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5주간 평일들(월.화.수.목.금.토)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짝수해 (이사야서 1, 10-17)


“참된 예배”




이응제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들은 독서에서는 헛된 제물을 바치기 보다 마음으로부터 회개하고 정의를 바로 새우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부정과 불의로 가득한 하느님 백성을 비판합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이미 오래 전에 벌의 받아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도시 ‘소돔과 고모라’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종교적으로도 멸망의 벌을 받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타락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불의에서처럼 이 종교적 부패를 주도한 사람들 역시 ‘지도자들’입니다. 일반 백성은 이들을 추종하고 모방함으로써 타락에 동참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현실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말씀’과 ‘가르침’에 따라 대안을 실행할 때 또 다른 가능성이 부여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종교 의식을 거부하십니다. 당신 백성이 거행하는 모든 형태의 제사와 축제일이 그분에게는 즐거움이 아니라 짐스럽고 견딜 수 없는 역겨움이 되어, 그분은 그 모든 것을 싫어하시게 되었습니다. 의식과 축제에 대해서 하느님이 느끼시는 혐오감의 표출은 종교의 기본, 곧 종교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도까지도 거부하심으로써 극에 달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나 그 의식 자체가 배격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전은 여전히 하느님 현존의 장소인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 백성이자 자기들 가운데에 현존하시는 그분의 뜻에 맞갖은 생활을 하지 않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하는 종교 행위가 하느님에게 용납 될 수 없는 것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이사야 예언자가 비판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희생 제물로 바칠 짐승을 잡느라고 피로 적셔진 바로 그 손이 또한 다른 이들에게 악행을 저질러 그들의 피로 더럽혀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행은 비단 살인만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모든 불의와 부정과 억압을 포함합니다. 이로써 예언자는 모든 사회적 악이 살인과도 같음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용서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용서는 하느님이 무상으로 베푸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씻어 내는’ 참회, 또는 선행의 수행 그 자체로써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다만 하느님에게서 용서를 받기 위한 조건일 따름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바로 이러한 ‘자신을 씻는’ 도덕과 윤리의 회복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요구하는 공동체 원리에 따라 정의와 공정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정의와 공정이 실현될 때에야 비로소 종교 의식도 하느님이 받아들이실 수 있는 참다운 예식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누구든지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원수진 사람과 화해하고 오라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 예배를 하느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위선적인 예배를 하느님께 드리며 의무를 채웠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제물은 바로 인간의 마음인 것입니다.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짝수해 (이사야서 7, 1-9)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하리라”


이응제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들은 이사야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만이 희망임을 말해줍니다.


이사야 예언자 시대에 사회, 경제적, 그리고 종교적 병폐가 만연한 유다왕국에 밖으로부터 왕국의 존립을 위협하는 위기가 닥쳐오게 됩니다. 시리아와 에브라임 연합군이 유다를 침략해 온 것입니다. 이 막강한 동맹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지자, “숲의 나무들이 바람 앞에 떨듯, 임금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떨렸다”라고 성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사야 예언자는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라고 야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사야가 전하는 하느님의 이 말씀은 지금 유다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한 것으로 들립니다. 침략자들은 엄연히 강력하고, 유다의 군사력은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인데도 이사야는 그들이 ‘다 타고 끝만 남은 장작 조각일 따름’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예언자의 시각과 판단이 다른 이들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임금과 유다 백성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만을 보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 현상을 하느님과의 관계 아래에서 보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임금과 다른 이들의 눈에는 활활 타오르는 커다란 장작으로 보이는 이 연합군이, 예언자의 눈에는 나약함과 멸족의 상징인 연기 피우는 장작 쪼가리로 보일 따름인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자의 확신은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침략자들의 계획은 하느님에 의해서 좌절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인간적인 계획은 실패하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현상을 거슬러 아무런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안목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대처해 나가는 데에는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믿음과 서 있음, 곧 신앙과 존립, 더 나아가서 신앙과 구원 사이에는 일종의 등식 관계가 성립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예언자가 전한 말을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만을 믿음, 하느님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함, 그리고 모든 인간적인 낙심과 실의를 극복함, 어떤 상황에서도 꿋꿋이 서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존립은 바로 그들의 믿음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과연 평소에 얼마나 하느님을 신뢰하고 전적인 믿음을 그분께 두고 있습니까?


