으로 주님께로 향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삶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슬기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말씀 듣고 실천하는 슬기로운 사람이 됩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가?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성당에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모두 완벽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다닌다고 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는 알면서 공동체를 깨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상처를 받아서 뒤로 물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성당 다니면 뭐하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자기 품성을 그래도 간직하면서 살아갑니다. 남이 변화되기를 바라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신앙생활 하는 보람이 없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고, 봉사도 아닙니다. 자기 취미생활입니다. 신앙생활과 취미생활은 다릅니다. 취미생활은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고,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기쁨을 얻고, 친교를 맺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자신이 원하는 이익을 얻기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면서 취미생활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손해를 보기도 하고,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향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려 하는 것은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달아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취미생활입니다. 그런 면에서 신앙도 취미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취미로 하다보면 ① 힘들면 포기합니다. ②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포기합니다. ③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하려고 합니다. ④ 내가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다보면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포기하게 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취미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성당 다니니까 그 정도 하지 안다녔으면 더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줘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위험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사기 치거나 이용하려 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던 사람들. 하느님의 목장으로 인도하던 사람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보셨습니다.  목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양들을 위해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 자신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고 하나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72명의 제자들이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 복종시켰습니다.”라고 보고했던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속되어야지 일회적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랬지만….지금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남에게 가르치는 사람이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언하고 기적을 행하고, 악마를 몰아내는 것은, 반드시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공덕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그에게 이 능력을 주셨는가 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유다도 마음에 배신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도들과 같이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불법을 일삼는 자들은 율법학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고, 결국 거짓 예언자들의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다는 것은 결국 불법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라면 기도합니다. 힘들수록 기도하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살아가기에 편을 가르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을 찾아서 행하지도 않습니다. 필요하다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을 행합니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과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그래야 높은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술과 오락에 취미를 들이면 운동실력에서는 멀어진다는 것을 모든 이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사람은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신앙의 뿌리를 내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위 위에 집을 짓는 사람처럼 어떤 시련이 들이닥친다 할지라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당에는 다니지만 그 뿌리를 예수님께 두지 않고 사람에게 두는 사람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아서 시련이 주어지면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아서 안 나오는 사람, 일이 너무 힘들어서 안나오는 사람. 그 이유는 뿌리를 예수님께 내리지 못해서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 위에 모든 것을 올려놓고 살아가는 신앙인과, 세상 것 위에 신앙을 올려놓고 살아가는 사람은 다릅니다. 삶도 다르고, 열매도 다릅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 위에 모든 것을 올려놓고 살아가는 신앙인, 뿌리를 예수님께로 두는 신앙인들은 조건이 없습니다. 계산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변명하지 않습니다.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하면서 살아갑니다. 내가 지금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직 예수님께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신앙인이라는 증거입니다. 운동을 할 때도 상대방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내가 연습을 안 해서 입니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입니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입으로만이 아니라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변함없이 그분 말씀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하지만 행동보다는 입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다도 그랬습니다. 함께 전도여행을 떠났고, 많은 기적을 행했을 유다. 주님의 제자로 3년간 폼 나게 살던 그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목 메달아 죽었습니다. 살다보면 당신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것들 안에 내 뜻이 더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죽기 전에는 반석위에 집을 지으려고 터라도 잡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어야하겠습니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성호경을 긋는 사람은 뭔가 달라야 합니다. 삶으로 신앙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뿌리를 깊이 내린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나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나보기).

    – 고백성사의 은총을 충만하게 받고, 성체성사로 강한 힘을 얻어야 합니다(성고은)

    – 형제자매들에게 인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형자인).

    – 기도는 필수입니다(기필수).


    28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랍니다. 율법학자들은 모세의 이름으로 가르쳤고, 그 스승의 말을 전하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단순히 인간의 권위에 서서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29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권위를 받고, 이 율법을 완성시켰습니다. 승천하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28,18;마르2,10)


    3. 나눔 및 묵상

    1. 가끔은 신앙인이면서 부끄럽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신앙인이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형제자매가 있다면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을까요?


    2. 모래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런데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고, 반석위에 집을 지어야겠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참으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반석위에 집을 지은 형제자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떤 장점들이 있고,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