오늘 독서에서처럼 믿음은 단순히 듣고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판단마저도 서슴없이 받아들이고 따르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갖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산도 옮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실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의 말씀입니다. 과연 우리는 일생을 통해 단 한 번이라도 온전히 하느님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겨드린 적이 없었기에 이러한 믿음의 체험을 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믿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바로 서있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하루 단 한 번이라도 온전히 하느님께 믿음을 두는 실천을 해야하겠습니다.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짝수해 (이사야서 10, 5-7.13-16)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이응제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당시 근동 지방 전역을 정벌하며 승승장구하던 아시리아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언자의 눈에는 그들이 단지 하느님이 “무도한 민족”에게 행하시는 심판의 도구로 보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시리아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지만 그들은 딴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잘나서 훌륭해서 그와 같은 업적을 이루었다는 교만한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아시리아에 대한 예언자의 판단은, 자기에게 대적할 나라가 하나도 없다면서 고대 근동 지방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전쟁을 자행한 아시리아의 방자한 자세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한 아시리아의 교만은 결국 예루살렘과 그곳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까지 무시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예언자의 눈에는 어리석은 짓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어찌 으스대겠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어찌 잘난 체하겠느냐? 지팡이가 들고 다니는 사람을 움직이기나 할 듯이. 몽둥이가 나무 아닌 인간을 휘두르기나 할 듯이”라고 예언자는 그들의 교만을 고발합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아시리아에 대해서 결국 파멸을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주 하느님께서 건강한 자를 수척하게 만드시고 그의 재물을 화염 속에서 태워버리시리라”라고 말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들은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에서 주님의 도구로서 우리 신앙인의 삶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의 이루시기 위해 모든 것을 도구로 사용할 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쓰여지는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재능도 주시고 때로는 고통도 주시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통해 당신의 선한 뜻을 실현해 가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바로 하느님의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시리아처럼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과 힘을 함부로 사용하면서 하느님의 뜻과 맞지 않는데 사용하고, 마치 자기 스스로 그러한 힘을 얻기라도 한 듯이 생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교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손에 들려있는 도끼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내려치시니 그 힘으로 나무를 자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은 이와 같습니다. 누구는 공부를 잘하고 누구는 돈을 잘 벌고, 또 누구는 억센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다 그분의 뜻을 이 땅 위에 실현하기 위해 사용되어져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교만함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마치 우리가 잘나서인양, 아니면 우리가 수고해서 다 얻은 것인양 인색하고 나를 위해서만 재능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죄를 짓는 데 우리의 재능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를 통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도구라는 사실을 배웠으니, 모두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재능과 힘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분께 순종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생활하면서 혹시라도 교만함에 젖어 하느님이 아니라 나를 내세우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짝수해 (이사야서 26, 7-9.12.16-19)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




이응제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들은 독서는 한 편의 신앙고백의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이 시를 통해서 야훼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사람의 인생길은 곧고 영원하다는 고백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그 사람의 길을 평탄케 하시며 그 길로부터 생겨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제거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바라볼 때 하느님의 섭리나 의인이 구원받으리라는 희망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이 역사를 움직이는 분이시라는 믿음! 이를 믿어 의심치 않기에 계속해서 하느님께 희망을 둔다는 내용인 것입니다.




또한 예언자는 지금 당하는 고통마저도 하느님의 주관 아래 있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하느님만이 지금의 고통을 없애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다시말하면 고통마저도 하느님께 속해 있기에 그 고통을 해결해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러한 고통을 이겨내고자 기울인 모든 노력은 바람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즉 허무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언자와 예언자가 속한 공동체는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에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끝으로 예언자는 마지막에는 하느님께서는 의인을 되살려주시고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실 것임을 고백합니다. 바로 하느님만이 유일한 심판자이시고 구원자이심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현실 생활을 바라볼 때, 우리 역시 오늘 독서에서와 같이 우리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기울인 많은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라지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갖게 됩니까?




포기하고 싶고, 하느님을 원망하게 되고 세상을 편한 대로 남들 하는 대로 대충 살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결코 의심하지 말도록 가르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결하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헛된 환상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이러한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또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하느님을 의심하고 우리 식대로 우리 힘으로만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의 섭리와 도우심 속에서 반드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짝수해 (이사야서 38, 1-6.21-22.7-8)


“네 기도를 내가 들었고, 네 눈물을 내가 보았다.”




이응제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독서에서는 죽을병을 앓고 있는 히즈키야 임금이 곧 죽으리라는 예언자의 예언이 전해집니다. 이 예언에 대에 임금은 눈물로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오, 주님, 제가 항상 당신 앞에서 참되게 살았으며 충성스럽게 당신을 섬겼고 당신 보시기에 선한 일을 행하였음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이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들으시고 예언자를 통해 그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그의 병을 고쳐주시고 다시 일어나 당신을 찬미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네 기도를 내가 들었고, 네 눈물을 내가 보았다. 내가 너의 병을 낫게 해주리라.”




이 말씀을 전해들은 히즈키야 임금은 과연 그것이 사실인지 증거를 보여달라고 예언자에게 부탁합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해를 반대로 돌리는 기적을 보여주면서 예언이 사실임을 증명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이제 히즈키야 임금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려 했습니다. 그러나 히즈키야 임금의 눈물어린 기도를 보시고 마음을 바꾸시어 그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진심어린 기도는 하느님께 직접 전해지고 기적도 이루게 합니다.




가끔 하늘도 감동한다는 말을 우리는 듣곤 합니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지극한 정성이나 기도로써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때 그것이 비록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늘의 뜻으로 기적적으로 이루어질 때 쓰는 말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히즈키야의 눈물어린 간절한 기도는 바로 하느님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그는 죽을 목숨이었지만 그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능력으로 다시 생명을 기적적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와 같이 기도의 힘은 놀라운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를 직접 연결해 주는 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또 기도를 통해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얼마나 정성껏 자주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는지요?


혹시, 내가 아쉬울 때만,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원하시지도 않는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기도하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습관적으로 빈말만을 되풀이하는 기도는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진심어린 기도는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더불어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음에 혹시 우리의 소홀함과 부족함은 없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짝수해 (미가 2, 1-5)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이응제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들은 미가 예언서의 말씀은 사회의 구조적인 악에 대해서 경고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언자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악행을 고발합니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하며 강하게 그들의 악한 행실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전체에 만연에 있던 사회적 문제들이 결국에는 하느님의 심판을 불러들일 수밖에 없음을 예언자는 경고한다고 하겠습니다. “주님인 내가 선언한다. 나 이제 이런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사회적인 악이란 바로 정의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회에서 정의가 사라졌다는 것은 오직 탐욕만이 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생명과 행복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다만 자신의 이익만을 얻기 위해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결국 하느님의 심판만이 내려질 뿐이라는 사실을 예언자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경고한다고 하겠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주위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물론 아주 극단적인 방법은 아닐지라도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인가 얻어야 되겠다고, 또는 해야되겠다고 결심한 것에 대해서는 무섭도록 집착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러한 자세가 가끔은 좋은 결과도 가져오지만, 많은 경우 자신의 뜻대로만 살아가려는 교만한 마음을 그들에게 심어주는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늘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맞추고 꼭 얻어내고야 마는 사람들은 타인의 처지나 상황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됩니다. 급기야 이러한 생활태도는 타인의 행복과 재산마저도 희생시키며 자기의 이익을 채우는 지경에까지 이르게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향을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 나가는 연습을 늘 해야 합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를 언제라도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가 각 개인에게 습관화 될 때, 이 사회에도 정의가 바로 서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은 카테고리: logos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